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지지 않는 사건들 /
어느 때인가 기숙사의 쌀을 모조리 도적맞은 사건이 일어났다.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니 쌀을 도둑맞아 밥을 지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쌀 도둑은 피아노를 잘 쳐서 어느 예술대학에 진학한 통학생 선배였다.
그날 밤 그는 기숙사에서 취사계였던 동급생의 방에서 자다가 쌀창고 열쇠를 가져다가
손수레로 쌀을 훔쳐갔다는 것이다.
그 이유인즉 예술대에 들어갔지만 학비 곤란을 받아 잠시 판단력이 흐려졌다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소사실에서 살던 선생님 댁의 김치 서리를 한 일이 있었다.
밤에 공부하다가 배가 출출해져서 김치 서리를 하기로 합의하고 양동이를 가지고
선생님 댁 김치 독에서 김치를 꺼내왔다.
그런데 우거지만 잔뜩 꺼내왔기 때문에 먹지 못하고 버린 적이 있었다.
기숙사에서는 가을에 한 번씩 학예회(신파)를 하였다. 각 방마다 연극, 노래, 만담 등을 꾸며서 연출하였다.
학예회 날에는 여자 사생까지 합해서 기숙사 전체가 축제 분위기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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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주사범 기숙사의 일요일 식사시간 / 좌로부터 주영기, 김해진, 공창식, 나, 윤희옥, 엄익록, 박종민, 한경춘, 이기찬 |
기숙사의 수난 /
기숙사는 46년~47년에 좌익학생들에게 짓밟혔고, 47년~49년에는 우익학생들에게 짓밟히는 수난을 당하였다. 46년 가을에는 기숙사가 전주 시내 중등학교 동맹휴학의 총지휘 본부라는 말을 들었다. 그것은 좌익학생들이 주동하는 것이었다. 경찰에서 지휘 본부를 습격 온다는 소문에 보초를 서기도 하였다. 우리들 하급생은 선배들이 시키는 대로 고향에 가지도 못하고 보초를 서야 했다.
학생회 선배들은 기숙사생이 아니면서 기숙사 쌀로 밥을 지어먹고, 신을 신은 채 다다미방에 들어오며, 함부로 책상을 부숴서 난로에 불을 피우기 일쑤였다. 또 지휘본부에서 자기들 말을 듣지 않는 반대파 학생을 구타하는 일도 있었다. 나는 하급생이며 몸집이 작고 힘이 약해서 크게 문제가 안 되었지만 기숙사가 짓밟히는 데는 부아가 치밀었다. 47년 가을(1학기)부터는 학교에서 우익학생들이 우세하여 통학생인 그들은 기숙사에 무상출입하였고, 기숙사생을 멸시하는 경향이 있어 아니꼬왔다.
특히 비워두었던 남료(이때는 북료만 이용하였다)를 학연 계통의 동지회가 사무실로 이용하여 자기들에게 거슬리는 학생을 데려다가 때려주기도 하였다. 신음소리, 울부짖는 소리가 밖에까지 새어나와 가슴을 서늘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 무렵에 권투부 학생들이 남료 1층에 학교의 허가도 없이 시합하는 링을 만들었다. 방벽에 구멍을 뚫고 그라이더의 고무줄을 끊어다가 링을 늘이고 권투연습을 하는 것이었다. 시끄럽기도 하거니와 기숙사의 질서가 엉망이었다.
애사심(愛舍心)이 강한 우리에게는 분하기 짝이 없는처사였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이래저래 힘 없는 기숙사는 수난을 당하였다.
퇴사 명령 /
48년 3월부터 최고 학년에 오른 심종학 형이 청소부장을 맡아 질서를 잡기 시작했고, 다시 그는 자치회장인 사장(舍長)에 당선되어 규율을 쇄신하였다. 형은 식사도 개선하였다. 식비는 종전대로 내면서 이틀만에 한 번씩 고깃국을 먹도록 취사운영을 개선한 것이다. 사회나 학교의 무질서와는 대조적으로 기숙사는 질서가 잡히고 운영이 정상화되었다. 이러한 생활이 약 3개월 가량 계속되었다.
나는 심 형과 친했고 그가 하는 일에 적극 협조하는 학생이었다. 이 무렵의 어느 날 저녁에 오 사감장 댁으로 심형과 내가 초대되었다. 댁에는 오 선생님만 계셨는데 과자 등 푸짐하게 대접을 받고, 아무런 말씀 없이 하직하고 나왔다. 나는 왜 초청되었는지를 알지 못했는데 그 후의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취사 운영에 학생들의 간섭을 배제하는 회유책에 말려든 것 같았다. 그런데 48년 9월 1일(사범과 2학년)에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기숙사에 가보니 날벼락이 떨어졌다. 9월 6일까지 퇴사하라는 명령이었다. 심 형을 포함해서 상급 학생 24명에게 내린 퇴사 명령이었다. 퇴사하지 않으면 명령 불복종으로 퇴학시킨다는 위협도 따랐다. 심 형은 백방으로 사감 선생님들을 찾아다니며 퇴사 철회를 탄원한 것 같은데 효과가 없었다. 나의 경우 기숙사에 들지 않으면 학교를 다니지 말라는 말과 같았다.
퇴사의 죄목은 2학기 말에 있었던 3학년 선배들의 졸업생 송별회 때 술을 마시고 난동을 부렸다는 것이었다. 오 사감은 사생에게 송별회 때 쓰도록 술과 안주 값을 주셨으니 교육자로서는 옳지 못한 처사를 한 것이다. 퇴사 명령을 받은 24 명 중에는 나처럼 술을 안 마시는 학생이 네댓 명 끼어 있었고, 송별회에 참석하지 않은 사생도 끼어 있었다.
그 송별회를 하던 중에 학연 계통의 동지회 회원들도 함께 술을 마시고 뛰며 놀았다. 그런데도 그들에 대한 처벌은 없었다. 어떤 잣대에 맞추어 퇴사생을 정했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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