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파타! -
☆ 2014년 가해 2월14일 (백) 성 치릴로 수도자와 성 메토디오 주교 기념일
[수원] 소통의 원칙, 친절하라.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기획 연구 담당 전삼용 요셉신부
† 제1독서 : 1열왕 11, 29 - 32 ; 12,19
† 복음 : 마르 7,31 - 37
치릴로 성인과 메토디오 성인은 형제간으로, 그리스의 테살로니카에서
태어나 터키의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교육을 받았다. 두 형제는 전례서들을
자신들이 창안한 알파벳의 슬라브 말로 번역하였다. 두 성인은 체코 모라비아의
슬라브 족에게 파견되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헌신적으로 일하였다. 로마로
돌아간 두 형제 중 치릴로 성인은 수도 서원을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869년
무렵에 선종하였다. 메토디오 성인은 교황 특사로 모라비아에서 활동하다가
885년 무렵 선종하였다.
★ 솔로몬의 신하였던 예로보암이 솔로몬에게 반기를 든다. 그는 길에서
아히야 예언자를 만나 주님께서 솔로몬의 나라를 찢어 내어 그 가운데 한
지파만을 솔로몬의 아들에게 남겨 둘 것이라는 예언을 들은 것이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수로 돌아오셨을 때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그분께 데리고 온다. 예수님께서 그를 정성껏 어루만져 주시자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된다. 예수님께서 함구령을
내리셨으나 사람들은 그 일을 널리 알렸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치유 이야기는 비교적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각 대목을 주의 깊게 묵상하면 예수님의 치유 행위의 깊은 뜻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데려온 사람은 귀먹고 말 더듬는 이였습니다. 귀가 먹으면
쉽게 언어 장애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러한 묘사를 통하여 복음을 읽는 우리는 조금씩 이 치유 이야기의 현실성을
느끼게 됩니다. 또한 우리는 이 육체의 장애가 상징적인 뜻도 지닐 수 있다는
점을 직감할 수 있습니다. 귀먹고 말 더듬는 그의 모습은, 복음에 귀를 기울이지
못하며 살아가기에 제대로 된 행동을 실천하지도, 참된 말을 하지도 못하는
우리의 처지를 그림처럼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오늘 복음에 나오는 인물은, 성서학의 세계적 권위자 요하임
그닐카 신부의 표현처럼, 우리를 비추어 주는 ‘실재 상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자에게 손이라도 얹어 주십사는 사람들의 기대를 넘어 매우
정성 들여 단계별로 그를 치유해 주십니다. 먼저 그를 군중에게서 떼어
놓으십니다. 그가 구경거리로 화제의 중심에 놓이지 않게 하시려는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치유의 과정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시간과 관심을 그에게 온전히 쏟으시는 모습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이를
우리는 ‘인격적 관계’라는 말로도 표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하늘을 우러러 “에파타!”(열려라!) 하고 권위 있게 명하십니다.
예수님의 치유를 표현하는 말마디 하나하나를 묵상하면서 우리는 그 병자가
느꼈을, 조금씩 커져 가는 감동을 나누어 받게 됩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온전히 집중하고 계신다는 사실에 더없는 힘과 용기를 얻습니다. 그리고 그
치유가 복음을 대하는 우리의 가슴속에서도 시작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귀를 열어 주시는 예수님 |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가해 2월14일 연중 5주간 금요일
<예수님께서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31-37
귀를 열어 주시는 예수님
귀가 있어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다면 그는 귀머거리 입니다. 입이
있어도 하느님에 관해 말할 수 없다면 그는 벙어리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큰 복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주님을 생각하고 주님의 현존을 깨닫기도 전에 나를
사랑하시고 먼저 생각하고 찾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말씀을 믿고 말씀대로 행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로마10.17).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에파타!” 곧 “열려라!” 하시며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고쳐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능력으로 귀를 열어주시고
말할 수 있게 해주시길 기도합니다. 사회적으로는 공부도 많이 하고 지위도
있으며 세상 것에는 해박하면서도 하느님의 말씀에는 둔한 사람들이 있다면
들을 귀가 없는 그는 귀머거리요, 입이 있어도 주님을 전하는 일에 사용하지
못한다면 반벙어리입니다. 그런 우리의 귀와 입을 열어주시길 청합니다.
