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주 기행](18)해남 덕정마을 진양주 진양주(眞釀酒)는 구중궁궐에서 임금이 마시던 어주다. 대부분의 특산품이나 전통주가 궁중에 진상한 것만으로 ‘명품’이라고 내세우고 있으나 진양주는 궁중의 어주가 반가의 가양주로 전승돼온 내력을 담고 있어 차별화된다. 전남 해남과 영암지역에는 진양주의 내력이 애주가들에 의해 전설처럼 구전되고 있다.
조선조 헌종 때 이조좌랑과 사간원의 사간(司諫) 벼슬을 지낸 김권이 사직하고 고향인 영암군 덕진면으로 낙향할 때 어주를 담그다 폐출된 상궁을 후실로 거둬 함께 왔다.
최씨 성을 가진 궁인은 궁중에서 빚던 진양주를 광산 김씨 문중의 제사나 애경사 때마다 제조해 상에 올렸는데 이를 맛본 문중의 애주가에 의해 입소문을 타고 그 진가가 원근에 퍼져 나갔다.
궁인 최씨는 김권의 손녀에게 진양주를 빚는 비법을 전수했는데 이 소녀가 해남군 계곡면 덕정마을 장흥 임씨 집안으로 출가해 진양주를 담그면서 제조비법이 임씨 집안의 며느리에 의해 대를 잇게 됐다. 김권의 손녀는 친정에 갈 때마다 자신이 빚은 진양주를 가지고 갔는데 할아버지는 “네가 만든 술맛이 훨씬 좋다”고 평가했다.
임씨 집안의 술맛이 친정집의 술맛보다 더 좋다는 평가를 받은 것은 흑석산의 맑고 깨끗한 암반수가 지하로 흐르다 솟는 우물 물로 술을 빚었기 때문이다. 덕정마을의 우물은 물맛이 좋기로 소문나 최근까지도 수십리 떨어진 마을에서 물을 길어갔다.
흑석산 자락에 위치한 덕정마을은 우뚝 솟은 흑석산을 야트막한 야산이 솥을 떠받치고 있는 형상처럼 보인다 하여 덕정(德鼎)이란 이름이 붙여졌으며 솥에 구멍을 뚫으면 마을이 망한다는 풍수지리설에 의해 우물을 파지 않는 불문율이 지켜져왔다. 마을 사람들은 흑석산 암반수가 솟구치는 공동우물 하나에 의지해 살아왔으나 주변 환경이 변하면서 우물의 수질도 크게 나빠져 1990년대 들어 사용하지 않고 있다.
지금의 진양주는 흑석산 자락의 계곡 150m 지하에서 뽑아내는 암반수를 사용해 빚고 있다.
94년 전남도 무형문화재 제25호로 지정된 진양주 기능보유자 최옥림씨(65)가 23세에 임씨 집안으로 시집와 시어머니 어깨너머로 진양주 제조비법을 배운 것은 궁인 최씨가 영암에 내려와 진양주를 담근 지 160여년이 지난 뒤이다.
진양주는 찹쌀과 누룩만으로 제조해 찹쌀(眞米)로 빚은 술이란 뜻을 지니고 있는데 재료로 쌀보다 훨씬 비싼 찹쌀만을 사용하다보니 함부로 연습할 수도 없어 어려움이 많았다. 최씨의 시어머니는 특별히 진양주 제조비법을 전수해주지 않아 명절을 앞두고 만든 술이 제맛이 나지 않아 실패한 경우도 있었는데 이같은 시행착오를 수없이 반복하면서 비법을 터득했다.
진양주 제조법은 먼저 찹쌀로 죽을 쑤어 식힌 뒤 누룩을 넣어 3~4일 발효시켜 종자술을 만든 다음 찹쌀로 고두밥을 쪄서 종자술에 넣고 비벼 2차발효를 시킨다. 발효기간은 10여일이 걸리는데 중간에 꼭 술을 한번 뒤집어주어야 한다.
술을 담글 때 누룩과 찹쌀, 물의 비율을 잘 맞춰야 하며 발효기간중 온도를 맞추는 일 등이 술맛을 좌우한다. 2차발효가 끝나면 용수를 박아 여과된 맑은 술을 떠내는데 이 기간이 일주일 이상 걸린다. 제대로 빚어진 진양주는 쌀 1되를 담그면 술 1되가 나오는데 향이 진하나 맛은 부드러워 한없이 마시다 일어나지 못해 ‘앉은뱅이 술’이란 별명이 붙기도 했다.
진양주는 마시고 나면 찐득거리는 뒷맛을 느낄 정도로 진하며 단맛도 남아 있는 데다 알코올 도수도 낮아 노인과 젊은이, 여자들도 좋아한다. 그러나 원료가 찹쌀인 데다 보관도 어려워 지체높은 양반들이나 맛보는 귀한 술이지 서민은 접하기 어려운 ‘먼 발치의 술’이었다. 진양주는 2004년 농림부와 농수산물유통공사가 주최한 한국전통식품 선발대회에서 ‘베스트 5’에 뽑혀 그 진가를 인정받았다.
술은 19도 이상 되어야 변하지 않는데 진양주는 알코올 도수가 낮아 주변온도가 30도 이상으로 올라가면 식초로 변하고 만다.
최옥림씨는 16도의 진양주를 생산하고 있으나 19도 이상의 제조허가가 나지 않아 독한 맛의 진양주는 제조하지 못하고 있다. 생산된 진양주는 집에 마련한 저온창고에 저장했다가 찾아오는 사람이나 전화주문을 받아 택배로 보내는 게 고작이다. 이 때문에 해남읍이나 땅끝 등 관광지에서도 진양주를 판매하는 곳은 없다.
