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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 좋은 사람으로 살기(요13장34-35)
성경본문:요한복음13:34-35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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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 .
지난주에는 “좋은 그리스도인” 된다는 것이, 기쁨이 충만한 삶, 그래서 보기만 해도 기분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말씀 드렸죠?
오늘은 그 후속편으로 기쁨을 주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좋은 관계”를 맺는 사람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참 좋은 관계를 맺기 어려운 순간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표현하고, 어떻게 생각하느냐의 문제가 아닐까요?
제가 하는 이야기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어느 나라에서는 면도는 2,000원, 이발은 5,000원이라는군요. 돈이 없는 나그네가 경제적으로 이발한 것이 머리를 면도해달라는 거였다나!
표현에 따라 재미있게 어려움을 넘어갈 수도 있지요?
"관계"라는 말 자체가 상대방이 없이는 성립이 되지 않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관계는 서로에게 서로가 누구인지를 말해주는 거울과 같습니다. 즉, 나의 모습이 상대방을 통해 드러나는 것입니다.
좋은 그리스도인 되어 살아간다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좋은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성경은 좋은 관계의 원칙을 이야기합니다."서로 사랑하라!"
서로 사랑함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인 것을 세상이 알게 됩니다.
얼마 전 김동호 목사님과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있었습니다. 김 목사님은 특히 북한을 향한 특별한 마음을 두고 계시지요. 그래서 탈북자들을 위한 공장도 만들고 북한에 여러가지 물품을 보내기도 합니다. 그분이 그 사역을 하게 된 이유는 통일 한국을 바라보며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동안교회에서 목회하던 시절 교회 건축을 준비하고 있을 때, 북한에 식량난이 터졌습니다. 그때 북한 사람이 통일이 되고 나서 자신들이 그렇게 어려울 때 한국 교회가 건축하는데 그렇게 많은 돈을 쓰면서 자신을 돕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듣는다면 교회를 찾아가겠느냐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건축을 포기하고 그 돈으로 북한을 돕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통일 한국을 바라보면 북한에 교회를 세울 것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통일이 된 후 북녘 동포들이 교회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훨씬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북한을 사랑한다는 것은 절대로 상식적인 사고로는 불가능합니다. 단지 말씀에 의지할 때 가능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이 말씀은 상황을 올바로 알지 못하면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오늘 본문은 요한복음 13장 21절 이하에 나와 있는 사건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나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12명의 제자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그리고 그 중의 하나가 예수님을 배신하고 팔리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26절)라고 하셨고,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행하라"(27절) 하심으로 모든 것을 드러내셨습니다. 그 상황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께서 가롯 유다의 발을 씻기셨고, 그에게 떡을 떼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을 이해해야 합니다."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상식적으로는 절대로 사랑받을 수 없었던 가롯 유다까지 사랑하셨던 그 사랑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돈 궤를 맡았던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하고, 권력 지향적이던 제자들이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을 떠나갔지만,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런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셨던 것 말입니다.
좋은 관계를 낳는 기적이 때로는 참 일방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상대는 있지만, 사랑을 베푸는 쪽이 일방적일 때가 있습니다. 관계적인 조건을 달고 살아가면서 정말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이 가능할까요? 그런데 쌍방의 관계 속에서 일방적인 사랑이 기적을 낳는 것을 봅니다.
2010년 3월 신문에 흥미로운 기사가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노동자를 위한 목회를 하던 김해성 목사님을 통해 스리랑카 대통령이 코끼리를 암수 한 쌍을 선물한 것입니다. 당시 한국은 코끼리 확보에 비상이 걸려 있는 상태였습니다. 이미 동물원에 있는 코끼리가 노쇠해서 얼마 지나지 않으면 다 없어질 형편에 처한 것이죠.
