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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치 원문보기 글쓴이: B J
오늘날 대한민국 국민의 절반이 내집이
없다.
주택보급률이 100% 를 넘는데도...
2009년
작년 전국 주택보급률 101.2%
입력시간 :2010.04.18
[이데일리 하지나 기자] 작년 전국 주택보급률이 소폭이나마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18일 국토해양부에 따르면 작년 전국 주택보급률은 101.2%(새 주택보급률 기준)를 기록했다. 가구수는 1686만가구이고, 주택수는 1707만채다. 2008년 추계치는 100.7%였다.
[내집마련노트]주택보급률 피부에 와닿지 않아
최근의 자료를 보면 전국의 주택보급률은 108%인데 비해 자가소유율은 60%이다.
1990년에는 전국 주택보급률이 72.1% 였고 자가소유율은 50.6%였다. 자가소유율의 경우는 70년 68.2% 이후 계속 떨어져 90년에 50.6%까지 떨어지다 2000년 54.2%로 높아졌다. 주택보급률은 지속적으로 올라갔지만 자가소유율은 반대로 떨어져 30%~40%이상의 격차를 보이고 있다.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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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일까?
주택보급률이 100%를 넘으면 자기집에 살지 않는 국민이 단 한사람도 없어야 한 다. 그런데 국민의 절반이 자기집이 없다. 왜일까?
그 이유는 바로 '부동산 폭등'
부동산 폭등이 불러온 부동산투기가 만들 어낸 또하나의 위기. 바로 대한민국의 시한폭탄인 900조가 넘는 부동산 담보대출 가계부채. 부동산 침체 핵심은 ‘집값 내림세’ 경향신문, 입력 : 2010-07-20 가계부채 900조 돌파 [뉴스토마토 명정선기자] "올해 한국경제 큰 숙제는 가계빚"(박현주 미래에셋자산운용 회장)
가계부채 1천조-하우스푸어 157만, 탈출구는? (100분 토론)
왜 한국 부동산은 폭등하고 집값은 올라야만 했을까?
이 모든 것의 시작은 바로 강남부동산 강남의 현상은 곧 전국으로 확대, 오늘날의 강남 지역이 서울특별시에 편입된 것은 1963년의 일이다. 당시 강남은 인구가 3만명도 채 안되는, 배밭이 듬성듬성 흩어진 농촌이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한강 이남으로 눈을 돌렸다. 강남 개발 초기, 강남 신드롬의 중심에는 압구정동 현대아파트가 있었다. 78년 당시 현대그룹 계열사이던 한국도시개발은 사원용으로 지은 아파트 900여가구 중 600여가구를 고위공직자 등에게 특혜 분양했다. 이 사건은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빚었지만, 엄청난 프리미엄 액수가 공개되면서 압구정동 현대아파트를 고급 아파트의 대명사로 만드는 구실도 했다. 신흥 부유층은 물론 전문직 종사자와 해외 거주 경험이 있는 사람들까지 줄줄이 압구정동으로 몰려갔다. 중산층도 뒤질세라 앞다퉈 강남으로 향했고, 투기 행렬 속에 ‘부동산 졸부’니 ‘복부인’이니 하는 말들이 회자됐다. 돈이 옮겨가자 환락의 중심지도 이동했다. 80년대 나온 주현미의 ‘비 내리는 영동교’나 ‘신사동 그 사람’은 이런 세태 변화를 드러내는 가요다. [100년을 엿보다] 강남 아파트
76년 아파트 지구로 개발 ‘부의 상징’
대규모 아파트 단지와 고층빌딩이 빽빽이 들어찬 서울 강남의 모습. | 경향신문 자료사진 강남은 이제 단순한 지역의 이름을 넘어 하나의 ‘상징’이 되었다. 누군가가 “저, 강남에 살아요”라고 말할 때, 듣는 이들은 재산은 물론 학력과 외모, 스타일, 문화적 취향까지 함께 떠올린다. 진입장벽이 높은, 완전히 새로운 계급의 출현이다.
