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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 미드웨이 ]
1976년, 유니버설 영화사는 미국 독립기념 200주년 기념으로 영화 <미드웨이>를 제작했습니다. 전편격인 <도라!도라!도라!>의 흥행실패 원인을 분석하여 이 영화에선 유명 배우들을 다수 기용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제작비가 만만치 않게 부풀어 오는 바람에 정작 전투 씬이라든지 다른 요소에서 제작비를 팍 줄여버렸습니다.
그래도 드라마적인 요소를 짜 넣어서 <도라!도라!도라!> 절반이 안되는 제작비 1100만 달러로 북미 4322만 달러라는 비교적 흥행은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영화 고증수준은 상당히 엉망인 데다가 다른 영화들의 장면을 짜깁기까지 했습니다. 이를테면 전시 선전영화인 <동경 상공 30초>, 일본에서 제작한 야마모토 이소로쿠 전기 영화 <태평양의 폭풍>, 그리고 전작인 <도라!도라!도라!>등 이었습니다.
이 영화의 배경인 미드웨이 해전은 실존인물인 미국의 니미츠 제독과 일본의 야마모토 제독의 팽팽한 머리싸움을 바탕으로 벌어진 미드웨이 섬을 둘러싼 치열한 전투였습니다. 결국 암호해독의 성공, 그리고 여러 가지 행운을 함께한 미 해군의 대승으로 끝났습니다. 4대의 항공모함을 동원하여 진주만 폭격처럼 기습한 일본 대함대를 맞이하여 미군은 2대의 항공모함과 수리중인 1대를 동원하여 승리한 전과였습니다.
이 영화는 대체적으로 6:4 정도의 비중으로 미군과 일본군의 각각의 관점에서 전투를 앞둔 상황과 참모진들의 움직임을 빠르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마치 스포츠 중계를 보는 듯한 느낌마저 듭니다.
주인공 찰톤 헤스톤을 위시하여 니미츠 제독을 연기한 헨리 폰다, 그리고 글렌 포드, 로버트 미첨, 제임스 코반, 로버트 와그너, 클리프 로버트슨, 할 홀브륵, 로버트 웨버 등 기라성같은 많은 배우들이 짧지만 적시 적소에 등장하는데 사실상 우정출연들이 많았다고 전해집니다.
미 태평양함대 사령관이었던 니미츠 제독을 연기한 헨리 폰다의 비중이 비교적 높게 나옵니다. 다만, 주인공 찰톤 헤스톤이 이 해전에서는 두드러진 역할이 아니었던 만큼 그의 주인공으로서의 위상과 비중을 다소나마 높여주기 위해서 일본여자와 사귀는 아들과의 관계를 양념처럼 집어넣은 부분이 픽션으로 등장합니다.
일본의 국민배우 미후네 토시오는 야마모토 제독 역을 맡아서 근엄하고 중후한 연기를 힘있게 보여주기도 합니다. <라쇼몽>이나 <7인의 사무라이>에서 보이는 가벼운 젊은 시절과는 달리 상당히 무게감 있게 변한 중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영화의 장점으로서는 실제 있었던 전략에 대한 비교적 상세한 설명과 스토리라인이 탄탄하다는 정도가 되겠습니다.
그러나 위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1960년대 일본 전쟁영화의 장면을 삽입하여 대부분의 전투장면을 처리하여 많은 구설수에 올랐습니다. 즉 꽤 볼만한 후반부의 상당시간 나오는 박진감 있는 전투장면은 잭 스마이트 감독의 연출이 아니라 일본영화의 장면을 그대로 넣은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태평양전투의 분수령이 되었던 이 역사적인 미드웨이 해전을 다행히 <투모로우>, <2012>, <패트리어트, 늪속의 여우> 등을 만든 거장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이 영화로 다시 만든다고 하니까 상당히 기대가 됩니다.
[ 줄거리 ]
영화는 태평양 전쟁 초기에 있었던 그 유명한 두리틀 폭격대의 일본 본토 폭격 장면으로부터 시작합니다(두리틀 폭격대에 관하여는 맨 아래에서 설명합니다). 일본 연합함대 사령관인 야마모토 제독은 이 소식을 전해 듣고, 미드웨이 섬과 알류산의 미군기지를 공격하여, 미국 항모기동부대를 여기에 끌어들여 일소하는 이른바 M–I작전에 대해 구상을 시작합니다.
미국에서는 매트 가르스(찰톤 헤스톤 분) 해군대령이 해군 조종사인 아들 톰 소위와 만나 아들이 일본 여자, 그것도 적성국민 강제이주법에 따라 강제수용소에 감금된 여인과 사랑에 빠졌다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습니다. 이 부분은 역사적인 사실이 아니라 픽션입니다.일본 군부 내에서는 M–I작전의 필요성에 대해 갑론을박이 이어지지만 결국 결행하기로 결정됩니다.
일본군의 암호 중에서 AF라는 단어가 유독 많이 등장함을 눈치 챈 미군은 이곳이 어디일지 알아보기 위해서 북태평양 미드웨이 섬의 미군기지에 담수응축기가 고장 났다는 가짜전문을 보내라고 명령합니다. 이후 일본의 암호에서 'AF에 식수가 부족하다'라는 말이 발견되면서 AF는 바로 미드웨이를 가리키는 것으로 미국 측이 간파합니다.
하지만 막강한 일본 함대를 저지할 항모기동부대 전력이 항모 엔터프라이즈, 호넷, 그리고 산호해 해전에서 대파되었다가 군민의 헌신적인 수리로 3일 만에 전열에 복귀한 요크타운 등 3척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일본 대함대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미군은 상당히 노심초사합니다.
한편 일본 해군은 자그마치 165척의 각종 함정을 동원하여 알류산 열도와 미드웨이 공격에 나섭니다. 이중에서 미드웨이 공격의 주력은 나구모 주이치 제독이 이끄는 제1항모 공격함대로서, 항모 소류, 가가, 아카기, 히류 등의 항공모함으로 편성되어 있었습니다.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은 세계 최대의 거함 야마토(7만 2,000톤급)에 탑승하여 미드웨이 섬 상륙부대를 이끌며 후속부대를 지휘합니다.가르스 대령은 수용소에 있는 아들의 애인 하루코를 면회합니다. 하루코는 부당한 처우에 항의하며 일본 우익조직과의 연계를 부인합니다.
항모 엔터프라이즈와 호넷이 소속된 미국 제16기동함대 사령관이던 미 해군의 맹장인 핼시 제독은 피부병에 걸려 입원하고, 대신 순양함 함대 지휘관 출신의 스플루언스 제독이 대타로 투입되어 5월 28일에 출항합니다.
플레처 제독이 이끄는 제17기동함대의 항모 요크타운은 3개의 보일러를 수리하는 바람에 이틀 늦은 5월 30일에 출항하게 되는데 톰 가르스 소위가 바로 이 요크타운의 전투비행대대에 배속받습니다.아버지 매트 가르스 대령은 아들의 애인을 구하기 위해 해군 정보부의 동기를 찾아가 하루코의 구명을 위한 사건 재조사를 부탁하고, 자신도 요크타운에 승선하여 출항합니다.
일본해군은 아직도 미 함대가 진주만에 있는 걸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미군의 정찰기들은 미드웨이로 향하는 일본 함대를 발견하지만 일본 함대는 미국 함대의 접근을 모른채 1942년 6월 4일 미드웨이 섬을 향해 공격편대를 발진시킵니다.미드웨이의 미군은 6대의 와일드 캣 전투기와 15대의 버팔로를 출격시키지만 모두 격추당하고, 비행장을 제외한 섬의 기지 시설은 일본군의 공습으로 초토화됩니다.
아직도 미 함대를 발견하지 못한 일본 해군은 미 함대가 오지 않을 걸로 지레짐작하고 항공모함 함상에 어뢰를 달고 대기 중이던 제2차 공격대의 전투기와 공격기들의 무장을 미드웨이의 재차공격을 위해 폭탄으로 바꿔 다는데, 일본은 훗날 이 결정을 두고 땅을 치고 후회하게 됩니다.
미드웨이 섬에서 출격한 여러 미군 항공기들이 일본 항공모함 히류, 소류를 공격하지만 쉽게 격퇴 당합니다. 그러나 사출기 문제로 다른 정찰기들보다 30분 늦게 이함한 일본 순양함 토네의 함재정찰기가 드디어 미 함대를 발견합니다.
심지어 산호해 해전에서 대파되었다고 믿었던 요크타운까지 등장한 데 놀란 일본 해군은 거의 다 완료되었던 무장 바꿔 달기 작업을 중지하고 다시 대함공격용 어뢰를 장착합니다. 게다가 일본 해군의 제로전투기들의 연료는 거의 고갈되어 상공을 지키기에도 부족한 상태였습니다.
* 니미츠(헨리 폰다 분)
한편 호넷과 엔터프라이즈에서는 자체 방어를 위한 소수의 전투기만을 남기고 일본 함대를 향해 모든 항공기들을 출격시킵니다. 하지만 일본 함대가 미군의 공격을 대비해 항로를 남에서 북으로 바꾸는 바람에 대부분의 미군 전투기들은 일본 함대를 발견해 내지 못한데다, 너무 서둘러 출격했기 때문에 조직적인 편대 구성도 흐트러진 상태였습니다.
워드론 소령이 이끄는 디베스테이터 폭격기 15대는 호위전투기 편대를 잃어버린 채 비행하다가 일본 함대를 우연히 발견, 공격을 가하지만 일본 제로전투기의 공격으로 모두 격추당하고, 해상에 비상 탈출한 조지 게이 소위를 제외한 전원이 몰살당합니다.이어서 다른 폭격기들도 일본 함대를 발견하고 공격을 가하지만 단 한 발의 어뢰도 명중시키지 못한 채 모두 격추당하고 맙니다.
이 과정에서 톰 가르스 소위는 부상을 당합니다.한편 엔터프라이즈에서 발진한 돈틀리스 급강하 폭격기들은 일본함대를 찾지 못하자 항로를 북으로 바꿉니다. 이 결정 덕분에 그들은 일본 항공모함군을 발견하게 됩니다. 무장 바꾸기 작업으로 인해 함상에는 폭탄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고, 연료 부족으로 제로전투기의 충분한 상공엄호도 받지 못하던 가가, 아카기, 소류는 미군 폭격기들의 폭탄을 얻어맞고 차례로 불덩어리로 화합니다.
