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집
전등을 끄자 집은 삽시간에 그림자로 가득 찬다. 화선지가 된 식탁 옆 벽 위로 날렵한 가지 몇 개가 난을 친다. 갓 싹을 틔운 작은 잎사귀가 가지 끝에 돋아나 있다. 흰 벽면에 간결하게 그려진 수묵화는 간간이 바람에 흔들린다. 금방이라도 한 마리 새가 날아와 앉고 잎사귀 옆에 매화를 닮은 꽃이라도 피어 화조도를 완성할 것처럼 보인다.
안방 문틀과 문으로 굴곡을 이루며 그림은 이어진다. 더 많은 가지와 잎들이 더 큰 그림을 만든다. 창밖 산사나무뿐만 아니라 생강나무도 섬세한 필치를 더한다. 거실 소파 뒤 벽면은 배롱나무 가지로 출렁인다. 마치 집 전체가 맑은 물속으로 가라앉고, 그 속에서 수초들이 일렁이는 것 같다. 액자 하나 걸지 않고 하얗게 비워 둔 벽면이 진가를 발휘하는 시간이다.
거실 밖 제법 넓은 화단에는 산사나무, 생강나무, 배롱나무가 있고, 화단 가로 키 작은 가로등이 서 있다. 아파트 일층이다 보니 낮에는 학교 가는 아이들, 택배 차량, 드나드는 주민들 모습을 볼 수 있다. 일상의 소소한 풍경들이다. 그러나 해가 기울면 어두워지기가 무섭게 블라인드를 내리곤 한다. 행여 밖에서 안이 보일까 신경 쓰이기 때문이다.
늦은 외출에서 돌아온 어느 날이었다. 거실로 들어서는데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공간에 무언가 가득 찬 느낌이 엄습했다. 둘러보니 그림자가 온 집을 점령하고 있었다. 벽면과 문, 심지어 천장에까지도 드리워져 있었다. 창밖에는 달밤의 검푸른 물결이 출렁이고, 키 작은 가로등이 마치 빔처럼 벽을 향해 영상을 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집을 나서기 전 블라인드 내리는 것을 깜빡했나 보았다. 그림자는 내가 입은 연회색 원피스 위에도 어른거렸다.
사실 나는 그림자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그림자는 한낮보다는 해가 서쪽으로 기울 무렵에 짙어지고 길어진다. 중학교를 중퇴하고 야간학교를 다니던 나는 친구들이 하교하는 시간에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서곤 했다. 큰길을 피해 되도록 골목을 따라 걸었다. 산자락에 있는 학교에 도착하면 운동장은 이미 교사의 짙은 그림자에 덮여있었다. 희미한 빛을 내기 시작하는 백열등 아래 계단에 앉아 운동장이 완전히 어둠에 잠길 때까지 바라보았다.
밤 열 시가 넘어 집으로 돌아올 때는 그야말로 그림자가 친구가 되어주었다. 가로등도 행인도 뜸하던 시절이었다. 불빛이 없는 곳에서는 다급해지던 발길도 그림자가 나타나면 한결 느긋해졌다. 보름달 아래 보리밭이 밤바람에 술렁여도, 강둑 넝마주이 움막에서 등잔불이 도깨비불처럼 깜빡여도 그림자는 내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즈음 나는 인생에도 그림자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큰딸을 중학교에도 보내지 못했던 아버지는 서산에 해가 기울 무렵이면 마당에 나와 종이에 말은 연초를 피우셨다. 마당 안쪽으로 길게 그늘이 지고 담배 연기가 옅은 구름처럼 흩어졌다. 결코 떨칠 수 없었던 가난의 그림자가 발목을 휘어 감은 채 자꾸만 짙어졌다.
그 그림자는 우리 가족에게도 드리웠다. 우리는 저마다 그림자를 끌며 인생을 살았다. 그래도 아버지는 이상향을 향해 끝없는 희망 회로를 돌렸고, 어머니는 견디지 못해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남으로써 결별을 고했다. 기특하게도 여동생은 잊어버리는 방법으로 세상을 살았다. 불행하게도 남동생은 갇혀버렸고 막냇동생은 떨쳐버리려고 먼 길을 떠났다. 나는 그냥 함께 살았고 그림자는 내 가슴에 짙게 배어들었다.
그림자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림자를 끌어안고 살았던 나는 항상 우울했다. 바깥사람들 앞에서는 굳이 그림자를 숨기려고 애써 웃었다. 그러나 어쩌다 사진을 찍으면, 찍히는 사진마다 그 웃음은 내 얼굴에 숨어있는 그늘을 드러냈다.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기묘한 얼굴이었다. 그런 나를 마주하기 싫어서 사진을 찍을 때면 딴전을 피우며 자리를 피하곤 했다.
사실 그 속에 들어앉아 있으면 그림자는 그냥 어둠일 뿐이다. 밖으로 나와 큰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볼 수 있어야 비로소 제대로 보인다. 나를 밖으로 끌어내어 준 것은 글이었다. 이 집으로 이사를 한 그해에 몇몇 수필 공모전에서 수상했다. 수필을 쓰면서 내 그림자를 직시하려고 노력했다. 역린 같은 고통이 따라왔지만, 서서히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그림자는 단지 어둠이 아니라 빛의 이면이라는 것을. 그림자가 짙을수록 거기에 배어있는 빛도 강하다는 것을.
실체를 가진 존재라면 피할 수 없는 게 그림자다. 햇살 아래에 자신을 드러낼 때면 반드시 따라붙는다. 상황에 따라 모습을 바꾸기는 하지만 분명 그것은 햇살을 받는 앞면이 투영된 뒷면이다. 어찌 보면 그림의 입체감을 살리기 위해 음영을 그려 넣는 것처럼 존재를 더욱 깊이 있게 드러내기 위한 일환인지도 모르겠다.
마음만 먹으면 그림자를 불러올 수 있는 이 집을 나는 그림자 집이라고 부른다. 자랑할 것이 별로 없는 나는 지인들이 찾아오면 곧잘 불을 끄고 그림자 전시회를 연다. 작은 거실에 붙어 앉아 우리는 기이하고 아름다운 그림들을 감상한다. 그림자가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뜨거워지곤 한다. 해가 저도 작은 불빛에 의지해 스스로 존재를 드러내는 그림자 집은 오늘 저녁에도 여전히 공연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