한국 경제의 근본적인 도덕성을 위협하는 부동산 투기가 시작된 강남
‘투기의 뿌리, 강남공화국’
온 국민들이 땅과 아파트에 목을 매게 만든 부동산 투기 바람의 뿌리는? 부동산 문제에 관해서는 ‘대통령도 불패’라며 정부가 강력한 부동산 투기억제 대책을 내놓고 있지만 ‘강남불패신화’로 대변되는 망국적인 부동산 투기는 정부의 의지를 비웃듯 계속되고 있다. ‘강남공화국’, ‘강남특별시’라는 별칭이 말해주 듯 대한민국 권력과 경제의 특권층을 상징하는 지역이 된 강남. 지난 70년대 망국적인 부동산 투기가 시작된 곳이 바로 강남이다.
강남지역으로 사람들의 이주를 촉진하기 위한 드라이브도 걸렸다. 정부는 당초 도심을 관통할 지하철 2호선 노선을 당시로는 서울인구의 20%도 못 미치는 강남 순환선으로 변경했다. 아울러 재학생과 졸업생들의 반대가 끊이지 않았지만 강북 도심에 있던 경기고, 휘문고, 서울고 등 이른바 전통 명문 9개교를 1976년부터 순차적으로 강남구와 서초구로 이전했다. 이른 바 현재의 8학군이 형성된 것이다. 당시 시는 강남지역 구획정리지구에 있는 체비지를 학교용지로 헐값에 불하해 줄 구실과 은행 융자를 알선해 줄 수도 있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여기에 강북억제, 강남개발도 본격화 한다. 강북지역은 특정시설제한구역으로 지정돼 유흥업소들이 발 빠르게 강남으로 옮겨 갔고 회사들도 앞 다퉈 이전하게 된다. 노동연구원과 한국감정원에 따르면 1970년~1980년 실질임금은 2배 올랐으나 전국 지가는 15배가 올랐고 특히 강남지가는 200배가 뛰는경이적인 폭등을 기록했다.
부동산 투기가 곧 돈이 된다는 사실을 체감한 대다수 국민들이 너나 할 것 없이 투기 현장으로 뛰어들면서 부동산 중산층은 더욱 확대되어 갔다. 투기가 심해짐에 따라 심지어 1년에 서너 번씩 이사를 다니는 사람들도 적지 않는 세태가 연출된다.
지난해 글로벌 금융위기 후 정부가 급히 돈을 풀어 부양에 나선 끝에 경기는 회복조짐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정작 실물경제로 돈이 흘러가지 않고 부동산 등 자산시장으로 쏠림이 심화되고 있다. 다시 고개를 드는 집값을 누르기 위해 정부는 총부채상환비율(DTI)의 수도권 전역 확대와 시중 유동성을 거둬들이는 출구전략 실행을 조만간 본격화할 태세다. 개발지상주의 시대에서 비롯된 강남 발 투기열풍, 지난해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미국과 일본이 부동산 버블로 큰 고초를 당하고 있고 한국에도 끊임없는 경고가 제시되지만 불길에 뛰어드는 불나방 같은 한국의 부끄러운 자화상은 2009년 현재도 진행형이다. 땅값 폭등과 복덕방과 복부인, 흥청망청 새로운 밤문화, 사교육 열풍 5. 주택보급률 100% 이상, 그러나 전국민의 절반이 내집이 없는 주택난 6. 그리고 지금 대한민국을 망국으로 이끄는 시한폭탄 900조 가 넘는 부동산 담보대출 가계부채 의 진앙지인 강남,
이미 지난해 전국 주택보급률은 101.2%(새 주택보급률 기준)를 기록했다. 그나마 그동안 적용하지 않았던 다가구주택과 1인가구를 반영해 수치는 예전보다 낮아졌지만 여전히 보급률은 100%를 웃돈다.
그러나 자가주택 보유율은 54.2%에 불과하다. 2가구 중 1가구는 전세나 월세를 살고 있는 셈이다.(2011한국경제과제)
⑥가계빚 900조 '시한폭탄' 터질라
"가계빚은 한국경제의 만성적 고질병이다"(이성태 한국은행 전 총재)
"가계부채가 한국경제의 짐이 되지 않도록 선제적으로 대응하겠다"(김석동 금융위원장공포의 가계부채, 마침내 '1천조 돌파'
박근혜 "저금리가 주범", 김중수 "당장 내일 위기는 아니다"
한국은행이 15일 발표한 `2011년 1분기중 자금순환동향(잠정)'에 따르면, 3월말 현재 개인 금융부채는 석달전보다 11조7천억원 늘어난 949조원으로 집계됐다.
여기에다가 사실상 개인으로 분류되는 소규모 개인기업(영세사업자)의 부채까지 포함할 경우 개인 금융부채는 1천6조6천억원으로 집계되면서 사상최초로 1천조원대를 돌파했다.
