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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열매(5),자비(갈5:22-23,눅10:30-37)
우리가 몇 주에 걸쳐서 성령의 9가지 열매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하나님의 성품으로 우리가 본받아야 할, 아니 우리에게 나타나야 할 하나님의 성품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 안에 성령님이 와 계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우리의 의지적인 선택이 먼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영접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 속에 이미 성령님이 와 계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증거로 바로 우리 안에 하나님의 성품인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열매는 1)사랑, 2)희락, 3)화평, 4)오래참음입니다. 그리고 오늘 다섯번째로 자비의 열매입니다. 특히 자비라는 말의 원어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최선을 다하여 남김없이 친절을 베푸신다’는 뜻입니다.
이와 비슷한 말이 마태복음 5장에 기록되어 있는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산상수훈 중 팔복에 있습니다. 팔복을 말씀하실 때 다섯 번째로 주님은 긍휼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마 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여기서 말하는 긍휼이란 말도 자비, 긍휼, 친절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말하면 자비와 긍휼은 같은 의미입니다. 자비는 긍휼한 마음으로 친절을 베푸는 것입니다.
때로는 그 친절을 깨닫지 못하고 외면할 때도, 때론 그 친절을 거절할 때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참으시고 기다리시고 끝까지 친절을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말합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자비로 대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비록 교만하여 목이 곧고 하나님 앞에 불순종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비로 애굽에서 출애굽할 수 있었고, 또 광야 생활을 통과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가 있었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에게도 자비로 대해 주셨습니다. 비록 우리가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었지만 구원받게 되었고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그 하나님의 자비를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쓰러지고 넘어질 때도 다시 일으켜 세워주시고 죄와 허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덮어주시고 용서해주셨습니다. 이렇게 참아주시고 용납하여 주시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주님께서 누가복음에서 이렇게 명령을 하고 계십니다. 눅 6:36절에서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처럼 우리도 자비를 행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서로에 대해서 또한 이 세상 믿지않는 이웃들에 대해서도 이 자비를 베풀라는 명령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가능합니까? 우리를 비난하고 조롱하고 대적하는 사람들에게까지 친절을 베풀 수 있습니까?
참는 것만 해도 굉장한 자비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적극적으로 자비를 베풀라는 것입니다. ㄱ더기에 십자가의 사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나를 배반하고 도망친 사람을 끝까지 용납할 수 있습니까? 참고 기다리고 끝까지 호의를 베풀 수 있습니까? 한 마디로 우리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이 명령 앞에 설 때 우리는 깊은 절망감에 사로잡힐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주님께서 그렇게 우리를 모르시겠습니까? 우리가 자비를 베풀 수 없는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몰라서 이렇게 명령하셨겠습니까? 분명히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왜 그런 명령을 내리셨습니까?
우리는 그 답을 오늘 본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 자비가 성령의 열매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자비는 내 열매가 아니라 성령의 열매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 힘으로, 내 성품으로, 내 노력으로 이 자비를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오직 성령께서 내 안에서 나를 주장하셔서 내 삶 속에서 맺어주시는 열매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성격이 좋고 마음이 착해도 주님께서 명하시는 자비는 행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속 깊은 곳에 자기 중심적인 자아의 모습이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본성 저 깊은 곳에서 이기심이라는 죄성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나를 주장하셔서 내가 성령의 충만할 때 이 자비를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어떻게 우리 안에서 자비라는 열매를 맺으시는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1. 하나님의 자비를 깨닫게 하십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자비를 행한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실려있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다윗입니다. 사무엘하 9장에 보면 감동적인 이야기 한 토막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정말 긴 세월 사울왕에 의해 쫓겨다녔습니다. 수많은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그러던 중에 사울왕이 전쟁에 나가 죽었습니다. 이제 다윗이 왕이 되어 사울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조인 다윗 왕조를 세웠습니다. 관례대로라면 전 왕가는 남김없이 멸절시켜야 했습니다.
게다가 그렇게도 자기를 괴롭히던 사울 왕의 혈통이기 때문에 남김없이 다 죽여야 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달랐습니다. 사울의 손자요,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를 왕궁으로 불렀습니다. 그를 따뜻하게 대해 주었을 뿐 아니라 그의 기업도 다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게다가 왕실에서 자기의 가족처럼 함께 지낼 수 있는 특권까지 주었습니다.
