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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일 아이들먼 목사님이 쓴 『팬인가? 제자인가?』라는 책이 있습니다. 제목만 봐도 무슨 내용일지 느낌이 오지 않으십니까? 누군가를 열정적으로 좋아하며 좋아하는 것이 뭔지 어떻게 살아가는 지 관심을 두는 사람을 ‘팬’이라고 합니다. 축구팬, 야구팬, 유명 배우, 아이돌을 쫓아다니는 팬,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들의 일상생활까지 쫓아다니는 스토커같은 사생팬 등등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열렬한 팬이라고 해도 한계가 있습니다. 운동경기 팬들은 정말 좋아하는 축구, 정말 좋아하는 축구선수가 그 곳에 있지만 오로지 관람석에 앉아서 팀을 응원합니다. 그들은 축구경기를 정말 좋아하지만 경기에는 나설 수 없습니다. 고함을 지르며 응원은 하지만 경기장 안에서 몸으로 부딪치는 희생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팬은 어디까지나 팬일 뿐입니다. 그런데 제자는 어떨까요? 과연 제자란 어떤 삶을 살까요? 예수전도단이라는 선교단체의 선교사인 플로이드 맥클랑이라는 분은 『제자도의 본질』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에서 맥클랑 선교사는 우리가 왜 이렇게 살지 못하는가? 맥클랑은 신앙생활을 두 가지로 분류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되는 신앙’ ‘예수님의 제자되는 신앙’으로 구분합니다. 맥클랑은 그 책에서 “오늘날의 크리스천들은 대부분 하나님의 ‘자녀 됨’은 좋아하는데 예수님의 ‘제자 됨’은 잘되지 않는다”고 지적합니다. 하나님의 자녀 됨에는 사랑과 축복과 용서와 위로가 있습니다. 대부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하늘의 선물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 하나님의 자녀 됨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된 현세의 복, 땅의 복들을 나열합니다. 그래서 너도나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에는 자원하고 기뻐하고 그분으로 오는 축복을 얻기 위해서는 더 많은 것들을 바칩니다. 반면, 예수님의 제자 됨에는 자기부정과 희생과 대가를 치르라는 요구가 따라옵니다. 제자는 반드시 스승이 있고 그 스승의 가르침대로 훈련받고 그 스승의 삶을 따라 살아갑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리스도인이라는 형식적인 자격을 뛰어넘어 예수님의 제자로서 살아가는 것이 참 신앙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임재가운데 놀라운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기를 소망할 때 우리에게 우리의 참 인생 기준을 주시는 예수님을 발견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면 우리는 나의 위치와 나의 존재가치, 나의 삶 속의 사명을 망각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우리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깨닫고 정말 예수님께서 인정하시는 거룩한 백성이며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예수님을 따르려 할 때 첫째, 주님을 따르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마태복음 8장 19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아뢰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오늘 말씀 18절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애워싸며 혼란한 상황이 생겼을 때 예수님께서는 갈릴리호수 건너편으로 가자고 하셨습니다. 이 때 한 서기관이 등장했습니다. 신약성경 복음서에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이라는 명칭이 등장합니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동일한 존재를 다르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서기관은 직업을 말하고 바리새인들은 출신을 말합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같은 사람을 직업으로 말하느냐 출신으로 말하느냐의 차이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제사장은 사두개파에서, 서기관은 바리새파에서 나왔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제사장과 서기관은 이스라엘 사회에서 종교적으로 대단히 존경받고 어디를 가든지 특별 대접을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사회적 지위를 인정받고 가는 곳마다 상석에 앉도록 대우받았습니다.