제가 알고 있는 엘리사벳 자매는 청각장애인입니다. 그분의 취미는 음악
감상입니다. 놀라시겠지만 ‘음악은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그분은 육체적인 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주님의
말씀을 듣고 느끼며 살아갑니다. 지금도 서예를 가르치고 장애인을 위한
활동을 열심히 하시며 말씀도 얼마나 이쁘게 잘 하시는지 모릅니다. 그는
육체적인 귀는 닫혔지만 영적인 귀와 입이 열려 있으십니다. 내면의 귀가
열리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더 큰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환자를 따로 데리고 나가서 손가락을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습니다. 우리도 한적한 곳에서 주님과 따로
만날 수 있는 시간이 허락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말씀으로
끝날 수 있음에도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해
주셨습니다. 자신을 가두어 놓은 주위 환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것입니다.
손가락을 귀에 넣고 침을 발라 혀에 대는 행동으로 당신의 관심과 사랑을
구체적으로 표현 하셨듯이 우리도 구체적인 행동을 통하여 이웃사랑을
드러내야 하겠습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꼭 안아주는
포옹으로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듯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것을 그의
손길에 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침을 발라 혀에 대는 것은 비위생적이고 단정치 못한 행동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로부터 소외당하고 늘 혼자 외롭게 지냈던
그들에게는 큰 사랑의 표현입니다. 엄마가 자식에게 먹을 것을 꼭꼭 씹어서
주는 것과 같은 행위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셨다고 하였는데 하늘을 우러러 본다는 것은
곧 하느님 아버지의 능력을 바라보면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길
소망하였다는 것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물고기 2마리와 빵 5개로
5천명을 먹이시는 기적(루카9,16).을 베풀 때도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어떤 처지나
환경 안에서도 하늘을 우러러 보며 기도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모든
것은 하늘 아버지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당의 수난 받으신 매괴성모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 보고 계십니다.
7방의 총탄을 맞으시고도 흔들림 없는 아름다운 모습을 간직한 채 천상을
바라보십니다. 시기, 질투, 미움, 분노, 증오, 적개심, 극한 두려움으로
표현되는 총탄을 품을 수 있는 힘은 바로 하늘에서 옵니다. 우리도 마음이
하늘, 천상을 향해 있을 때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콜로3,2).
성경은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분을 찾으면 만나 뵐
것이다”(신명4,29).라고 적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귀를 열어 주시고
말을 할 수 있게 해 주시는 주님을 뵙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마음이 말씀에 열리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위로와 구원을 얻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너 한껏 네 입을 벌려 보라, 나는 곧 그 입을 채워
주리라.”(시편80,11) 사람들이 우리의 변화된 삶을 보고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하고 놀라워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주님을 열린 마음으로
지난주에 동창 모임에서 한 신부가 다른 신부에게 “내가 오늘 디스할 거야.”
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당사자 신부는 무슨 말인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혹시 ‘디스’가 무슨 뜻인지 모르는 거야?”
라고 물어보았지요. 정말로 모르고 있더군요. 영어의 ‘This’를 생각했고, 왜
그런 말을 쓰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하긴 오랫동안
본당사목이 아닌 특수사목을 했고, 인터넷도 거의 하지 않는 신부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 요즘 사람들이 많이 사용하고 있는 이 말을 모른다는
것이 조금 너무하다는 생각도 들더군요.
혹시 요즘 젊은이들이 많이 사용하는 ‘디스’라는 말을 모르시는 분이 계실 것
같아서 설명 드리면, 영어의 ‘disrespect(무례, 결례)’의 줄임말로 주로 다른
사람을 폄하하는 행동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런 식의 단어들이 많이 있지요.
소위 초급단계의 단어라고 하는 몇 가지만 써 보겠습니다. 이 중에 몇 개나
아시는 단어입니까?
