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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도행전 1장 6-8절 기대했던 대로 되지 않았어도, 그래도 구하라
요즘 사람들이 들깨를 심느라고 바쁘십니다. 비가 온 후에 땅이 젖어 있어서 심기가 좋고, 또 이번 주간에 비가 내린다는 일기예보로 인해 부지런히 심고 계십니다. 농사는 때를 놓치면 심는 수고만큼 거둘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같은 양의 씨나 모종을 심고도 그 심는 시기에 따라 어떤 사람은 많이 거두고, 어떤 사람은 생각보다 적게 거두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많이 거두기를 원하는 사람은 때와 시기를 중요시 여겨야하며, 거름을 충분히 주어서 땅을 옥토로 만들어야 합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 사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들을 낳기만 한다고 해서 훌륭하게 자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 아이들에 맞는 교육환경을 제공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무조건 공부하라고 닥달한다고 해서 아이들이 공부를 잘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아는 어떤 목사님 부부는 아이들에게 공부할 환경만 제공하고 공부하라는 말은 한마디도 안했는데 이 아이들이 대학을 다니면서 자기 부모님에게 한 말은 “아빠 엄마 저희에게 공부하라고 한 마디도 안하셔서 감사해요”였다고 합니다. 그들은 목사님 부부가 그런 말을 하지 않아도 자기네가 알아서 책도 보고 공부도 하니까 아이들이 필요하다는 것만 사주고 나머지는 자기들이 알아서 공부를 했는데, 좋은 성적으로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서 좋은 직업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아이들이 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아이들마다 대하는 방식이 달라야 합니다. 요즘에는 아이들이 핸드폰에 매달려 있고 부모들은 나름대로 바빠서 아이들과의 시간을 갖지 못하다보니 핸드폰하는 것을 통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핸드폰을 보는 재미에 빠져서 다른 일들은 일체 하지않고, 또 하기 싫어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심지어 작은 심부름을 시켜도 귀찮아 합니다. 그들의 미래뿐 아니라 그 가정과 대한 민국의 미래가 암담해져가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부모들이 자식을 낳으면 자기 아이들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럽고 예뻐보입니다. 그리고 아이가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보면서 이 아이가 영재나 천재가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자랄수록 평범함이 드러날 때 부모님들은 약간의 실망을 합니다. 하지만 부모님들의 사랑은 변함이 없기에 그들을 사랑으로 양육합니다. 천재가 아녀도 자기 자식이라는 그 한가지로 인해 변함없이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아이들의 입장에서도 마차가지입니다. 갓난 아기 때는 자기의 부모가 뭐든지 다 아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울기만 하면 자기가 무엇을 생각하는 지 알고 다 해줍니다. 유치원 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반항기를 거치고 사춘기를 거치면서 아이들은 부모님이 전지전능하신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부모의 한계점과 단점, 약점이 계속적으로 보이면서 실망합니다. 특히나 반항기나 사춘기에는 그런 실망이 훨씬 더 커집니다. 그렇지만 부모님에게 그것을 설명할 순 없습니다. 설명해도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디.
만일 이렇게 끝난다면 그 가정은 비극일 것입니다. 하지만 자녀들이 알게 되는 것은 그런 불완전함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가족을 위해 사랑으로 희생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존경심이 우러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보면 자녀들은 부모들의 큰 소리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녀들을 큰 소리로 제압하려고 하는 부모들은 자신의 권위를 큰 소리로써 세우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실상 자신이 자녀를 진정한 사랑으로 양육하지 못했다는 것을 스스로 시인하는 것과 같습니다. 진정으로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들은 언제나 오래 참고 온유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이 교회에서뿐만 아니라 가정에서도 적용된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이런 사랑은 하나님을 믿기에 그 기대감을 하나님께 둔 믿음의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확신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여러분이 사랑하는 자녀들이나 성도들에 대하여 역사하시고 바로 세워주실 것을 믿기에 예수님 안에서 받은 사랑을 지속적으로 나누어 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녀를 큰 소리가 아닌 진정한 사랑으로 양육하십시오. 만일 여러분들이 젊은 날에 큰 소리로 자녀들에게 권위를 세우려고 하셨다면 나이들어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에는 자녀들로부터 큰 소리로 야단치는 소리를 들으면서 살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여러분들이 심는 씨앗이 여러분들이 거두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심 은데 팥 나듯이 말입니다. 당연히 심은 것이 납니다. 물론 그 주위에는 잡초들도 많이 나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그 잡초는 여러분들의 원수 마귀가 뿌려놓는 것입니다.
