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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워지니치니의 ‘비극적인 사망’ 이후, 소비에트 러시아의 정계는 일대 개편에 들어갔습니다. 체카는 ‘사회주의 동지에 대한 고문과 핍박을 자제하는 선’에서 무제한의 수색을 허가받았고, 이는 연립정당뿐만이 아니라 공산당을 포함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의 위기는 언제나 누군가의 기회인 법, ‘자동소총 음모론’의 대상이었던 우스트랼로프는 실제로 암살 시도 사건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는 있었습니다. 그는 구 멘셰비키 찬전파와 사회혁명당 우파 등의 인사들이 자신을 암살하기 위해 대기 중이란 것을 독자적인 첩보망을 통해 입수한 뒤였습니다. 그 정보의 출처는 콘스탄틴 공작이 알선해 준 것이었는데, 귀족 출신이자 러시아 최초의 여성 조종사였으며 지금은 체카의 중역이 된 [예브게니 샤홉스카야]였죠.
해외로 도피해 있는 멘셰비키 찬전파의 대부 [파벨 악셀로드]가 비밀리에 사빈코프를 후원하는 가운데, [미하일 리베르]를 비롯한 분트 내부의 일부 인사들이 암살 시도를 도와달라는 악셀로드의 편지를 받고도 악셀로드를 돕지도 않았지만, 암살 시도를 폭로하지도 않았다는 것이 우스트랼로프가 입수한 정보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나서서 총을 맞은 것은 두 가지 이유였습니다. 첫 번째는 우스트랼로프가 입수한 정보는 자신에 대한 암살 첩보였지 레닌을 대상으로 한 게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우스트랼로프가 이 암살 시도를 통해 선제적으로 연립정당들을 통제할 구실을 만듦으로써 이 사건이 통제되지 않은 상태에서 폭발해 다른 정당이 전부 불법화되는 그의 기준의 ‘참사’를 막기 위한 것이었죠. 욕받이 토템의 역할의 극한에 다다른 셈이었습니다.
암살 시도 직후 조사 과정에서 사회혁명당 우파의 간부인 [아브람 곳츠]와 리베르를 비롯한 이들에게 전달된 악셀로드의 편지의 손상된 사본을 입수한 파우코이는 레닌에게 이를 즉시 보고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레 우스트랼로프가 암살 시도를 사전에 알고 있었다는 사실 또한 발각되었죠.
즉시 우스트랼로프가 입원한 병원으로 행차한 레닌은 상당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우스트랼로프는 암살 시도로 한쪽 눈이 실명되었기 때문이었죠. 목에 가벼운 상처만을 입은 레닌보다 훨씬 심각했습니다. 특히 그 총상은 본래 레닌을 노렸던 것을 우스트랼로프가 인간 방패가 되어 레닌을 보호했기에 입은 것이었죠.
자신의 목숨은 아까워하지 않았지만, 그 죽음이 러시아 혁명의 실패로 이어졌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우스트랼로프가 암살 시도를 알리지 않은 것을 타박하려던 레닌은 우스트랼로프의 변명 아닌 변명을 듣고 마음이 변했습니다. 특히 암살 시도를 후원하는 배후가 해외로 도피한 멘셰비키 찬전파이자 사회민주노동당 내 레닌의 선배라는 말을 듣고 레닌의 기분은 급격히 나빠졌습니다.
레닌은 우스트랼로프가 단순히 욕받이 토템 그 이상의 존재가 되었으며, 그가 총을 맞지 않았다면 레닌이 총에 맞아 죽거나, 그렇지 않았더라도 동질적 사회주의 정부가 붕괴했을 것이란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이는 볼셰비키-멘셰비키 분당 이후 6년 만에 레닌과 우스트랼로프가 화해하는 순간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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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협상회의는 광범위한 대표성을 갖는 통일전선 조직으로서 다당합작 통일전선과 동질적 사회주의 정부의 유지를 위해 중요한 역사적 역할을 맡을 것이며, 지속적으로 국가의 정치 생활 · 사회 생활과 대외 우호활동에서, 그리고 사회주의 현대화를 이루고 국가의 통일과 단결을 지키는 투쟁에서, 더욱 중요한 역할을 발휘할 것이다.