여기에다가 통계에는 잡히지 않고 있는 대부업이나 사채 대출 등까지 합할 경우 가계부채는 1천조원을 크게 넘어선 것으로 추산된다.
2011-06-23 17:30:59
무디스, '한국 1천조 가계부채' 거듭 경고
WSJ "한국 가계부채, 미국 서브프라임보다 심각", 경고음 계속
무디스의 최영일 부대표 겸 수석애널리스트는 30일 '한국 은행시스템' 보고서를 통해 "한국 은행권이 직면하고 있는 주요 신용문제는 이미 높은 수준에서 증가세를 보이는 가계부채"라며 "가처분 소득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이미 세계에서 가장 높은 편에 속한다"고 지적했다.
69년 강남과 강북 도심을 잇는 최초의 다리인 제3한강교(현 한남대교)가 완공되면서 강남 개발에 본격적으로 시동이 걸렸다. 75년 강남구가 생기고 이듬해 압구정동, 도곡동, 반포동 등이 ‘아파트 지구’로 지정됐다. 교육환경이 좋지 않아 이사를 꺼린다는 분석이 나오자, 정부는 강북의 전통적 명문고들을 대거 강남으로 이전시켰다. 경기고와 서울고가 먼저 총대를 멨고 휘문고, 경기여고, 숙명여고 등이 뒤를 따랐다. 8학군의 시작이었다.
경부고속도로 주변부터 땅값 폭등이 시작됐다. 실례로 말죽거리(현재 양재동)는 당시 3.3㎡(평)당 땅값이 100~200원이었으나 1년도 안 돼 2000~3000원으로 껑충 뛰었다.
1, ‘말죽거리 신화’라고 하는 강남지역
2 , 부동산 투기로 일확천금을 노린
3 , 강남지역 유흥업소를 중심으로 한
4 , 8학군의 등장과 아파트 가격상승 및
이 부동산 폭등은 누구에 의해
어떻게 만들어 ?는가?
대한민국을 서울과 지방으로
서울을 다시 강북과 강남으로
대한민국을 가진자와 못가진자로
분열시키고 양분 시키는
이 강남 부동산은 누구에 의해 시작
되었는가?
누가 만들었는가?
부동산 투기 바람은 강남 개발로부터 시작
그리고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대한민국 고대사가
중요한 이때, 고대한성백제 유적이 지천
에 깔려있었던 고대한성백제의 수도였던
강남,,,,
그곳에서 있었던 충격적인 사실
'8학군'으로 상징되는 입시 과열 현상
강남 8학군은 과연 어떻게 형성되었나?
그리고 그곳에서 있었던 충격적인 사실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대한민국 고대사의 중요성이 나날이 높아지는 이 때. 서해바다를 자신의 앞마당 처럼 여기며 동아시아를 호령하던 고대 한성백제의 실체는 그 유적과 기록의 적음으로 인하여 실체 파악에 어려움이 많다. 그리하여 오늘날 고대 한성백제 유적의 중요성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그런데 이 고대 한성백제의 중심지가 바로 오늘날 강남일대 였다.
강남엔 이러한 고대 한성백제의 유적이 지천에 깔려 있었다. 그러나 정권유지를 위해 부동산을 폭등시켜 그 차액을 챙기려던 박정희는 강남개발을 밀어붙이며 강남 일대에 산재해있던 고대 한성백제의 유적을 철저히 파괴시켜 버린다.
대한민국 고대사 유적 하나하나가 너무나 소중한 이때에 우리 고대사의 진실을 말해 줄 소중한 역사 유적은 이렇게 사라져 버렸다.
강남 8학군과 뭉개진 한성백제 유적
▲ 아시아의 로마제국이였던 고대 한성백제의 영역
‘강북의 눈물’ 위에 핀 강남8학군
(서울=연합뉴스)김태식 기자
서울 강남구 삼성동 경기고등학교 건물이 들어선 자리에는 원래 토성이
있었다. 야트막한 산을 두른 이 토성은 이것이 있는 장소를 따라 삼성동토성이라 일컬었다. 1970년대
까지만 해도 성벽 은 350m 가량 남아 있었다. 애초 성벽은 그 둘레가 460m 정도 됐던 것으로 추정된다.
