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姜世昌 傳
화려(華麗)가 인덕(仁德)이 부족하여 백성읖 핍박하던 구(舊) 삼국(三國)을 멸하고 새 하늘을 열었다. 태조(太祖)가 처음 나라를 세우니 나라 건국에 공이 큰 공신을 개국(開國功臣)이라 하고 52인에게 공신 작위(爵位)를 하사하였으며, 나라를 평안케 하고 제도를 개혁하여 체제를 안정시킨이들 74인을 정국공신(政國功臣)에 하사하였으며 이후 3대 정종(定宗)이 후계구도를 확실히하고 국내(國內)의 변란(變亂)을 안정시킨 공신 121인에게 평정공신(平定功臣)이라 하였다.
강원룡(姜原龍)은 본래 옛적 철원땅의 한량이었는데 이후 태조(太祖)가 천하대란을 평정코자 병사를 일으키니 스스로 고향 50인의 무리와 함께 태조의 측근 신성공(信成公)의 수하가 되었다. 이후 나라가 평안하고 후계가 확립되니 공(公)은 정종(定宗)의 명을 받아 의빈(義嬪) 허씨(許氏)와 그 두 아들을 남해로 모셔 관리하는 업(業)을 맡게 되었다. 의빈은 태조의 29명 부인중 27위(位) 서열로 본래 함주(咸州)땅을 다스리던 태수의 2남4녀중 5째였다.
이후 원룡이 나이들어 고향으로 돌아가 여생을 보내고자 상소를 올리니 주군(主君)이 허락하여 철원땅으로 돌아갔다. 다만 이때까지 자손이 없으니 고향땅 월정산(月定山)에 올라 탄식하기를 ‘내 본시 재주없는 몸으로 무슨 크나큰 부귀공명을 원했건만, 비록 부족한 공으로 주공(主公)의 크신 은혜를 받아 3등 평정공신자리에 109번째로 명단에 올랐으니 더는 여한이 없도다. 다만 나이가 칠순이 되도록 자손이 없어 이후의 번성(繁盛)을 기대하기 어려우니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탄식하였다. 울면서 사흘밤낮을 산속에서 보내다 하루는 깜빡 잠이 들었는데 꿈을 꾸었다. 꿈에 이전에 본적없는 화려한 복장에 미색 자태로은 여인이 나타나 말하기를 ‘공께서 무엇을 그리도 근심하시나이까. 저는 천상에서 남방상제(南方聖帝)를 모시는 선녀로 특별히 주군(主君)의 명을 받아 천명을 전하고자 내려왔으니, 이제 동남방 100이를 가면 어릴 때부터 부모없이 자라 다 죽어가는 어린처자가 있으니 공께서 부디 거두어 배필로 삼아 자손을 보도록 하소서’ 하였다. 공이 놀라 눈을뜨니 꿈이었다. 기이하고 황망해 하는 가운데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선녀의 말을 따랐다. 말대로 100여리 떨어진 고을을 가니 대략 50여호가 넘는 주민이 살고 있었는데, 마을 주민들이 말하기를 ‘예전 토란과 마를 심어 농사를 짓던이가 있었는데 아들없이 딸 넷만 둔채 세상을 떠났다. 다만 나이가 다들 나이가 어리고 의탁할곳이 없어 오직 죽는날만을 기다리고 있는지라 어찌해볼도리가 없다’ 탄식하였다. 가서 만나보니 실로 주민들이 말한 그대로라 첫째딸을 만나 잘 설득해 데려가고 남은 세 동생들에겐 쌀 백석과 의포(衣布) 50여필을 하사하였다.
여인의 이름은 진령(眞玲)이라 하였다. 원룡이 진령과 혼인하여 얼마후 아들을 낳으니 이름을 두(斗)라 지었다. 이후 함께 10년을 더 살다 원룡이 하늘로 돌아갔고 10년이 더 지나니 강두가 20세가 되었다. 이때에 진령이 강두를 불러 말하기를 ‘나는 본시 남방성제의 명을 받들어 너의 가문을 번성케하러 온이다. 하지만 이제 하늘이 주신 소임을 다했으니 마땅히 하늘로 돌아갈때가 되어 가고자한다. 너는 부디 선대(先代)의 뜻을 이어받아 조정과 나라에 크게 충성하고 작게는 가문을 번성케하는 소임을 게을리말라’하고 하늘로 돌아갔다. 진령이 사라진곳에는 이전에 볼수없던 진귀한 옥과 구슬과 보랏빛 생강만이 남아있었다.