정치권 대표에게 암살 시도 사건의 진상과 배후를 알리는 자리에서 레닌은 우스트랼로프를 ‘앞으로도 공산당과 다른 당을 연결하는 가교 구실을 할 것이다’라고 공식적으로 인정했습니다. 마침내 기회를 잡은 우스트랼로프는 1920년 7월로 연기된 제헌의회 선거를 통해 설립될 소비에트 러시아의 새로운 권력기관에 대한 자신의 구상을 발표했습니다.
‘전러시아 정치협상회의’라는 기관은 이미 소비에트로 권력이 이전된 러시아의 현실을 감안해 자유주의 국가의 의회와는 조금 다른 기관이 될 예정이었죠. 레닌은 이 정치협상회의, 줄여서 정협의 수장으로 우스트랼로프를 임명하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내걸고 결국 한쪽 눈까지 바쳤던 우스트랼로프의 노림수가 통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암살 시도의 범인이었던 파니 카플란은 정신병자 판정을 받고 정신병원에 강제로 입원당하였습니다. 이는 정신병이 생기거나 악화하면 ‘정말 정신병자이니 백군의 순교자가 될 리 없고, 정신병자가 아니면 몰래 죽이고 계속 입원 중인 것으로 처리하면 된다’라는 우스트랼로프의 방안이었습니다. 공범인 코노플레바도 마찬가지로 입원당하였죠. 후일 코노플레바는 ‘실종’되고 카플란은 ‘자살’했지만, 공식적으로는 정신병의 악화로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이윽고 우스트랼로프는 리베르와 곳츠를 면담해 ‘당신들이 나와 레닌을 죽이려 한 것은 묵인하겠지만 불법화를 막아줄테니 나를 지지해달라’라는 노골적인 거래 요구를 전달했습니다. 우스트랼로프는 두 명에게 ‘러시아에서 정치적 다원주의를 보존할 것이다’라고 여러 번 주장했지만, 곳츠와 리베르는 자신이 생각하는 정치적 다원주의와 우스트랼로프가 생각하는 정치적 다원주의가 상당히 다르다는 것만 알 수 있었습니다.
“아니, 충분히 되었소. 다만 충격을 좀 받아서 그렇소. 우스트랼로프 동무가 말하는 자유는 손발이 잘린 상태에서 걸어 다닐 자유였군.”
곳츠가 항의하듯 말하자 우스트랼로프는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던 적이 있었죠. 다만 명심하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여러분. 혁명가의 피 없이 자유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가장 많이 흐른건 볼셰비키의 피입니다.”
우스트랼로프의 계획의 절정은 지도부가 노농적군을 통제할 새로운 방안을 발표하면서 다다랐습니다. 스워지니치니의 사건으로 인해 노농적군이 언제든 사유화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인민위원회는 노농적군을 통제할 새로운 방안을 찾아냈습니다.
‘총정치국(Политическое управление)’이라는 기관은 그동안의 제한되어 있던 정치위원의 직위를 대폭 상승시키고 군사 지휘가 아닌 모든 분야에서 권한을 가지게 해 노농적군에 대한 철저한 문민통제를 확립할 예정이었죠. 이는 프랑스 혁명기의 파견위원과 같은 것이었지만, 군사적 식견이 있으며 분파 투쟁에 휘말리지 않는 인사를 임명해 파견위원과 같은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한다는 해결책이 채택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수장인 총정치국장으로는 핀란드에 우스트랼로프와 함께 파견되었던 이바르스 스밀가가 임명되었죠. 이는 우스트랼로프가 레닌의 후계자 후보군에 들어가는 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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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과 우스트랼로프에 대한 암살 시도와 스워지니치니의 죽음이라는 사건의 충격이 가라앉을 무렵, 한때 스워지니치니와 함께 노농적군 내 사조직을 꾸리려 했던 바레츠노프에게는 뜻밖의 연락이 전해졌습니다. 그것은 자캅카스 민주연방공화국의 구원 요청이었죠.
