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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이도 없었고 갓난아기인 딸을 잃을 운명이었던 나는 아름답고 비극적인 어린 소녀를 만들어냈다.
ㅡ 윌리엄 포크너 ㅡ
《소리와 분노》는 모더니즘 소설의 금자탑이다. 학자들이 1890년대에 시작된 것으로 파악하는 모더니즘은 1920년대 절정을 맞았다. 1차대전을 기점으로 서구 문명의 도덕적 기반과 영속성에 대한 신념이 뿌리째 흔들리던 때였다. 전쟁으로 달라진 세계, 가혹한 현실, 과거의 조화로움을 잃고 삐걱그리는 현실을 표현하기에는 전통적 문학 양식이 적합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많은 작가들이 실험적인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는데, 유럽의 경우 1922년에 차례대로 발표된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 T.S. 엘리엇의 《황무지》, 버지니아 울프의《제이콥의 방》, 미국의 경우 1929년 윌리엄 포크너의 《소리의 분노》등이 이 시기를 대표하는 모더니즘 작품으로 꼽힌다.
모더니즘 문학은 전통과의 단절을 의미했다. "서술의 연속성을 해체하고 인물 묘사의 전범에서 이탈했으며, '의식의 흐름,과 색다른 혁신적 서술 양식을 도입함으로써 전통적인 서술의 구문과 통일성을 무시했다. 이것은 당시를 특징짓는 "허무와 무질서의 광대한 파노라마"에 나름의 질서를 부여하려는 시도였다. 이 과정에서 제임스 조이스와 버지니아 울프, 윌리엄 포크너, 마르셀 푸르스트, 거트루드 스타인 등 모더니즘 작가들은 과거에서 현재와 미래를 찾았다. 그들은 서술로 과거의 기억을 불러들이지만, 그것은 그들이 경험하는 현재가 반영된 기억이다.
포크너에게 기억은 반복이었다. 소설가이기 전에 상징주의 시인이었던 그는 자신의 네번째 소설 《소리와 분노》로 전통과 결별을 고했다. "4악장의 심포니 구조"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의심할 여지 없이 "헨리 제임스가 즐겨 말하는 '허구 예술'의 걸작"으로, 그는 이 작품에서 동시대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의식의 흐름, 분열된 서술, 다수의 서술 관점, 상충하는 관념들을 통한 시간과 과거의 구성"을 사용했다. 동일한 주요 사건은 네 장으로 나뉘어 각자 다른 화자에 의해 서술된다.
벤지, 퀜틴, 제이슨이 화자가 되어 일인칭시점에서 서술하는 첫 세장에서 독자는 직접 화자가 되어 소설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강요 받는다. 포크너는 일인칭 서술을 통해 독자에게 화자의 의식적인 생각을 알려주는 동시에, 이에 내면의 독백, 의식의 흐름를 추가해 화자의 머리속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보여준다. 그렇게 해서 포크너는 독자의 "감정이입을 확립"한다. 백치인 벤지 섹션에서 작가의 전지적 시점으로 서술되는 마지막 장 딜지 섹션으로 가는 과정은 '닫힌 영역'에서 '열린 영역'으로의 이행, "어둠에서 밝음으로의 이행"이라고 할 수 있다. 독자는 "백치인 벤지의 머릿속에서 출발해서 햄릿형 퀜틴의 기억과 몽상으로 옮겨간 다음, 합리주의자인 양 행동하는 완고하고 과민한 제이슨의 관찰"에 도달한다.
《소리와 분노》는 첫 장 부터 수수께끼 같다. 각 장의 제목인 날짜들이 시간순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는 점은 "독자들에게 수수께끼를 푸는 데 참여할 것을 요청한다. 이 소설이 처음 출간되었을 때 미국 독자들은 벤지 섹션의 "기형적인 문법, 어색한 문장에 당황했다. 또한 그 뒤를 잇는 퀜틴 섹션은 저명한 포크너 비평가인 클리앤스 브룩스마저 어떤 구절들은 자기가 보기에도 너무 내밀해서 거의 이해하지 못할 정도라고 했다. 그럼에도 이 두 장은 감수성이 풍부한 독자들이 소설의 분위기를 피부로 느끼게 하는 데 큰 역활을 했다.