사무엘하 9:8을 보면 므비보셋이 분에 넘치는 사랑에 감격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가 절하여 이르되 이 종이 무엇이기에 왕께서 죽은 개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하니라” 바로 다윗은 지금 므비보셋에게 하나님의 자비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사람의 자비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를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윗이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사무엘하 9:3에 보면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왕이 이르되 사울의 집에 아직도 남은 사람이 없느냐 내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고자 하노라 하니 시바가 왕께 아뢰되 요나단의 아들 하나가 있는데 다리 저는 자니이다 하니라” 다윗은 자기의 은총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겠다고 말했습니다.
다윗은 돌이켜보면 지금의 자기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으로 이루어진 것을 부인할 수가 없었습니다. 가문이 좋아서 왕이 된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실력이 뛰어나 왕이 된 것도 아닙니다. 도저히 헤어 나올 수 없는 수많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수없이 지나면서도 죽지 않고 살아남아서 여기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자기를 돌아보셨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철저하게 깨달았습니다. 이제 자기가 조그마한 자비를 베푼다고 해도 그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자비 때문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자기가 지금 므비보셋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은 하나님께 받은 그 큰 자비를 나누는 일일뿐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다윗이 이렇게 하나님의 자비를 실천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인간성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그가 성품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그가 하나님의 큰 자비를 체험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가 있었습니다.
다윗은 시 23편에서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내 잔이 넘친다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들, 그들만이 하나님의 자비를 실천할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 성령께서 일하시는 자리가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충만히 역사하시게 되면 먼저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십니다. 내게 부어진 하나님의 자비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인가를 깨닫게 해 주십니다. 그래서 다윗처럼 “내 잔이 넘치나이다!” 고백할 수 있게 해 주십니다.
이 고백 위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를 나타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속에 이미 부어진 하나님의 자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과 자비가 생수의 강처럼 내 속에서 이웃에게 흘러가야 하는 것입니다.
2. 예수님처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31절을 보십시오. 제사장은 강도만난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갑니다. 32절을 보십시오. 레위인도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갑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보고 어떻게 합니까? 피하는 것이 아니라 불쌍히 여깁니다. 세 사람 다 강도만난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종교지도자들인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무관심하고 냉담합니다. 무관심과 냉담은 자비의 반대 개념입니다. 무자비한 태도입니다. 피했다는 것은 의도적으로 도망갔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제사를 집례하는 사람들입니다. 성전 봉사자들입니다. 그 사람을 돕다 피가 묻으면 불결해지고 혹 치료하다가 그가 죽으면 문제는 심각해집니다. 레위기서 22장에 "시체로 부정해진 사람은 해가 질 때까지 성전 안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고 있기때문에 그들은 피해버린 것입니다. 자신들의 본업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이 따로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당시 유대 지도자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마 12:7에서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자비를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탕자의 비유를 통해 하나님의 자비에 대해 구체적으로 소개해 주었습니다. 재산을 탕진하고 방탕한 생활을 한 아들이지만 그의 행위 자체를 따지기 전에 돌아온 탕자를 아들로서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이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마땅히 처벌해야 할 대상을 위해 잔치를 베풀어 줍니다. 마땅히 비난해야 할 대상을 환대합니다. 아버지의 자비는 그 아들이 한 행위에 따라 그 정도와 강도가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야고보서 1장 27절에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자비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자비하신 하나님의 마음, 그 자비를 이 땅에서 분명하게 보여주신 예수님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긍휼의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자비의 열매를 풍성히 맺히기 위해서는 어떤 사람을 볼 때 불쌍히 여기는 마음, 긍휼이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서 당시 유대 종교의 무자비함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강도 만난 사람을 그냥 지나친 레위인과 제사장은 바로 자비를 잃어버린 유대교를 비유적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간음하다 현장에 잡힌 여인을 보십시오. 당시 관습대로 하면 마땅히 돌로 쳐 죽여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돌로 치려고 합니다. 그들은 율법을 빙자하여 무자비하였습니다. 마땅히 죽어야 할 사람 당연히 죽는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공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용서하는 것에 인색했으며, 속량에 대해 말은 많이 했지만 속량의 진정한 의미는 알지 못했습니다.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자기가 당한 손해를 마땅히 복수로 갚아 주어야 하고, 물질적 인격적 손실을 눈은 눈으로 갚아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자비로 그를 용서해 주었습니다.
죽음에서 살아난 경험을 한 이 여인은 어떤 사람이 되었겠습니까? 다른 사람의 아픔과 고통을 자신의 아픔과 고통으로 여기는 감수성을 지닌 여인으로 바뀌었을 것입니다. 자신이 체험한 자비가 상대를 정죄하고 싶은 욕망을 이기게 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 사시는 예수님을 경험한 사람은 예수님 안에서 이미 죽음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마땅히 멸망당해야 하고 마땅히 버림받고 마땅히 돌에 맞아야 할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우리가 거듭날 때 우리 속에 자리 잡았던 이기심과 탐욕들이 사라지게 되고 그 자리에 그가 하늘로부터 가져오신 자비한 마음이 자리 잡게 됩니다.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을 때 비로소 우리는 거듭나게 되고 그리스도의 자비하심이 어떤 것인지를 배우게 됩니다.