이미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한 방어 전쟁에서 승리하는 대로 러시아와 통일할 것’을 밝혔던 자캅카스는 내부의 이슬람교도 반군과 북쪽에서 밀려 내려오는 백군의 잔당, 오스만 제국군을 상대로 여전히 분전 중이었습니다. 특히 구 러시아 제국이 점거했던 페르시아 북부까지 장악한 영국은 오스만 제국과 싸우면서도 자캅카스에는 그 어떤 도움도 제공하지 않았죠.
자캅카스는 핀란드와 우크라이나의 소식을 듣고 일종의 인사치레에 불과했던 러시아와의 통일 밀약을 더욱더 결연한 관계로 전환하기를 원했습니다. 브레스트-리토프츠크 조약으로 인해 직접 개입이 어려운 특성상 인민위원회는 의용군이라는 이름의 대규모 병력을 꾸려 파견하기로 하였습니다. 의용군 사령관에는 표트로프가, 의용군 정치위원에는 우스트랼로프가 임명되었죠.
이는 자캅카스 측에서 자신에게 접근한 것이 남부전선 당시의 일 때문이라는 것을 짐작한 바레츠노프가 자신에게서 스워지니치니의 흔적을 지워내기 위해 우스트랼로프에게 자리를 넘긴 결과였습니다. 우스트랼로프도 소문으로만 듣던 ‘자캅카스의 타협적 볼셰비키’들을 만나볼 기회라는 생각에 찬성하였죠. 그는 사상적으로 상대적으로 유연한 이들을 수행원 삼아 출발했습니다. [니키타 흐루쇼프]와 [안드레이 즈다노프]가 그러한 수행원 중 일부였죠.
한편 바레츠노프는 스워지니치니 사건으로 인한 덤터기를 벗기 위해서라도 자캅카스와의 협상을 최대한 유리한 방식으로 이끌기 위한 노력을 지속했습니다. 군사, 외교, 통화정책, 고등교육제도, 민법 외의 사법 체계, 사회안전제도를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통제하고 나머지 모든 분야에서 자치를 약속하는 식으로 인민위원회는 자캅카스 정부와의 밀약을 정식으로 체결하였고,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이 끝나는 대로 발효시키기로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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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1918년 말이 되며 러시아 내전은 마침내 종막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소비에트 러시아 측에서 총공세를 자제하는 동안에도 후방의 유격전 활동은 계속되었고, 일본을 제외한 열강의 지원이 없는 콜차크와 백군은 연해주 일대로 거점을 이전해 사실상 일본의 꼭두각시가 된 상태였습니다.
이 상태에서 일본은 외무부대신 [시데하라 기주로]를 필두로 한 인사들을 보내 소비에트 러시아와 담판을 지으려 하였습니다. 촉망받는 해외 유학파 장교들인 [나가타 데츠잔], [도조 히데키], [이시와라 간지] 등이 대표단의 수행원으로 포함된 가운데, 일본은 ‘사할린 북부만 할양해준다면 러시아에서 완전히 손을 떼겠다’라는 견해를 밝혔습니다.
소비에트 러시아가 일본을 상대로 전면전을 치를 여력은 없었지만, 밥을 먹고 잠을 잘 때도 혁명만을 생각하는 레닌은 내부 안정화를 틈타 ‘큰 한방’을 질러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바로 일본의 조건 없는 철수였죠. 이는 단순한 도박 수는 아니었습니다.