벤지 섹션은 1928년 4월 7일의 에피소드로 시작한다. 독자는 첫 장 부터 "미국 문학에서 가장 복잡한 상상의 산물을 접한다." 화자인 벤지는 백치로, 나이는 서른세 살이다. 그를 돌보는 러스트는 열네댓 살의 흑인 아이이다. 첫 장면에서 벤지와 러스트는 잃어버린 동전을 찾아 돌아다니고 있다. 그리고 곧 시간 이동이 이루어지면서 서술은 과거와 현재를 왕래하며 이루어진다. 시간 이동은 벤지의 머릿속에서 일어난다. 크게는 현재 (1928년), 할머니가 죽은 날 (1898년), 모리가 벤지로 이름이 바뀐 날 (1900년), 누나인 캐디의 결혼식 날 (1910년)로 나뉜다. 좀 더 자세하게는 14개의 시간대가 혼재해 있다. 하지만 서로 다른 시간대의 기억을 서술하면서도 밴지는 과거와 현재를 구별하지 못한다. 과거의 장면은 현재가 감각기관에 주는 자극, 즉 냄새, 소리, 눈에 보이는 것 등에 촉발되어 일시적으로 벤지의 의식를 점유할 뿐이다. 독자는 벤지를 돌보는 흑인들을 통해 시간대를 식별할 수 있다. 벤지가 세살(1898년)일 때 부터 열세 살 정도가 될 때까지는 버시 (벤지보다 최소한 대여섯 살 많다), 그다음 청소년기는 티피 (벤지보다 한 살 아래), 현재는 러스트가 시간대의 지표다. 포크너는 독자로 하여금 "이야기를 재구성해서 스스로 그 의미를 이해하기를 강요한다."
독자는 벤지가 사용하는 서술 어휘와 구문을 보고 그의 세계가 극도로 한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벤지의 정신연령은 채 세 살도 되지 않는다. 벤지가 세상을 경험하는 순간 포크너가 그의 머리속을 들여다보고, 그 안에서 밀려다니는 '영상'을 포착한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벤지의 서술은 거의 전적으로 시각적 영상적이다. 언어가 발달하기 전의 어떤 원시적 상태를 최대한 표현할 수 있는 언어의 형식을 상상하여 서술한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소설은 현실계를 묘사한다기 보다는 있을 법한 이야기를 창조하고 독자로 하여금 그것을 '믿도록' 설득한다. 그러기 위해서 포크너는 비정상적인 '백치의 언어"를 창조해 낸다. 그리고 독자는 그것이 벤지의 언어라고 믿는다.
퀜틴 섹션을 이야기하기 전에 캐디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포크너는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ㅡ《소리와 분노》는 마음속에 떠오른 어떤 이미지에서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그것이 어떤 상징인지 나는 알지 못했다. 집 옆의 배나무에 올라 할머니의 장례식이 벌어지는 방을 들여다보고, 나무 밑에 있는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벌여지는지 말해주는 여자아이의 엉덩이에 흙이 묻어 있는 이미지였다. 그들이 누구며,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어떻게 해서 속옷 엉덩이에 흙이 묻었는지 쓰고 나서 나는 단편소설로는 그 이야기를 다 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때야 나는 흙 묻은 엉덩이의 상징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것은 사랑, 애정, 이해를 받지 못하고 집에서 탈출하는, 부모 없는 여자아이의 이미지로 대체되었다.ㅡ
포크너는 원래 '황혼,이라는 제목의 단편을 쓰려고 했다. 황혼은 벤지의 "반쪽 세계" "빛과 어둠(이해와 몰이해)사이의 초시간적 미결 상태"를 의미한다. 그는 자기가 말하려고 했던 것을 제대로 쓰지 못했다고 생각하고 다시 한번 시도했으며, 그것이 퀜틴 섹션이 되었다. 나머지도 그런 과정을거쳐 쓰였다. " '황혼'이라는 제목의 단편으로 끝날 이야기를 《소리와 분노》라는 장편으로 만든 것은 캐디였다." 포크너는 "캐디를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단편으로 짧은 생을 살게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캐디는 퀜틴의 누이동생으로 두 살 어리다. 제이슨은 캐디보다 두 살 어리고 벤지는 제이슨과 한 살 터울의 막내다. 네 형제 중에서 캐디에게만 화자로서의 목소리가 주어지지 읺는다. 포크너는 형제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그녀에게 접근한다. 그는 간접적인 접근이 더 "열정적"이라고 생각했다. "개울에 비친 그늘을 묘사하고 나무는 독자로 하여금 상상해서 창조하도록 하는 것이 더욱 감동적"이라는 것이다. 포크너는 "사람마다 미의 기준이 다르므로, 그 미를 직접 묘사하지 않고, 그림자로 나무를 상상하게 하는 것이 최상"이라는 생각을 캐디에게 적용했다.
