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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치욕을 돌아본 선지자
예레미야애가 5장 1-10절
미국 역사에 기적과 같은 많은 일이 있었지만, 그 중에 미네소타 주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1874년부터 1877년까지 3년간 심한 가뭄과 메뚜기 떼로 농작물은 전멸하고,
더 나가서 미국 경제는 대공황에 빠졌습니다.
1877년 4월 27일 주지사 필스베리는 모든 주민에게 감사기도의 날을 선포하였습니다.
농작물이 전멸하였으나 몸이 살아있고, 앞으로도 기회를 주실 하나님께 먼저 감사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미네소타 주민 전체의 감사기도가 하늘을 덮었습니다. 정말 믿기 어려운 사실은 들판을 덮었던 메뚜기 떼가 며칠 사이에 전부 죽은 것입니다.
과학자들은 여러 가지로 설명을 시도하였지만 결론은 기적이라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역사하신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예루살렘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여기저기서 탄식소리가 가득합니다.
그 탄식소리 중에도 하나님께서 주신 소망의 빛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선지자는 4장에서 예루살렘의 극심한 기근과 굶주림에 대해 말하며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책임이 지도자들에게 있음을 밝혔습니다.
이제 5장에서는 하나님께 자신들의 형편을 보고 기억해달라고 요청합니다.
기억해달라고 요청하는 선지자(1)
성도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존귀함을 지켜야 합니다. 금과 보석처럼 귀하게 취급받던 유다 백성들은 죄악으로 인해 존귀함을 잃어버리고 질그릇처럼 업신여김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존귀함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1여호와여 우리가 당한 것을 기억하시고 우리가 받은 치욕을 살펴보옵소서(1)
예루살렘의 참상을 하나님께서 전달한 선지자는 그 책임이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의 죄악으로부터 시작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않고 그들을 죽인 피로부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종교지도자들을 외면과 멸시당하고 쫓겨 다니는 형벌을 받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멸망을 도왔던 에돔의 멸망을 언급하시면서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작은 희망의 빛을 비추고 계십니다. 선지자는 이러한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을 읽습니다. 그리고서는 다시 여호와께 이스라엘을 다시 기억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먼저 ‘우리가 당한 것을 기억하시고’라고 간구합니다. 이제부터 이어질 기도의 목적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 목적은 유다가 겪은 고난과 수욕을 기억하고 감찰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자신들을 ‘기억’해 달라는 것은 여호와께서 현재 자신들이 처한 처지를 자세히 살펴주시고, 그 상황에 개입하셔서 회복시켜 달라는 의미입니다. 예레미야애가 3:19에서처럼 또 다시 여호와께 기억해달라고 간구로 시작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어려운 현재의 상황에 개입하고 구원하시는 처음 단계입니다.
하나님께는 ‘백성이 있었고’, ‘약속이 있었고’, ‘하나님과 함께 보냈던 사랑의 시간’에 대한 기도합니다. 과거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혹독한 노예의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의 사람 모세를 보내 구원하기로 하신 사건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기억하셨기 때문입니다(출애굽기 2:25). 다음으로 선지자는 ‘치욕을 살펴 봐 달라!’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봐 달라’고 요청하는데, ‘주목하여 보소서’라는 뜻의 단어 ‘하베트(טיבה)’를 첨가하여 봐달라는 것을 반복하면서, 자세히 그 고통을 보시고 들으셔서 하나님께 요청합니다.
즉, 치욕적으로 나라를 이방인에게 빼앗겼으니 살펴서 다시 회복시켜 달라는 것입니다. 그 동안 선지자는 혼자서 기도했지만, 4장 마지막 부분과 마찬가지로 ‘우리’라는 표현으로 기도합니다. 이렇게 ‘우리’라는 표현을 통해 이스라엘 공동체가 함께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한 것입니다. 한국 교회들도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함께 ‘우리’라는 공동체 안에서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다시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의지하는 신앙의 기본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함께 간구해야 합니다.
극심한 고통 중에 있는 백성들(2-5)
하나님께서는 주시기도 하지만 때로는 빼앗기도 하십니다. 이스라엘에게 기업을 주셨지만,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등을 돌리자 주셨던 것을 빼앗으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목적은 선물만 주신 것이 아니라 자신을 주시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에 있어 가장 큰 보상은 하나님이십니다. 온갖 좋은 것은 모두 하나님께 있습니다.