* 가운데 야마모토
아카기에 탑승했던 나구모 제독은 지휘소를 순양함 나가라로 옮기고, 아카기를 포기합니다. 요크타운에 귀환한 전투기 부대에서 매트 대령은 부상당한 아들을 목격합니다.살아남은 한 척의 일본 항공모함 히류는 이 참극을 목격하고, 즉각 공격편대를 발진시켜 미군 전투기들을 추격해 요크타운을 공격합니다. 3발의 폭탄을 급소에 얻어맞은 요크타운은 간신히 침몰은 면했으나 전투 불능 상태가 되었고, 플레처 제독도 배를 떠나 피신합니다. 히류에서는 제2차 공격대가 출격하여 요크타운을 발견, 공격을 가합니다.
이 공격으로 요크타운에는 퇴함 명령이 내려집니다. 일본군은 어이없게도 자신들이 두 척의 미군 항공모함을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든 걸로 착각하고, 함재기가 몇 남지 않은 상태에서도 최종 공격을 준비합니다.그러나 요크타운에서 피신한 전투기들을 포함한 미군의 공격편대가 엔터프라이즈와 호넷에서 출격해 히류를 덮쳐 침몰시킵니다.
매트 가르스 대령도 직접 조종간을 잡고 이 편대에 참가합니다. 매트 대령은 히류에 명중탄을 날리지만 자신의 비행기에도 적의 대공포화로 큰 피해를 입고, 귀환하는 길에 착함사고를 일으켜 산화하고 맙니다.일본 해군은 그동안 그들에게 승리를 안겨 주었던 4척의 최신예 항공모함과 275기의 함재기, 그리고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다수의 숙련된 베테랑 파일럿들을 모두 잃었고, 야마모토 제독은 침통한 표정으로 전 함대의 철수를 명령합니다.
진주만으로 귀환한 미 함대에서 하루코는 부상당한 톰을 보고 충격을 받습니다. 그리고 '과연 우리가 일본보다 나았던 것일까? 아니면 그저 행운이 따라 주었던 것일까?'를 자문하는 미군 제독들과 이 전투에서의 미군 장병들의 노고를 치하하는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의 치사를 마지막으로 영화는 끝납니다.
[ 태평양 전쟁의 터닝 포인트, 미드웨이 해전 ]
< 해전의 배경 >
1942년 4월 18일 일본 해군은 미 항공모함(호넷)에서 출격하여 일본을 공습하고 중국으로 탈출했었던 두리틀 중령이 이끄는 폭격기들의 본토 폭격에 크게 충격을 받았습니다. 항속 거리가 긴 쌍발 육상 폭격기를 항공모함에 적재하고 출격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던 일본 군부는 공습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었고 충격을 받은 일본 국민들의 군부에 대한 비난이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또한 히로히토 일왕이 거주하는 도쿄에 적의 폭격이 가해지는 것은 기세등등하던 당시의 일본 군민 모두에게는 상상할 수가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해군 야마모토 연합함대 사령관은 이에 대하여 대담한 결심을 합니다. 즉 전쟁 전부터 미리 생각해 두고 있던 미드웨이- 알류산 열도 작전을 감행하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 일본의 작전도
그는 개전후의 2단계 공세(1단계는 진주만 기습)에서 중부 태평양을 주요한 목표로 보고 이를 상부에 우겨서 관철시키고 행동을 구상 중이었습니다. 즉 미드웨이 섬을 점령하여 초계선을 멀리 하와이 근처까지 동진시켜 두리틀 폭격대와 같은 기습의 가능성을 아예 싹을 도려내 버리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미드웨이 섬을 그 해 10월쯤 예정된 하와이 점령 작전의 교두보로 삼겠다는 의지도 있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야마모토 제독이 미드웨이와 알류산 작전을 추진하는 데에는 크데 두가지 목적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미드웨이를 점령함으로서 향후 하와이와 미국 본토 공격을 위한 하나의 귀중한 도약판이 될 수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알류산 서쪽 끝에 있는 아투 섬과 키스카 섬을 점령함으로써 반대로 미국이 일본을 공격할 수 있는 디딤돌로 사용될 수 있는 우환을 사전에 제거하여 일본 본토를 미국의 기동 부대 공격으로부터 방어한다는 것이었습니다.
* 야마모토의 계획(일단 점선까지 진출하고 다음엔 하와이 점령)
또한 소부대에 의한 알류샨 공격을 미드웨이 공격과 동시에 함으로써 일본의 주공격 목표가 어딘지 혼란을 일으키도록 하는 한편, 일본 함대의 주력 기동부대가 미드웨이에 대한 기습 공격을 함으로써 진주만에 있는 허약한 미국의 잔존 태평양 함대를 미드웨이 해역으로 유인한 다음 일본의 막강한 항공모함과 전함의 전력으로, 남아 있는 미국 함대를 완전히 쓸어 버린다는 계획이었습니다.
만약 미 태평양 함대가 미드웨이를 방어하기 위해 하와이에서 출동하지 않는다면, 그 때는 쉽게 방해 받지 않고 미드웨이를 점령할 수 있기 때문에, 일본군으로서는 미국이 어느 것을 선택하더라도 좋은 꽃놀이 패의 입장이었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하와이에 상륙하고 하와이를 발판으로 삼아 미국 서해안 어느 곳에든지 출몰하여 샌프랜시스코에서 로스엔젤레스까지 함포 사격과 공습을 할 수 있게 되므로, 미국은 일본이 원하는 조건대로 협상테이블에 나올 것이라고 야마모토는 자신만만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일본 육군은 이와같은 야마모토의 작전 안에 공감하여 미드웨이와 알류산 작전에 필요한 병력을 협조하기로 합니다.
< 미드웨이 작전 연기 주장들 >
그러나 반론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반론은 해군 내부에서 나왔습니다. 1941년 12월 진주만 기습 작전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제1기동함대(나구모 기동부대) 사령관 나구모 주이치 중장은 진주만 공격 후 계속해서 남태평양과 인도양의 여러 작전에 동원되었던 함정과 항공기, 군인들의 피로가 누적되어 일정기간 정비와 휴식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작전의 연기를 강하게 건의하였습니다.
그의 건의는 휘하 항공전의 중요한 전문가들인 항공 참모 겐다 미노루 대좌나 제2항공전대 사령관 야마구치 다몬 소장의 지지를 받고 있었습니다. 남태평양의 산호해 해전에서 큰 타격을 입고 수리중인 즈이카쿠의 수리가 끝나고 그의 자매함 쇼카쿠가 인원 충원과 훈련이 완료된 후에 합류하기를 기다려서 작전을 실시해야 한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야마모토는 이를 모두 거부하였습니다. 그의 생각에 미드웨이 해전은 촌각을 다투는 것이었습니다.
야마모토의 미드웨이 작전에 대해서는 원래 대본영 해군부와 육군은 반대를 했으나 야마모토가 계획했던 진주만 기습이 성공한 전례가 있고, 둘리틀 폭격대의 기습에 대해 일본 신문들은 둘리틀 중령의 이름을 발음하는 데 빗대어 ‘Do nothing raid'(별 것 아닌 기습)라고 비꼬아 말했지만 실제로 둘리틀 중령의 기습은 미드웨이 작전에 대해 반대 의견을 가졌던 사람들을 찬성 쪽으로 돌아서게 하였습니다.
< 사전 탐지한 미국의 정보력 >
1942년 5월5일 일본 해군은 대해령(大海令) 제18호를 발령하면서 미드웨이-알류산 작전 개시를 알렸습니다. 이 무렵부터 일본군보다 항상 한 수 위였던 미군의 정보 능력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전에 1942년 3월 4일, 장거리 비행 능력이 뛰어난 일본군의 대형 비행정 1기가 미드웨이 섬에 접근했다가 격추 된 일이 있었습니다.
이 때 미 태평양 함대 사령관 체스터 니미츠 제독은 이는 일본이 이 해역에 공세를 취할 징후라고 판단하고 휘하 부대에 엄중한 경계를 지시했었습니다. 미드웨이 일본군의 정찰 시도를 니미츠 태평양 함대 사령관이 지나쳐 버리지 않은 것입니다. 전 해(1941년)에 진주만 기습을 받자 곧 루즈벨트 대통령은 기습 당시 미국 태평양 함대 사령관이던 킴멜 해군대장을 경계 태만의 지휘 책임을 물어 해임하고 후임에 니미츠 소장을 임명했습니다.
서열로 보아 니미츠 앞에는 스물 여덟 명의 선배 제독들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었으나 루즈벨트 대통령은 텍사스 출신으로서 조용하지만 무인(武人)의 기개가 넘쳐 나는 니미츠 소장을 선발하여 대장으로 승진시켜 태평양 전쟁이라는 중책을 맡기게 됩니다.
미 해군은 1942년 4월말부터 암호의 부분 해독에 힘입어 일본군이 태평양 해역에서 대규모의 공세 작전을 전개할 농후한 가능성을 포착했습니다. 그러나 그 작전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는 불확실했습니다. 일본군의 암호에 자주 등장하는 AF라는 암호는 공격 목표로 판단되었는데 도대체 이것이 어느 곳을 뜻하는지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 니미츠 제독
5월 20일 야마모토가 AF를 공격하라는 전문을 일본 함대에 보내자 이것을 가로 챈 블랙 체임버라 불리는 암호 부대는 하루 속히 AF가 어디인지 알아내야만 했습니다.
워싱턴의 미 합참본부는 이 미지의 암호가 하와이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미 육군 항공대는 이것이 알래스카나 미국 서해안이라고 추측했었습니다. 5월 중순까지 여기에 대해서 아무런 정보가 없이 시간이 흘러갔지만 태평양 함대 사령관 니미츠 제독은 각종 정보를 종합 분석해보고 이곳이 하와이 인근 미드웨이 섬일 것이라고 판단하였습니다.
하와이 소재 해군 첩보부도 그 AF가 미드웨이라는 가정으로 정보 수집에 집중하였습니다. 블랙 체임버는 워싱턴에서 하와이로 급파된 죠셉 존 로체포트가 지휘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미 해군 암호 첩보분야에서 전설적인 전공을 남긴 사람으로서 일본의 진주만 기습을 암호 분석으로 사전 예견했던 것으로도 유명했습니다.