70년대 초반 이곳을 답사했던 윤무병 전 충남대 교수는 이곳에서 한성백제 시대(BC 18~AD 475년) 기 와 몇 조각을 줍기도 했다. 그 동쪽 2㎞ 쯤 떨어진 한강변 풍납토성처럼 성벽을 흙으로 쌓아올렸
고 기와조각까지 출토된 것으로 보아 백제 유적임은 분명했고 더구나 기와건물까지 있었음에 미 뤄 백제
가 이곳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삼성동토성은 지금은 흔적조차 없어지고 말았다. 종로구 정독도서관 자리에 있던 경기고 가 이곳으로 이전하면서 다 파괴해 버렸기 때문이다.
한성백제를 깔아뭉갠 곳에서 과연 학생들에 게 '우리 문화를 사랑하라'고 가르칠 수 있을지... 어떻든 귀중
한 한성백제 유적 1개는 이렇게 해 서 뚝딱 사라졌다. 뿐만 아니라 한강 북쪽과 맞닿은 뚝섬 경마장 자리에는 1916년 조선총독부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아차산으로 이어지는 토루(土壘)의 대부분이 남아 있었고 강
동구 암사동 소산 이라는 해발 88m 야트막한 산에도 역시 토루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그 파편조차 찾을 수 없다. 지구상에서영영 사라진 삼성동토성에 비하면 풍납토성은 나은 편이다.
비록 성벽을 포함해 22만 3천평이나 되는 넓은 땅에 벌집처럼 빽빽히 들어선 아파트와 연립주택,상가에
짓눌려 신음하기는 하지만 아직까지 숨통은 붙어있기 때문이다. 삼성동토성처럼 아예 사라진 한성백제 유적은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물론 백제 멸망 이후 한강 일대를 차지했던 고구려와 신라를 거쳐 고려,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많은 유적
이 파괴됐을 것이다. 하지만 서기 475년 한성백제 멸망 이후 1960년대 서울 강남
일대에 개발 바람이 불기까지 무려 1천 500년 동안 진행된 파괴는 그 이후
40년 동안 있었던 파괴에 비하면 그야말로 새발의 피에 지나지 않는다.
한성백제 중심지인 송파구,강동구,강남구 일대는 이미 아파트를 비롯한
각종 마천루 건물이 빼곡히 들어서면서 그 지하에서 1천500년을 잠자던
백제 유적을 파괴하고 말았다.
이렇게해서 겨우 살아남은 한성백제 유적이라고는 그나마 잘 정비된 몽촌토성과 뼈대만 남은 풍납 토
성, 그 맞은편 아차산성, 석촌동고분군 정도 밖에 없다. 이 중 몽촌토성을 제외한 다른 곳에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파괴 일로에 있다. 백제 뿐만 아니라 고구려, 신라에도 대단히 중요한 아차산성은 곳곳에서
맨살을 드러내고 있다.
초기백제 유적 중 가장 안타까운 것은 석촌동. 가락동 일대 고분군. 1917년에 나온 『조선고적도보』를
보면 석촌동 일대만 해도 돌무덤 66기, 흙무덤 23기의 총 89기 나 되는 백제 고분이 있었다. 이 중 대부분
이 사라지고 그나마 기단있는 돌무덤 4기를 가까스로 건져 지금은 이 일대 1만7천평을 사적공원으로 만
들어 놓고 있다.
이들돌무덤은 장군총이나 태왕릉처럼 전형적인 고구려식 모양을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1980년대 초반
에는 이들 무덤 주위에서 기와조각까지 발견돼 백제 당시에는 무덤 위에다가 사당 건물을 세워 제사를
지냈음이 이형구 선문대 교수에 의해 확인됨으로써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나머지는 거의 다 사라졌다고
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
하남위례성터냐 아니냐 하는 논쟁을 넘어 풍납토성이 왜 꼭 보존되어야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문화유적 보존가치를 꼭 희소성이라는 경제학 원리로 따 질 수만은 없겠지만 풍납토성이 백제 왕성 여부
를 떠나 몇 군데 남아있지 않은 귀중한 초기백제 유적 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보존 이유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2000/05/26
서울시 송파구에 있는 풍납토성.
이것이 사라진 백제의 위례성일줄은 아무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그런데 지난 97년 풍납토성의 한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백제 유물이 발굴되기 시작하면서 그것을 신호탄으로 우리 역사학계 최대 발굴로 비유할만큼 엄청난 양의 백제 유물이 쏟아져 나와,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기에 이르렀다.