2우리의 기업이 외인들에게, 우리의 집들도 이방인들에게 돌아갔나이다 3우리는 아버지 없는 고아들이오며 우리의 어머니는 과부들 같으니 4우리가 은을 주고 물을 마시며 값을 주고 나무들을 가져오며 5우리를 뒤쫓는 자들이 우리의 목을 눌렀사오니 우리가 기진하여 쉴 수 없나이다(2-5)
본문에서 선지자는 철저하게 멸망당한 유다의 회복을 구하기 전에 다시 한 번 이스라엘의 치욕적이고 비참한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선지자가 하나님을 향해 이스라엘의 참상을 다시 아뢴 것은 진노를 거두시고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긍휼을 베풀어 달라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께 범죄하지 않았지만, 이스라엘 공동체의 한 사람이 되어, 그들의 죄를 자신이 행한 것처럼 회개하며 하나님의 회복을 위해 간절히 기도합니다.
⑴ 기업을 빼앗긴 이스라엘(2)
이스라엘이 당한 치욕 가운데 가장 큰 치욕은 기업을 빼앗긴 것입니다. 선지자는 가장 먼저 하나님께 아뢴 것은 이방인들에게 기업을 빼앗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기업’은 조상 때부터 상속되어 오는 재산이나 소유물로서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조상들에게 주신 ‘가나안 땅’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땅을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기업’이라고 말씀합니다. 일반적으로 땅이 자녀에게 상속될 때, 상속 받은 자녀는 그 땅을 매매할 수 있는 소유권까지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업’은 매매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소유권은 이스라엘 각 개인에게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기업’은 소유하고 상속할 수 있지만, 소유권을 하나님께 있었기 때문에 매매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언약의 땅, 약속의 땅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의 땅, 삶의 터전인 기업의 땅을 이방인인 바벨론에게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이 기업과 재산을 이방인에게 넘어갔다고 호소합니다. 이 기업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지파별로 나누어주신 땅입니다.
이 땅은 사고팔아서는 안 되고, 남에게 넘겨주거나 빼앗겨서, 남의 것을 빼앗아도 안 되는 땅입니다. 그런데 그 땅이 이제 이방인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땅뿐만이 아니라 집까지도 남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서 삶의 터전을 완전히 빼앗겼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신명기 28장에서 언급된 하나님의 심판 목록 중 하나입니다. 신명기 28:30에 따르면, ‘… 집을 건축하였으나 거기에 거주하지 못할 것이요 포도원을 심었으나 네가 그 열매를 따지 못할 것이며’라고 경고하였습니다. 모두 이방인들에게 빼앗긴 상황을 묘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업을 이방인들에게 빼앗긴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내리신 심판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리고 범죄함으로 ‘약속의 땅’, ‘언약의 땅’을 상실하게 된 것입니다. 신명기 8장에서도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아름다운 땅을 주시겠지만, 만약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여호와를 잊어버리면 반드시 망하게 할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따라서 현재 이스라엘이 기업을 빼앗긴 것은 여호와께서 그들의 기업이 되신 것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잊었기에 멸망당했지만, 이제 다시 여호와께 자신들을 기억해달라고 호소하면서 자신들의 어려움을 깊게 토로합니다. 완전히 멸망당하는 고통을 겪기 전에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는 것이 지혜입니다.
⑵ 고아와 과부 같은 이스라엘(3)
두 번째로 선지자는 현재 이스라엘의 형편을 부모를 잃은 고아처럼, 남편을 잃은 과부처럼 비유합니다. 이곳에서 언급된 고아와 과부는 이스라엘에서 기업이 없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경제·사회적으로 가장 어려운 형편에 있는 사람들에 해당합니다. 이제 상황이 이방인 바벨론에게 땅과 집을 빼앗기고 모든 권리를 박탈당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업 없는 이방인처럼 살게 되었습니다. 자신들에게 기업을 물려줄 아버지도 없는 고아와 남편 잃은 과부처럼 의지할 때가 없는 처지가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이 말은 바벨론에 의해 무참한 살육으로 이스라엘에 고아와 과부가 많이 생겼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은 가장 불쌍한 자들이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기업이자 아버지이자 남편인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그들의 어머니는 시온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예레미야애가 1:1에서 ‘시온이 과부같이 되었다’라고 하는 말과 평행을 이룹니다.