* 암호해독 전문가 조셉 존 로체포드
5월 11일 첩보대의 장교 야스퍼 홈스의 제안으로 기가 막힌 작전이 만들어졌습니다. 블랙 체임버의 일원으로써 전쟁 전에 하와이 대학의 공과 대학 교수로서 미드웨이에 대해 잘 알고 있는 홈즈 소령이 미드웨이는 빗물과 정수 시설에 의존하기 때문에 물 부족 문제가 자주 발생한다고 말하자, 옆에 있던 피니간 소위가 일본군이 이렇게 미드웨이에 물 부족 사태가 발생하는 것을 알게 된다면 도꾜로 보고하지 않겠느냐고 의견을 제시하였습니다.
이제 AF를 확인할 수 있는 묘안이 생긴 것입니다. 미드웨이와 오하우 섬의 중간에 깔린 해저 케이블로 미드웨이 섬 기지 사령관과 사전에 모의한 후 무선으로 하와이에 미드웨이 섬의 해수 정화장치가 고장 나서 식수가 다 떨어져 간다는 긴급 위장 보고를 평문으로 보고하게 했습니다.
이 평문 전문이 웨이크 섬의 일본군 통신 부대에게 감청되어 암호문으로 본국에 보고되었습니다. “미드웨이에 식수가 떨어져가고 있다.”라는 내용인데 여기서 미드웨이를 지칭하는 암호인 AF라는 글자를 그대로 사용하였습니다.
이 무선은 다시 미 해군 통신 정보대에게 바로 감청되었습니다. 감청된 전문은 미 해군 통신 감청 본부에게 보고되어 비로소 AF가 미드웨이임이 밝혀졌고 이어서 이곳에 대규모의 일본군 공격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하게 됩니다. 추가로 암호가 더 해독되어 미드웨이 공격부대의 병력과 지휘관 예정 항로등과 공격 시기도 밝혀졌습니다.
* 미드웨이 섬
연합함대의 미드웨이 작전과 알류산 열도 공략작전에 동원된 함대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습니다.
* 나구모 중장이 지휘하는 제1 기동부대
항모 네척(아카기, 가가, 히류, 소류)과 전함 두 척, 그 밖에 여러 호위함들
* 호소가야 보시로 중장의 제5 함대 알류산 공략부대
항모 두척(류조, 준요), 그 밖에 여러 함정들
* 야마모토 대장이 이끄는 본진(상륙부대와 주력부대)
항모 두척(즈이호, 호쇼)와 야마토 등 전함 아홉척, 그밖에 여러 함정들과 병력 수송선 다수
< 니미츠의 걱정, 빈약한 미 함대 규모 >
니미츠 제독은 가용 항모에서 많은 제약이 있었습니다. 5월에 있었던 산호해 해전에서 항모 렉싱턴이 격침되었고 요크타운은 큰 수리를 요하는 손상을 입어 진주만의 도크에서 수리 중이었습니다. 항모 사라토가도 일본 잠수함의 어뢰 공격을 받아서 수리 중에 있었습니다.
니미츠 사령관은 자칫하면 할지 제독의 16 기동부대의 단 두 척의 항모, 엔터프라이즈와 호넷만으로 힘겨운 전투를 벌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 가지 가능성은 5월 27일 하와이에 도착하여 수리 도크에 들어가 있는 요크타운의 수리가 어느 정도인지에 따라 요크타운을 미드웨이 해전에 투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였습니다. 요크타운의 최대 파괴 부분은 연료 탱크로서 이를 제대로 수리하려면 하와이 수리 조선소에서는 불가능하고 미 서해안의 큰 수리 조선소에 가서 장기적으로 수리해야 하는 심각한 상태였습니다.
* 수리중인 요크타운
그러나 하와이 수리 도크의 인원들은 72시간의 불면불휴의 돌관 작업으로 요크타운을 일단 출항을 할 수 있게 하는 응급조치를 완료하였습니다. 요크타운은 5월 30일, 수리 도크에서 빠져나와 전장으로 달리는 동안 공작함(수리선)이 옆에 붙어 계속 긴급 수리를 하도록 하였다.
일본 측은 요크타운이 산호해 해전의 피해가 너무 커서 출동이 불가능하리라고 보았습니다. 만약 미 기동부대의 반격이 있다면 미군이 미드웨이 작전에 핼시 제독의 16기동부대인 엔터프라이즈와 호넷, 2척 외에 경항모 와스프 정도가 출동하리라고 판단했었습니다.
1942년 5월 28일. 미 해군의 엔터프라이즈와 호넷으로 편성 된 제16 기동부대가 주력으로 출동하였습니다. 이 부대는 지난 4월에 두리틀의 폭격대를 발진시킨 부대기도 합니다. 이어서 5월 30일. 17 기동부대의 요크타운이 뒤를 이어 출동하였습니다. 17 기동 부대는 플레처 제독이 계속 지휘를 맡았습니다. 그러나 16기동부대의 사령관인 맹장 핼시 제독은 피부병으로 병원에 입원중이라서 대신 스플루언스 제독이 부임하였습니다.
항모 작전에 별다른 경험이 없던 그는 참모장 엘리엇 브라우닝 대령의 조언을 대폭 받아들여 작전을 수행하기로 하였습니다. 이 콤비의 협동 작전은 나중에 커다란 성과를 만들게 됩니다. 연합한 두 기동함대의 통합 지휘는 스플루언스 보다 선임인 플레처 소장이 맡았습니다.
* 플레처 제독
아울러 니미츠 사령관은 일본의 공격 목표인 미드웨이에 있는 수비대의 방위가 걱정스러워 방위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직접 그곳을 방문하여 방위력을 강화하였습니다. 총 60대의 항공기에서 150대로 보강시켰고, 수비군은 해병대와 조종사 등 3,600명으로 증가시켜 이치기 대좌가 지휘하는 5,800 명의 일본 상륙부대를 맞아 싸울 태세를 갖추었습니다. 야마모토는 자체 정보에 의해 미드웨이는 해병대 750 명과 항공기 쉰 여섯 대 규모의 빈약한 수비대가 있는 것으로 낙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미드웨이 비행사들의 자질은 일본과 현격한 차이를 보여 미군은 일본 조종사들의 적수가 될 수가 없었습니다. 미군 비행사들은 비행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곧 바로 미드웨이에 배치되었으나 일본군 조종사들은 오래전부터 진주만 공격을 위해 맹훈련을 쌓은 데다가 이후 태평양과 인도양 전투에서 충분한 실전 경험을 쌓은 그야말로 베테랑들이었기 때문입니다.
* 스플루언스 제독
< 야마모토 사령관과 거함 야마토(大和)의 출동 >
한편 일본은 5월 27일 나구모 주이치 해군 중장이 지휘하는 항모군이 엄중한 무선 봉쇄를 실시하며 출격하였습니다. 주력 항모들은 제1항공전대의 아카키, 가가, 제2항공전대의 히류, 소류의 네 척이었습니다.
6개월 전 하와이를 공격했던 기동부대에서 제5항공전대의 쇼카쿠와 즈이카쿠가 빠진 것이었습니다. 참가했더라면 미드웨이 해전의 운명을 바꿔 놓았을지도 몰랐던 항모 쇼카쿠는 산호해 해전에서 입은 손상 수리에 무려 3개월이나 걸리는데다 산호해 해전에서 조종사 손실이 절반에 달했던 자매함 즈이카쿠는 트럭 섬에서 조종사 충원과 재정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전함 기리시마와 하루나 두 척의 전함이 호위함대의 주축으로 동반하였습니다. 그 뒤를 세계 최대 전함 야마토를 포함해서 5척의 전함을 중심으로 대함대가 거리를 두고 출동하였습니다. 사상 최대의 함대가 출동한 것이었습니다.
6월 3일 오후, 나구모 기동부대를 후속하던 주력 부대 기함인 야마토의 통신 감청반은 미드웨이 섬 부근에서 미군이 발신하는 항모 호출의 신호를 잡았습니다. 항모가 미드웨이 근해에 나타났다는 징조였습니다.
그러나 애초부터 절대 무선 봉쇄상태라는 지시 때문에 앞서가는 나구모 부대에서도 이를 접수했을 것이라는 안이한 가정을 하고 전달을 포기하였습니다. 항모의 통신 안테나는 전함의 통신 안테나 수신 능력보다 낮아서 기동부대에서는 이를 감청하지 못한 것입니다. 만약에 나구모 부대가 이 정보를 접수하고 경계를 했더라면 미드웨이에서의 전황은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미군은 초긴장 속에서 5월 30일 이후 미드웨이 기지 항공대 소속 32기의 카타리나 비행정들을 초계 임무에 배치하고 있었습니다. 6월 2일, 플레처 소장의 제17 기동부대와 스플루언스 소장의 제16 기동부대가 미드웨이 섬 북동 해역에서 합류하였습니다.
< 발견된 일본 함대 >
* 나구모 제독
미드웨이를 향해 항진하고 있는 나구모의 머리 속에는 미 항모가 지금 어디 있을까 하는 궁금증으로 온통 가득 차 있었습니다. 진주만에? 혹은 남태평양 어디에? 아니면 미드웨이에? 등등... 그러나 해군 참모들이 미 항모들은 남태평양에 있을 것이라는 진언을 듣고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구모는 세가지 추측을 합니다. 첫째, 미국은 일본의 계획을 모르고 있고 일본 기동 부대를 탐지하지 못했다. 둘째, 일본 기동 부대 근처에는 미국 함대가 없다. 셋째, 미드웨이를 공격하여 지상 기지 항공기를 파괴하고 상륙부대를 지원할 수 있으며, 그 다음 차례로 접근하는 미국 함대와 조우하여 이를 격멸한다였습니다.
이래서 나구모 함대가 미드웨이에 접근할 때 두 대의 미군기가 가까이 왔다가 사라졌으나 나구모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항모도 없는 친구들이 우리를 발견하면 뭐 해’하는 심정으로 자만에 빠진 나구모는 미드웨이에 접근하면서 정찰기조차 발진시키지 않았습니다. 나구모를 비롯하여 그 누구도 진주만 이후의 자기네 상승함대를 누가 막을 수 있겠느냐는 자만이 꽉 차 있었습니다.