약한 자를 불쌍히 여길 줄 아는 마음, 고난당한 자를 돌아볼 수 있는 자비심은 바로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긍휼인 십자가의 은혜를 체험할 때에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단순한 동정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통해 넘쳐 흐는 자비입니다. 그래서 자비의 열매는 성령의 열매인 것입니다. 내가 맺고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내 안에서 행하시는 열매입니다.
내 힘으로, 내 성품으로, 내 노력으로 맺는 행위가 아니라 성령님이 나를 통해 이루시는 열매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내안에 임하여 그 은혜가운데 거하면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생기고 세상을 바라볼 때 긍휼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게 됩니다. 우리가 어떻게 성령의 열매인 자비의 열매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내가 먼저 하나님의 자비를 힘입어 구원받았고, 하나님의 자비 때문에 오늘도 살아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면 긍휼의 마음이 생기고 그 긍휼의 눈으로 바라보면 자비의 꽃이 피고 열매를 맺히게 됩니다. 멸할 사람 멸하지 않고 버릴 사람 버리지 않고 언약을 신실하게 지켜가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하면 성령이 마음을 장악하여 긍휼이 여길 수 밖에 없는 사람이 됩니다. 성령의 사람들은 의무 방어전만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상대방의 허물을 들추어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연약한 부분을 소문내고 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3. 예수님처럼 자비를 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율법사에게 비유를 말씀하신 후 무엇을 요구합니까? 37절을 보십시오. “너도 이와 같이 하라”라고 말씀합니다. 말씀은 이론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자비를 베푸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말씀을 듣고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이론에 메여있습니다. 신앙은 실제인데 실제 삶에 적용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성령님께 순종할 때 열리는 열매입니다. 아무리 좋은 씨앗일지라도 길가나 자갈밭이나 가시떨기에 떨어지면 잘 자라지 못합니다. 우리의 마음밭이 순종의 밭이 되어야 합니다. 아멘의 밭이 되어야 합니다. 순종하지 못할 상황이 올 때 십자가를 바라보며 순종하는 것입니다. 무자비한 행동을 하고 싶을 때 타인과 자신을 동일화하며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 내 이웃이 아니라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로 강도 만난 자의 입장으로 입장을 바꾸어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 편에서 볼 때 의도적인 결단으로 나타납니다. 우리가 자비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자비로운 사람이 되려고 의도적으로 결단해야 합니다. 무자비한 것은 죄입니다. 우리가 거듭난 것은 자비로운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롭게 지음받았다는 말입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본질은 자비이며, 그 자비를 행하는 것입니다. 자비가 바로 성도의 생명입니다.
예수님이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행하라고 하는데 선한 사마리아인이 어떻게 행합니까? 그는 강도만난 사람을 보고 외면하지 않는 것입니다.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다가가는 것입니다. 상처를 후벼 파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싸매주는 것입니다. 홀로 걸을 수 없는 사람에게 걸어가라고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짐승에 태워주는 것입니다. 또 필요한 치료비를 주고 모자라는 돈은 나중에 다시와서 지불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약점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희생시켜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는 것입니다. 단순한 감정적 동정이 아닙니다. 실제가 따르는 희생이 있는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생각에서만 머문 것이 아니라 불쌍히 여기는 눈으로, 불쌍히 여기는 발로, 불쌍히 여기는 손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율법사처럼 이론의 방에 자비를 가두어 놓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고 내 유익만을 찾아가는 세속적인 인간이 아니라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비의 도구가 되어 하나님의 손 역할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우리에게 자비의 모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수많은 인생의 강도를 만난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기까지 자비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자비, 긍휼, 친절, 바로 성령의 다섯번 째 열매입니다. 우리는 자비를 베풀 수 있는 사람이고 또 자비를 베풀어야 할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먼저 더 큰 자비를 베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자비를 베풀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이 자비를 입은 사람임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종인데도 백 달란트 빚진 자를 감옥에 가두는 무자비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이 자비는 내 힘이 아닙니다.
내 안에 모신 예수님의 마음이요,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충만하여 이 자비를 베푸는 성도가 되셔서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자비를 베풀어 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진정한 증인들의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