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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목민 이야기
1. 서양에 나타난 최초의 유목민 킴메르인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서양 역사학의 원조로 꼽히는 책이다.
페르시아인들(현대 이란인들의 조상)과 그리스인들과의 전쟁의 원인과 과정 그리고 그 결과를 다룬 이
책은 단순히 페르시아 전쟁사로 끝나지 않는다.
그랬더라면 그 책은 사서로서는 그렇게 큰 명성을 누리질 못했을 것이다.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민족들에 대한 상당히 상세한 서술을
남겨놓았다.
그의 《역사》는 그래서 역사책일 뿐 아니라 인류학적 정보가 잔뜩 담긴 ‘민족지(ethnography)’라고 할 수 있다.
스키타이인들과 그 주변 족속들에 대한 정보가 잔뜩 들어 있는 제4권이 그런 부분이다.
헤로도토스가 살던 시기에 흑해 북부 지역은 스키타이인들의 땅이었다.
이들은 일부는 농사를 짓고 사는 사람들이기는 했지만 대다수는 유목민이었다.
호기심 많은 헤로도토스는 스키타이인들의 생활방식과 독특한 (심지어는 괴이한) 풍습들을 자세히
소개한다.
그리고 스키타이인들이 자신들의 영토를 침략한 페르시아 군대를 물리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반세기 전에 페르시아의 침략을 맞아 사생결단의 싸움을 벌였던 그리스인들처럼 페르시아로부터 침략을
받았다는 면에서 동질감을 느꼈던 것일까?
헤로도토스가 살던 시기에 동서양을 통틀어 가장 큰 나라는 페르시아였다.
중동 일대가 몽땅 페르시아의 지배하에 있었던 것인데 이 페르시아 군대가 보스포로스 해협을 건너 유럽
땅으로 침략하였던 것이다.
스키티아인들은 페르시아 군대와의 직접적인 전투를 피하고 계속해서 후퇴하여 페르시아 군대로 하여금
지치게 만드는 전술을 썼다.
낯선 땅 깊숙이 끌려들어간 페르시아 군대는 두려움을 느끼고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스카티아에서
퇴각해야 하였다.
당시 보스포로스 해협을 건너기 위해 다리우스 대왕은 배를 연결하여 그 위에 판자를 덮어 다리를 만들
었다.
이 선교를 지키는 역할을 맡았던 것이 이오니아의 그리스인들이었다.
이오니아의 그리스인들은 페르시아의 지배에 대해 불만이 많았기 때문에 페르시아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그들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
그래서 퇴각로가 끊길까봐 허겁지겁 퇴각을 결정한 것이다.
오늘날 보스포로스 해협이라고 불리는 이 해협은 지금은 터키의 영토에 속하지만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그리스인들의 세계에 속했다.
해협에 면한 이스탄불이라는 도시는 원래 비잔티온이라는 그리스 도시가 있던 곳이다.
‘보스포로스’라는 이름부터가 그리스 말에서 왔다.
황소(보스)가 건넌 곳(포로스)이라는 뜻인데 황소로 변한 여인 이오 신화와 연관되어 있다.
그런데 보스포로스라는 이름의 장소가 또 하나 있었다.
흑해에 면한 아조프 해 입구에 있는 해협을 지금은 케르치 해협이라고 부르는데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곳을 ‘킴메르 보스포로스’라 불렀다.
킴메르인들(kimmerioi)의 보스포로스 해협이라는 뜻으로 이 지역이 킴메르인들의 땅이었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참고로 말하자면 보스포로스 해협 안쪽에 있는 바다는 ‘아조프 해’라고 불리기는 하지만 고대에는 ‘마에
오티스 호’라고 불렸다.
바다라고 하지 않고 호수라고 한 것이다.
염도도 낮을 뿐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낮은 바다라 불릴 정도로 수심도 낮았기 때문일 것이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후대의 훈족이 이 케르치 해협을 건너왔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수심이 낮은 곳은 1 미터가 채 되지 않는다고 한다.
헤로도토스는 《역사》제4권에서 스키티아인들의 기원에 대해 말하면서 킴메르인들에 관해 짧은 정보를
제공해주고 있다.
그러나 킴메르 땅에 직접 가서 그곳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쓴 헤로도토스의 정보는 너무나 소략하다.
그것은 무엇보다 당시에 킴메르인들이 그곳에 살지 않고 이제는 주민이 스키타이인으로 바뀌었기 때문
일 것이다.
그가 전하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첫째, 킴메르인들은 스키타이인들의 침략을 받고 그 땅에서 밀려났다.
둘째, 지금도 스키티아에는 ‘킴메르족의 성벽’, ‘킴메르족의 나루터’, ‘킴메르족의 보스포로스’라는 곳이
있다.
셋째, 킴메르족은 스키타이족을 피해 소아시아로 들어가 흑해 북안의 시노페 지역에 정착하였다.