야마모토도 미 항모들은 진주만에도 없고 미드웨이를 향해 출격하는 것도 발견 못했다고 잠수함 보고가 들어와 미 항모들은 남태평양 어디에 있을 거라고 편안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일본 잠수함들이 하와이와 미드웨이 사이에 배치된 것은 6월 1일이어서 이는 당연한 보고였을 겁니다. 그 전에 이미 미 항모들은 미드웨이 가까이 접근하고 있었으니까요. 특히 항모 요크타운은 침몰했던지 아니면 어딘가에서 수리 중에 있을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으니...
한편 미국측은 일본측보다 훨씬 강도 높은 경계 자세를 취하였습니다.
* 돈틀리스 급강하 폭격기
6월 3일 오전 9시, 카타리나 비행정 1기가 마드웨이에서 930km 떨어진 곳에서 일본 수송선단을 호위하고 있던 제2수뢰전대를 발견하였습니다. 이 발견된 부대는 곤도 노부다케 중장이 지휘하는 미드웨이 공략부대로서 미드웨이에 상륙할 이치기 대좌 이하 5,800 명의 상륙부대를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일본이 미국 함대를 발견한 것보다 하루가 빠른 것이었습니다. 급보를 받은 미드웨이 제7육군 항공 부대 분견대 소속 B-17 9기가 발진하였습니다. 오후 4시경. 선단을 발견한 B-17 부대는 폭격을 개시하였습니다.
폭격대장 월터 스위니 중령은 사령부에 자기 폭격대가 일본 전함, 공모, 수송선등을 공격하였고 다수의 적 함선을 격파했다고 보고했습니다. 실제로는 두 척의 일본 수송선이 함체 가까운 해면에 지근탄 공격을 받았을 뿐이었습니다.
미드웨이에서 보내온 적 함대 발견의 보고를 받은 태평양 함대 사령부는 뒤따른 B-17 공격 보고에 폭격을 가한 함대는 미드웨이 상륙 부대라고 판단하였습니다. 긴급 전문이 미 기동부대에 타전되었습니다. 기동함대 사령관 플레처 소장은 하와이 함대 사령부의 정보 판단과 의견을 같이 하였습니다.
이 때 플레처와 스플루언스가 이끄는 항 모 세척은 미드웨이 동북쪽 500km에서 은밀히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곤도의 상륙부대를 발견하였다는 보고를 받고서도 공격기를 발진시키지 않았습니다, 이들이 노리는 목표는 곤도의 순양함, 수송선 부대가 아니라 나구모의 주력 항공모함군이었으므로 목표를 발견할 때까지는 위치를 드러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 엔터프라이즈
< 미 기동부대의 접근 >
6월 3일 저녁, 미 기동함대는 일본 기동함대를 영격할 예상 지점을 향하여 남서로 진로를 변경하였습니다. 6월 4일 01:30. 미 항모 부대의 항공대원들은 이른 아침을 먹고 후 출격대기를 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한 시간 후 대원들은 정렬하여 함장과 비행대장으로부터 앞으로 있을 출격에 대해 주의와 훈시를 받았습니다.
04:15. 미드웨이 기지에서 카타리나 비행정이 출격하였고 15분 후 제17 기동 함대의 항모 요크타운에서 돈틀레스 급강하 폭격기가 정찰 임무를 받고 출격하였습니다. 정찰을 나간 폭격대가 일본군의 수상 정찰기 1기와 교전을 했다고 보고한 시점에 나구모 기동부대는 요크타운의 서방 370km를 항해하고 있었습니다.
< 미드웨이 1 차 공습 >
6월 4일 새벽, 나구모는 미 항모들이 근처에 없다고 확신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서 여러 대의 정찰기를 발진시켰으나 기상 악화로 정찰 거리의 절반 정도에서 정찰을 중지하고 돌아왔습니다. 만약 날씨가 좋아 미 항모들을 발견했다면 전투의 양상은 바뀌었을런지 몰랐습니다.
04:30, 나구모는 미드웨이 공습대를 발진시킵니다.
예정대로 미드웨이 공격을 위해 비행 갑판을 떠난 일본 항공기들은 상공에서 선회하며 편대를 이룬 뒤 동쪽으로 사라져 갔습니다. 6월 4일 오전 4시 45분이었습니다. 역사적인 순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조심성 많은 나구모는 만의 하나라도 미 항모가 나타나 역습을 할지 모르므로 항모 네 척이 보유하고 있는 항공기 가운데 절반인 108 대만 출격시키고 나머지는 만약을 위해 대기시켰습니다.
제1차 공격대의 지휘관은 도모나가 대위였습니다. 서른 여섯 대의 수평 폭격기, 서른 여섯 대의 급강하 폭격기, 서른 여섯 대의 최신형 제로 전투기로 이루어졌습니다. 미드웨이로부터 발진한 체이스 대위의 카타리나 비행정은 수많은 일본 함재기들이 미드웨이 섬을 향하여 비행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보고하였습니다.
* 돈틀리스 급강하 폭격기
06:00, 미드웨이 섬에서는 몰려오는 일본 공격대를 요격할 전투기 26기( 버팔로 20기, 와일드 캣 6기)가 출격하였습니다. 이어서 뇌격기 6기와 B-26 마로더 폭격기 4기, 급강하 폭격기 6기로 혼성 편성된 공격대가 나구모 부대를 향하여 출격하였습니다.
06:07, 미드웨이를 경유하여 일본군 항모부대 발견의 보고를 받은 미17기동부대 사령관 플레처 제독은 즉시 행동에 들어가 휘하 요크타운에 공격 준비를 하도록 명령하고 16기동부대 사령관 스플루언스 소장에게 일 기동함대 공격대를 발진시키도록 명령하였습니다. 미 해군의 항모 3척은 즉시 출동준비에 돌입했습니다.
* 도모나가 대위
06:16. 도모나가 공격대 108기가 미군 요격기들이 엄호하고 있던 미드웨이로 접근해갔습니다. 전투는 미군기들이 선제 공격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미군 요격기들은 선두의 도모나가 공격대장기를 포함한 함상 공격기대에 달려들어 불을 뿜었습니다. 그러자 후속하던 제로기 편대가 이들을 역습하면서 치열한 공중전을 벌였습니다. 약 15분간의 공중전에서는 실전 경험이 풍부한 노련한 조종사들을 주축으로 하는 일본 제로 전투기대의 완벽한 승리로 마감되었습니다.
미 요격기들을 물리친 도모나가 공격대는 저유소, 비행정 격납고, 전투 지휘소, 발전소를 폭격하였습니다. 대공포대 일부가 파괴되고 활주로도 파괴되는 등 기지 시설들도 타격을 입었습니다. 일본군은 함상공격기 5기, 함상폭격기 1기, 함상전투기(제로 전투기) 2기가 격추되었을 뿐이었습니다.
* 뇌격기
< 헨더슨 소령 >
태양이 막 수평선 위로 솟아오르려고 할 때 제2차 공격대 항공기 108대가 항모 네 척의 각 비행 갑판 위에서 발진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지휘는 진주만 공격 시 뇌격기대를 지휘했던 무라다 소좌였습니다. 무라다 소좌의 공격대는 혹시 근처에 미국 항모나 전함이 출현하면 즉시 출격하기 위해 동체 밑에 어뢰를 부착하고 발진 대기 중이었습니다.
이때 1차 공격대 도모나가로부터 미드웨이에 대해 제2차 공격이 필요하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몇 분이 지나자 일본군은 나구모 함대를 향해 미드웨이 기지에서 저공 비행으로 날아오는 미군기 뇌격기 편대를 발견했습니다. 이것을 보고 나구모는 도모나가의 요청이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미드웨이의 미군 항공기들이 살아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미 해병대의 데버스테이터 뇌격기들은 용감하게 일본 함대에 어뢰 공격을 감행했으나 일본 항모들은 지그재그 회피 운동으로 어뢰를 모두 피했습니다.
* 카타리나 비행정
상공을 경계하던 제로 전투기들은 느린 속도의 미군 뇌격기들을 쉽게 먹이로 삼았고 살아 남은 미군기들은 일본 함대에서 쏘아대는 격렬한 대공 포화에 맞아 모두 격추되었습니다.
한편 미드웨이 기지에서는 돈틀리스 급강하 폭격기 제241 비행대대 승무원들이 출격 준비를 끝내고 헨더슨 소령의 짧고 결의에 찬 훈시를 듣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비행대원들은 전부 방금 비행 학교를 졸업하고 미드웨이에 배치 받았으므로 급강하 폭격을 제대로 할 수 있는 파일롯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헨더슨 소령은 45도 내지 60도의 활공 폭격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이 각도는 대공포화의 밥이 되기 쉬웠으나 그로서는 어쩔 수 없었을 겁니다. 열 여섯 대의 돈틀리스 폭격대는 전투기의 엄호없이 나구모의 항모군을 향하여 용감하게 날아갔습니다.
그러나 일본 함대군은 이들 폭격기들을 모두 요절내 버렸고 헨더슨 소령의 비행기도 피격당하면서 항모 가가에 기체를 충돌하려고 돌진하다가 갑자기 화염에 싸이면서 가가의 좌현 물 속에 곤두박질쳤습니다.
열 여섯 대 중 겨우 여섯 대만 기지에 귀환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헨더슨 비행대의 과감한 공격에 놀란 나구모의 미드웨이 제2차 공격대의 발진이 늦춰지게 되고 결국 이것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 해군의 패배와도 연결됩니다.
< 운명의 결단 >
한편 나구모의 정찰기들은 이함한 지 두 시간이 되었지만 미국 함대나 미 항모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보고를 보내왔습니다. 나구모는 안도하였습니다. 오전 7시 14분, 나구모의 제로 전투기들이 헨더슨 소령의 폭격대를 사냥하고 있을 때 나구모는 운명적인 명령을 내립니다.
“공격 제2파는 장착한 어뢰를 육상 공격용 폭탄으로 바꿔 장착하고 미드웨이에 대한 추가 공격을 위해 비행 갑판에 대기하라!!” 이 명령을 내리고 얼마 있다가 정찰기 한 대가 요크타운 비슷한 항모를 발견했다는 보고를 무전으로 보내왔습니다. 나구모는 이크! 이거 큰일났구나 했을 겁니다.
마침 미드웨이를 공격하고 돌아오는 도모나가의 항공기들이 나구모의 항모군 위에 도착했습니다. 도모나가의 비행기들은 거의 연료가 떨어져가고 있었습니다.