밴지와 퀜틴 섹션을 다 읽고 제이슨 섹션에 들어갈 때쯤이면 독자는 캐디에 대한 이미지를 형성하게 된다. 그래서 제이슨이 그녀에 대해 뭐라고 말해도 믿기 어려워진다. 벤지와 퀜틴 섹션에서 캐디는 그들과의 "대화를 통한 서술 참여로 사실상 '핵심적 화자'가 되었다고 할 수도 있다. 종합하자면, 이 소설의 "관념적 또는 상징적 중심"은 엉덩이 부분에 흙이 묻은 속옷을 입은 어린 캐디 콤슨이라는 것, "이 소설은 제대로, 또한 완전히 바로 담을 수 없는 이야기를 하려는 시도와 좌절의 연속"이라는 것이다. 포크너는 또한 "이 소설은 집요한 이미지를 파고드는 과정"이며 "이미지가 서술을 대체한다"고도 말했다. 캐디에게 화자의 목소리가 주어지지 않았어도 일단 캐디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독자 각자는 나름대로 마음속에 캐디라는 인물을 구축하는 것이다.
이제 퀜틴 섹션으로 들어가보자. "벤지의 고립이 물리적, 감각적인 것이라면, 퀜틴의 고립은 추상적인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정상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퀜틴의 내면세계는 고립되어 있고 비이성적이다. 그는 세상이 어때야 한다는 기대감과 실제 경험 사이의 괴리감에 절망한다. '근친'의 경험을 말, 또는 언어로 강제하지만, 이 시도에 실패하자 자기가 원하지 않은 상황에서 벗어나려 죽음을 선택한다. "퀜틴의 절망적인, 끊임없는 상념은 벤지의 신음, 울부짖음이 언어로 표현된 것이다." 구두점이 생략되는 것은 문장의 제약을 허물어뜨림으로써 퀜틴의 혼돈을 드러내려는 시도다. 외적인 사건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내면 사이의 경계가 불분명하다는 것이 그렇게 시각적으로 표현된다. 그의 의식이 안으로 깊이 침잠하고 혼돈에 빠져들어갈수록 문장과 문법이 해체되며 걷잡을 수 없이 난해해진다. 마지막에서 두번째 단락에 이르러서는 그렇게 해체된 파편적 문장에 일인칭 주어마저 소문자로 표기되어 퀜틴이 심오한 무의식에 빠져 자아를 상실하고 서술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한다는 점을 나타내 내용과 형식의 절묘한 결합이 절정에 달한다.
벤지에게 질서는 감각기관과 관련이 있지만, 퀜틴에게는 관념과 관련되어 있다. 순결 또는 처녀성은 하나의 관념이며, 그것이 명예와 관련된 관념인 한은 세계의 중심이다. 그는 "처녀성이라는 관념과 사랑에 빠져있다". 그리고 나중에는 "죽음 자체와 사랑에 빠진다". 누이동생 캐디에 대한 그의 사랑은 "플라토닉한 근친적 사랑"이다. 아버지는 그에게 "여성의 순결은 남성이 윤리적 의미를 부여한, 어떤 일시적 육체의 상태일 뿐"이라고 한다. 그러나 퀜틴이 볼 때 그들이 부여한 의미는 "자연에 반하는"(155쪽) 것이다. 어버지는 상담역이 되고 조언을 해주고 고해를 받아주는 역활에 실패하고, 엄마는 사랑의 원천이 되어야 하는 역활에 실패한다.
낭만적 이상주의자인 퀜틴은 삶을 회피하는 방편으로 죽음을 택하지만, 냉소적 현실주의자인 아버지 콤슨 씨는 술을 선택한다. 그는 "아이들의 감정과 필요를 가지고 장난치는, 나약하고 허무주의적인 알코올 중독자"로, 아이들에게 "연민은 느끼지만 그것을 효과적으로 전달하지 못한다". 한편 "차갑고 짜증스러운 얼굴"(369쪽)의 콤슨 부인은 "냉담하고, 자기 밖에 모르는 여자"다.
삶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는 데 모든 힘을 쏟고, 무엇보다 체면을 중시한다. 퀜틴은 엄마를 콤슨가의 몰락의 원인으로 본다. 콤슨 가족이 몰락하는 근본 원인은 "자기 집안(외가)의 사회적 위치에 예민한, 차갑고 냉정한, 자기중심적인 콤슨 부인이다". 그녀는 벤지가 백치라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그것이 가문의 수치라고 생각한다. 셋째인 제이슨을 편애한 나머지 그의 버릇을 잘 못 들이고, 다른 자식과 남편에게는 진정한 사랑과 애정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녀는 "사악한 사람이라기 보다는 정상적인 가족 관계를 마비시키는 부정적 성향의 차가운 무게"로 가족 전체를 내리누르는 존재다.