이때 강두는 마을의 친우들과 사냥과 시문회를 즐기며 세월을 보냈는데 하루는 산길을 가다 멱을 감는 한 여인을 발견했다. 벗들과 함께 멱을 즐기던 여인이 급히 몸을 숨기니 강두가 기이해서 여인의 존재에 대해 물었다. 한 친우가 답하기를 ‘내가 이전에 면식이 있는데 옆마을의 한준수(韓俊受)란 어른의 둘째딸일것이오’라고 했다. 한준수는 선대에 나라에 공을 세운 귀족가문이나 지금은 한미한 위치에 있었다.
하루는 강두가 의관을 정제하고 정중히 준수의 집을 찾아와 딸과의 혼사를 청했다. 헌데 비슷한 무렵 낭자에게 반한 또다른 남자가 있으니 다른 마을에 사는 손태광(孫泰廣)이라고 했다. 준수가 근심하여 딸을 불러 말하기를 ‘네 이미 나이가 차 마땅한 혼처를 찾을떄가 되긴 하였으나 동시에 너를 찾아온 남자가 둘이나 되니 이를 어찌하면 좋으냐 ?’ 하였다. 딸이 말하기를 ‘아버님께선 어찌 그런 사소한일로 근심하시나이까. 제가 직접 두 남자를 만나 지략을 알아본뒤 몸소 선택하겠나이다. 만약 두 사람을 만나본뒤 손가(孫家)가 마음에 들면 다음날 하얀버선을 신고 나오고 강가(姜家)가 마음에 들면 검은 버선을 신고 나오겠나이다’ 하였다. 준수가 딸의 계책을 들으니 그럴듯하다하여 시행케하였다.
낭자의 이름은 유정(裕情)이라 하였는데, 먼저 태광을 만나 묻기를 ‘만약 누가 공자에게 황금 열냥, 베 한포, 쌀 한석을 준다고 하면 무엇을 먼저 하시겠습니까 ?’ 하니 태광이 답하기를 ‘황금 열냥으론 우선 진귀한 예물을 마련 낭자를 맞이하겠고, 베로는 진귀한 옷을 지어 낭자를 입히겠나이다. 그리고 하인들로 하여금 쌀로 떡을 찧게 하여 낭자에게 맛나고 귀한 음식을 대접하곘나이다’ 하였다. 낭자가 미소만 짓고 물러가게 한뒤 다시 강두를 만나 같은 질문을 하였다. 강두는 답하기를 ‘열낭으로 가게를 하나 사서 밑천을 삼겠소이다. 그리고 쌀 한석과 베 한포를 바탕으로 장사를 시작한다면 이후 먹고사는데 그리 어려움이 없을것이오이다’ 하였다. 유정이 둘을 모두 물러가게한후 다음날 아침 아버지께 일찍 문안(問安)인사를 올리러 가는데 검은버선을 신고 있었다. 이에 준수가 뜻을 알고 강두를 배필로 맞이하게 하였는데 그전에 연유가 궁금하여 물었다. 이에 유정이 답하기를 ‘손공자는 오직 귀한 예물로 저의 환심을 살 생각만 하고 이후의 살림은 어찌할 생각인지 전혀 대안이 없었나이다. 허나 강공자는 저와 혼사를 치른뒤 살림을 어찌 시작할것인가에 대한 구상이 다 되어 있으니 더 논의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 하니 준수가 고개를 끄덕이고 딸의 지헤예 감복하였다.