* 항모 아카기
그래서 나구모는 이들 비행기를 착함시켜야 할지 아니면 발견된 요크타운을 공격하기 위해 신속히 폭탄을 어뢰로 바꾸고 공격대를 발진시켜야 할지 갈팡질팡하고 있었습니다. 숙고한 끝에 나구모는 미 항모를 먼저 공격하고 그 뒤에 미드웨이를 공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때 항모 히류에 있던 차기 연합함대 사령관 감이라는 야마구치 다몬 소장은 즉각 현재의 공격대를 전투기 호위 없이 그대로 발진시키자는 제언을 해왔습니다.
어뢰로 바꿀 시간이 없으니까 지금 그대로 장착 중인 폭탄으로 빨리 미 항모를 공격하자는 얘기였습니다. 나구모는 알았다는 말만하고 참모들과 끙끙거리고 있었습니다. 결국 나구모는 현재 상공을 떠돌고 있던 전투기들을 착함시켜 연료를 보급한 다음 전투기들로 하여금 뇌격기와 급강하 폭격기를 호위하게 하는 정공법을 택하게 됩니다. 나구모는 전투기 호위 없이 공격대를 미 항모에 보내면 방금 전의 미군기와 같은 꼴이 될 것을 걱정한 겁니다.
미 항모들은 시시각각 다가오는데 금쪽같은 시간이 이렇게 폭탄을 바꾸느라고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네 척의 항모들은 난리가 났습니다. 비행 갑판 위에 있던 모든 항공기들은 그 아래층인 격납고에 엘리베이터로 내려졌고 항모 공격을 위해 다시 폭탄에서 어뢰로 바꾸는 작업으로 돌입했습니다. 시간에 쫓겨 떼어 낸 폭탄을 폭탄 창고에 갖다 둘 시간이 없어 일단 비행기들 옆에 놓는 등 승무원들은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 바람에 고성능 폭탄들이 항모 격납고 안 도처에 널려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나중에 큰 화를 불러 일으키게 됩니다. 한편 비행 갑판 위에는 도모나가의 비행기들이 차례로 착함하기 시작했습니다. 오전 9시 20분 폭격기들의 무장을 어뢰에서 폭탄으로, 다시 폭탄을 어뢰로 바꾸는데 두 시간이 걸렸으며, 이제 모든 항공기는 발진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한편 미군의 카타리나 비행정은 구름 위에 숨어서 계속 나구모 함대의 일거일동을 플레처 소장에게 보고하고 있어 플레처는 공격할 최적의 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6월 4일 동이 틀 무렵 정찰기로부터 미드웨이 북서쪽 370km 해상에 일본 항모 두 척이 있다는 보고를 받은 플레쳐는 즉각 항모 호넷과 엔터프라이즈에 출격 명령을 내렸습니다.
* 6월 4일 오전 4시~8시, 나구모의 미드웨이 폭격, 오른쪽 엔터프라이즈,호넷,요크타운이
접근하고 있는 상황
지금이야말로 미드웨이를 공격했던 도모나가 공격대가 귀함하고 있을 시간이라고 계산한 스플루언스가 호넷의 서른 다섯 대의 급강하 폭격기, 열 대의 전투기를 발함시켰습니다. 이어서 엔터프라이즈 호의 서른 다섯 대의 급강하 폭격기, 열 네 대의 뇌격기, 그리고 열대의 전투기를 발함시킴으로써 두 척의 항모로부터 발진한 공격대는 모두 119 대였습니다.
플레처는 일본의 항모 수를 네 척 또는 다섯 척으로 추산하고 있어 정찰기가 보고한 두 척 외에 어딘가에 다른 항모들이 있다고 생각하며 요크타운의 항공기를 발진시키는 것을 주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먼저 발진한 엔터프라이즈 호의 함재기들이 적 함대들이 공격 거리에 있다고 보고하자 열 일곱 대의 급강하 폭격기, 열 두 대의 뇌격기, 여섯 대의 전투기를 발진시키고 만약의 경우에 대비하여 예비로 절반의 항공기를 대기시켜 놓았습니다.
* 항모 호넷
요크타운에서 함재기들이 발함한 지 50분이 지나자 호넷과 엔터프라이즈에서 출격한 공격 제1파는 드디어 나구모 함대를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제일 처음 일본 함대에 접근한 미군 뇌격부대 열 다섯 대는 일본 전투기와 대공 포화에 모두 격추당했습니다.
이 뇌격부대의 유일한 생존자는 조지 게이 소위였는데 그는 일본 전투기에 격추당했으나 조종석 고무 의자 방석을 붙잡고 물 위에 떠 있으면서 눈 앞에서 펼쳐지는 생생한 미드웨이 해전을 처음부터 구경하다가 다음 날 카타리나 비행정에 의해 구조되었습니다.
미군은 뇌격기 부대를 호위하던 전투기들은 앞을 가리는 구름과 통신 장애 때문에 뇌격대를 놓치는 바람에 뇌격기들이 일본 전투기들에 의하여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겁니다.
호넷의 뇌격부대가 공격한 지 15문이 지나 이번에는 엔터프라이즈의 뇌격대와 요크타운의 뇌격대가 뒤를 이어 나타났습니다. 이들도 호넷 뇌격대처럼 전투기 호위없이 나타났는데 이들도 통신 장애 때문에 아군 전투기들이 6천 미터 상공에서 헛되이 선회하고 있었습니다. 이들도 마찬가지로 호넷 뇌격대처럼 모두 일본 제로 전투기들의 밥이 되었습니다.
* 오전 8시~10:30 미군 항공기들의 나구모 항모들에 대한 폭격
이로써 미드웨이 전투가 시작되면서 수많은 미군기가 일본 함대를 공격했지만 일본 함대는 여태까지 피해를 입지 않았고 대신 미군기들은 처절할 정도로 일본 함대 바로 앞에서 격추되었습니다. 나구모를 비롯한 일본 함대의 승무원들은 이번 미드웨이 작전은 완전히 일방적으로 이김으로써 이제 태평양 전쟁도 곧 일본의 승리로 끝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지금까지는 일본군의 최고의 순간이었을 겁니다.
뇌격대들은 모두 섬멸되었지만 이들의 활동은 간접적으로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 해군이 승리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그것은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 이들 뇌격대는 일본 기동부대를 연속으로 흔들어 이들로 하여금 신속한 반격에 나서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둘째, 미군기들은 대부분의 일본 전투기들이 뇌격대에 눈이 팔려 자기 위치를 이탈하게 만들었습니다.
셋째 많은 제로기들의 실탄과 연료를 소모하게 만들어서 다음 미군 폭격대 요격에 대처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일본의 제로기들도 계속되는 이함-전투-착함-보급-이함을 되풀이 하느라 피로가 누적되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공격을 시도하다가 섬멸된 요크타운의 뇌격대는 특히 승리를 위한 중대한 기여를 했습니다.
일 기동부대 남동쪽에서 저공으로 공격해온 요크타운의 뇌격대를 영격하느라 일본 호위 전투기들은 모두 남동쪽 해역 저공에 몰려들어 일 기동부대 상공의 고공을 비워 놨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요크타운의 요격 직후 발생한 일본 전투기들의 방심은 곧 일본 기동부대의 참변으로 결론이 나게 됩니다.
여러 번 되풀이하다가 실패로만 끝난 미 뇌격대원중에 바다에 불시착하거나 낙하한 미 해군 조종사 2명과 한 명의 탑승원은 표류하다가 일본군에게 포로가 되었습니다. 일본 해군은 이들로부터 중요한 정보들을 뽑아내고 물을 넣은 석유통에 묶어 바다 속에 수장시키는 잔인한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 역사를 바꾼 운명의 5분, 맥클러스키 폭격대 >
미 항모 세 척에서 발진해 온 마흔 한 대의 뇌격기 가운데 여섯 대만이 항모에 귀함하였습니다. 일본 항모들은 한 척도 어뢰에 맞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 때 맥클러스키 소령이 이끄는 엔터프라이즈에서 발진한 운명의 돈틀리스 급강하 폭격대가 서서히 날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폭격기들이 정찰기의 보고에 의존한 현장에 도착하자 일본 함대는 보이질 않았습니다. 항로를 변경한 것입니다.
급강하 폭격대를 지휘하는 맥클러스키 소령은 잠시 생각을 하다가 이는 필시 일본 함대가 북쪽으로 항로를 변경했을 것이라고 판단합니다. 맥클러스키 소령은 일본 기동부대가 북방으로 이동했으리라고 판단하고 변침과 수색을 되풀이하며 북동쪽 바다를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 맥클러스키 소령
함재기의 발진과 회수에 바람 방향이 중요한데 이 해전의 무대에서 북쪽에서 바람이 불어왔기 때문에 항모들이 함재기 발진을 위해서 이쪽으로 향했을 것이라는 그의 예감 때문이었습니다.
맥클러스키 소령의 감투정신 없이는 할 수 없는 명령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때 폭격대의 연료가 거의 절반 밖에 남지 않았으므로, 만약 일본 함대를 발견하지 못하면 폭격대는 귀함하지 못하고 바다에 떨어질 판이었습니다. 미드웨이 해전의 결정적인 순간이었습니다.
명령을 내린지 20분이 지난 오전 10시쯤 북쪽으로 향하는 폭격대 밑 해상에 가느다란 흰 선이 보였습니다. 곧 이어서 일본 항모군이 보였습니다. 아카기, 가가, 소류, 히류 등 일본 주력 항모들 네 척이었습니다.
* 오전 10:30~오후 5시 50분, 일본 항모 아카기,가가,소류를 침몰시키고
히류를 공격하고 있는 미군 폭격기들, 그 사이 오른쪽 히류의 포격기들로
부터 피격받은 요크타운
이 때만해도 나구모는 기분이 절정에 달해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일본측이 뭔가 보여줄 때라고 생각하면서 항공기들의 발진을 명령했습니다. 바로 그 때 구름 사이에서 맥클러스키 소령의 돈틀리스 급강하 폭격기 세 대가 겁도 없이(dauntless는 겁이 없다는 뜻입니다) 아래에 있는 아카기를 향해 내리 꽂히듯이 하늘에서 떨어져 내려오면서 폭탄 세발을 떨어드려 이 중 두 개의 직격탄을 명중시켰습니다.