원수마귀는 여러분들의 자녀들과 교회를 제대로 자라지 못하게 하려고 영적인 영양분을 자꾸만 빼앗아갈 잡초씨를 자녀의 마음과 교인들의 마음에 자꾸만 뿌립니다. 영적인 훼방을 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가르침을 받는 제자들에게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마 16:6)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실제로 초대교회는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진리의 말씀과 더불어 유대인들의 율법주의를 함께 받아들여서 영적으로 잘못된 할례당이 생겨서 큰 어려움을 겪었었습니다. 여러분들의 자녀들과 교회가 그런 잘못된 가르침을 이기고 오직 진리만을 받아들여야 하는 데 영적인 잡초가 마음에서 자라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자녀를 키우는데 많은 기도와 심혈을 기울여 진리 안에 살 수 있도록 애를 써야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그들이 영적으로 건강하고, 마음도 건강하여 진정으로 하나님이 이 세상에 보내신 선한 뜻들을 그들을 통해 이루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삼년반 동안 계속해서 가르치시고 훈련시키셨던 제자들 앞에서 예수님께서 하늘로 들림을 받으시기 바로 직전에 제자들과 나누신 대화입니다. 그 대화 속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성령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5절입니다. “요한은 물로 침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이 말씀을 보면 물침례는 침례 요한이 베풀었지만 성령으로 침례를 주는 일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귀를 기울이셨습니다. 그러자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아들이신 에수님께 “내가 몇 날이 못되어 그들에게 성령으로 침례를 줄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말씀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전에 침례 요한은 성령침례에 대하여 이렇게 증거 했었습니다. “나는 물로 침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성령으로 너희에게 침례를 베푸실 것이다. 그에 비하면 나는 그의 신발끈 풀기도 합당치 못할 사람이다”
침례 요한은 예수님이 성령을 베푸실 분이라고 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그 성령을 아버지께서 제자들에게 주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결국 성령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시는 데 누구에게 주시느냐 하면 아들이 원하는 사람들에게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경우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 예수님을 따라 다녔을 때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일하고 계시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가르침이 이 세상 나라와 다른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 나라 가운데 임하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런 기대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셨을 때 와르르 무너졌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 부활하시자 그들은 이제는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실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그 순간에도 제자들은 예수님이 자기들 앞에서 승천하실 것은 몰랐기 때문에 이제는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까 이스라엘 온 땅을 다스리시는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가 이 때냐고 여쭈어보고 있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묻습니다. 6절 말씀을 보면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하고 물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아직도 영원한 천국에 소망을 두기보다는 땅의 나라 이스라엘에 소망을 두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예수님이 기대하셨던 것과는 먼 생각들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힘써야 하는 일이 주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임하는 시기와 때에 대한 것이 아니라 성령을 받고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날도 이 부분에서 많은 사람들이 초점이 빗나가서 예수님이 언제 오시느냐에 관심을 가지고 때와 시기를 알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랬던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7-8절에 나와 있습니다.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람들이 예수님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예수님의 증인이 되기를 구하는 것보다 때와 시기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때와 시기에 집중하면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알게 되니까 자기가 신령하다고 부각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극히 위험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잠가둔 금고를 억지로 열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인이 잠가둔 금고를 억지로 여는 것은 도둑들이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합법적인 방법으로 써서 자기 것으로 만든 일을 맨 처음 한 영적인 존재가 바로 마귀입니다. 마귀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을 속여서 자기의 소유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막지 않으셨던 이유는 마귀에게도 자유를 허락하신 부분이 있고 사람에게도 역시 허락하신 자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자유는 놀라운 축복이지만 그에 따르는 책임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것을 훔친 벌로 영원한 불못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지옥은 마귀를 벌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장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마귀의 말에 속아서 스스로 지옥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말씀을 열쇠로 사용하지 않고 자기의 거짓말을 사용해서 금고를 열었습니다. 그로인해 지옥의 문이 활짝 열렸고 마귀 사탄을 따르는 모든 천사들을 타락시켰고, 또 자기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을 함께 지옥으로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인류는 마귀를 따라 하나님의 기대를 무너뜨리고 스스로 악한 길, 죄의 길로 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구원의 길을 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의 길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열린 이 구원의 길에 서서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의 증인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모두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생명을 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종말의 날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며, 이 지구상에 유일한 구원이심을 알리는 일에 관심을 집중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온 세상에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예수님의 증인이 되기 위해 성령을 충만하게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역시 예수님의 증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성령을 충만히 부어주십니다. 그럴 때 성령을 충만히 받은 사람들이 능력있게 예수님을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거룩한 예수님의 몸다운 교회를 만드시고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일하게 하시기 위해 그들을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일을 맡기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불완전함을 감수하시고 계십니다. 만일 교회가 예수님의 기준치에 미달된다고 내침을 받는다면 이 세상에 존재할 교회는 하나도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긍휼히 여기십니다.
