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호 열사 영전에 / 문병란
_1987년 5월 26일 이재호 열사 1주기를 맞아 쓴 시임
산 자도 죽은 자도 사랑했던 광주
그 이름 부를 량이면
벌써 우리들의 혀가 말린다
이재호 열사,
그대 이름 부를 량이면
어른들은 모두 다 부끄러워진다
그대를 누가 죽게 했는가?
민중이 덫이 된 이 나라의 정치제도,
권력에 의한 권력을 위한 권력의 정치,
살인자가 된 가식의 민주주의가
그대의 꽃다운 청춘 ,
그대의 빛나는 이상을 앗아갔구나
광주를 연인처럼 사랑했던 젊은이
피투성이 금남로와 망월동을 안고
밤마다 몸부림치며 잠 못이루었던
이 나라의 아름다운 순정의 사나이
그대는 앞서간 임들의 뒤를 따라
끝내 찬란히 산화하고 말았구나
이재호 열사, 그대 앞에 서면
우리는 모두 부끄러운 어른들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자식을 죽였고
대통령이란 이름으로 장관이란 이름으로
더구나 대학교수 총장이란 이름으로
우리들은 모두 공범이 되어
그대 순결한 청춘을 살해하였구나
수많은 책의 페이지를 메꾸었던 거짓 진리
혓바닥과 펜으로 그대를 죽였고
썩은 권위로, 질서를 빙자한 폭력으로,
평화를 가장한 선린우호의 침략으로,
젊은이들의 가슴에 모진 비수를 박는
살인적 휴머니즘으로 피를 빠는 흡혈의 도덕으로
작은 한반도를 도막내는 제국의 각축장
이 나라는 도마 위에 올려 놓은 살코기가 되었구나
장한에 둘러싸인 가날픈 미인이 되었구나
그대, 이재호 열사,
빈사에 놓인 조국, 피투성이 광주를 구해야 된다
캄캄한 한반도의 한 밤중을 절규하던 목소리,
공부 잘 하면 무엇하는가?
후배 목이나 옭아매는 검사 판사 되면 무엇하는가?
그대 자랑스런 317점의 고득점
이 나라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서울대학생
그러나, 그러나, 공부 잘하여 출세하면 무엇하는가?
민주주의 방해하는 법무장관,
통일 방해하는 통일원 장관,
농민 목을 조이는 농림부 장관,
민의를 짓밟는 국회의원,
서울대학 졸업하여 출세하고 돈 벌면 무엇하는가?
그대, 이재호 열사,
그 많은 영광 , 그 많은 꿈, 그 많은 자랑스러운
아크로폴리스의 낭만을 한 줌 재로 남기고
그대의 프라이드를 광주에 되돌려 주었구나
우리 모두의 부끄러움
서울대학의 반민중적 반동을
지식인들의 빈지식인적 배신을
산자들의 무기력 산자들의 기득권적 매국을
그대 한 몸 불태워 우리 대신 속죄하였구나
우리 대신 민족의 원죄 대속하였구나
이재호 열사,
누가 헛된 가식의 찬미 뇌까리는가?
아직 우리에겐 천국이 없고
아직 우리에겐 편히 누울 무덤이 없다
원수의 군화가 짓밟고 있는 땅
어디다 꽃다발을 바치며
어디다 묘비명을 세우랴
죽어, 거듭 죽어
천 번을 죽을지라도
광주와 더불어 영원히 살리라
그 어느 낙원보다 천당보다 아름다운
고난의 광주를 사랑했던 그대,
온 몸 횃불 되어 불 밝히고
마침내 광주에 돌아와
한 줌 흙이 되었구나
자랑스런 망월동의 형제가 되었구나
절뚝이며 절뚝이며 돌아와
한 줌 불씨로
묻혀있는 내일의 빛나는 씨앗으로
그대는 빛나는 광주의 마음이 되었구나
영원히 살아 있는 우리들의 사람이 되었구나
죽어서도 영원히 우리들의 노래가 된
사랑스런 우리들의 아들이여 연인이여
오 무등의 횃불 이재호 열사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