어떻게 목사님이 한 나라의 대통령으로부터 그런 선물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올해로 28년째 외국인 노동자 선교 사역을 해온 김해성 목사는 사역 초기 경기도 광주 한 도로를 지나던 중 버스 정류장에서 처량하게 서 있는 두 명의 외국인을 발견했답니다.
그는 가던 차를 멈추고 그들에게 다가가 어디서 왔는지 무엇을 하는지 물었습니다.
직장도 없고 갈 곳도 없던 스리랑카인 두 명에게 일자리를 구해주고 거처도 마련해 줬습니다.
이후 이들은 스리랑카 친구들을 계속 데려와 김 목사에게 소개했고, 함께 예배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이들 가운데 한 명이 ‘아버지가 국회의원’이라고 소개하며 한국에 왔을 때 안내를 해 줄 수 있느냐고 부탁을 했고, 김 목사는 흔쾌히 수락을 합니다. 이후 김 목사는 스리랑카를 오가며 국회의원과 친분을 쌓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바로 스리랑카의 현 대통령인 마힌다 라자팍세입니다. 그는 야당 국회의원 시절 한국을 방문했고, 노동부 장관과 총리를 거쳐 2005년에 대통령에 당선된 것입니다.
이후 26년 내전을 종식하고 2010년 재선에 성공한 것입니다.
그가 김 목사를 스리랑카에 초청했고, 스리랑카에서 선교를 전폭 지원하기로 약속을 합니다. 그리고 코끼리를 선물로 받게 되었을 때 당황스러워 거절을 했답니다. 가져갈 방법도 키울 곳도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때 마침 코끼리를 구하려던 서울시의 도움으로 3억을 들여 공수해 왔고 동물원에 기증하게 되었습니다.
길 가다 만난 처량한 노동자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도와줬던 것이 이런 놀라운 일을 만들어 내게 된 것이죠.
이 기사가 나가고 나서 생긴 일입니다. 모 기업에서 스리랑카에 진출하기 위해 방법을 모색하던 중 10억 정도의 수수료를 주고 계약을 체결하려다 이 기사를 보고 김 목사에게 그곳 상황을 알아보게 되었고, 그 사람이 사기꾼으로 판명되게 된 것입니다. 그 기업은 사기를 당하지 않고 스리랑카에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좋은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정직함?
많은 사람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좌우명을 "정직"이라고 정하기도 합니다. 역시 정직이라는 말 자체가 관계성에서 나오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우리의 정직함 때문에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하거나 다치게 한 경험은 없으신가요?
사실 우리가 얼마나 정직하게 살아가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정직할 것이냐도 무척 중요합니다.
내가 정직하게 말한 것 때문에 누군가 피해를 보기도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정직했어!"라고 말하지만, 내가 인내하지 못하거나 내 속에 있는 분노가 정직이라는 이름으로 표출될 때가 많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직하다!"라는 것보다 "어떻게 정직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올바른 관계를 만들 것입니다.
잠언 16장 32절의 말씀입니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지혜서 기자는 이야기합니다. 자신의 감정에 정직한 것보다는 자신의 감정을 이기는 것이 낫다고 말입니다.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지금 정직하다는 것이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고 나오는 신앙적 결단, 신앙적 행동인가?"입니다.
이 물음을 물을 수 있을 때 우리는 신앙의 사람, 성령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정직하게 이야기해서, 우리가 분노하는 것은 우리의 관심과 사랑이 무엇인지를 말해줍니다. 우리와 이해관계가 없고, 우리가 사랑하지 않는 것들에 대하여 '분노'라는 감정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분노하지 않고 살 수 있는 특별한 존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노를 다스리며 살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고는 말합니다. 분노하더라도 '인내'를 통해 분노가 표출되는 것을 막고, 최소화할 수 있습니다. 즉, 분노를 인내로 다듬는 것이 좋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흔히 "영적인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기도합니다. 하지만 분노는 영적인 상대보다는 가장 가까운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라는 말씀이 사실은 우리와 관계없는 사람들에 대한 것이 아니라 우리와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 대한 말씀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시나요?