로마서 9장 22-24절을 보면 하나님의 불신자들을 향하신 인내의 관점과 믿는 자들을 행하신 인내의 관점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하나님은 두 가지의 그릇을 준비하셨습니다. 하나는 진노의 그릇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긍휼의 그릇입니다. 하나님께서 진노의 그릇에 대하여 행하시는 방식은 오래 참으시면서 관용하시는 것입니다. 반면에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행하시는 방식은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가끔가다가 방이나 거실에서 옥수수껍질을 깔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세 개의 그릇을 준비합니다. 하나는 따온 옥수수를 담은 그릇입니다. 또 하나는 깐 옥수수껍질을 담을 그릇입니다. 이것은 다 까면 거름으로 쓸 곳에 버립니다. 그것은 모두가 썩히는데 사용하는 것입니다.
나머지 하나의 그릇은 껍질을 벗겨낸 옥수수를 담는 그릇입니다. 여기에 담겨져 있는 옥수수는 물로 깨끗하게 씻어서 솥에 찌면 아주 맛있게 있어서 맛있게 먹을 수가 있게 됩니다. 옥수수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은행이나 밤도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버릴 것을 담는 그릇도 준비하고 사용할 것을 담는 그릇도 준비하듯이 하나님도 이 세상이라는 큰 그릇 안에서 진노의 그릇도 준비하시고, 또 긍휼의 그릇도 준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긍휼의 그릇들이 모이는 찬장과 같은 것이 바로 교회며, 하나님은 그 그릇들을 수시로 사용하십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어떤 긍휼의 그릇은 매일 쓰여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중요한 때 사용하시기 위해 교회를 통해 만들어 나가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 여기서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은 모두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예비된 긍휼의 그릇인 줄로 믿고 계십니까? 아멘
하나님은 교회의 지체인 여러분들에 대하여 긍휼의 인내로 오래 참으시면서 여러분과 교회 공동체를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도록 많은 것들을 공급하시며, 또 연단의 장소로 이끄십니다. 그 여러 가지 과정들을 통하여 여러분들은 영적으로 성장하여 하나님이 쓰실 만한 사람으로 세움을 받습니다.
여러분들이 복된 것은 여러분들 스스로가 그냥 자라도록 방치해 두시는 것이 아니라 목회자들을 세우셔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잘 섬기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목회자들은 교회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받아서 여러분들을 영적으로 잘 자라 하나님의 선한 일을 통하여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시는 일을 위하여 수고하고 섬기도록 세우신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선한 일에 쓰임받기를 원하신다면 목회자를 통해 말씀을 듣고 배워야 하며 이 배움을 갈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여러분의 기대에 못 미치게 자랄지라도 실망하지 말고 그래도 기도하십시오. 여러분들의 보모님들이 여러분들이 기대한 만큼 채우지 못해 주실지라도 실망하지 말고 그래도 기도하십시오. 또한 교회 목회자나 다른 성도들이 여러분들의 기대를 채우지 못하시더라도 실망하지 말고 그래도 기도하십시오.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예수님의 기대에 못미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위해 그래도 기도하셨고 인내하시면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시는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자 그들은 달라졌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권능으로 행하는 예수님의 증인들이 되었습니다. 훌륭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의 예수님에게서 듣고 성령의 가르침을 받아 교회에 가르친 내용들은 바로 교회의 터요 기초가 되었습니다.
에베소서 2장 20절을 보면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에베소서 3장 5절은 사도들이 성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는데 이 가르침은 다른 세대에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리지 않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 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셨으니”
그들은 자신들이 예수님과 성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대로 교회에 온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였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사랑하는 자녀와 부모와 가족들이, 그리고 교회가 여러분의 기대에 미치지 못해도 실망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지금 그들을 키우고 계시는 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키우시고 성령을 충만하게 부어주실 때 그들은 온전하게 되어 하나님 나라 일꾼들로써의 역량을 발휘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