‘간지: 폼이 난다’, ‘레알: real에서 유래된 말로 진짜?라는 뜻’, ‘읭: 으잉에서
ㅇ을 뺀 줄인말’, ‘깝ㄴ: 깐죽되지 마라’, ‘대략난감: 왠지 좀 어렵고 힘든 상황’,
‘듣보잡: 듣도 보도 못한 잡놈’, ‘지못미: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깜놀: 깜짝
놀라다의 줄인 말’, ‘선추후감: 먼저 추천하고 후에 감상’, ‘오나전, 젭라: 완전,
제발’.
요즘 젊은이들이 많이 사용하는 단어로 초급단계라고 하던데 몇 개나
아십니까? 아마 젊은이들의 문화에 활짝 열려 있어야 이런 단어들도
알아들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그 문화를 받아들이지 않고,
그냥 비판만하고 있다면 절대로 이해할 수도 또 함께 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열려 있어야 이런 문화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처럼, 주님의 말씀 역시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이 활짝 열려 있어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항상 새롭게 다가오시는 분이시지요. 그래서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즉, 항상 그 시대에 가장 맞게 활동하시는 하느님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그 시대에 맞게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오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런데 과거에
매어 있다면 어떻게 새롭게 다가오시는 하느님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이런 모습을 기억하기에, 오늘 복음에서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고쳐주시면서
하신 ‘에파타!’ 곧 ‘열려라!’라는 말씀이 더 크게 와 닿습니다. 귀와 입이
열리라고 하신 말씀이지만, 어쩌면 더 중요한 우리의 마음이 열려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은 아니었을까요?
불평불만으로 가득 찬 나의 닫힌 마음으로 주님을 거부하는 것이 아닌, 늘
새롭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귀먹고 말 더듬는 이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할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삶 안에서 제대로 생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최선을 다한다면 얻을 수도, 얻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도전은 반드시
자신의 세계를 넓힌다(김희중).
발렌타인데이라고 합니다. 초콜릿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랑이 중요한 날로
만드세요.
악취가 향수로
‘디올(Dior)’이라는 브랜드를 아십니까? 지금 현재 ‘디올(Dior)’이라고 하면
향수를 비롯한 다양한 패션 상품을 일컫는 상표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그랬을까요?
프랑스의 어느 마을에 ‘디올(Dior)’이라는 청년이 살았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비료 공장을 운영했는데, 그 거름 냄새가 바람이 불 때면 엄청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눈살을 찌푸리면서 그때마다 ‘디올 냄새가 난다.’라고
말했지요.
이렇게 사람들의 시선에 그의 어머니는 악취를 없애기 위해서 열심히 꽃을
심었지요. 그리고 이렇게 접했던 꽃이 나중에 의상 디자이너로 성장하는
커다란 발판이 된 것입니다. 그가 바로 프랑스의 대표적인 디자이너
‘크리스찬 디올(Christian Dior)’입니다. 후에 향수까지 직접 개발해서
향수의 유명 상표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지요.
어렸을 때, 악취의 대명사였던 ‘디올(Dior)’이라는 이름이, 오늘날에는
좋은 냄새의 대표 이름이 되었습니다.
지금의 부정적인 모습이 영원할 것이라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좋은
모습으로 변화될 수 있다는 희망을 잃지 않을 때, 지금과 전혀 다른 나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 인천교구 성소 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기타] “에파타!”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듣고자 한다면, 마음이 고요해야 합니다.'
2014년 가해 2월14일 금요일 복음묵상
“에파타!” (마르코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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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는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우리는 참 많고 다양한 소리들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 소리는 좋은 소리도 있고 나쁜 소리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듣기 원하는 소리만 듣고 살 수는 없습니다.
그 안에는 우리가 주고 받는 말들도 있지요.
소리는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우리의 귀를 통해 들어옵니다.
그리고 그 소리에 우리는 반응을 하게 됩니다.
이는 소리에 대한 물리적이고 생체적인 1차 반응이지요.
그런데 같은 소리나 말을 듣고도 사람에 따라 소리를 이해하고 소화하는
능력은 다른 듯 합니다. 2차 반응이 다르다는 것이지요.