마태복음 23장 6,7절입니다.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서기관은 어딜 가더라도 그 곳에서 백성들의 선생님으로 존경받고 대우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서기관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에서 놀라운 권위를 발견하고 예수님을 따르려는 마음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9절에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8장 19절을 읽어볼까요?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아뢰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중요한 점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첫 번째는 ‘제자가 되겠다고 나선 서기관이 누구인가?’, 그리고 둘째로는 ‘서기관이 왜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싶어 했을까?’입니다. 서기관이 어떤 일을 하는 사람입니까?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전문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서기관들은 율법을 필사하고 연구할 뿐만 아니라 율법을 해석하여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일도 했습니다. 당시 백성들로부터 ‘랍비’ 즉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들어가며 존경을 받았습니다. 요즘으로 따지면 신학대학원 교수, 성경학 박사님 같은 존재였습니다. 이런 서기관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싶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날 때 그냥 ‘예수님을 믿는다’라고 말하든지 ‘예수님에 대해 알고 싶다’고 말하는 정도로 살아가서는 안됩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을 찾아온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보며 일상의 문제를 해결 받으려고 했습니다. 질병의 문제, 가족의 문제를 해결 받고 싶은 마음에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은 그들의 근본적 인생문제를 해결하시는 것을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현실 문제를 뛰어넘어 영혼의 구원을 원하셨습니다. 이런 궁극적 문제를 해결하시는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아버지께로 가기 위해서는 유일한 길이시며 완전한 진리이시며 궁극적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주님의 나라와 그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길 원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믿고 따라야 하는 존재입니다. 여기서 ‘따른다’라는 단어는 예수님의 생각, 예수님의 정신, 예수님의 행동을 닮아가겠다는 각오를 뜻합니다. 자신의 과거 생각과 행동의 변화가 필요하며, 사고의 전환, 생활방식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가치관의 변화, 생활패턴의 변화는 주변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안겨주고 어쩌면 그런 변화로 인해 따돌림을 경험하거나 적대시하는 관계로 바뀔 수 있습니다. 이런 변화가 두려워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포기하고 예수님을 떠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자 한다면 변화의 두려움에서 해방되어 진리로 인한 자유로움을 경험해야 합니다. 우리들은 주님의 뜻을 이루며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하기에 세상의 가치관과 싸우고 세상의 가치관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주님만 따라가야 합니다.
독일의 디트리히 본 회퍼 목사님은 『나를 따르라』라는 책에서 ‘값싼 은혜 대신 값비싼 은혜를 추구하라’고 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구원을 값싼 은혜로 만들지 말라. 그리스도인이 받는 은혜는 반드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전제로 하는 값비싼 은혜여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과 뜻을 같이 하며 끝까지 따르는 것이 참된 신앙생활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위해 주님을 찾는 믿음에서 주님을 위해 그를 따르는 믿음으로 발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이 세상과는 구별되고 참 길, 참 진리, 참 생명이신 예수님만 따라가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예수님만이 인생의 참 기준되기에 저와 여러분이 인간적 사고, 세상적 욕망, 이 땅의 가치관을 내려놓고 주님의 종으로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예수님을 따르려 할 때 둘째, 희생과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8장 20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세상에서 이름난 스승을 따르려고 찾아온 제자들은 그 스승의 권위와 위엄은 물로 그 부귀와 권세도 함께 누리려고 합니다. 그것이 자신이 생각하는 성공의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이 땅에서 권력과 명성, 지혜와 재력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뛰어난 선생님을 찾아서 인간적인 노력을 기울입니다. 결국 인간적인 희생과 노력은 자기가 출세하기 위한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서기관도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이시며 세상에서 유일무이 완전한 선생님이신 예수님께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의 뜻은 ‘세상에서 생각하는 어떤 것도 채워주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나를 따를 수 있겠느냐?’라는 말씀으로 서기관에게 헌신의 각오를 물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에서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누가복음 14장 27절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누가복음 14장 33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고 하면서 세상에서 얻어질 것을 생각하며 살아간다면 그것은 참 제자의 삶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으니 더 가난해질 수 있다고, 예수님을 믿으니 더 멸시받을 수 있다고, 예수님을 믿으니 더 희생할 수 있다고, 예수님을 믿으니 더 포기해야하고, 예수님을 믿으니 더 초라해보이게 될 수도 있다고, 그럼에도 나는 예수님을 따른다고 말할 수 있어야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가 되기를 원하는 서기관에게 진짜 제자가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가르쳐주십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면 바로 로또에 당첨되고 머리가 우둔해서 공부해도 안되는 사람이 예수님 믿자마자 전교 1등을 하게 되고 돈 한 푼 없던 사람이 예수님 믿자마자 예금통장에 수 억원이 생기게 된다면 어느 누가 예수님에게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예수님을 믿으면 그들이 과연 얻게 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예수님을 이용한다면 우리가 과연 예수님의 종일까요? 아니면 예수님이 우리의 종이 되는 걸까요? 진정 예수님의 종이 되려고 한다면, 진정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고 한다면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세상의 멸시를 받고 세상에서 고난당하고 세상에서 희생하며 주님을 섬기며 낮아져서 겸손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을 희생하고 더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시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희생할 것이 많으며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포기해야 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헌신, 이런 믿음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직접 부르신 열두제자들도 예수님의 부활이전에 끝까지 따르지 못하고 예수님을 버리며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큰소리치며 예수님을 절대 버리지 않겠다던 베드로도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은 고난입니다.