제이슨의 세계는 벤지나 퀜틴과는 달리 감각이나 관념에 기초하지 않는다. 그의 세계는 논리의 세계, 인과와 손익의 세계다. 그는 무엇이든 계산한다. 캐디에게 그녀의 딸을 보여줄 때조차 돈을 받는다. 모든 것을 계약 관계로 본다. 가게 주인인 고용주 얼과의 관계도, 창녀 로레인과의 관계도, 집안 하인(일꾼)들과의 관계도 그렇다. "잠긴 방의 벽장 속에 숨겨놓은 금고의 돈은 제이슨의 세계의 상징"이다. 그는 계산하고 또 계산하며 시간과 경주하지만, 돈를 훔쳐 달아난 조카 퀜틴을 쫓는 과정에서 예측 가능했던 그의 세계는 허물어진다. 시간에 집착하며 그것을 망각하려 했던 퀜틴과 달리 제이슨은 시간에 쫓기며 그것을 따라잡으려 애쓴다. 그는 "현재에 살지 않고 항상 살기 위해 준비한다". 그가 두려워하고 '존경'하는 유일한 인물은, 요리사와 유모 역활을 모두 담당하는 "깜둥이" 딜지이다.
딜지 섹션에 이르러 독자는 앞선 화자들의 시선을 거치지 않은, 객관적으로 관찰되는 딜지를 만난다. 화자는 제한적인 전지적 시점으로 서술하는 작가 포크너이다. 여기서 만나는 딜지는 예상을 뒤엎는다. 그녀는 체격이 좋고 순종적인 스테레오타입의 흑인 유모나 가정부가 아니다. 그녀는 인고하기도 하지만 저항하기도 한다. 이 소설은 대지주였던 콤슨가의 몰락이 막바지에 이른 시기를 그리고 있다. 이 시기에 콤슨가를 지탱해주는 사람은 딜지다. 딜지에게 인생의 진리는 사랑과 명예다. 콤슨가의 아이들에게 "엄마가 있다면 그것은 딜지다". 한편 "딜지는 농업경제에서 산업경제로 이행하는 남부에서 일종의 이정표 역활을 한다". "딜지를 관점을 가진 화자로 만들 경우 윤리적 규범으로서의 그녀의 효용이 소실 될 것이며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또하나의 파편적 진리"일 것이기 때문에 포크너는 딜지에게 그 역활을 담당시키지 않았다.
소설의 내용을 웅변하는 제목 '소리와 분노'는 무의식중에 떠오른 것이라고 밝힌 포크너는, 나중에 한 생각이지만 맥베스의 유명한 독백이 이 소설에 아주 "적합할뿐더러 오히려 더 낫다"고 말했다. 이 독백은 또한 《소리와 분노》의 주요 모티브 중 하나인 '그림자'에 대해서도 말해준다.
ㅡ내일, 또 내일, 그리고 또 내일이
매일 이렇게 꾸물꾸물
기록되는 시간의 마지막 순간까지 기어갈 것이며
우리의 모든 지난날들은
바보들에게 흙으로 되돌아가는 길을 밝혔다.
꺼지는구나, 꺼지는구나, 잠시뿐인 촛불이!
인생은 엑스트라의 그림자, 서투른 배우,
무대에 올라 뽐내며 걷고 안달하다가는
더 이상 들리지 않지.