⑶ 물과 땔감을 구입해야할 이스라엘(4)
선지자는 고아와 과부 같은 이스라엘은 이제 물과 나무를 돈을 지불하고 구입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나무와 물은 생필품으로 당시 자연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예전 같았으면 물과 나무는 공동 우물이나 산이나 들에서 값없이 얻을 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벨론이 마을과 산과 모든 곳을 점령하였기 때문에 예루살렘 사람들은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우물에서 물을 길으려 해도 돈을 내야했고, 산이나 들에게 땔감을 취하려 해도 돈을 지불해야 했습니다. 그만큼 자유가 없이 통제되고 억압된 상황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의 땅에서 예루살렘 사람들은 물 한 모금을 구하기 위해 큰 대가를 치러야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⑷ 억눌리고 평안 없는 이스라엘(5)
선지자는 자유와 번영을 누리던 이스라엘에서 억눌리고 평안이 없는 삶으로 변했음을 묘사합니다. 기본적인 권리와 공의를 보장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목을 짓누르는 듯한 압제자들의 학대에 계속 시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치 추적을 당했다는 것처럼 정복자들은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을 정도로 거칠게 몰아붙였습니다. 이렇게 심한 괴롭힘 때문에 예루살렘 사람들은 피곤하지만 한순간도 쉴 수 없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즉 ‘평화의 도시’에서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 백성들이 무거운 멍에를 멘 짐승과 같이 압제자들에게 무력하게 학대와 압제를 당하고 있었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자신들이 시온에서 겪는 심각한 상황을 토로하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기억하고 돌아보시길 기원합니다. 이러한 모든 상황은 바벨론이 이스라엘보다 강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역사상 이스라엘이 주변 나라들에 비해서 강한 적이 없었지만, 그래도 이스라엘은 망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이스라엘이 망했습니다. 자신들을 구원하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목을 뻣뻣하게 세우고 대적한 그들은 이제 그 강퍅함의 대가로 이방인들에 의해 목이 짓눌리는 형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도움을 줄 자 없는 이스라엘(6-8)
성도들이 하나님을 떠나면,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집니다. 그리고 남는 것은 치욕밖에 없습니다. 모든 것을 빼앗기고 배고픔의 연속이며 자유와 휴식은 사라집니다. 이러한 모든 것을 십자가에서 해결하신 예수님이 계시기에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항상 예수님께 가까이 나가야 합니다. 그분은 우리를 부요케 하시고, 만족케 하시며, 참된 쉼과 자유를 허락해 주십니다. 그 주님을 찬양합니다.
6우리가 애굽 사람과 앗수르 사람과 악수하고 양식을 얻어 배불리고자 하였나이다 7우리의 조상들은 범죄하고 없어졌으며 우리는 그들의 죄악을 담당하였나이다 8종들이 우리를 지배함이여 그들의 손에서 건져낼 자가 없나이다(6-8)
선지자는 다시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고백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보다 주변 강대국을 의지 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먼저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죄에 대한 고백과 회개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현재 당하는 고난이 자신의 죄 때문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시험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고난이 멈춥니다. 하나님의 시험이라면 그 시험이 지날 때까지 하나님을 신뢰하고 잠잠히 견디는 것의 외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⑴ 이방을 의지한 이스라엘(6)
선지자는 4장에서 지도자들의 잘못을 지적하였는데, 이제는 이스라엘이 국가적으로 범죄한 사실을 지적합니다. 그들이 환란을 당한 것은 자이스라엘의 보호자이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주변 강대국을 의지한 것입니다. 남유다는 북이스라엘이 멸망한 이후 내내 앗수르의 속국으로 살면서 그들을 의지했습니다.
앗수르가 멸망한 후에는 앗수르를 멸망시킨 애굽의 속국이 되어 다시 애굽을 의지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어려움을 당할 때, 애굽이 자신들을 도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침략할 때, 애굽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애굽은 이스라엘에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람들, 이사야와 예레미야를 통해 애굽을 의지하지 말라고 계속 경고하였습니다(이사야 19장; 30:2-7; 31:1-3; 예레미야 42:14-19).
하지만 그들은 예언자들을 통한 경고를 듣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양식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서 간구하기 보다는 눈에 보이는 애굽을 의지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먹을 것을 주시는 분이라고 말씀하셨지만(신명기 8:9-10),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이방 나라를 의지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위대한 정체성을 빵 한 조각에 저버렸던 것입니다.