좋은 관계의 증명은 우리와 관계없는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주신 사람들에 대한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당신의 가정을 보고, 그 가정이 하나님의 가정인지가 드러나게 될 것이고, 우리 교회를 보고, 하나님의 교회인지를 보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는 세계적인 크리스천들을 보면서 이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우리가 꼭 물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나로 말미암아 상대방이 어떤 영향을 받는가?"라는 것입니다.
좋은 그리스도인은 내가 하는 행동 때문에 일어나는 일의 결과에 대하여 책임이 있음을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누가복음 17장 1-2절에 무서운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우리가 흔히 그런 말을 하지 않습니까?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가 죽을 수도 있다고.
우리가 완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완전을 향해 나아가려고 노력할 수는 있습니다. 우리가 판단하는 누군가가 상처를 입을 수 있다는 것, 그것 때문에 실족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알 수 없습니다.
관계의 회복
회복되지 못하는 많은 관계는 '무관심'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서로 사랑하라!'라는 능동적 사랑의 명령이라면 '무관심'은 수동적 태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그렇게까지 사랑을 표현하셨어야 했나요?
꼭 발까지 씻겨주시면서, 마지막 만찬에 함께 하셨어야 했나요?
이미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셨는데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니 사랑은 "끝까지 사랑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섭섭한 마음과 상한 마음을 해결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무관심'으로 일관하며 관계를 개선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랑하고 살아가려는 의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깨어진 관계는 수동적이지만 우리의 삶에서 적극적인 선택의 결과입니다.
저에게 있어서도 깨어진 관계들이 있습니다. 저에게 관계를 깨려는 의지는 전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관계를 만들어 가려는 소극적 모습이 있었습니다. 어쩌면 '무관심'이라는 적극적 선택이 만들어낸 결과물일 뿐입니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귀찮니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게으름'과는 다른 것입니다. 무엇에 대한 게으름, 무엇에 대한 부지런함.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적극적인 선택의 결과라는 것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모든 관계는 우리의 선택의 결과일 뿐입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명령합니다."서로 사랑하라!"
중요한 것은 "서로" 범주 안에 드는 사람이 누구인가? 라는 질문입니다.
저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런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영향을 줄 수 있는 모든 사람이 "서로"입니다.
이러한 묵상이 저를 무척 당황하게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이 서로의 범주에 내가 성실하기는 무척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모든 관계의 완벽함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니,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지금 맺는 관계 때문에 일어나는 일로 괴롭고, 아파하고, 힘들어하고, 개선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모든 관계의 회복은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회복된 경험이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관계를 맺게 합니다.
나를 잘 아시는 하나님 앞에 우리가 정직해야 합니다. 성경은 이러한 관계의 회복을 "온유함"을 통해 가능한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실까요? 온유함은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당연한 결과물입니다.
누군가 '온유'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온유란 하나님께서 직접 처리하실 때까지 기다리는 것 그리고 처리하시는 순간에는 말리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모세를 온유한 사람이라고 표현하셨을 때는 바로 이런 모습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신명기 9장 25-29절의 말씀을 보세요.
"그때에 여호와께서 너희를 멸하겠다 하셨으므로 내가 여전히 사십 주 사십 야를 여호와 앞에 엎드리고 여호와께 간구하여 이르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큰 위엄으로 속량하시고 강한 손으로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 곧 주의 기업을 멸하지 마옵소서.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생각하사 이 백성의 완악함과 악과 죄를 보지 마옵소서.
주께서 우리를 인도하여 내신 그 땅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허락하신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일 만한 능력도 없고 그들을 미워하기도 하사 광야에서 죽이려고 인도하여 내셨다 할까 두려워하나이다.그들은 주의 큰 능력과 펴신 팔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 곧 주의 기업이로소이다 하였노라."