넷째, 스키타이족은 킴메르족을 추격하여 카프카즈 산맥을 넘어 아시아로 들어갔는데 방향을 잘못 잡아
반대쪽으로 가는 바람에 메디아 땅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여기서 아시아는 아나톨리아 지방 즉 ‘소아시아’를 의미한다.
다섯째, 킴메르인들은 아시아로 들어가 여러 곳을 약탈하였다.
킴메르인들은 리디아 왕국의 수도인 사르디스까지 함락시켰다.
그러나 리디아 왕 알뤼앗테스에 의해 아시아에서 쫓겨났다.
이상이 헤로도토스가 전하는 내용이다.
카프카즈 산맥 너머로부터 밀려들어온 킴메르인은 기마유목민으로서의 뛰어난 전투능력을 발휘하여
이곳저곳을 약탈하였다.
그런데 헤로도토스가 전하는 이야기는 백퍼센트 정확한 것은 아니다.
소아시아에서의 킴메르인들에 관한 정보는 예상 밖에도 아시리아인들의 문헌에 나타난다.
리디아의 기게스 왕이 아시리아의 아수르바니팔 왕에게 도움을 청해 그들을 축출했다는 기록이다.
아시리아를 비롯한 고대 오리엔트 지역에서는 점토판에 예리한 갈대로 문자를 기록하고 그것을 말려서
문서로 보관하였다.
19세기 중반 니느웨의 왕궁 유적지에서 그러한 점토판 문서들이 다량으로 발견되었다.
아수르바니팔 왕(BCE 669-627)은 문헌수집에 열정적인 인물로서 궁정 도서관에 많은 점토판 문서들을
수집, 소장하였다.
현재 그 도서관에서 나온 점토판들만 3만 점 이상 영국의 대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 문서들 중에 아수르바니팔 왕이 자기 나라 사람들은 들어본 적도 없는 리디아라는 나라의 왕 기게스
(‘구구’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의 간절한 요청에 응하여 킴메르인들(‘기미라야’)을 물리쳤다는
자신의 치적을 자랑하는 기록이 담긴 점토판이 발견되었다.
이 선전용 문서는 판본이 여섯 개나 된다고 하니 아수르바니팔 왕이 킴메르족과 싸워 그들을 격퇴한 것이
얼마나 자랑스럽게 생각했는지 보여준다.
첫 판본이 기록된 시기가 BCE 665년 경으로서 킴메르족과의 싸움은 그 직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킴메르인들은 아시리아의 도움을 받은 기게스 왕에 의해 패배를 당하기는 했지만 아나톨리아
에서 물러난 것은 아니다.
그 기게스 왕을 계승한 그 아들 아르디스가 왕위에 올라 다시 아수르바니팔 왕에게 군대를 보내 도와
달라는 요청을 하였을 뿐 아니라 기게스 왕의 분묘를 킴메르인들이 약탈하였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헤로도토스의 책에 나오는 리디아 왕국의 수도 사르디스의 함락도 기게스 왕의 아들 아르디스 시기에
있었던 사건으로 보인다.
그리스인들의 단편적 기록에서도 나오는 에페소스 외곽의 아르테미스 신전이 파괴되었던 것이나 또
그곳에서 멀지 않은 마그네시아가 파괴된 것도 같은 킴메르인들이 행한 일이었다.
7세기에 아나톨리아 반도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킴메르인들의 아시아에 대한 공격은 사실 8
세기 말에 시작되었다.
아시리아의 사르곤 왕(재위 BCE 721-705)에게 보낸 태자 산헤드립이 보낸 편지가 남아 있는데 그
편지는 킴메르인들이 아라르투 왕과 싸워 이겼다는 사실을 왕에게 보고하고 있다.
관리들의 또 다른 편지들에서 킴메르인들의 동향을 보고하는 것으로 보아 킴메르인들은 아시리아
왕국의 커다란 경계와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갑자기 먼 곳으로부터 나타나 습격과 약탈을 자행한 후 전리품을 갖고 사라지는 이러한 약탈자들이
두려움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말을 타고 말 위에서 활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이러한 북방 기마전사의 무리는 아시리아 같은 강력한
오리엔트 제국에게도 두려움의 대상이 된 것이다.
실제로 사르곤 왕 자신은 이러한 기마전사인 킴메르인들과의 싸움에서 전사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구약성서의 〈에스겔서〉에는 이러한 무서운 북방기마전사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고 검과 활을 무기로 사용하는 이들은 어느 날 구름 같이 나타나 마을들을 습격
하여 여인을 겁탈하고 노략질을 하여 금과 은, 가축을 빼앗아 간다.
이들은 모두 극한북방에서 말을 타고 오는 군사들이다.
