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시민의 눈] 계엄의 밤이 지나고 『소년이 온다』를 읽다/손명보

[김수영1]

이런 우연

2024년에는 추석이 지나고 9월이 다 가도록 늦더위가 이어졌다. 10월인데도 가을 같지 않았다. 사 놓고 읽지 못해 잔뜩 쌓인 새 책을 볼 때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그러던 어느날, 마음의 불편함을 내려놓고 예전에 읽은 『소년이 온다』를 꺼내 들었다. 그즈음에도 나의 무겁고 힘든 마음은 여전했는데 역설적이게도 그럴 때 나는, 몸과 마음을 더 힘들게 만든다.

지난 여름방학, 고등학생 큰딸이 거실 테이블 맞은편에서 몇 시간을 말도 없이 굳은 표정으로 앉아서 『소년이 온다』를 읽었다. 책을 읽은 뒤 아프고 불편한 마음을 뭐라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고, 그날은 도저히 밥을 못 먹겠다고 말했다. 소설이지만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무게감이 상당하고, 시적 산문이라 일컬어질 만큼 작가의 표현력이 몰입감을 높인다. 그렇게 다시 책을 읽은지 불과 열흘만인 10월 10일, 한강 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국내는 물론 전 세계가 떠들썩했고 노워리 기자단도 기쁨과 축하의 마음으로 비어있던 12월 독서회 책을 『소년이 온다』로 바로 결정했다.

우연에 우연이 더해지다

2024년 12월 3일 밤 10시 30분. 대한민국에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다.

실시간으로 보고 듣고 있는데도 도저히 믿기 힘든 일이 벌어졌다. 천만다행으로 4일 새벽 1시경 국회에서 계엄 해제 요구안이 가결되어 6시간 만에 계엄은 해제되었다. 하지만 한밤중에 벌어진 이 엄청난 사건에 많은 사람들이 잠을 이루지 못하고 공포에 떨었다. 바로 그날 아침, 기자단 독서회에서 『소년이 온다』를 읽고 이야기를 나누기로 되어 있었으니 ‘우연인가? 운명인가?’ 소름이 끼쳤다.

45년 만에 선포된 비상계엄이다. 1980년, 대여섯 살 꼬마였던 나는 계엄 당시를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동안 책이나 사진으로 보고 들었던 일이 반백 살의 내 앞에 펼쳐졌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으로 치가 떨렸다. 마침 한강의 노벨상 수상 이후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 같은 국가폭력의 역사를 다룬 작품이 사람들에게 엄청나게 팔리고 읽히고 있다. 이 비극을 그저 책으로만 배웠을 세대들에게 계엄이라는 산교육을 하다니. 이 또한 그저 우연일까.

우리는 다시 미래의 역사가 될 것이다

나와 남편은 돌아가는 국정상황에 더는 참고 있기가 힘들어 2024년 11월부터 주말 집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추위와 빗속에서도 매주 집회에 모이는 사람들의 수는 갈수록 늘어났다. 그러던 중 계엄 선포와 해제를 경험했고 그날 이후 많은 일이 다시 시작되었다. 내란의 우두머리인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이 즉각 발의되었으나 12월 7일에 진행된 1차 표결은 여당의 불참으로 무산되었다. 여의도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탄핵을 외치던 우리 부부는 울분을 토하며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바로 다음날부터 분노와 탄핵의 열망으로 가득찬 국민들은 평일인데도, 맹위를 떨치는 추위에도 아랑곳 않고 국회의사당 앞에 모여 집회를 이어갔다. 결국 일주일 뒤, 2차 표결에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었다. 그날은 기말고사가 끝난 중고등 두 딸도 집회에 참여해 역사의 순간을 현장에서 함께했다. 대통령 탄핵이라는 사건은 국가적으로도, 국민으로서도 부끄럽고 불행한 일이다. 하지만 집회에 등장한 다양하고 기발한 문구의 깃발, 촛불을 대신한 형형색색의 응원봉, 민중가요보다 더 많이 불린 K팝들로 시위를 축제처럼 즐기는 새로운 문화가 만들어졌다. 핫팩이나 방석을 나누고,직접 집회에 참여하지 못해도 음료와 음식값을 선결제 해두며 마음을 보탠 많은 시민들까지. 평화로운 시위 문화는 갈수록 진화하고 있다. 무력과 공권력에 맨몸으로 맞섰던 시민들의 용기 있는 행동도 아픈 역사가 준 선물처럼 느껴졌다.

그로부터 다시 한 달이 지난 지금 혼란과 위험한 상황이 계속 되고 있고, 갈 길은 멀어 보인다. 하지만 과거의 역사가 우리를 여기까지 데리고 온 것처럼 우리는 다시 미래의 역사가 될 것이다.

이번 사건을 겪으며 깊이 공감했던 한강 작가의 말이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그리고, 박노해 시인이 쓴 시의 마지막 구절을 되새긴다.

우리 인생의 ‘별의 시간’에

다치지 말고 지치지 말고

빛으로 모이자, 될 때까지 모이자

[윤미선]

과거의 역사가 우리를 여기까지 데리고 온 것처럼 우리는 다시 미래의 역사가 될 것이다.
우리모두 아픈 역사가 준 선물이 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