폭탄 한 발은 아카기의 아래층 격납고 바닥에 흩어져 있던 폭탄과 어뢰 및 항공 연료에 인화되어 가공할 대연쇄 폭발을 일으켰습니다. 함교에 있던 나구모와 함장 그리고 참모들은 가까스로 함을 탈출하여 순양함 나가라로 황급히 피신했습니다.
* 피격당하는 아카기
아카기 근처에 있던 가가에도 맥클러스키 소령의 다른 아홉 대의 급강하 폭격기들이 아카기에 대한 공격보다 1 분 전인 10시 23분에 내리꽂히면서 직격탕 네 발을 명중시켜 가가 역시 불기둥과 화염에 휩싸였습니다. 맥클러스키 급강하 폭격대가 이런 가공할 폭격을 하고 있는 동안 요크타운에서 발진한 열 두 대의 급강하 폭격기들이 추가로 현장에 도착했습니다.
이들도 10시 25분 소류에 급강하 폭격을 하자 직격탄 세 발을 얻어맞고 아카기와 가가에 이어 역시 불덩어리가 되었습니다. 불과 5분 만에 일본 해군이 자랑하던 세 척의 항모가 불길에 싸였고 이 후에도 폭발은 계속되었습니다. 세 척의 항모는 바다 위에 떠 있는 지옥으로 변했습니다.
일본 함대는 마지막 남은 항모 히류를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집결하면서 전투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히류는 야마구치 다몬 소장이 이끌고 있었는데 그는 나구모 중장보다는 직급이 낮았지만 훨씬 단호하고 명쾌한 두뇌의 소유자로서 야마모도의 후임 사령관감으로 칭송받던 인물이었습니다.
* 회피 기동하는 히류
그는 애초에 나구모가 어뢰를 달 것이냐 아니면 폭탄을 달 것이냐하고 우왕좌왕할 때 어뢰가 아니더라도 폭탄을 그대로 달고 가서 미 항모에 떨어트리자고 직언하기도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야마모토 역시 진주만 기습 이전부터 나구모보다는 다몬에게 그 지휘를 맡기고 싶어 했지만 대본영의 해군본부 내의 알력싸움과 서열 때문에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나구모 함대 뒤 550km에서 뒤따라오던 주력부대의 전함 야마토의 작전실에서 미드웨이로부터 길보를 기다리던 야마모토는 세 척의 항모가 침몰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그야말로 망연자실해졌습니다.
* 회피 기동하는 소류
오전 10시 40분, 야마구치 다몬 소장은 세 척의 항모가 침몰하였다는 보고를 접하고 즉시 급강하 폭격기 열 여덟대와 호위 전투기 여섯 대를 발진시켰습니다. 요크타운을 발견한 일본기들은 여기에 달려들었습니다. 엔터프라이즈와 호넷에서 요크타운을 돕고자 달려왔습니다. 주위 함선들의 격렬한 대공포화와 전투기들의 사격으로 열 세대가 격추되었으나 다섯 대는 요크타운에 세 발의 폭탄을 명중시켰습니다.
1차 공격대가 돌아가면서 도모나가가 지휘하는 2차 공격대가 다시 발진하여 요크타운에 달려들었습니다. 1차 미드웨이 공격대를 지휘했던 도모나가는 왼쪽 연료 탱크가 파괴되어 오른쪽 연료 탱크에만 연료를 급유 받은 뒤 열 여섯 대의 공격대를 이끌고 미국 함대가 있는 방향으로 돌진하였습니다. 가는 도중에 귀함하는 1차 공격대로부터 요크타운이 대파됐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 피격 당한 요크타운
도모나가 공격대는 요크타운을 발견하였으나 요크타운이 너무 빨리 복구되는 바람에 도모나가는 이 항모가 다른 항모인줄 알고 폭격을 하기로 결심합니다. 필사적인 탄막을 뚫고 들어간 일본 뇌격기들에 의하여 발사된 어뢰 두 발이 요크타운에 직통으로 명중하면서 2만 톤의 요크타운은 놀란 말처럼 물 위에서 뛰어 오르듯이 요동치면서 거대한 불덩어리로 화했습니다. 도모나가는 요크타운 피격 직전에 어차피 귀함 못하는 입장인지라 그대로 요크타운의 갑판에 돌진하였습니다.
히류에서 발진한 도모나가 비행대가 요크타운을 공격한 것이 미드웨이 해전에서의 일본의 마지막 공격이 되었습니다. 한편 요크타운이 집중으로 얻어맞고 있을 때 미군 정찰기가 히류를 발견합니다. 이 보고를 받고 오후 4시 엔터프라이즈에서 스무 대의 돈틀리스 폭격기와 호넷에서 열 여섯 대의 폭격기들이 발진했습니다.
1시간 후 엔터프라이즈호에서 발진한 돈틀리스 폭격대가 히류를 발견하고 곤두박질하여 내려오면서 검은색 폭탄들을 투하하기 시작했습니다. 폭탄 네 발이 비행 갑판에 명중하여 폭발하자 발함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비행기들의 폭탄과 연료 탱크가 폭발하면서 히류도 화염에 휩싸였습니다. 야마구치 소장은 불구덩이 속의 히류에 끝까지 남아 최후를 맞았습니다.
* 얻어 맞는 요크타운
요크타운은 왼쪽으로 심하게 기울면서 이미 회생이 불가능해짐에 따라 플레처 소장과 벅마스타 함장을 비롯한 2천 여명의 승무원들은 퇴함을 하게 되었습니다.
6월 5일 새벽 야마모토는 공식적으로 미드웨이 작전의 실패를 인정하고 작전을 취소한다고 말하면서 태평양 전쟁의 분수령이 되는 대해전은 막을 내렸습니다. 미드웨이 해전 결과 미국과 일본 양측이 입은 손실은 아래와 같았습니다.
* 미국측
항모 한 척 침몰, 구축함 한 척 침몰, 항공기 147대 피격, 전사 307 명
* 일본측
항모 네 척 침몰, 중순양함 한 척 침몰, 항공기 322대 피격, 전사 3,500 명
이틀 동안 벌어진 치열한 전투로 양국의 수많은 젊은이들과 거대한 함선들이 미드웨이 앞바다 5천 미터 속에 수장되었습니다. 일본측 전사자 중에는 316 명의 베테랑급 조종사들과 탑승원이 포함 되어 있습니다. 노련한 조종사를 양성하는 것은 비행기를 다시 생산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과 노고가 필요로 합니다. 이와같은 알토란같은 파이롯들의 대거 상실은 향후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수행하는데 두고두고 애를 먹게 합니다.
< 요크타운의 침몰 >
한편 일본 함대 히류의 공격으로 대파된 요크타운은 회생이 희망적으로 보였습니다. 극심한 피해에도 불구하고 요크타운은 침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요크타운은 해군함 비레오에 의해서 견인되어 하와이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6월 6일 늦은 오후 일본 잠수함이 추적해서 어뢰를 발사했고 두 발이 요크타운에 명중하였습니다.
요크타운은 이미 모든 승조원들이 대피해서 인명 피해는 불과 몇 명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러나 한 발이 요크타운을 밀고 있던 구축함 함만에게 명중하여 적재한 폭뢰가 터졌습니다. 함만은 함체가 두 쪽으로 갈라져서 침몰했습니다. 이로 인해 80여명의 승조원이 사망했습니다.
어뢰에 피격된 요크타운은 더 이상 예인이 불가능해보였습니다. 구조팀은 언제 침몰할지 모르는 요크타운을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요크타운은 불사신같은 투지를 보이며 다음날 6월 7일 오후 다섯 시까지 해면에 떠 있다가 바닷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스플루언스의 기동부대는 일본 함대를 웨이크 섬까지 추격하다가 다시 함수를 동쪽으로 돌려 철수하였습니다. 요크타운의 침몰은 두리틀 폭격대의 일본 폭격으로 유발되었던 미드웨이 전투가 그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일본은 대패하였고 미국은 대승한 전투였습니다.
< 일본측의 인원피해 >
미 기동부대는 하와이로 철수했습니다. 만신창이가 된 일본 함대는 서쪽으로 항해를 하여 6월15일 일본 히로시마로 돌아왔습니다. 해군의 최고위층과 일왕 히로히토에게는 미드웨이 해전의 패배에 대한 사실을 알렸을 뿐 재앙에 가까운 패배에 대해서는 철저히 숨겼다. 심지어 육군의 최고위층에게도 숨겼습니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부상을 입은 장병들은 격리 입원 되었고 침몰함에서 살아남은 장병들은 가족과의 면회마저 금지당하고 남태평양에서 활동 중인 각 부대에 분산 배치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대패의 책임자중 문책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최대의 책임을 질 나구모는 다시 편성한 기동부대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 영화에서...미군 정찰기
< 미드웨이 해전의 패인 >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이 대패한 주요 원인을 분석해보면 첫째, 태평양 전쟁 내내 일본에게 치명타를 안긴 정보전에서 미군에게 당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야마모토가 최악의 경우를 설정하지 못하고 너무도 자신만만하게 안이한 작전을 실행했었기 때문입니다.
적 기동함대의 조기 출현에 대비한 정찰 활동도 부족했었고 조기 출현 시에 대비한 긴급 행동에 대해서도 별다를 준비가 없었습니다. 또한 철저하게 무선 통신을 금지하면서 최초 미 항모들의 움직임을 나구모에게 알려주지 않았던 점도 중요한 실책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집중의 원칙을 외면하고 미드웨이 점령과 적 함대 격멸의 두 마리 토끼를 쫓았다는 점을 들 수가 있습니다. 두 마리 토끼를 쫓았던 결과는 미 함재기들의 공격에 노출할 수많은 허점을 제공하였습니다. 네 번째는 정찰기를 동원한 색적, 즉 해상 수색 활동이 너무 빈약했었습니다.
네 번째로 나구모 제독의 미흡한 상황 판단 능력이 발목을 잡았습니다. 어뢰를 다느냐 폭탄을 다느냐하며 우왕좌왕하다가 황금같은 시간을 허비하면서 미 폭격기들의 급습을 받게 됩니다. 다몬 소장이 현재 그대로 폭탄을 달고 미항모군으로 달려가자는 제언이 무시당한 것도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 다몬 소장
끝으로 승운(勝運)이 일본 함대를 외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대승한 미국 해군의 한 간부가 이 해전에서 승리한 것은 “행운의 혜택이었다.“라고 말했었습니다. 이것을 일본 측에서 말하자면 “악운이 대패를 안겨주었다.”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미군 항공공격을 여러 차례 막아내던 일 항모 부대가 엔터프라이즈에서 발진한 마지막 급강하 폭격대가 가한 단 한차례의 기습에 네 척의 항모를 잃고 개전 단 6개월 만에 일 해군의 괴멸이 시작되는 비극을 맛본 것입니다. 이는 맥클로스키 소령이 연료 문제로 귀함하지않고 그대로 북쪽으로 진로를 돌려 일본 항모군을 발견한 것은 미군으로서는 참으로 천운이었습니다.