6세기 중반 바빌론 왕국에 포로로 끌려가 있던 이스라엘의 예언자 에스겔이 본 북방민족에 대한 환상은
순전한 환상은 아니었다.
그것은 소아시아와 메디아 일대를 휘젓고 다녔던 이전 세기의 킴메르족의 이야기가 반영된 것이다.
에스겔은 야훼 신에 의해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의 도구로 사용될 이 기마유목민족의 땅이 로스와 메섹과
두발이라고 하였는데 로스는 남러시아 땅, 그리고 메섹과 두발은 소아시아에 있는 지역들로 생각된다.
그 땅들이 모두 킴메르인들이 활동하던 땅이었다는 것은 예언자 에스겔이 아시리아 왕국을 계승한 바빌론
인들로부터 킴메르인들의 이야기를 전해 들어 그들에 대해 알고 있었음을 드러내준다 할 것이다.
참고로 〈에스겔서〉에 나오는 이 북방민족의 왕의 이름은 곡이었고 그 나라 이름이 마곡이었다.
후일 기독교인들은 말세의 환란기에 일어날 큰 전쟁에서 곡과 마곡이 성도들을 대항해서 싸울 것으로
믿었다.
북방기마민족에 대한 공포가 북방민족을 악마화시켰던 것이다.
아시아에서 온 스키타이족
스키타이인들은 BCE 2세기경에 사르마타이족에 의해 흑해 북안과 남러시아 일대에서 밀려나기 전까지
동유럽의 상당 지역을 지배한 기마유목민족이었다.
물론 스키타이인들은 문자로 된 기록을 남겨놓지 않아 그 기원을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BCE 5세기에 살았던 헤로도토스도 스키타이족의 기원에 대한 서로 다른 이야기들을 몇 가지 소개하였다.
그 가운데서 그 자신이 가장 그럴듯하게 여긴 이야기는 스키타이족이 원래는 아시아에서 살던 유목민이
었는데 맛사게타이인들과의 싸움에서 패배하여 아락세스 강을 건너 킴메리아 인들이 살던 흑해 북안으로
이주하였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헤로도토스는 스키타이인들의 원향이 구체적으로 아시아 어느 곳이었던가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다.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스키타이족은 헤로도토스의 말에 따르면 페르시아에서는 ‘사카이(사카족)’이라
고 불렸다.
사카족은 페르시아 전쟁에서 페르시아 용병으로 참여하였는데 많은 부족들 중에서 페르시아인들과
더불어 가장 용감하게 싸운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 전쟁에 참여하였던 사카족을 ‘아뮈르기온’ 출신 스키타이족이라고 하였는데
아뮈르기온 평원은 옥수스 강(시르다리야 강) 동쪽의 페르가나 지방에 위치한 초원지역으로 생각된다.
사카족도 단일한 집단은 아니고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있었다.
고대 페르시아의 비문에 등장하는 사카 부족들로는 ‘사카 티그라카우다’ (고깔모자 사카족), ‘사카 타라
드라야’ (흑해 너머의 사카), ‘사카 하오마바르가’(하오마를 마시는 사카) 등이 있는데 두 번째 사카족은
헤로도토스가 그의 역사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스키타이족이다.
사카 티그리카우다는 다리우스 1세 때 (BCE 510년경) 페르시아에 반기를 들었던 페르시아에 예속된
족속이었다.
세 번째 사카 하오마바르가족이 헤로도토스가 ‘아뮈르기온 스키타이족’이다.
하오마는 환각성이 있는 식물로 대마와 같은 식물로 보인다.
하오마 풀을 음료로 만들어 마시는 관습이 있어서 그런 이름이 붙은 것 같다.
사카족이 카스피해 동쪽의 중앙아시아와 남부 시베리아 일대에 살았던 것은 확실하다.
심지어는 파미르 고원 너머 알타이 산지까지 이들의 자취가 보인다.
예를 들어 1929년부터 발굴된 파지리크 고분의 주인공들이 사카족으로 여겨진다.
그 고분들에서는 스키타이 형식의 많은 동물문양의 금속조형물들이 출토되었을 뿐 아니라 문신을 한
미라, 심지어는 카펫까지도 온전한 모습으로 출토되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물이 고분에 침투한 후 얼어서 여름에도 녹지 않는 상태로 2천년 이상 내려온 때문이다.
고분이 냉동고 속에 보관되어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파지리크 5호분에서는 모전 직물이 출토되었는데 말을 탄 기사의 모습이 생생하게 나타나 있다.
기사의 모습은 수염을 기른 스키타이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
이 직물이 알타이 지역에서 제작된 것인지 아니면 외부에서 수입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스키타이 문화가 알타이 지역까지 널리 퍼져 있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사카족이 이 지역에 살았을 가능성도 높다.
고대 그리스인들과 긴밀한 접촉을 하였던 흑해 북안의 스키타이인들의 일부는 유목생활을 버리고 정착
해서 농사를 지었다.