그것은 백치가 떠드는 아야기,
소리와 분노로 가득하고 아무런 의미가 없다.ㅡ
퀜틴과 마찬가지로 맥베스도 시간에 대해 곰곰이 생각한다. "내일, 또 내일, 그리고 또 내일"은 천천히 힘없이 터벅터벅 진행한다. 배우는 이 독백을 느리게 연기한다. 맥베스의 자부심은 "꾸물꾸물 기어가는"것이 되었다. 인생은 촛불처럼 짧고 덧없다. 무대의 "엑스트라"와 같다. "엑스트라"는 "걸어다니는 그림자 (a walking shadow)"의 번역이다. 그림자에 집착하는 퀜틴에게 그것은 시간과 죽음, 허무를 의미한다. 또한 인생은 "서투른 배우"이기도 하다. 무대에 올라 과장된 몸짓에 소리를 지르듯 대사를 외고, 제이슨처럼 공연히 인상이나 쓰며 노심초사하다가 무대를 내려가면 곧 잊히는 서투른 배우다. 그것은 "작고 연약한 사내의 보잘것없는 분노" (406쪽)이며 벤지라는 "백치가 떠 드는 소리"와 같다. 인생은 흙 ("먼지")과도 같다. 인생은 정작으로 잠시 타다가 꺼질 나무의 "화신"(360쪽)과도 같다. 게다가 그것은 보잘것없는 러스트가 나르는 화신이다. "그림자" "먼지"와 관련해서 퀜틴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ㅡ그림자들 속으로, 그림자들 위에 앉은 가벼운 먼지 같은 지나간 슬픈 새대들의 발소리가 메아리치는 속으로 구부러져 올라가는 계단이 있을 뿐이다. 내 걸음이 그 그림자들을 깨웠으며 그 먼지들은 다시 가볍게 내려앉았다. (228쪽)ㅡ
궨틴에게 그림자들은 "기묘하고 비뚤어진 형태를 띠고 스스로 긍정했어야 할 의미를 부인"(226쪽)한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소리"일 뿐이다. 이 소리가 퀜틴의 경우에 언어로 정교하게 표현되는 것이라면 벤지의 울부짖는 "소리"는 "고통과 공포, 혼란이 뒤섞인 획일적인 것, 언어가 없는 소리다.
ㅡ벤은 전적인 단절감에 휩싸이며 울부짖었다. 울부짖음에 울부짖음이 더해지며 그의 목소리는 더욱 커졌다. 숨을 쉴 틈도 두지 않았다. 거기에는 경악 이상의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것은 공포였다. 충격이었다. 눈이 없고 혀가 없는 고통이었다. 그것은 오로지 소리였다. (419쪽 ) ㅡ
《소리와 분노》의 이 마지막 장면에서 러스트는 마차에 벤지를 태우고 가다가 낭패를 본다. 기념비에 이르러 말머리를 왼쪽으로 돌려야 할 것을 오른쪽으로 돌렸기 때문이다. 모두 자만심에 기인한 것이다. 이 자만심은 콤슨가의 몰락의 한 원인이기도 하다. "분노"한 제이슨이 그것을 보고 달려와 말머리를 돌린다. 벤지의 울부짖는 "소리"는 그치고 질서가 회복된다. 이 질서는 벤지에게는 "순전히 습관적인 것"이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냥 소리였다. 언제나 아무것도 아니다가 행성들이 합을 이룰 때 부당함과 슬픔이 잠시 내는 소리였는지도 모른다."(379쪽) 벤지의 질서가 혼돈에 휩싸였다가 다시 회복되지만, 광장에서 마지막 일어나는 이미지는 "끝이 아니다. 소설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 이미지는 부당함, 상실, 말로 표현되지 않는 고통의 본질적인 요소를 요약한다.
이 소설에는 독자를 만족시키는 결말이 없다. 그래서 "내적 결말과 소진의 부재는 외적, 형식적 완결과 소진에 대한 요구를 증대시킨다. 특히 플롯과 관련해서 그렇다. 발단과 종말에 이르는 플롯의 완결 문제가 제기 되는 것이다. 그러나 문학이론가 바흐친의 관점에서 보면 완결이란 없다. 아무것도 최종적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소리와 분노》의 경우, 캐디는 아직 서술되지 않은 이야기들의 부재가 가장 두드러진" 가공의 인물이다. 독자는 이 부재를 각자의 서술로 채워야 한다.
포크너에게 "현재는 혼돈된 소음 또는 소리, 그리고 지나간 미래"다. 그의 세계관은 "달리는 오픈카에 앉아 뒤를 돌아보는 것에 비유될 수 있다. 무형의 그림자, 깜박이는 빛, 빛의 희미한 떨림, 빛의 파편들이 양쪽 시야에 들어오지만 그게 무엇인지는 그 모든 것들이 뒤로 밀려난 다음, 어느 정도 원근감이 생긴 뒤에서 나무가 되고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나는 존재했다 나는 존재하지 않았다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존재가 아니었다"(226쪽 ). 프루스트에게 있어서 구원은 "시간 자체에, 과거의 완벽한 재현에 있지만, 불행히도 과거는 포크너에게서 상실되지 않는다. 그것은 항상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그것은 집착의 대상이다".
출처: 윌리엄 포크너 장편소설
《소리와 분노》(문학동네)
옮긴이 공진호의 작품해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