이를 마음의 반응이라고 하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주 사용하시던 표현 중에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어라.”
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2차 반응인 마음의 반응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마음으로 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한 것처럼, 마음으로 들을 수 있는 귀도
필요합니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제일 힘든 것 중의 하나가 듣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나무라는 소리를 듣기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약으로 생각하고 귀를 기울이는 이들이 있고, 의도적으로 피하려는
이들이 있습니다. 칭찬하는 소리를 듣기 싫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더욱 겸손해지고 성장할 수 있는 말로 받아들이는 이들이 있고,
유치한 교만에 빠지는 이들도 있습니다.
잘 들어야 합니다.
들리는 소리를 제대로 듣는 것을 넘어서, 스스로 듣고자 하는 적극적인
자세로 옳은 것에 귀를 기울이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어디선가 고통으로
울부짖는 이의 소리가 있어도 아무 의미 없이 흘려버릴 수 있는 것이 우리의
약함입니다. 어디선가 정의를 외치는 이의 소리가 있어도, 별 감응 없이
귀담아 듣지 않을 수 있는 것이 우리의 비겁함입니다.
복음을 살고자 하는 우리들, 그렇다면 먼저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들을 수 있는 귀를 허락해달라고 청해야만 합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을 하나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제대로 듣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내 안이 조용해야 합니다.
마음이 시끄러우면 안 된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오랜 가톨릭 영성의
역사에서 항상 강조해온 것이 침묵이라는 보물인 것입니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수도회] 허물없는 하느님
2014년 가해 2월14일 금요일 성 치릴로 수도자와 성 메토디오 주교 기념일
- 마르 7, 31-37
“예수님께서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셨다.”
<허물없는 하느님>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못하실 일이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전지전능하신 능력의 주님이셨습니다.
말씀 한 마디에 죽어가던 사람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습니다. 당신 눈빛
한 번으로 마귀들이 서둘러 도망갔습니다. 때로 환자가 있는 현장에 굳이
가시지 않더라도 치유가 가능했습니다. 원격 치유도 종종 이루어지던
모습이 복음서 여러 곳에 소개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묘사되고 있는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은 조금은
의아스럽습니다. 꽤나 의외의 모습이 비춰지고 있습니다.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치유하는 과정에서 꽤나 복잡한 절차를 거치게 하십니다.
우선 예수님께서는 환자를 군중에서 불러내십니다. 그리고 그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1대 1로 마주서십니다. 그리고 몇 가지 특별한 행동을
보여 주십니다.
당신 손가락을 환우의 두 귀에 넣으십니다. 그리고 그 손에다 침을 발라서는
또 환우의 혀에다 대십니다.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조금은 이상했을 것입니다. “지금
도대체 뭐하는 거야, 손가락을 남의 귀에 넣지 않나, 그 손으로 침을 묻혀
내 혀에 묻히고 이거 지저분하게 왜 이러시지?” 하는 생각도 들었을 것입니다.
대체 오늘 보여주신 예수님의 특별한 치유활동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요?
예수님께서 우리와 직접 접촉하고자 하시는 강한 열망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시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가 너무 사랑스러워, 우리의 모습이 너무 측은하고
가여워서 우리를 ‘터치’하고 싶은 마음에 환우의 귀에 혀에 손을 갖다 대신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 허물 많고 나약하고 죄 많은 우리들을 터치하고 싶어 하신다는
것, 이거 보통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얼마나 황송하면서도 은혜로운 일이며
행복한 일인지요?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얼마나 극진히 사랑하셨으면 우리와 직접
접촉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너무 크시고 대단하셔서 감히
범접하기 힘든 하느님, 너무나 높으셔서 한 자리에 앉기 부담스러운
하느님이 우리와 손을 마주잡고 싶어 하는 하느님이십니다.