학계에서 그동안 출토된 유물을 분석한 결과 풍납토성은 백제사 500년의 미스터리는 물론
우리 고대사 체계를 재구성할 수 있는 놀라운 비밀을 간직해온 것으로 밝혀졌다.
그동안 마구잡이식 개발로 뼈대만 남은 풍납토성은 백제 초기 수도 위례성이다.
그러나 이 풍납토성도 현재 개발로 인한 파괴일로에 있다.
지금 한창 발굴 중인 곳은 풍납토성에서 서북쪽 방향 미래마을 연립이 있던 구역이다.
현재 발굴 지역에서 유물이 나오고 있는 곳은 지하 1미터에서 4미터의 지층,
모습을 드러내는 유물들은 거의 원형에 가까웠다.
바로 이것이 서울 송파구 석촌동에 있는 백제 돌무지 무덤이다.
형태는 고구려 무덤(장군총)과 같다.
일제 강점기엔 이곳에 고분 80여 기가 흩어져 있었고 그래서 이 마을 이름을
'돌마을'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은 대부분이 개발로 파괴되어 사리지고
3기의 고분만이 겨우 남아있을 뿐이다.
1천 5백년을 이어오던 고대 한성백제의 유적은 이렇게 박정희의 강남개발바람에 의해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말죽거리 신화’라고 하는 강남지역 땅값 폭등과 부동산 투기로 일확천금을 노린 복덕방과 복부인,
8학군의 등장과 아파트 가격상승 및 사교육 열풍의 진앙지인 강남,
그리고 뭉개진 소중한 고대 한성백제의 유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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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경제기적의 허구.
대한민국의 경제를 전부 박정희가 이루어 낸 거다??
제대로 된 경제학자에게 다 물어 봐라. 그 말에 동조하는가.
그것은 <조중동>을 비롯한 수구세력들이 만들어 낸 허구이다.
경제학자 강기춘의 정권별 경제성적표 (김영삼정권 2년까지)에 따르면
1위: 전두환.노태우정권 각각 12점, 김영삼정권:10점, 박정희: 6점의 이었다.
박정희 경제가 꼴찌였다.
박정희시대 경제지표들
정말 대단하다! 박정희는 정말 통이 컸다 말아먹을 것 확실히 막아먹을려고 덤벼들었다
그래서 않좋은 것들은 죄다 최고기록을 했다 역사에 길이 이름을 남기기위해
어떻게 이지경이 되도록 만들어놨는지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아마도 아래의 신기록은 앞으로 누가 대통령을 해도 나오기 어려울 것이다
하나하나 살펴보자
[소비자물가 상승률(cpi)]--역대최고
박정희시절의 소비자 물가는 평균 년 16.5%의 상승률을 보였고 63년 20%, 1964년 29%를 기록하는 등 60년대 동안 해마다 10% 이상 폭등.1974년 24.3%, 1975년 25.7%, 마지막해인 77년 12.1% 78년 21%(78년에 고추 한근에 1만원이었고, 배추 한포기에 3천원---정말 대단하다) 1979년에는 18.3%(79년에는 유류가격이 59%, 전기요금이 20-30% 인상) 살인적인 물가상승이었다. 70년대에 들어서도 1973년만 빼고 매년 10% 이상의 물가 상승을 기록
[은행대출금리]
60년대 은행대출 금리가 년17.5%-26%였다. 1965년도에는 금리가 년 30%까지 치솟았다. 이런 상황도 찬양의 대상인가?-노무현.김대중 같으면 살아 남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지가 상승률]--연평균땅값상승률 33.1%, 역대최고
63년 기준으로 하여 7년 후 강남의 부동산은 학동이 20배, 압구정동이 25배, 신사동이 50배로 올랐다. 충격적이지 않는가? 같은 기간 서울의 중구 신당동은 10배, 용산구 후암동은 7.5배 상승했다. 땅값상승에 따른 불로소득은 326조원이다(참고로 현재 우리나라 1년 예산이 200조 전후이다 그당시 국민소득 최대 1천불로쳐서 326조돈을 현재 국민소득 1만7천불로 계산하면 계산이 안나온다)
[노동시간, 산업재해, 소득상황]
1. 박정희시절은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이 세계에서 가장 길었다.
1. 산업재해는 세계 최고였다.
1. 피고용인 가운데 1976년 74.9%, 1978년 76.7%가 근로소득 면세점 이하였다.