강두가 유정과 혼사를 치른뒤 이후 3남2녀를 낳았는데 이중 셋째가 세창(世昌)이었다. 나이 20세가 되어 조정에 출사하기를 원하니 무과(武科)시험을 보기 원했다. 주위에서 의아해 묻기를 ‘그대가 본래 학문을 즐겼고 부친 또한 무예보다는 본래 시문(詩文) 짓기를 좋아하던이였는데 그대는 이제 오히려 무과를 택하니 이해할수 없도다. 하였다. 세창이 답하기를 ’화려가 개국(開國)된지 어느덧 100년이 되어가나 지금까진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을 평한케 하는데 문치(文治)의 힘이 필요한 때였소이다. 허나 이제 북쪽에 거란과 여진,흉노의 세력이 강성해져 저마다 옛 구려(句麗)의 땅을 차지하겠다며 굶주린 늑대나 승냥이처럼 노리고 있으니 반드시 머지않아 화려의 화근이 될것이오이다. 100년의 세월이 문치의 시대였다면 이제 마땅히 무(武)로써 나라를 지켜야하는 시기가 되었으니 어찌 대비하지 않겠소이까‘ 하였다.
이때에 거란과 여진이 모두 옛 구려(句麗)땅을 차지하고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예전 구려의 땅에서 일어나 구려땅을 물려받았으니 구려의 정통은 우리에게 있다‘ 하였다. 허나 화려(華麗)는 애초에 태조가 친조강령(親詔綱領) 십사조(十四條)에 말하기를 ’옛적 신국(新國)이 구려,백잔을 멸하여 천하를 평정하였으나 다시 300년만에 세상이 어지러워져 과인이 직접 다시 천하를 평정하여 백성을 평안케 하였도다. 화려가 옛적 구려,백잔,신국의 도(道)를 모두 물려받은 이치가 이와같으니 거슬로 올라가면 옛적 천조상제(天朝上帝)의 명을 받아 이땅에 나려오신 단웅(檀雄)폐하의 혈손(血孫)‘이로다. 화려가 옛적 구려의 영토를 회복하여 정통성을 바로하고자 하는 이치가 이와같으니 후대에 나라가 안정되면 마땅히 옛 조상의 터전을 되찾도록 하라’ 하셨다. 화려가 옛 구려의 땅을 도모(圖謀)하려는 이치가 이와 같았다.
이때에 거란왕이 말하기를 ‘거란이 이미 옛 구려땅에 자리잡아 300년 세월이 흘렀거늘 어느 천지무도한 오랑캐가 감히 천손(天孫)의 땅을 범하려 한단말이냐 ?’며 노하여 장수 정국진(鄭菊鎭)에게 명하여 30만 대군을 이끌고 화려를 평정하라 하였다. 이때 강세창이 병부(兵部)의 승섭장군(承燮將軍)으로 있었는데 벼슬은 ‘종5품’이요 평상시에는 수도와 인근의 병장기를 관리하는 직책을 맡고 있었다.
이때 문종(文宗)이 병마도감(兵馬都監) 이태식(李泰植)의 추천을 받아 강세창으로 하여금 오랑캐를 정벌하라 명하였다. 양군이 대강(大江)에서 대치하니 세창이 대처할 방도가 없어 책사(策士) 오한(吳限)을 등용하였다. 오한이 말하기를 ‘강에서 작은 병사로 대군을 물리치려거든 역시 풍세(風勢)와 화공(火攻)을 이용하는수밖에 없나이다’ 하였다. 이에 세창이 씁쓸히 웃으며 ‘옛부터 그와같은 계책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나 사료(史料)를 찾아보면 그와같은 계책으로 승전한 사례가 백번도 넘는다. 헌데 또 그와같은 방식을 반복한다는 말인가 ?’ 하였다. 오한이 말하기를 ‘무릇 신묘(神妙)한 계책이 그렇게 많은 것이 아니오 평범함속에 진리를 찾는법이니 공연히 무리수를 두지말고 옛 선현의 이치대로 하소서’ 거듭 간하였다.
이때 정국진은 측근에게 명하여 ‘우리가 대군이고 적은 수가 적으니 반드시 어떤 계책을 의논하고 있을 것이다. 이때에 적의 허장성세(虛張聲勢)를 알아내는 방도밖에 없으니 마땅히 간자가 필요하도다’ 하고는 부장 진흥(陳興)과 유장(劉裝)에게 명하여 적에 거짓투항하게 하였다. 진흥과 유장이 강세창에게 투항하며 말하기를 ‘저희는 모두 옛적 구려의 후손으로 거란이 구려의 후예는 오직 노예나 금수만도 못하게 핍박하니 더는 견딜수 없어 부모를 그리워하는 자손의 마음으로 화려에 투항코자하니 받아주시오소서’ 하였다. 세창이 일단 둘의 투항을 받고 측근에게 말하기를 ‘거란이 구려의 자손을 핍박하였다는 이야기는 들은적이 없는데 혹시 거짓투항이 아닌가 의심되도다’ 하며 둘을 감시토록 하였다.