지난봄 사순절을 지나며 십자가 위에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나누었던 것을 기억하시나요?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하신 말씀이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라는 기도였습니다.
우리가 그런 예수님을 닮아가려고 노력하면 닮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변하면 세상도 나를 따라 변화될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나비효과"라고 말합니다.
"관계"란 바로 이러한 선한 영향력이 아닐까요?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 나에게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선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 말입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사랑하라!"가 어떤 사랑인가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쉽게 우리의 자녀를 생각해 볼까요? 우리 눈에 보이는 자녀를 보면서 사랑하는데도 참기 어려운 적이 참 많습니다. 하지만 그 아이 등 뒤에 있는 가능성이 보여야 합니다.
"기다림" 그렇습니다. 가능성을 보는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관계에서 이 말이 적용됩니다. 하나님께서 손대시고, 하나님께서 하시면 이루어질 일에 대한 가능성 때문에 기다리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그렇게 기다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정말 좋은 사람은 탁월하게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끝까지 기다려주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정말 이게 힘든 일입니다. 가르치기는 쉬워도 기다려주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행동하는 것만큼이 아는 것이고 기다려주는 것만큼이 가르친 것이기 때문입니다."그런데 하나님께서 나에게 맺으신 관계가 바로 "기다림"이었습니다.
조금 길지만. [빛과 먹선 이야기]에 나오는 저자의 이야기를 읽어드리면 좋을 듯합니다.
며칠 전 모임 약속이 있어 아침 일찍 나와 뻐스를 탔습니다.
간만의 아침 뻐스라 졸린 눈을 비비며 잠을 깨고 있었는데 몇 정거장 지나갈 무렵 모르는 번호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전화를 거신 분은 같은 아파트의 주민 아주머니셨는데 빨리 차를 빼라고 수화기에 대고 소리를 치시는 것이었습니다.
전날 밤, 주차장에 자리가 없어서 어느 차 앞에 가로로 주차를 해놓았는데 실수로 그만 사이드 브레이크를 걸어놓고 나오는 바람에 이미 주차되어 있던 아주머니께서 차를 빼지 못하고 계신 것이었지요.
전화를 받자마자 중간에 버스에서 내려 택시로 갈아타고 아파트 지하주차장으로 달려왔습니다.
최대한 빨리 온다고 왔는데 지하주차장에서 저를 기다리시던 아주머니는 "당신 때문에 약속에 늦었다!"라며 '왜 차를 하필 내 차 앞에다가 주차했느냐?'라고 화를 내셨고 저는 연거푸 죄송하다고 사죄하며 차를 빼 드렸습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나신 아주머니는 퉁명스럽게 차를 몰고는 제 앞에서 그렇게 사라지셨지요.
'내가 잘못한 것은 맞지만, 그 정도까지 화를 내셨어야 했을까?'
'왜 대한민국 아줌마들은 이렇게 성질이 사나울까?'
'그래도 나는 할 만큼 했다. 택시 타고 돌아왔고 욕도 먹었고 내가 이 실수로 치러야 할 대가는 다 치른 거지 뭐.'
분명히 내가 잘못한 것은 맞았지만, 지나치게 화를 내시는 아주머니의 태도에 불쾌감을 느끼며 그렇게 씁쓸한 오전을 보냈습니다.
늦은 오후 불쾌감이 다 사라질 때 즈음, 하나님께서는 제가 다하지 않은 부분을 뒤늦게 깨닫게 해주셨는데 그것은 이 일을 마무리하면서 단순히 실수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나 때문에 생긴 아주머니 마음속의 화까지도 풀어 드려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할 만큼 다했다고 생각했지만, 이 깨달음 앞에서 더 앞으로 나아가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외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참을 고민하다가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수신된 번호를 찾아내 문자를 보냈지요.