즉 소득세를 낼 상황이 아니었다는 것(태반의 근로자가 최저생계비조차 못 버는 상황이었다)
1. 근로자들은 노조를 결성하거나 노조에 가입했다는 이유만으로 ?겨 나든가 빨갱이로 몰리기도 했다.
[소득불평등도-지니계수 ]
속칭 ‘한강의 기적’ 뒤편에서 부의 불균등 분배는 박정희 시절부터 나타나고 있었다.
통계청에 따르면, 소득불평등도를 나타내는 지니계수(1에 가까울수록 불평등 심화)는
1965년 0.344, 1970년 0.332, 1976년 0.391, 1980년 0.389, 1993년 0.310으로 나타났다.
대개 1960∼70년대를 ‘절대 빈곤의 평등’ 시절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박정희 정권 시기에 소득분배의 불평등이 갈수록 커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설비투자비율, 소득분배율, 실업률]
기업의 설비투자비율 11.7% 역대4위
노동소득분배율 43.7% 역대최하위
79년 실업률 17.9% 역대최고
[경제성장률]
⊙ 단순 숫치상으로 전두환이 1위, 박정희 2위, 노태우 3위, 김대중 4위
역대 집권자들의 연평균실질성장률(이하 연평균성장률)은 전두환 9.3%,
박정희 8.5%, 노태우 7.0%, 김대중 6.8% 순으로 단순 수치상으로는 박정희가 2위이다.
⊙ 상대평가에서는 김대중 1위, 전두환 2위, 노태우 3위, 박정희 4위
박정희의 경제성장률은 주요국가 보다 3.3% 더 높았으나 대만보다 1.5% 낮았고,
전두환의 경제성장률은 주요국가 보다 5.7% 더 높았고 대만보다 0.8% 더 높고,
김대중의 경제성장률은 주요국가 보다 4.8% 더 높았고 대만보다 3.7% 더 높았다.
*대만을 포함한 주요국(8국:미,카,영,독,프,이,일,대)의 연평균성장률을 비교하면
김대중 1위, 전두환 2위, 노태우 3위, 박정희 4위다.
그리고 성장율은 대체로 선진국에 갈수록 작아진다는 것을 참조하면
김대중과 전두환의 경제는 박정희보다 훨씬 나은 것이다.
이에 비해 김대중의 경우 한국전쟁이후 가장 큰 국란이란 외환위기를 극복하고도
세계 최고수준의 성장을 이루었다.
전체적으로 조명하는 박정희시대의 경제
박정희가 한국경제의 기반을 닦았다? 차라리 선조가
임진왜란극복의 국방력기반을 닦았다고 하는 것을 믿는게 낫다
박정희가 경제의 기반을 닦았다는 말은
박정희 이후에 이루어진 엄청난 경제적인 성장은 다 박정희가
밑바탕을 잘 닦았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이것 또한 근거가 희박한 주장이다.
박정희경제는 처음 5년간은 부정부패이외는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고,
60년대 후반부터 일본과 베트남으로부터 돈이 들어오면서 좋아졌다.
말기에는 또 완전히 망할 정도로 몰락해 가고 있었다.
수치로 표현하면 박정희말기에 박정희경제는 거의 몰락상태에 있었다.
(그래서 후일 전두환이 일본에 40억달러구걸하기에 이름)
그 이후의 정권들이 잘했기 때문에 박정희 경제의 후유증이란
외환위기를 극복하고도 지금까지 승승장구를 했다고 해야 말이 맞다.
박정희의 마지막 해인 1979년 GNP는 마이너스로 돌아섰고,
경상수지는 사상최악인 41억5천만 달러의 적자를 냈고,
기름재고는 7일분 밖에 남지 않았고, 소비자 물가상승도 18.3%나 뛰었고,
외환보유고도 바닥이었다.
박정희정권이 들어서고 초기에 박정희가 초능력을 발휘하여
단숨에 뭔가를 이루었느냐 하면 그것 또한 전혀 아니다.
(경제가 그런 것이 아니기도 하다)
특히 박정희 정권 5년간은 4대의혹사건 등 부정부패를 제외하고는 경제가 특별히 달라진 없었다.
1960년~1964년의 연평균 GNP성장률은 5.5%로 별 볼일 없는 것이었다.