이때 정국진이 적의 계교를 미리 알아차리고 허수아비와 나무로 만든 가짜활과 화살을 수백개 만들어 내려보냈다. ‘마땅히 적이 풍세를 이용해 공격해올것이니 그 허점을 이용해 치라’고 명하니 마침내 국진의 계교에 넘어가 아군의 병사는 적의 거짓 병사와 무기에 대량으로 화공을 사용하였다. 이때 동남방 진영에 되려 허점이 보이자 적이 그곳을 노려 공격하니 아군(我軍)이 패하였다.
강세창이 책사 오한과 상의하기를 ‘오랑캐가 이전과는 달리 지금은 책략을 쓰니 다른 방도로 유인하는수밖에 없다’ 하고는 후퇴하는척 인근 야동산(野動山)에 진을 쳤다. 정국진이 측근들을 보내 정찰을 하니 보고하기를 ‘산 한쪽에선 연기가 많이나고 반대쪽에선 연기가 적게나고 있습니다’ 하였다. 정국진이 말하기를 ‘적이 계책을 쓰는 것이 분명하도다. 연기가 많이 나는 것은 병사가 많은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함이요 연기가 적은곳에 정예의 병사들을 매복시킨 것이 분명하니 연기가 많이나는쪽을 치자’ 하니 다들 용케여겨 국진의 말대로 따랐다. 이윽고 연기가 많이나는 왼쪽길로 진군하니 이때 실제로 강세창의 본진(本陣)이 실제로 대기하고 있어 정국진의 군대를 크게 섬멸하였다.
양측이 일진일퇴를 거듭한뒤 대강에서 다시 대치하였다. 이후 여러차례 국지전이 벌어졌으나 확실한 승부를 보지 못하였다. 비로소 양측이 모두 지치자 화친을 청하고 옛 구려의 땅을 반씩 양분하기로 했다.
이때에 여진은 야비하여 이간책을 썼다. 사람을 변장시켜 한떼는 거란인으로 변장한후 화려의 마을을 약탈하고 부녀자를 겁탈하니 화려의 국경지대에선 거란을 원망하는 민심이 하늘을 찔렀다. 또 한떼는 화려인으로 변장하여 거란마을에서 방화와 노략질을 일삼으니 거란왕이 비로소 노하여 ‘일찍이 화려와 잦은 전란을 피하기위해 옛 구려땅을 반으로 나누고 함께 사신을 오가기로 하였건만 어찌 반도의 도적이 배신하기를 이와같이 할수 있단말인가.’ 하고는 다시 장군 정국진에게 명하여 30만 대군으로 화려를 치게하니 국경지대 임존성(林尊城), 맥수성(麥首城), 영홍성(嶺紅城)이 모두 적에게 떨어졌다. 이때 강세창은 정3품 도순검사(都巡劍使)로 있으면서 지역의 병장기를 관할하였다. 문종이 명을 내려 의진장군(義眞將軍)이란 칭호를 하사한뒤 적을 방비하게 하였다.