다시 마태복음 8장 19절,20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아뢰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오늘 본문 19절에서 서기관이 한 말은 ‘주님을 진정으로 따르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예수님을 정치 혁명, 이스라엘 독립의 용사로 생각하고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로마의 식민지에서 독립시켜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 될 때 자신도 한 자리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세상 영광의 자리를 생각하며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가시는 길에 영광만 승리만 있는 줄 알고 뒤따르겠다고 했는데 예수님께서는 “나에게는 그런 영광의 자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머리 둘 곳 조차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존 칼빈은 이 부분을 이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자신이 이 세상에 계실 때의 생활상을 여기서 보여주시고 있으며, 더 나아가 자신의 모든 제자들에게 그들이 살아가야 할 생활 양식을 규정하고 있다.”
우리는 절대 예수님처럼 살 수 없습니다. 이 땅에서 제자로서 헌신해도 우리의 노력으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희생, 헌신, 포기, 겸손을 이루어 낼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살아가는 삶을 인간적인 결단으로 절대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우리는 우리의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갑니다. 우리는 우리의 노력이 아니나 하나님의 은혜로 먹고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아야 합니다.
주기철 목사님의 신앙, ‘일사각오’를 한 번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눈물 없이 못 가는 길 피 없이는 못 가는 길 영문 밖의 좁은 길이 골고다의 길이라네. 영생복락 얻으려면 이 길만은 걸어야 해 배 고파도 올라가고 죽더라도 올라가세”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정말 예수님의 제자로써 헌신과 포기의 삶으로 살아갈 수 있으시겠습니까? 성경에 서기관이 어떤 결단을 했는 지 정확히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헌신과 희생, 포기와 겸손에 대해 절대 인정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생각됩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저와 여러분은 헌신과 희생, 포기와 겸손한 삶을 보여주며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 스스로 헌신과 희생, 포기와 겸손을 이루어 내지 못하겠지만 예수님만 의지하며 예수님께 우리를 맡길 때 예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며 주님의 제자로써 헌신과, 희생, 포기와 겸손을 이뤄내시는 주님의 역사를 경험하시기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예수님을 따르려 할 때 마지막 셋째, 생사화복 모든 일상을 하나님께 다 맡기며 따릅니다.
마태복음 8장 22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예수님과 서기관의 대화가 마친 후 갑자기 한 제자가 예수님께 자신의 가정일로 예수님께 한 가지 부탁을 합니다. 21절을 보니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하옵소서”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22절에서 너무나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불신의 세상 사람들이 들으면 우리 기독교를 뭐라고 생각할까요? 불효막심한 종교라고 비난할 것입니다. 신앙이 있는 우리들도 어쩌면 이 본문을 그냥 보게 될 때 뭔가 어색하고 과연 이게 무슨 의미의 말씀인지 이해하기 힘들 것입니다. 우리가 제자로 헌신하며 예수님을 따라 복음사역을 감당하며 지낼 때 우리가 지켜야 할 가족간의 도의를 지키는 것은 정말 힘듭니다. 이 땅에서 주님을 따르는 헌신을 할 때 정말 가족의 일을 돌보는 일이 정말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성경에서 원하시는 부모, 자식의 관계는 분명합니다.