얼굴도 잘 알지 못하는 주민 아주머니께 나의 실수를 인정하며 다시 한 번 용서를 구하고, 이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더한 장문의 문자를 말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답문이 왔는데, 지나치게 화를 내었던 것과 함부로 말했던 것을 본인도 인정하시며 오히려 저에게 사과를 하시는 내용의 답문이었습니다.
정말 이분이 아침에 내게 화를 내시던 그분이 맞는가 싶을 만큼 전혀 다를 모습이었습니다.
그 답문을 읽다 보니 그분의 화를 풀어 드리려 했던 원래 의도와는 다르게 나의 심령이 회복되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회복해주었고 좋은 하루를 보내라는 응원까지 주고받으며 기쁘게 대화를 마무리했습니다. 씁쓸했던 오전에 비해 오후는 아주 개운하고 따뜻한 시간이었지요.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주고 한쪽 뺨을 맞으면 다른 쪽 뺨을 돌려대라!'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저에게 언제나 120%를 요구하십니다.
남들만큼 지키고 남들만큼만 실천하면 그것이 무슨 사역자냐며 남들이 100% 한다고 너도 100% 한다면 그게 무슨 그리스도인이냐며 도전을 주십니다.
'왜 나는 남들처럼 살면 안 되느냐?'라고 물으면 '그리스도인이면 그리스도인답게 명확히 예수님의 법칙에 따르라!'라고 요구하십니다.
그리스도인임에도, 보통 사람처럼 살면 세상은 너를 통해 감동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100%만 해도 되지만 120%를 하는 사람,오리를 가자고 하는데 십 리를 가주는 사람,한쪽 뺨을 때리면 다른 쪽 뺨까지 내어주는 사람,할 수 있는 수준만큼이 아니라 그 이상을 하는 사람.
그런 사람을 통해 세상은 감동할 것이고 결국 예수님에게 감동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한참을 그렇게 옥신각신하고 나면 저는 결국 예수님께 굴복합니다.
그리고 기도합니다. 120%를 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세상은 갖가지 말로 비꼬며 교회를 조롱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이미지가 실추된 이 시기에 120%를 다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우리를 통해 더 이상 그리스도의 감동을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결코 수월한 일이라고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나와 당신이 120%를 해낼 수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늘 옳고 그름을 따지기를 좋아합니다.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할 때까지, 아니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인정할 때까지 싸우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런 상상을 해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결백을 주장하셨더라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옳음을 증명하기보다는 죄인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의'가 아니라 '사랑'입니다.
세상도 의를 주장합니다. 옳고 그름을 따지려 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려고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가장 강력한 무기, 좋은 관계를 회복하는 길은 '의'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싫어하고 비난하는 사람을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그 사람이 정말 나쁜 사람인가요? 그 사람도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아들이자 딸이고, 아버지이자 어머니가 아닌가요? 그리고 누군가에게 좋은 친구가 아닌가요?
단지 나와 다르다는 것, 내가 인정하지 못한다는 것 때문에, 나의 주관적인 기준 때문에 적이 되어 버린 그런 사람이 아닌지 말입니다.
내가 그렇게 비난 하는 그 사람 역시 충분히 사랑받기에 합당한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 아니, 그것은 나의 인정이 아니라 '사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35절을 깊이 묵상해 보세요.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즘 점점 그런 생각이 많이 듭니다.
"신앙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그리고 지극히 개인적이 차원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신앙을 사람들 앞에서 드러내려고 하면 과장되고 위선적이 되기 싶다. 그럼에도, 신앙이 드러나는 것은 늘 사람들과의 관계에서이다."
그러므로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신앙은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나타나는 것이다!"
그저 신앙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통해 그가 누구인지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지금 누군가와 좋은 관계를 맺는 나를 봅니다. 객관적으로, 인격적으로, 상황적으로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없는 사람인데, 신앙적 결단이 그 관계를 가능하게 합니다.
이것을 보는 누군가가 바로 당신을 주님의 제자로 인정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