강세창이 군대를 이끌고 임존성 인근에 대치하였다. 우선 상황을 살핀뒤 책사 오한에게 말하기를 ‘여진이 먼저 계책을 써서 우리와 거란을 이간하였는데, 우리 또한 계책을 쓰는수밖에 없다’ 말하고는 일단 간자를 보낸뒤 몇몇 탈주병을 붙잡아 내부의 상황을 파악해보도록 했다. 이때 정국진은 측근 엄준(嚴俊)을 임존성 태수에, 의홍(義弘)을 맥수성 태수에, 백원(白原)을 영홍성 태수에 각기 임명한뒤 남진을 계획중이었는데, 이중 엄준과 의홍은 각기 공명심이 많고 평상시 서로를 시기,질투하며 의심이 많은 성격이라 전해졌다. 이에 계책을 발휘해여 거짓 거란왕의 조칙을 엄준과 의홍에게 전했다. 먼저 엄진에게 밀서를 보내 말하기를 ‘의홍이 예부터 조정에 반역을 꾀할뜻을 품었으니 이때에 해치고자 한다. 만약 네가 의홍의 목을 먼저베어 내게 보내면 열후(列侯)에 봉할 것이다’ 하였고 의홍에게는 ‘정국진과 엄준이 이전에 왕자를 독살하려는 음모에 가담한바 있어 이참에 징계(懲戒)토록 하겠다. 정국진과 엄준을 네가 먼저 도모하면 추후 상장군(上將軍)에 봉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이에 먼저 엄준이 군사를 내어 의홍을 치라하니 의홍이 뒤늦게 알고 격분하여 ‘엄준이 원래 조정에 반역할 뜻이 있다는 황제의 칙서가 있더니 과연 그렇구나.’하고 역시 군사를 보내 대치하였다. 백원이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놀라 ‘엄준과 의홍이 지략없고 무모함을 내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건만 오늘에 와서 어찌 이런 나변을 일으킨단 말인가. 이는 한낮 오랑캐의 암계(暗計)에 불과하거늘 어찌 대(大) 거란의 용장(龍將)들이 한낱 삼류 계책에 놀아난단 말인가’ 하며 역시 군사를 내어 양쪽을 만류하려 하였다. 허나 엄준과 의홍은 백원이 자신을 치러 오는 것으로 오해 결국 삼군이 모두 격돌할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엄준,의홍,백원의 군사가 서로 싸우다 전멸하고 나머지도 기진하니 이때에 강세창이 대군을 몰아 거란을 치니 적은 크게 패하고 물러났다. 정국진이 패장의 몸으로 거란왕앞에 나아가 패전의 경위를 설명하니 거란왕이 기가막혀 격노하니 ‘어떻게 선봉에 선 장수들의 우매함이 그와같을수 있단말인가. 내가 비밀칙서를 내린바가 없고, 또 상식적으로 거란의 황도에서 화려의 국경까지 가는데 걸리는 시간이 있는데 무슨 비밀칙서가 그리도 빨리 도착할수 있느냐 ?’며 적의 꾀임에 빠져 삼군을 잃은죄로 엄준,의홍,백원을 모두 목베게 했다. 정국진 역시 부하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죄를 물어 효수하려 하였으니 신료들이 만류하여 다만 벼슬을 깎아 백두(白頭)의 몸으로 지내게 했다.
화려(華麗)에서 정변이 일어났는데 나이많은 조카가 어린 숙부 세명의 목을 베고 황위에 올랐으니 7대 신종(新宗)이다. 이때 거란왕이 보고를 받고 진노(震怒)하여 ‘반도(半島)에서 패륜망극의 변란이 일어났다하니 어찌 인륜(人倫)이 땅에 떨어짐이 이와같을수 있는가. 내 이제 신성(神聖)한 군사를 일으켜 반도의 몽매한 백성들에게 천지도리의 바르고 그른 것을 제대로 가르치고자하니 경들은 부디 나를 따르라’ 하였다. 이후 몸소 30만 대군을 이끌고 화려를 침범했다.
이때 화려는 신종이 대장군(大將軍)에 임무웅(林務雄), 병부상서(兵部尙書)엔 진동완(陳東完)이 있었고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로 전용권(全容圈)이 있었는데 강세창은 어느덧 나이 60을 넘겨 현역에서 물러나 다만 병부(兵部)의 원로회의인 충위원(忠衛院)의 감사(監事)로 있었다. 이때에 중신들이 앞다투어 논하기를 ‘거란의 대군을 무찌를수 있는이는 오직 강세창 장군밖에 없나이다. 지금 비록 연로하여 현역에서 은퇴 충위원에 있으나 마땅히 그를 다시 등용하시어 거란을 막으소서’ 하니 왕이 다만 강세창은 옛적 명종(明宗),인종(仁宗)때의 신료인지라 망설이고 있었다. 이때 승상(丞相)겸 대국원사(大局元師) 한승진(韓承進)이 간하기를 ‘국가변란시에 어찌 한낱 계파(系派)를 따지리이까. 예부터 죄가있는 신하도 공으로서 그 죄를 사하는 법도가 있고 또한 능력이 있으면 천출(賤出)이라도 무장(武將)으로 등용한 사례가 고금(古今)에 수두룩하거늘 어찌 이전의 공신을 다시 채용하는데 망설임이 있으리이까’ 하였다. 신종이 한승상의 계책을 옳다여겨 결국 다시 강세창을 등용하였다.