죄인인 우리와 한 식탁에 자리하고 싶어 하는 허물없는 하느님, 우리의
상처와 심각한 죄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손을 대고 싶은 사랑과 친절의
하느님이 바로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 관구 부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서울] 성 치릴로 수도자와 성 메토디오 주교 기념일
며칠 전에 방에서 운동을 하다가, 작은 부상을 당했습니다. 방 문지방에
전임 신부님께서 운동 할 수 있도록 봉을 달아 놓았습니다. 가끔씩 그 봉을
잡고 매달리기도 하고, 턱걸이를 하기도 했습니다. 튼튼할 줄 알았던 봉이
그만 제가 매달리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다행히 탁자의 모서리에
부딪치지는 않았습니다. 머리, 목, 엉덩이가 조금 아프지만 그래도 천만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50이 넘으면 운동을 해도 조심해야 할 것 같습니다.
혹 문지방에 설치한 봉이 있다면 안전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나에게 벌어진 일 때문에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벌어진 일을 해석하면서 성장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일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 경험이 나를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경험을 해석하는 마음에 따라서 내가 발전하는 것입니다.
운동을 하다가 넘어질 수 있고, 부상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재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왜 그런 것을 달아 놓아서 부상을 당하게 했느냐고
생각한다면 큰 발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다음에는 좀 더 조심해야지라고
생각한다면, 그나마 크게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구나라고 생각한다면
조금씩 발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본의 아니게 형님을 대신해서 고향 선산을 위해 돈을 지불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장남이 아닌데 왜 그렇게 해야 하는가라고 생각하면 속이 상할
것입니다. 형님의 아들들 등록금도 제대로 주지 못했는데 이번 기회에
조카들 등록금 대신으로 주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집니다. 누군가
말 한대로 세상일은 다 생각하기 나름인 것 같습니다.
이규혁 선수는 올림픽에 6번 출전했지만 한 번도 메달을 목에 걸지는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이규혁 선수를 비난하지 않습니다. 끝없는
도전정신과 올림픽에 출전할 정도로 실력을 쌓아온 선수의 땀과 노력을
칭찬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 이규혁 선수가 4위를 한 모태범 선수에게
말했다고 합니다. ‘고개 숙이지 마라! 4등도 잘 한 거야!’ 올림픽은 늘
말하듯이 지구촌의 축제입니다. 메달의 색깔도 중요하겠지만 함께 어울려
우정을 나누고, 친교를 나누는 축제의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에파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열려라’
라는 뜻입니다. 부정의 문을 열고 긍정의 문으로 들어가면 좋겠습니다.
절망의 문을 열고 희망의 문으로 들어가면 좋겠습니다. 분노의 문을 열고
용서의 문으로 들어가면 좋겠습니다. 미움의 문을 열고 사랑의 문으로
들어가면 좋겠습니다.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고, 강물은 강을 버려야
바다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탐욕과 욕망의 문을 활짝 열고 나눔과 봉사의
문으로 들어갔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문을 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
병자들, 굶주린 이들에게 그 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당신의 권한과 능력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를 만들어 가는 과정입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도회] "에파타!" -주님과의 소통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2월14일 금요일
성 치릴로 수도승(+869)과 성 메토디오 주교(+885) 기념일
열왕기 상11,29-32;12,19 마르7,31-37
<예수님께서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31-37
"에파타!" - 주님과의 소통 -
죄의 비극적 결과가 불통이요 소외와 분열입니다.
바로 1독서는 솔로몬의 죄로 인한 비극적 분열상을 보여줍니다.
자기가 입고 있던 새 옷을 움켜쥐고 열두 조각으로 찢는 아히야 예언자의
상징적 행위가 의미하는바 솔로몬의 나라의 분열입니다.
반면 복음은 주님과의 만남으로 인한 소통의 구원을 보여줍니다.
불통의 벽(壁)이요 소통의 문(門)입니다.
불통의 죽음이요 소통의 생명입니다.
온갖 심신의 병도 잘 들여다보면 불통으로 인한 내적분열에서 기인됨을
깨닫습니다. 마음이든 몸이든 잘 통해야 건강입니다.
불통으로 인한 내적분열보다 해로운 것은 없습니다.