⑵ 변명으로 일관한 이스라엘(7)
선지자는 이스라엘은 조상 때부터 거역하고 이방 나라들을 의지하는 배역의 죄를 지었습니다. 세월이 흘러서 범죄한 조상들이 모두 죽어 없어졌습니다. 이제 그들의 죗값을 현재 후손들이 그 죄를 짊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자신들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있다고 말한 것과 달리 자식들이 조상들의 죗값을 대신한다고 합니다. 자신들이 무죄하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앞에서 보듯이 오로지 조상들의 죗값으로 고통을 겪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후손들이 고통을 겪은 것은 그들 역시 조상들의 죄를 그대로 답습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현재 환란은 조상 때부터 저지른 죄와 자신들의 죄의 산물이라는 뜻입니다. 한편으로는 몇 세대에 걸친 죄의 무게가 매우 무겁다는 뜻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참으로 오랫동안 하나님이 참으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⑶ 종과 같은 비참한 이스라엘(8)
조상으로부터 가중된 죄 때문에 이스라엘은 아주 미약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나라를 잃은 그들은 바벨론의 침공으로 망하게 되었습니다. 수치스럽게 이전에 자신들의 종이었던 바벨론에게 종이었던 자들에게 지배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여기서 ‘종’은 실제적으로는 바벨론의 관리를 나타내지만 여기서는 상황의 역전을 효과적으로 나타냅니다. 어욱 절망스러운 것은 그런 수치스러운 지배에서 벗어날 길이 도무지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다시 일어날 능력을 완전히 살실했습니다. 이렇게 철저하게 멸망당한 이유는 자신들의 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떠났기 때문이었습니다.
기근으로 죽게 된 이스라엘(9-10)
우리는 세상에 화려함과 부요함에 관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습니다. 아무리 화려하고 부요하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면 순식간에 안개처럼 사라집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화려한 옷을 입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관계입니다.
9광야에는 칼이 있으므로 죽기를 무릅써야 양식을 얻사오니 10굶주림의 열기로 말미암아 우리의 피부가 아궁이처럼 검으니이다(9-10)
하나님께서 그들의 왕이시며 주인이실 때 그들은 약속의 땅에서 많은 축복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그 땅의 주인이 되려는 욕심을 가지자 하나님을 버리고 주변 나라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자기들이 알지도 못하는 이방인들의 종이 되어 그들의 통치를 받는 신세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다시 자신들의 비참한 상황에 대한 묘사로 돌아옵니다.
⑴ 양식을 얻기 어려운 이스라엘(9)
참기 어려운 고통 가운데 하나는 배가 고픈데 먹을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굶주림이 심해지자 광야에 나가 먹을 것을 구해 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양식’이 아니라 ‘칼’인 거친 유목 민족의 공격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제 기본적인 양식까지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할 처지가 되었습니다. 점점 양식을 구할 수 없어 심각한 영양실조에 걸린 자들도 있습니다. 선지자는 굶어 죽는 것보다 칼에 죽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할 정도로 백성들은 배고픔에 시달렸습니다. 백성들은 너무 굶주린 나머지 자기 자식을 먹기까지 했습니다.
⑵ 영양실조로 위기된 이스라엘(10)
극도의 굶주림은 강렬한 불길처럼 그들의 뼈와 살과 내장을 태웠습니다. 그래서 아름답고 윤택했던 지도자들의 얼굴이 아궁이 숯보다 검은 얼굴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모습은 오랫동안 먹지 못해 살가죽이 달라붙어 막대기 같은 몰골이 되었습니다. 피부가 검은 것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영양실조로 수척한 모습을 표현합니다. 선지자는 다시 어려움을 호소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고대합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허기진 모습인 외형적인 몰골을 표현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를 돌아볼 때, 영적인 영양실조에 걸려서 수척해져 가고 있습니다. 영적 양식인 말씀을 어디서 제대로 먹을 수 있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배워보겠다고 열심을 내었지만, 이단으로 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기독교 방송에서 유명한 설교가들의 설교들이 모두가 제대로 된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은 유명세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설교들을 잘 분별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영혼이 허기지지 않도록 하나님의 일용할 양식으로 항상 채워야 합니다.
예레미야애가 시대의 상황과 현재 한국 교회의 상황이 별반 다르진 않습니다. 그래서 선지자가 간절히 외쳤던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 공동체와 영적 지도자들을 위해 함께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예레미야처럼 간절함과 믿음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겠다고 약속하신 사실을 믿고 간구해야 합니다. 한국 교회를 회복시켜달라고, 지도자들에게 말씀의 영이 충만하고, 성도들이 말씀으로 충만해지도록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