헤로도토스의 말에 따르면 ‘농경 스키타이족’은 자신들이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다 팔기 위해 농사를
지었는데 특히 스키타이인들이 생산한 밀은 평야 지역이 부족한 그리스 세계로 대거 수출되었다.
그리스인들에게 밀 외에도 꿀, 가죽, 말린 물고기, 황금 등을 수출하고 반대로 포도주, 올리브 유, 금속
제품, 장신구, 갑옷과 투구 등을 수입하였다.
스키타이인들은 그리스인들 뿐 아니라 주변 족속들과 활발한 교역을 하였다.
현재 스키타이인들이 남긴 유물들 가운데서는 황금으로 만든 장식품들이 적지 않다.
우리나라에도 2012년 <스키타이 황금유물전>이라는 이름의 전시회가 서울에 있는 예술의 전당에서
개최된 적이 있다.
그 공예품들의 미적 가치에 대해서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기 힘들 것이다.
그런데 전시장을 둘러보며 필자에게 든 의문은 스키타이인들이 가진 그 많은 황금은 도대체 어디서
나왔는가 라는 것이었다.
킴메르인들처럼 스키타이인들도 주변 족속들을 약탈해서 금을 획득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지만 알타이
지역과의 교역을 통해 금을 축적했을 가능성도 높다.
스키타이인들에 의해 전파되었다는 그리핀 전설이 이를 간접적으로 뒷받침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현재 중국과 러시아, 카자흐스탄, 몽골 등의 나라들이 만나는 접경 지역에 위치한 알타이 산맥은 원래
금이 많이 나는 지역이었다.
알타이라는 말도 금에서 나온 것이다.
2세기 그리스의 유명한 여행기 작가 파우사니아스에 의하면 그 금은 지표면이나 지표면에서 가까운
곳에서 얻어졌다고 한다.
알타이의 금은 바위에서 떨어져 나와 계곡으로 씻겨 내려간 사금의 형태로 채굴되었다.
그리스인들이 스키타이인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는 그리핀이라는 상상의 새가 알타이의 금을 지킨다는
것이었다.
그리스인들이 남긴 조각이나 그림에는 그리핀은 네 발을 가진 새의 모습을 하고 있다.
미국의 과학사가 아드리엔 메이어에 의하면 그리핀은 ‘프로토케라톱스’라는 공룡의 화석을 보고 알타이
유목민들이 만들어낸 상상의 산물이었다.
‘프로토케라톱스’는 알타이 지역의 건조한 기후 때문에 그 화석과 알이 많이 발견된다.
프로케라톱스는 중생대에 살았던 공룡의 일종이라서 인간이 만날 수 없는 동물이었지만 알타이인들은
그 화석을 보고 그리핀이라는 새를 상상해 내었다.
그리핀의 이야기는 중앙아시아에 살던 스키타이 유목민에 의해 서쪽으로 전파되어 그리스인들의 예술과
신화에 등장하게 되었다.
그리스인들은 스키타이인들이 접촉하던 아시아의 여러 족속들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다.
망자의 고기를 제물의 고기와 함께 먹는다는 잇세도네스인들, 그리고 그 북쪽에 산다는 외눈박이 아리마
스포이족, 땅의 최북단에 사는 휘페르보레오이족 등이 그러한 족속들이었다.
그리스인들 가운데에는 호기심 때문이었던지 스키타이인들의 땅을 지나 잇세도네스인들이 사는 곳까지 간 사람도 있었다.
헤로도토스의 역사 책에 나오는 ‘아리스테아스’라는 시인이 그런 사람인데 그는 잇세도네스인들에게 가서
그들로부터 아리마스포이인들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아리마스페이아》라는 서사시를 지었다고 한다.
세 권으로 되었다는 이 시는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데 전해졌다면 BCE 7세기경의 그리스인들이 북방민족에 대해 어떠한 관념을 갖고 있었던가를 생생하게 보여주었을 것이다.
아리마스포이족은 황금을 지키는 그리핀과 싸웠다고 그리스인들은 들었다.
이는 알타이 지역에서 난 금을 획득하기가 쉽지 않았던 사실을 암시해주는 것은 아닐까?
험난하고 위험으로 들끓는 먼 길을 통과해야만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실크로드 교역은 그렇게 금을 얻는
지난한 하나의 방편이었을 것이다.
김현일 박사
서울대 서양사학과 졸업.서울대 대학원에서 석사 및 박사과정 수료(문학박사)
프랑스 정부 초청 장학생으로 EHESS에서 연구
연구논저 및 번역서 : 『서양의 제왕문화』, 『동학의 창도자 최수운』 등의 저서와 『프랑스문명사』,
『절대주의국가의 계보』, 『금과 화몌의 역사』 등의 번역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