개인이든 공동체든 우선적인 게 주님과의 소통이요 내적일치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귀먹고 말 더듬는 이가 상징하는바 불통의, 자폐적
인간입니다. 닫혀있을 때 죽음이요 열려있을 때 생명입니다.
주님과 소통으로 마음이, 몸이, 귀가, 입이, 눈이 열려야 비로소 내적일치의
치유와 구원이요 충만한 삶입니다. 귀먹고 말 더듬는 이의 치유과정에서
정성을 다하는 주님의 모습이 감동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은 우리의 간절한 청에 기꺼이 응답하시는 주님의 자비로운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그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 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불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주님의 정성을 다하는 치유과정이 그대로 기도요 참 아름답습니다.
주님의 ‘연민의 마음’과 ‘사랑의 스킨십’, ‘능력 있는 말씀’이 삼위일체
하나가 되면서 소통의 구원입니다.
주님에게는 우리 하나하나가 소중한 존재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
우리 하나하나에게 이렇게 사랑을 다하시는 주님을 체험합니다.
“에파타!”
진정 마음이 열려 주님과, 이웃과, 나와 소통해야 삽니다.
주님과의 소통, 너와의 소통, 나와의 소통입니다.
바로 이런 소통의 중심에 십자가의 주님이 계십니다.
회개가 의미하는바 역시 소통입니다. 매일 평생 끊임없이 바치는 우리의
시편 성무일도와 미사의 공동전례기도시간 역시 ‘에파타’, 즉 회개와 소통,
열림의 시간입니다. 이렇게 끊임없이 마음이 열려 주님과 하나 되어야
개인도 살고 공동체도 삽니다.
주님이 하시는 일이 일치라면 사람이 하는 일이 분열입니다.
주님이 하시는 일은 소통이라면 사람이 하는 일이 불통입니다.
주님이 하시는 일은 용서라면 사람이 하는 일이 죄 짓는 일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의 전 존재를 활짝 열어주시어 온전한
내적일치의 구원을 이루어주십니다.
“주님, 저희 마음을 열어 주시어, 당신의 아드님 말씀에 귀 기울이게
하소서.”(사도16,14참조).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소통의 원칙, 친절하라.
2014년 가해 2월14일 연중 제5주간 금요일
< 예수님께서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셨다. >
복음 : 마르코 7,31-37
< 소통의 원칙, 친절하라. >
보브 그린은 신문 칼럼리스트입니다. 일이 그렇다보니 인간 본성의 어둡고
불행한 면들을 많이 다루게 되었고, 그의 인생관도 그리 밝지만은 않았습니다.
그는 인간 본성에 대해 회의적이었고 그 중에 가장 나쁜 범죄를 접한 것은
이것이었습니다. 즉, 한 아름답고 총명한 눈을 가진 여섯 살의 소년이 여름
내내 어머니와 의붓아버지에게 폭행을 당하고 어두운 옷장 속에 묶여 매달려
있다가 사망한 사건이었습니다. 보브는 하마터면 묻혀버릴 수도 있었던 이
사건을 자신의 칼럼을 통해 세상에 알렸고, 그 가해자들을 정당한 재판을
통해 처벌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같은 폭행을 당하고 있던 소년의 형, 코르넬리우스의 생명은
보장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형 코르넬리우스는 법정에서 자신의
어머니와 의붓아버지가 가한 폭행을 당당히 증언하여 유죄를 입증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당시 코르넬니우스는 10살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을 감당하기엔 역시 너무나 어린 나이였습니다. 물론
친척이 돌보아주고 있기는 했으나 그의 상처가 너무 커서 원만한 생활이
어려웠습니다. 그가 농구와 책 읽기를 좋아한다는 글을 쓴 적이 있는데,
하루는 시카고 불스 팀에서 그 아이와 보브를 초대한다는 메시지가
왔습니다. 그는 흔쾌히 그 초대를 받아들여 코르넬리우스를 경기장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옷장에 갇힌 채 학대받고 매를 맞으며 자라온 코르넬리우스에겐 농구장은
하나의 신성한 사원과 같았습니다. 이 웅장한 경기장에서 생애 최초로
시카고 불스 팀의 경기를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와 아이가 경기장
관중석으로 내려가다가 한 남자와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아이는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무언가 말하려고 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때 그 아이를
돕기 위해 그 농구선수는 아이 얼굴만큼 자신을 낮추기 위해 무릎을
꿇고 이렇게 이야기를 걸었습니다.