임씨 가문에선 바다에서 나는 생선을 회로 떠 진양주 안주로 내놓았다. 흑산도에서 잡힌 홍어도 삭혀 안주로 곁들이면 술맛이 더욱 좋다.
진양주 제조비법 기능보유자 최옥림씨(65)는 월출산과 왕인박사의 고장 전남 영암에서 태어나 23세 되던 해 해남군 계곡면의 임종모씨와 결혼하면서 진양주를 알게 됐다.
최씨의 시어머니는 명절 차례상과 조상 제상에 반드시 진양주를 빚어 제주로 올렸다. 누대에 걸쳐 내려오는 전통이자 정성이었다.
시어머니의 어깨 너머로 진양주 제조비법을 터득한 최씨가 괴로웠던 것은 전통주를 담그는 것이 밀주제조로 탈세혐의를 받아 항상 단속대상이라는 점이었다. 정성스럽게 담근 진양주를 양조장의 신고로 모두 압수당하고 나면 억울하고 아까워 밤잠을 설쳤다.
최씨는 1986년 우연히 민속주가 무형문화재로 등록된다는 것을 신문에서 읽고 밀주신세를 벗어나기 위해 무형문화재 등록을 결심했다.
어려운 살림이지만 찹쌀을 사들여 진양주를 빚고 여러 사람에게 맛을 보여주는 시음회를 여는 등 홍보에 힘썼다. 그 결과 94년 문화재 지정을 받는 데 성공했다.
진양주가 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진양주를 찾는 사람이 줄을 서 기다렸다. 최씨는 정성껏 진양주를 담가 재료값 정도를 받고 공급했다.
그러나 제조허가를 받기 전까지 진양주는 여전히 밀주요, 탈세혐의를 받는 단속대상이었다. 서둘러 제조허가를 내기 위해 관공서를 찾은 최씨는 서울에 사는 누군가가 먼저 진양주를 상표등록한 상태여서 어안이 벙벙하기도 했다.
최씨는 재판을 신청했고 긴 싸움 끝에 승소해 99년에야 제조허가를 받고 자신의 상표로 ‘진양주’ 등록을 마쳤다.
“진양주는 찹쌀로 죽을 쑤어 누룩과 섞어 종자술을 만들고 고두밥을 쪄 종자술과 버무려 2차발효를 시킨 뒤 용수를 박아 완전히 익은 술을 떠내기까지 보름이 걸려 ‘보름술’이라고도 부릅니다. 찹쌀과 누룩만으로 만들어 쌀밥을 먹는 우리나라 사람에겐 가장 잘 어울리는 술이지요.”
최씨의 꿈은 진양주가 전국에 보급돼 많은 사람으로부터 그 진가를 제대로 평가받는 것이다. 다행히 해남군에서 전남대 식품영양학과 정희종 교수 팀에 용역을 주어 오래 보관하는 방법을 연구중이어서 기대를 걸고 있다.
“진양주가 잘 나가면 누군가가 제조비법을 배우겠다고 나서는 이가 있지 않겠어요.”
최씨는 믿음직한 후계자가 나서 진양주 제조비법을 전수받기를 기대하고 있다.
〈해남|정건조기자〉
[전통주 기행]찹쌀 한말로 술 한말 ‘진짜 술’
진양주(眞釀酒·진짜 술 같은 술)가 있다. 찹쌀 한말로 술 한말을 얻는다. 그러니 진짜 술일 수밖에.
진양주는 한반도의 땅끝마을, 전남 해남에 있다. 진양주 같은 우리 민속주는 다양하면서도 맛이 있다. 하지만 우리 민속주는 오랫동안 외국산 수입양주와 적포도주 등에 눌려온 게 사실이다. 그것은 식량이 부족한 탓에 술의 원료가 되는 곡물을 술 제조에 사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개 민속주가 발달한 곳에는 좋은 물이 있다. 술맛은 양조용수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진양주도 예외는 아니다. 진양주는 해남군 계곡면 덕정리에서 빚어져 내려오는데, 덕정리는 마을 이름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흑석산이라는 뒷산을 끼고 있어 물이 좋은 마을로 이곳에 있는 우물이 진양주의 근원이기도 하다.
진양주는 조선 헌종대 퇴출 궁녀인 최상궁에 의해 어주의 궁중양조기술이 전남 영암군 덕진면의 장흥 임씨 문중으로 전수돼 내려온 술로 2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누룩과 찹쌀로만 빚는 순곡주이기 때문에 알코올 도수도 16도로 비교적 순하고 특히 약간 단맛이 있는 데다 입술에 달라붙는 듯한 술맛이 일품인 고급 청주이다.
찹쌀 중의 전분이 분해돼 나오는 포도당이 미처 술로 되지 못하고 남아 있어 단맛을 내기 때문에 여성이나 술에 약한 남성에게 딱 맞는 술이기도 하다. 강한 술보다는 술의 진짜 맛을 음미하면서 즐기려는 애주가에게 잘 맞는 약주라 할 수 있다. 또한 은은한 황색의 술 빛깔에 누구나 끌리고 만다. 색깔 좋고 맛이 순한 진짜 술 같은 술인지라, 아무리 먹어도 취하는 줄 모르고 취한 뒤에도 술잔을 놓기가 아쉽다.
술을 빚는 데 보름 정도 걸리는데 대개 늦가을이나 겨울철에 담그는 술이고 늦은 봄이나 여름철에는 저장성이 약해 담그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은 저온저장시설이 좋아 연중 제조가 가능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