(현재, 중국은 7.5-10%, 베트남도 7% 이상의 성장을 기록하고 있다)
박정희의 경제가 불행중 약간이나마 좋아진 것은 60년대 후반기에
한일협정으로 돈(무상 3억 달라, 차관 2억 달라)이 들어오고
베트남전쟁에 따른 특수로 10억달라 이상 들어오면서부터였다.
(다른 대통령들은 외국으로부터 돈을 받은 것도 없어도,
그리고 월남특수가 없어도 박정희이상의 경제발전을 이루어 냈다.)
문제는 박정희 정권유지목적으로 한국민족의 대일청구권을 모조리 포기하는
폭거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베트남 전에서 한국군 5만 명이 이 5년간 받은 수당은 1억3,000만 달라였다.
당시(60년대) 외화보유고는 3억 달러에도 미달 했으므로 한국외환 보유고의
거의 반에 해당하는 숫자였고, 또한 한국 총수출액의 40%에 해당하는 거였다.
(그런데 전투수당마저 실종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박정희의 경제가 찬양받아야 할 일이라면
박정희보다 훨씬 더 짧은 기간에 훨씬 더 찬란한 경제를 이루어 낸 독일의 히틀러와, 러시아의 스탈린,
대동강 기적을 이루어 낸 북한의 김일성(지금은 쫄딱 망했지만),
30년 이상 중국의 경제를 년 약 10%의 성장을 이루어 낸 중국의 지도자들은
더욱 찬양을 받아야 하나?
한국전쟁 이후 최대의 국난이라는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한국을 세계 10대 경제강국까지 올려 놓은 김대중과 노무현은 무슨 찬양을 해야 하나??
박정희가 토대를 이루었기 때문에 전두환경제도 있고, 김대중.노무현경제도
있다고 한다. 모든 것이 박정희에서 비롯되었다고도 한다. 이 말도 웃긴다.
100명의 학생 중 꼴지의 학생이 60-70등 하는 것이 쉽나? 10등의 학생이
5등 하는 것이 쉽나? 개방을 하고 국제환경 등이 맞아 떨어지면 박정희가 없어도
경제는 꽃이 핀다... 러시아, 베트남, 인도, 남미의 나라들을 한 번 보시라.
캄보디아는 년 13%라는 경이로운 성장을 하기도 한다.
싱가폴, 대만, 홍콩, 일본 등은 박정희가 없어도 크게 성장했다.
우리나라 이상의 성공을 거두었다. 역사를 정략적으로 왜곡해서는 안 된다.
박정희가 통뼈인가? 박정희도 초기 5년간은 약 5.5% 정도로 이승만 후기와 비슷했다.
박정희의 경제가 좋아진 것은 60년대 후반기에 한일협정으로 돈(무상 3억 달라,
차관 2억 달라)이 들어오고 베트남전쟁에 따른 특수로 10억 달라 이상
들어오면서부터였다.
박정희가 무에서 유를 창출하는 신이 아니라는 말이다.
역대 대통령들의 경제실적
이승만 12년집권 -15억$적자 67 -> 82
박정희 18년집권 - 233억$적자 82 -> 1,636
세계 4위 외채국 만듬.
죽기전 한국의 석유재고 7일분 남아 있었음.
죽기전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로 돌아섬.
역대 대통령중에 경제 성장률이 마이너스로 돌아선 대통령은
김영삼 박정희 뿐
어떻게 해서 박정희의 무능력이 능력으로 미화가 되었는지 참 궁금하다.
전두환 7년집권 + 8억$최초흑자 1,749 -> 4,268
세계 4위 외채를 30억 달러까지 줄임.
박정희 사후 불어닥친 국가부도 위기를 일본에서 40억달러를 구걸해와서 부도를 막았음
노태우 5년집권 - 132억$적자 4,268 -> 7,811
김영삼 5년집권 - 366억$적자 7,811 -> 7,355
무능한 독재산업화세력에 영남의 마지막(부산경남) 양심을 팔어버림.
국고에 39억달러 남기고 물러남.
금융거래불량자(신불자)1997년말..200만.
국가부도로 국가신용도 최대 10단계 하락시킴.
1997년 12월 3일 IMF와 비밀리에 기업매각 헐값계약서 작성함.
김대중 5년집권 + 846억$흑자 7,355 ->12,646
신용불량자 65만 늘어난 2002년 말..265만 기록.
독재산업화 세력이 말아먹은 국가경쟁력 41위ㅡ> 29위 역대최고 기록.
