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순 시인의 시집 『먹물도 분홍』
약력
시인 김광순 金光順
1960년 충남 논산 출생.
한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1988년 충청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조문학》추천완료,
시집 『물총새의 달』, 『새는 마흔쯤에 자유롭다』,
『고래가 사는 우체통』, 『달빛 마디를 풀다』,
『녹두빛 저녁』
<한국문화예술진흥기금>, <세종문학나눔 우수도서>
선정, 한국시조작품상, 대전문학상, 한남문인대상,
충남시인협회작품상 등 다수
현재 한국시조시인협회 대전지회장.
email : ks88k@hanmail. net
시인의 말
시조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28세 등단,
35년 본토박이가 되어 참 멀리도 왔다.
여섯 번째 시조집을 향하여 겹겹이 지나왔던,
은유적 시학을 앞세운 견지에서
『먹물도 분홍』 매화를 낳기까지,
동굴벽화를 빠져나온 새가 되어
일탈을 막아주는 당신에게로 가고 싶다.
2023년 겨울
김광순
홍매화 시편
-묵언
이른 봄 흰 것들은 몇 걸음 앞서 온다
마디마디 깊은 잠 바람에 날아가서
마침내 천년고찰이 홍매화를 피운다
누군가 불러내어 나에게 묻는다면
처마 끝 풍경소리 계룡산도 친구처럼
살며시 다가오는가, 저 분홍빛 묵언으로
하얀 독법
사나흘 쏟아 붓던 늦장마 물러가고
애당초 곧게 뻗던 초막 아래 죽비소리
백지에 숨어서 울던 어린 날이 숨어있다
가을 악사
어린사 漁麟寺 소나무가 호수를 안고 섰다
바람결 득음하여 목 축이는 음표 하나
바위는 서쪽 하늘로 옥피리를 보냈다
재두루미 날아간 출렁다리에 나도 섰다
아스라한 강변연가 다시금 내려와서
그림자 호수에 비친 가을 악사 있었다
먹물도 분홍
홍매화 하늘자락 대전 쪽으로 뻗어서
젖은 눈 갈피마다 친가에 머물었을
사모곡 붓 한 자루가 마당귀에 서 있네
달빛 들어 다문다문 꽃가지 내려왔을
지붕 위 두고 떠난 고요가 앞서왔을
산모롱 돌고 돌아온 기름등잔 고왔을
그즈음 만난 새는 부리를 오므리고
저만치서 걸어와 밤마다 그려냈을
먹물도 분홍 먹물이 누마루에 어렸네
우금치를 찾아서
외딴집 밤새도록 호얏불에 고요하던
듣기만 하던 새가 지그시 밟아가던
전봉준 녹두 봉우리 긴 터널이 열린다
우금치 죽지뼈에 위령비가 나오던
금강가에 흰여울 바람만 처연하던
소걸음 더딘 발등에 산나리꽃 얹는다
해설
형식과 내용의 아름다운 조화
- 김광순 시조학의 가능성
송기한(문학평론가. 대전대 국문과 교수)
김광순은 시조시인이다. 시조란 어찌 보면 시대와의 정합성 때문에 계속 그 논의가 이어져 왔다. 시조의 현대적 가능성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있어 온 사실은 잘 알려진 일이거니와 그러한 까닭에 시조는 여전히 새로운 시대에 대한 정착을 모색하고 있다. 이처럼 현실 적응 여부의 무대 위에 올려져 있는 시조 양식에 대해 발을 들여놓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김광순은 시인이 되고 난 이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줄기차게 이 양식에 매달리고 있는데, 이 또한 예외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현상은 이 장르에 대한 애정과 그것의 현대적 가능성에 대해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김광순의 시조들은 맑고 깨끗하고 정돈되어 있다. 어디 하나 군더더기 없이 선명한 무채색을 띠고 있다. 시인은 형식에 대한 거침없는 도전을 하고 거기서 기왕의 시조에서는 볼 수 없는 자아의 자유로운 유영을 시도하고 있다. 자아는 형식의 그러한 자유로움 속에서 자신 속에 숨겨져 있던 다양한 면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이 김광순 시조학이 갖는 새로운 단면일 것이다. 이는 다른 말로 하면, 시인이 시도하는 새로운 형식과 내용의 조화로운 결합이라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격정적인 인생의 여행 속에서 이제 거울 앞에 선 사람처럼 성찰과 내성의 감각 또한 갖고 있는데, 거기에는 조화와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전통적인 시조 형식이 차용된
다. 이렇듯 형식의 파괴와 그에 걸맞은 새로운 서정들이 갖춰진다. 그런 다음 이 이질적 마주함이 정형미학의 필연적 조화를 이루는 것. 그것이 김광순 시조학이 갖는 특징적 단면이다. 이런 단면들이야말로 가람이나 백수 등의 시조학들과 구분된다는 점에서 그 시사적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