강세창이 다시 대강에서 거란의 대군과 맞닥뜨렸는데 책사 오한과 함께 의논하기를 ‘지금 마침 나라에 가뭄이 들어 강물이 줄었거늘 이를 이용함이 좋을듯한데 경의 생각은 어떠한가 ?’ 하니 오한이 말하기를 ‘마땅히 허장성세로 우선 적이 경계하게 하여 강을 건너지 못하게하고 천시(天時)를 기다름이 옳은줄로 아옵니다. 마침 천문을 보니 일주일이내에 큰 장마가 있을 듯 하옵니다’ 하였다. 강세창이 이후 병사를 풀어 오십리 떨어진곳에 둑을 쌓게하고 물을 모았다. 이때 마침 사흘간 비가오니 둑에는 물이 넘쳐 흘렀으나 마른 강에는 아직 물이 많이 모이지 못하였다. 이때 아군이 물러가는 뜻을 보이자 거린이 비로소 안심하고 강을 건너려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둑을 터트려 결국 30맨 대군을 몰살시켰다. 이를 신묘대첩(辛卯大捷)이라 한다.
황제가 몹시나 기뻐하여 몸소 장군의 공을 치하한뒤 나라를 지키고 외적을 무찌른 공이 크다하여 ‘진보(鎭保) 일등공신’을 하사하고 그 무용(武勇)과 계책(計策)이 남다르다하여 ‘신무(神武賢策) 충천일등장군(忠天一等將軍)’이란 칭호를 하사하였다. 또한 몸소 금 1만관과 쌀,보리,콩 각 3백석, 포 5천필을 하사하니 이때 어사대부(御史大夫) 홍진옥(洪進玉)과 상서령(尙書令) 어윤용(魚胤容)이 간하기를 ‘폐하께서 무릇 나라에 공을세운 신하에게 그 공을 치하하시여 높은 지위를 하사하심은 그 누가 이론을 제가히겠습니까만 다만 충천장군에게 지금 나이 칠순이 다되도록 지금껏 대(代)를이을 자손이 없어 그것이 근심인듯하니, 이때에 아무리 높은 지위와 금은보화가 내린다한들 무슨 복록(福祿)이 되리이까. 마땅히 다시 생각하시오소서’ 하였다. 황제가 이윽고 근심하니 이때 태사(太師) 양동안(梁動安)이 간하기를 ‘병천공신(炳天功臣) 권자신(權資伸)에게 딸 넷이 있는데 이중 막내가 아직 혼사를 치르지 못하였으니 이로서 마땅히 인연을 맺게하소서’ 하였다. 헌데 이때 공(公)이 나이어린 첩실을 들였는데 가노출신의 앙화(仰花)라는 여인이었다. 이에 황제가 근심하다 결단하여 말하기를 자신(資伸)의 여식을 ‘제일부인(第一婦人)으로 하여 진국부인(眞國婦人)이라 칭하게하고 앙화라는 여인은 ‘제이부인(第二婦人)’으로 하여 ‘보의부인(補義婦人)’이란 창호를 하사하여 함께 장군을 받들어 가문을 번창토록하라‘ 하였다. 이윽고 세창이 두 부인을 맞아들여 훗날 진국부인은 아들 다섯을 낳았고 보의부인은 아들 일곱을 낳아 평생을 의좋게 살며 가문을 번성케하다 갔다. 공(公)은 나이 90에 하늘로 돌아갔다. 이때에 한 사관(史官)이 사사로이 말하기를 ’그 옛날 중원에 거기장군 동승이 나라에 찬역한 역도를 몰아낸 공으로 진충공신(眞忠功臣)이 되자 나라에서 그 공을 치하하여 나이 칠순에 어린 후실을 들이게하여 자손을 번창하게한 도리가 있더니 오늘날 화려에도 이와같은 이치가 있도다‘ 하며 ’진실로 나라에 충의로운 신하는 하늘과 황제가 함께 감동하여 자손을 번송토록 해주는 이치가 여기에 있도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