< 주도권을 빼앗긴 일본 해군력 >
미드웨이 해전은 국력의 차이를 도외시 하고 거대국 미국에 도전한 일본이 완전히 무릎을 꿇은 최초의 전투였습니다. 몇 번의 항모 기동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나구모 부대의 긴 칼의 맛을 보여줄 다음 적은 어디에 있느냐?”라고 큰소리치던 기동부대 간부들은 이제 내심 국가 멸망을 걱정하기 시작했습니다.
미드웨이 해전 뒤에 실상을 알게 된 어느 해군 간부는 "이제 일본 해군은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다“라고까지 말했는데 일본 해군에 결정적인 강타를 먹인 미군은 3개월 뒤에 과달카날에서부터 반격을 가하면서 3년 뒤 일본을 항복시켰습니다.
< 미 태평양 함대 사령관 니미츠 원수 >
* 니미츠(왼쪽), 일본의 항복 조인식이 거행되던 미주리 함상에서...
그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소리없는 영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태평양 전쟁을 수행하면서 천산천하 유아독존의 맥아더, 불같은 황소 핼시, 깐깐하고 도도한 킹, 울부짖는 미치광이 스미스처럼 육군과 해군의 기라성같은 개성파 인물들을 조율하며 조용하지만 결단력 있는 리더십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또한 진주만 공습 이후 일본 해군에 비해 현저한 열세의 함대를 적절하게 운용하면서 결국 전세의 역전을 이끌어 냈습니다. 니미츠가 맡았던 태평양함대 사령관의 자리는 독이 든 성배일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전력의 열세에 따른 어려움을 극복하고 태평양전쟁의 승리를 이끌어냄으로써 자신이 뛰어난 전략가이자 최고의 리더임을 보여주었습니다.
태평양함대 사령관 겸 태평양지역 사령관으로서 그가 보여준 리더십은 오늘날에도 큰 울림으로 전해옵니다. 그는 결코 권위적이지 않았습니다. 또한 불간섭주의 지휘관으로 유명했던 그는 부하들을 믿고 임무와 책임을 맡긴 뒤, 뒤로 물러나 있으면서도 능 그들을 지켜보았고, 부하들의 실수를 관대하게 받아들였고, 그 실수를 만회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으며, 자기 편이 아닌 사람도 끌어안는 포용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아울러 어떠한 외압에도 흔들리지 않는 원칙주의자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해군차관 포레스틸이 전과가 있는 그의 친구를 해군 소령으로 승진시켜달라고 했을 때, 그는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잠수함 분야의 독보적인 권위자이기도 했던 그는 훗날 원자력 잠수함을 개발하는 데 크게 일조하기도 했습니다.
어렵게 해군참모총장이 되고 나서 루이스 존슨 국방장관을 비롯한 육군 지상주의자들의 공격으로 해군과 해병대가 존폐 위기에 처하자, 미래의 해군력 활용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소신껏 말함으로써 국민적 공감대를 불러 일으켜 해군과 해병대를 지켜내기도 했습니다.
그는 전쟁이 끝난 후 연봉 1만5천 달러라는 빠듯한 수입에 맞춰 검소하게 생활하면서 여기저기에서 보수가 두둑한 일자리를 제안 받았지만, 자신의 화려한 군 경력을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하려 하지 않은 참군인이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유명해진 다른 지휘관들과는 달리, 그는 결코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태평양전쟁의 진정한 승자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인생에서도 승자였습니다. 그 누구보다 자기 자신에게 엄격했던 사람, 함께 근무했던 사람들의 생일이나 기념일을 잊지 않고 있다가 축하해주는 따뜻한 인간미가 넘치는 사람, 언제 어디서나 사람들을 즐겁게 만드는 유머감각까지 두루 갖춘 사람이었기에 모두로부터 존경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
태평양 전쟁 당시 연합함대 사령관이었습니다. 진주만 공습의 입안자로, 미국에 유학을 갔다 왔고, 워싱턴 주재 일본 대사관 무관으로 근무한 경력이 있어 미국의 잠재력을 알고 있었던 지미파였고 해군 내 협상파에 속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미국과의 전쟁을 결사반대하였습니다.
하지만 결국 전쟁이 확실시 되자, 진주만 기습을 성공시키며 승승장구 하지만, 약 반 년 후 미드웨이 해전에서 정규 항모 4척을 날려 먹는 치명적인 패배를 겪습니다. 이후로도 일본 해군의 실질적인 최고 지휘관으로서 과달카날 전투 및 그에 연계된 해상전과 공중전을 지휘합니다.
이후 이어진 부겐빌 공중전이 한참 진행되던 중인 1943년 4월 18일, 비행기에 탑승하여 쇼틀랜드, 라바울 등 남방 전선을 시찰하던 중, 일본군의 암호를 해독한 미군의 캑터스 항공대 토머스 랜피어 대위의 P-38 라이트닝에 의해 부겐빌 섬 상공에서 격추되어 전사하였습니다.
* 제2차 세계대전 까지
그는 러일전쟁 당시 일본 해군 소위로 종군하며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의 지휘 아래 쓰시마 해전에서 러시아 발트 함대와 교전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오른손 왼손 손가락 2개를 잃었는데, 알려진 바와는 달리 전상이 아니라 그냥 사고였습니다.
1914년 고급 과정인 해군대학을 졸업했습니다. 1919년에 미 대사관 무관으로 파견되었을 때, 하버드 대학에서 연수하고 이 때 유창한 영어를 익히게 되었습니다. 1921년부터 1923년에 걸쳐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 관계로 미국을 자주 방문하였습니다.
이 때 그가 직접 보고 느낀 미국의 잠재력에 훗날 태평양 전쟁을 적극적으로 반대하게 됩니다. 압도적인 생산능력, 풍부한 물적/인적자원, 기술력과 교육 수준 등등 미국의 모든 것은 일본에 비해 말 그대로 넘을 수 없는 벽이라는 현실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미국은 제2차 세계 대전 이전부터 이미 모든 인프라와 철강 생산량 등 경제적 수준에서 열강들이 수두룩 모여 있던 유럽을 압도하였으며 대학의 수와 수준 또한 이미 유럽의 그것을 능가하여 식자율도 세계 최고 수준이었습니다.
당시 일본에서는 귀중품이었던 설탕이 미국에선 무진장 있었다는 것도 그에게는 쇼크였다고 합니다. 하여튼 미국의 엄청난 잠재력을 그는 간파하고 있었던 겁니다.1935년 해군성 항공본부장에 취임해 일찍부터 거함거포주의의 한계를 간파하고 해군항공대와 항모전단 편성에 심혈을 기울여 선진적인 항모전술을 만들어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
러나 사실 항공기의 진가를 알아봤다기보다는 일본이 미국과의 생산력 경쟁에서 이기려면 선박보다는 항공기 쪽이 그나마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을 뿐입니다.
특히 전함은 미국과의 경쟁에서 절대로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일본 최대의 거함 야마토의 건조에 대해서 '야마토를 만들 돈이면 제로전투기 1,000기는 뽑아낼 수 있다'며 반대한 것도 이것의 일환이었습니다.
다만 구상한 항공모함 운용은 최후의 함대결전을 대비한 작전의 일환이었고, 그것이 결정적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항공모함을 잘 운용하여 적의 주력 함대를 약화시킨 다음, 일본 근해로 다가오는 적의 함대를 러일전쟁의 쓰시마 해전과 같은 함대결전으로 제압하여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다는 것이 그의 원래 구상이었습니다.
'전함이란 건 함대 기함으로 사용할 것과 그 예비로 사용할 것으로 총 2척만 있으면 충분하다'라는 발언이나, 야마토의 건조현장에서 작업자들에게 '이제 전함은 필요 없어질 테니 자네들은 조만간 실업자가 되겠구만'같은 맥빠진 소리를 하여 수많은 관계자들에게 원성을 산 에피소드가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막상 거함 야마토가 완성되고 난 뒤에 '이 배가 있으니 반드시 이길 수 있다'라는 발언을 한 것으로 보면 야마토 자체를 싫어했던 건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그러나 현실감각이라는 게 아예 없었던 다른 장성들과는 달리 처음부터 미국과의 전쟁이 승산없는 전쟁임을 예감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미국과의 평화협정을 유지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기 때문에 정국을 장악했던 일본 육군 강경파와 대립했는데 오죽하면 1939년에 연합함대 사령장관에 오른 것도 강경파의 암살위협을 피하기 위한 조치였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당시 연합함대 사령부는 육상이 아닌 전함 나가토 함상에 있었기 때문에 암살자가 접근하기 어렵다는 얘기죠. 그가 당시 총리였던 고노에 후미마로에게 언급한 '"우리는 처음 6개월에서 1년 정도는 맹렬하게 돌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후에는 텍사스의 유전과 디트로이트의 공장들이 (우리에게) 단호하고 결정적인 반격을 시도해 올 것이다."는 언급은 실제로 거의 들어맞았습니다. 주변에서는 요나이 미츠마사, 이노우에 시게요시와 함께 해군 좌파 삼인방으로 불렸다고 합니다.
* 진주만 공격, 그리고 짧은 영광
그러나 같이 개전을 반대하던 요나이가 일본 총리직에서 물러나고 확전파 도조가 취임하면서 미국과 전쟁을 불사하자는 분위기가 형성됩니다. 그러자 그는 태도를 180도 바꾸어 "미국과 전쟁을 한다면 미 태평양 함대의 본거지인 진주만을 공습해 기선을 제압해야 승리의 가능성이 있음"을 역설하며 철저한 준비와 훈련에 매달렸습니다.
관동군처럼 본국의 의사에 반해 전쟁을 일으킨 것은 아니지만, 러일전쟁 이후의 대미전략으로서 남방작전을 상정해온 일본 해군의 계획을 뿌리부터 뒤집는 진주만 공격을 강하게 주장하고 자신의 자리까지 걸며 끝내 관철시킵니다.