BK21사업으로 과학기술경쟁력 28위ㅡ> 12위까지 상승시킴.
무능한 독재산업화세력 세계4위 외채국 만든 한국을
국가부도 걱정없는 1200억 달러 세계 4위 외환보유국 만듬.
무능한 독재산업화세력이 말아먹은 10단계 추락한 국가경쟁력.
남북정상회담을 통해서 국가신용도 최대 10단계 상승시킴.
1999년 9월부로 대한민국을 최초로 순채권국으로 만듬.
대한민국 경제사를 국민에게 안가르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실제 박정희는 전두환보다 못하며 오히려 김영삼과 동급이다
수치 통계는 (대한민국 통계청 공식기록) 자료출처: KOSIS
경부고속도로의 업적 ?
일본넘들에게 협상금 받아 처먹고 18년동안 통치하면서
그정도도 안했으면 정말 버러지 중에서도 상버러지라고 밖에 말할수 없다
.
박정희 때문에 한국경제가 발전한 것이 아니라
박정희에도 불구하고 한국경제가 발전한 것이다
-경제학자 최용식씨-
가시적인 실적 위주의 박정희 개발독재야말로
시장 경제를 병들게 한 암세포였다.
나아가 그것은 IMF 금융위기의 뿌리였다
-고려대 총장 이필상씨-
(수구)신문을 읽을 때 나는 섬뜩한 느낌이 든다.
보도와 해설을 보면 신흥종교 단체 기관지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다.
-한완상 전 통일부총리, 한성대 총장-
김재규는 이등박문을 암살한 안중근과 같은 급의 인물이다.
만약 김재규가 박정희를 암살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
북한 김정일체제와 같은 암흑의 세상에 살고 있을 것이다
-역사학자 최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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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키 경제]
○…"서민들은 박정희 대통령 때가 살기 좋았다고? 무슨 소리!"
이정우 전 청와대 정책기획위원장이 16일 역대 정권의 부동산 정책을 평가한 성적표를 공개했다.
현재 경북대 경제통상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이 전 위원장은 이날 토지정의시민연대와 헨리조지연구회가 공동주최해 국가인권위 배움터에서 열린 부동산 정책 토론회에서 발제문을 통해 박정희 이후 김대중 까지 역대 대통령 재임 기간 중 땅값이 오른 폭과 경제소득이 오른 폭을 비교했다.
박정희,불로소득의 천국
"박정희, 남의 장작으로 밥 해놓고 생색"
[오마이뉴스 박수원 기자]
"요즘 유행하는 역대 대통령의 밥솥 유머에 의하면 박정희는 밥을 많이 지어 놓은 모범적인 대통령이라고 이야기 된다. 그러나 부동산 정책의 관점에서 보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가능하다. 박정희는 미래의 남의 장작까지 미리 사용해서 밥을 해놓고 생색낸 대통령이라고 평가 받아 마땅하다."참여정부 정책실장과 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장을 지낸 이정우 경북대 교수가 내놓은 박정희 정권의 부동산 정책에 대한 평가다.
연 평균 지가 상승률과 생산소득 대비 불로소득의 비율을 근거로 역대 정권에 대한 부동산 성적표를 제시했다.
(표 참조)
역대 정권의 부동산 성적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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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마이뉴스 한은희 |
이 자료에 따르면 지난 50년 동안 대한민국 부동산 가격의 가장 큰 특징은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3인의 군사정권에서는 부동산 가격의 폭등이 두드러졌던 반면 문민 정부인 김영삼, 김대중 정권에서는 부동산 가격이 크게 안정된 점이다.
이정우 교수는 "박정희 집권기간인 16년 동안 전국의 지가(땅값) 총액이 3조 4000억원에서 329조로 무려 100배 상승했고, 연평균 지가상승률은 33%에 이른다"면서 "만약 지금 박정희 정권 때처럼 부동산 가격이 오르면 폭동이 일어날 것"이라고 꼬집었다.
특히 박정희 정권 당시 생산소득보다 불로소득이 2.5배에 이른 점을 들어 '배보다 배꼽이 큰' 거품 경제가 만들어졌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이정우 교수는 박정희가 국민을 배불리 먹이기 위해서 밥을 많이 지은 모범적 대통령이 아니라, 미래의 장작까지 미리 사용해 밥을 해놓고 생색낸 대통령에 불과하다고 혹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