출애굽기 20장 12절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디모데전서 5장 8절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성경의 이런 구절들을 볼 때 오늘 본문의 예수님 말씀은 자식의 도리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의 죽음 앞에서 장례를 치르는 것은 세상적인 원리에서는 상식적이고 당연한 일이지만 주님을 따르는 제자로써는 주님의 가르침과 비교할 때 우선순위에서 더 앞설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당연히 세상의 일도 신경써야 하겠지만 혹 주님의 일과 겹칠 때, 주님의 가르침과 세상의 가치관이 충돌될 때 우리는 분명히 예수님을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의 길은 영광이나 승리를 보장하는 길이 아니라 도리어 십자가의 길이며 죽음을 각오한 길이며, 희생과 섬김의 길이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사명자의 길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사명을 위해 무엇이 우선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주님을 따르려는 참 성도는 부모의 장례식을 절대 치러서는 안된다는 뜻으로 해석하면 이단이 되고 사이비종교가 될 것입니다. 이 본문은 주님을 위한 헌신속에서 삶의 우선순위를 제대로 하라는 명령입니다. 메튜헨리 성경주석에는 이 본문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비록 양친에게 대한 효심은 우리 종교의 위대하고 필수적인 부분이지만 그에 앞서 하나님께 대한 충성심이 선행되어야 한다”라고 말입니다. 누가복음 14장 26,27절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 그것은 그저 탁월한 스승을 따르는 문제가 아니라 새로운 생명, 새로운 진리를 만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8장 22절에서 ‘죽은 자들’이라는 표현은 장례를 치르는 사람들을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아버지 장례를 치르는 일이 참으로 중요한 일이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일과 동일선상에서 비교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정하신 것은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는 것 자체가 아니라 장례를 위해서라면 예수님과 하나님 나라를 잠시 유보해도 괜찮다는 그의 판단에 대해 경고하신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족행사일정이 주일에 겹쳐질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주일예배를 포기하고 가족행사를 진행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참 신앙인이라면 주일예배를 거르고 가족행사를 하는 것에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우선순위, 신앙가치관을 점검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우리의 가정의 일, 우리의 일상적 일들에 대한 우선순위를 생각하며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 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명과 우리의 일상생활을 비교할 때 정말 사명을 따라 살아가며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참 신앙인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을 믿고 살지만 우리 생각 속에는 여전히 하나님보다 나를 먼저 앞세우며 일하고 있지 않습니까? 내 사정이 급하다는 것 때문에 예수님께 “주님 조금만 뒷전에 좀 물러가 계십시오” “먼저 내 일 먼저 처리하고 주님 일 하겠습니다”라고 말하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솔직히 “내 삶이 먼저”요 “내 사정이 먼저”라고 생각하며 내 생계, 내 생활을 주님의 일보다 앞서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진짜 신앙을 가졌다면 세상의 것을 더 얻기 위해서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기 위해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말씀대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앞 뒤가 바뀌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위해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이용해서는 안 됩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존 칼빈이 “주님 당신께 내 마음을 드립니다. 즉시, 그리고 진심으로” 라고 한 것처럼 주저 없이 주를 위해서 우리 마음을 드리고 주를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따르라”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제가 서양의 문화, 서양의 가치관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남녀가 있을 때 항상 “레이디 퍼스트”(Lady first)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고 합니다. ‘여자 먼저’라는 뜻입니다. 남자들은 아무리 바쁘더라도 여자를 먼저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연약한 사람들, 어려운 사람들을 먼저 챙겨야 하는데 특히 여성들을 먼저 생각해 주며 챙겨준다는 의미입니다. 여성배려의 아름다운 언어입니다. 그런데 신앙인들에게는 삶에서 우선적으로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어느 것보다 먼저를 외쳐야 할 것이 있습니다. 신앙인이라면 제일 먼저 고려해야 하는 존재가 있습니다.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항상 삶에서 “갓 퍼스트(God first)”, “지저스 퍼스트(Jesus first)”를 입에 달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 일상에 모든 일들에서 하나님 먼저, 예수님 먼저라고 외치며 우리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