1941년 12월 7일 개시된 진주만 공습을 철저한 준비로 대성공을 거두어 본래 목적인 미 함대 전력들을 상당수 격침시키거나 전투 불능으로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공격시 유류저장고 등의 기간시설을 제거하지 못함으로서 후일 미 해군의 재기의 단초를 만들어주고 말았습니다.
실제로 그는 진주만 공습 성공소식을 듣고 '잠자는 사자를 건드린 것은 아닐까?'라는 말을 했다는데 이것은 영화 <도라 도라 도라>의 한 장면입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이 진주만 공습으로 주력 전함 및 중순양함이 왕창 털린 미 해군은 이때의 전훈을 집중적으로 받아들여 현대적인 항모를 전력의 핵심으로 삼는 함대를 찍어내기 시작합니다.
미국은 전함을 포기하고 항모찍기로 전환한 게 아니라, 진주만에서 가라앉은 전함 대부분을 인양해 업그레이드해서 재투입하고 계획된 전함을 찍어내는 건 계속 하면서 항모를 따로 찍어냈습니다.진주만 공습 이후에 야마모토가 요미우리 신문의 기자와 한 인터뷰는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요미우리 기자: 진주만 공습이 성공했는데, 이제부터 어떤 방식으로 미국과 싸우실 겁니까? 야마모토 이소로쿠: 미국과의 휴전조약을 준비할 겁니다.
말만 들어보면 곧바로 전쟁을 중단할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하와이를 점령하고 이곳을 기점으로 파나마 운하를 틀어막으면 공업기반이 동부에 집중돼있는 미국으로서는 손을 들 수 밖에 없을테니 이때 선심 쓰는 척 조약을 맺으면 된다는 계획이었습니다.
이후, 둘리틀 특공대의 공습으로 충격에 빠진 대본영의 분위기를 바꾸고, 미군의 잔여 항공모함들을 모조리 격침하기 위해 미드웨이 공략을 계획합니다. 그러나 이미 미군은 일본군의 암호를 모조리 해독해 작전의도를 다 파악한 상태였고, 여기에다 방만한 작전 계획으로 인해 제대간 협동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거기다 항모기동부대의 지휘를 맡았던 나구모 주이치의 헛발질이 겹치면서 작전에 동원된 정규항모 4척을 잃는 대참사를 당했습니다. 너무 믿기지 않는 지독한 패배라, 사기에 영향을 줄까봐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일반에는 기밀사항이었다고 합니다. 일본 외무대신 시게미츠 마모루까지도 전후에야 이걸 알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합니다.
이후, 그의 노력은 아무 소용없이 전황은 악화일로를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1943년 4월 18일 솔로몬 제도 상공에서 비행기를 타고 가던 중 암호를 해독한 미군 항공기의 공격으로 격추되면서 사망합니다.
< 나구모 주이치 제독 >
진주만 공습을 지휘한 나구모 제독은 진주만 공격 이후 연이은 남방작전에 항모부대를 지휘한 공을 세웠지만, 야마모토와 달리 일본 군부 내에서의 영향력은 전혀 늘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6개월여 뒤 미드웨이 해전의 패배라는 최악의 결과를 거두면서 나구모는 항모부대 지휘관 자리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이후 다시 복귀하여 과달카날 전투에 참가했지만 산타크루즈 해전에서 상처뿐인 승리를 거둔 끝에 결국 항모 기동부대 지휘관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이후 수상함대 사령관직을 이어가다가 사이판 전투에서 자살합니다.
나구모와 야마모토는 서로가 한 편이 아니었습니다. 야마모토는 협상파의 일원이었고 나구모는 개전파의 일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간의 역량의 차이는 현격하였습니다.
항모기동부대 지휘관의 자리는 어디까지나 연공서열 때문에 앉게 된 것이어서 나구모 스스로도 이 자리를 불편해 했고, 그를 그 자리에 임명한 야마모토 역시 이런 상황을 그리 내켜하지 않았지만 연공서열이 지배하는 당시 일본 해군 내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이러한 불편한 관계는 진주만 공습을 전후로 더욱 심해졌습니다. 진주만 공습을 강하게 반대했던 주역 중 한 명이 바로 나구모였으며, 이후 진주만에서 3차 공격을 포기하고 돌아온 나구모에 대한 야마모토의 시선은 더욱 차가워져 버렸습니다.
야마모토는 나구모를 바로 해임해버리고 싶었지만 승리한 장수를 그런 식으로 대했다가는 커다란 후폭풍이 닥칠게 뻔했고, 이후 남방작전의 공이 더해지자 나구모를 끌어내릴 명분은 아예 사라져 버렸습니다.
하여튼 나구모에 대한 야마모토의 시선 때문에 연합함대 내에서 나구모의 발언권은 사실상 없는 셈이었으며, 남방작전 이후의 전략적 행보에 대해 육군에서 주장하는 수세적인 전략을 지지했다가 연합함대 내에서 완전히 무시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나마 나구모가 항공전 분야에 무지했던 게 역으로 야마모토의 명령에 달리 반박하지 못하고 고분고분 따르는 모습으로 이어지자 야마모토도 이 상황이 그리 나쁘지는 않다는 선에서 만족해 하던 터였겠지요.
[ 둘리틀 공습 ]
* 항모 호넷 위의 폭격대
둘리틀 공습(1942년 4월 18일)은 제임스 해롤드 둘리틀 중령이 지휘하는 B-25 미첼 경폭격기 편대가 항공모함 호넷을 출발하여 일본을 폭격한 사건입니다.
지미 둘리틀 중령의 지휘 하에 도쿄, 요코하마, 요코스카, 가와사키, 나고야, 고베, 욧카이치, 와카야마, 오사카 등 일본 각지를 B-25 미첼 폭격기 16대로 폭격하였습니다. 이 공습으로 사상자 363명, 가옥파괴 약 350동의 손해를 주었습니다.
피해는 크지 않았지만 불침의 하늘이라 호언장담하던 일본의 군부, 특히 일본 해군 상부에 준 충격은 엄청났고, 미국은 비록 일본에 큰 피해를 입히진 않았지만 이 사건은 진주만 공습으로 의기소침하던 미국인들에게 큰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둘리틀 공습을 계기로 그해 6월 초에 미일양국의 운명을 뒤바꾼, 진주만 공격 후 두 번째로 대규모 전투인 역사적인 미드웨이 해전이 벌어지게 됩니다.
* 배경
일본 제국의 진주만 공격 이후 미군은 태평양에서 일방적인 패퇴가 계속되었고, 급기야는 1942년 2월 24일에 일어난 일본 해군 잠수함의 미국 본토의 캘리포니아 주 산타 바바라 엘우드의 정유소에 대한 포격은 미국 전역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에 따라 사기를 높이는 방책으로서 미군은 일본의 수도 도쿄를 폭격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미국 육군은 장거리 폭격기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그 행동 반경 내에 일본을 포함하는 기지는 없었고, 소련의 영토는 일소 중립 조약 때문에 폭격을 위한 기지 사용은 실시할 수 없었습니다. 또, 미국 해군의 항공모함 함재기는 항속 거리가 짧고, 폭격을 위해서는 항공모함을 일본 근해에 접근시킬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태평양 상에서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항공모함 기동부대가 그야말로 위험에 노출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미국 해군에서 "항속 거리가 긴 육군의 폭격기를 항공모함으로부터 발진시키면 어떻겠는가"라고 루스벨트 대통령에 진언했습니다. 미군은 급히 B-25 폭격기를 항공모함의 짧은 비행 갑판으로부터 발진할 수 있도록 경량화를 도모했습니다.
육군 폭격기의 항공모함으로부터의 발진은 실전에서는 처음이며, 이 작전은 극비 사항으로 여겨졌습니다. 또, 폭격 이후 항공모함에 착함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 열도를 횡단해 당시 일본군과 전쟁 중이던 중국 동부로 장개석군의 유도 신호 아래에서 착륙할 예정이었습니다. B-25를 탑재하는 항공 모함은 호넷 호였고, 엔터프라이즈 호가 호위를 맡아 뒤따르게 계획되었습니다.
* 폭격대를 실어 나른 호넷
* 경과
1942년 4월 1일, 16기의 B-25 미첼을 탑재한 항공모함 호넷 호 및 호위 순양함 3척, 구축함 3척은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했습니다. 도중에 엔터프라이즈와 순양함 2척, 구축함 4척이 합류해 일본으로 향했습니다. 공격 예정 전날인 4월 17일, 미해군 함선 레이더에 비친 국적 불명의 2척의 어선을 초계기로 확인 중에 일본군의 감시정이란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이들 중 1척은 경순양함 내슈빌 호의 포격으로 격침되었고 승무원 14명 전원은 함정과 운명을 같이했습니다. 발진 예정 해역 앞의 예상외의 원거리에서 일본군에게 발견되어, 폭격대는 예정보다 빨리 항공모함 호넷 호에서 발진했습니다. 덧붙여 내슈빌은 또 1척의 감시정을 격침했습니다.
둘리틀 중령이 인솔하는 B-25 폭격기 16기는 도쿄, 가와사키, 요코스카, 나고야, 욧카이치 , 고베를 폭격했습니다. 일본 측에는 50명의 사망자, 가옥 262호의 피해가 나왔습니다.
폭격기는 일본 열도를 횡단해, 그 중 12기는 중국 본토에 착륙, 3기는 중국 영해에 추락, 나머지 1기는 소련의 블라디보스토크에 착륙했습니다. 소련에 착륙한 폭격기의 승무원은 억류되었다가 얄타밀약 성립 후 석방되었습니다. 승무원은 전사가 1명, 행방불명이 2명, 포로가 8명이고, 나머지는 미국으로 귀환했습니다.
일본 대본영은 이 피해를 "적기 9기를 격추했으며, 손해는 적다"고 포장해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폭격 당일의 날씨는 맑았으며, 추락한 항공기 중 민간인에게는 단 1기도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에, 대본영의 발표에 대해 "웃기지 마라. 황군은 아무것도 격추하지 못했다"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한편, 일본군에 체포된 폭격기 승무원은 도시의 무차별 폭격을 실시한 혐의에 대해 포로가 아닌 전쟁범죄자로서 다루어져 조종사 2명과 사격수 1명이 처형되었으며, 5명은 징역을 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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