“안녕, 코리넬리우스! 나는 마이클 조단이다.”
조단은 아이에게 몇 마디 농담도 건네고 아이가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 때까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경기를 앞두고 있었지만
농구 황제는 결코 서둘지 않았습니다. 아주 오랫동안 자신을 학대하던
어른들만 만나오던 코르넬리우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 우리 팀을 응원해 줄 수 있겠니? 우린 너의 응원이 필요하거든.”
처음으로 세상에서 필요한 존재가 된 코르넬리우스는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조단이 그에게 자신과 같은 유니폼을 주면서
관중석이 아닌 경기장 벤치 자신 옆자리에 앉히고 조단이 쉴 때는 계속
그와 이야기를 나누어 주었던 것입니다. 조단은 신문기사를 통해
코르넬리우스의 상처를 잘 알고 있었고 이 모든 것을 미리 준비해 두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 날도 날듯이 덩크슛을 했고 코르넬리우스는
세상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는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농구 황제와 함께
한 이 시간은 그가 살아갈 세상이 그렇게 두렵기만 한 세상이 아님을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경기 후에 보브는 감사의 말을 전하기 위해 탈의실로 갔습니다. 그리고
감사의 인사를 전했습니다. 조단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만일 내가 이렇게 하지 않았다면 난 어머니에게 매를 맞았을 겁니다.
어머니는 나를 제대로 된 인간으로 키우려고 애를 쓰셨으니까요.”
[참조: 101가지, 농구 황제의 친절]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세상에 귀머거리요 벙어리인 사람을 데려와서
머리에 손을 얹어달라고 청합니다. 귀머거리요, 벙어리라는 말은 아마도
세상과의 단절을 상징할 수도 있습니다. 마치 코르넬리우스처럼 세상이
무서워 듣기를 거부하고, 세상과 대화하기를 멈춘 상처받은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무언가를 청할 때도 매우 조심스럽습니다. 고쳐달라고
하지 못하고 그저 손을 머리에 얹어 주십사고 청합니다. 우리도 가끔은
누군가에게 더 큰 것을 원하지만 감히 그것을 다 청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머리에 손을 얹는 것은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너무 쉽기
때문입니다. 대신 당신의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십니다. 손가락은 바로
성령의 힘을 상징합니다. 하느님은 당신 손가락으로 세상을 지으시고, 당신
손가락으로 마귀를 쫓아내셨습니다. 그만큼 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을
귀로 듣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당신 성령을 상징하는 침을
손가락에 발라 혀에 대 줍니다. 이런 일들을 굳이 하실 필요가 없고 그저
“네 병이 나았다.”라고만 해 주시면 되겠지만, 이 사람이 하느님과 세상에
열리기 위해서는 그것보다 더 큰 친절이 요구되었던 것입니다.
김창옥 교수가 자라오면서 무서워서 한 마디도 제대로 못하고 살아왔던
아버지와 대화를 시작하게 된 데는 그가 벌어온 돈을 용돈으로 아버지에게
드리면서부터라고 합니다. 용돈을 받으신 아버지는 자신의 자녀에게 입을
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용돈이 바로 삼위일체 관계에서는 성령을 의미함을
아실 것입니다. 이것이 소통입니다. 소통은 먼저 내가 가진 에너지를 희생
제물로 상대에게 내어줄 때부터 시작됩니다. 사랑을 주지 않고 말만 하라고
해 보아야 그의 입은 열리지 않습니다. 참다운 소통, 우리도 우리 친절함을
먼저 닫혀있는 이들에게 보여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조금 더,
어쩌면 지나치리만큼, 친절해봅시다. 이것이 곧 ‘에파타!’, ‘열려라!’하는
주문인 것입니다.
요셉 신부님 홈페이지: http://www.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기획 연구 담당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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