콜차크 제독의 전러시아 임시정부는 무능을 입증하며 붕괴 중이었습니다. 휘하 장성과 장교는 하나둘씩 적군으로 전향 중이었고, 일본의 문민 내각은 물론 육·해군이 모두 콜차크에 대한 기대를 저버린 뒤라는 정보는 일본 대표단에게서 손쉽게 입수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 협상을 진두지휘하는 시데하라는 ‘차라리 이번 협상에서 이익을 챙기고 빠진 다음 러시아 공산정부와 친교를 다져 놓아야 한다’라고 주장하였죠.
레닌의 ‘큰 한방’은 물론 정치적인 이유도 있었습니다. 레닌과 공산당은 ‘반제국주의’와 ‘민족해방’ 등 마르크스가 말한 여러 가지 사회주의적 요소를 세계 각지의 약소 민족 독립운동과 결부시킬 생각이었습니다. 중앙집행위원회에 마르크스주의와 시온주의를 결합한 유대인들의 단체인 포알레 시온이 의석을 보유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었죠.
수소문 끝에 [이위종]. [김알렉산드라]. [남만춘] 등 고려인 인사들과 조선어를 구사할 수 있는 체카 부위원장 [뱌체슬라프 멘진스키]를 협상 대표단에 포함시킨 레닌은 고려인들을 보고 크게 당황하는 일본 인사들에게 은근슬쩍 폭탄을 던졌습니다. 바로 옛 러시아 제국의 세력권과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는 조선의 사회주의 혁명 가능성이었죠.
사회주의는커녕 폐위된 옛 황제에게 충성하는 근왕파들이 더 많은 조선에서 그러한 혁명은 말이 되지 않는 것이었지만, 철저하게 유럽식 정치체계를 신봉하던 일본의 문민정부는 유럽에서 사회주의가 얼마나 위력적인 무기인지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특히 아나키즘이나 마르크스주의 등을 구별하기 어려웠기에 더욱 그랬죠. 미국의 매킨리 대통령이 아나키스트의 총격을 받아 사망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였으니까요.
하지도 않았던 조선의 혁명 세력 지원을 대가로 소비에트 러시아의 선택지는 늘어났습니다. ‘조선에 대한 지원을 포기하는 대가로 시베리아 철수를 요구하고 남사할린까지 추가로 요구하자’ 등의 타협안이 나왔지만, 레닌은 ‘앞으로 지원을 정말로 하려면 그런 여지를 두면 안 된다’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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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네는 있지도 않은 정부를 지원하느라고 있지도 않은 전력으로 거짓말을 하고 있소.”
자신들을 모욕하다시피 비판하는 말을 심지어 조선인 장교인 이위종의 통역을 거쳐 듣자 시데하라 부대신을 비롯한 이들의 얼굴은 새빨개졌다. 그러나 일본 측의 모든 실상을 알고 있다고 공공연히 비웃어대는 볼셰비키를 상대로 일본 대표단은 무력했다.
“사할린섬을 가져갈 수 있다면 가져가 보시오. 그렇다면 우리는 조선인, 만주인, 그리고 일본인의 마음을 가져가겠소. 적절한 등가교환 아니오?”
마침내 진행된 협상 자리에서 레닌은 자신의 견해를 간단하게 전했습니다. 레닌은 ‘너희 개뿔도 없는 것이 다 티 나니까 더 다치고 싶지 않다면 우리 영토에서 꺼져라.’라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그 대가로 일본과 불가침조약 및 기본조약을 맺겠다는 것이었죠.
일본은 결국 이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세등등해진 소비에트 러시아는 ‘1월까지 블라디보스토크를 탈환한다’라는 야심 찬 목표를 세우고, 콜차크 제독을 제거하기 위한 계획까지 만들었습니다. 콜차크에 의해 축출되어 바보가 되어버린 사회혁명당 우파 중 사빈코프와 사이가 나쁜 인사들을 고른 체카는 ‘지금이라도 콜차크를 축출하고 통일전선에 참가한다면 제한된 정치활동을 보장하겠다’라는 대담한 제안을 전했습니다.
이미 볼셰비키의 첩자 노릇 중이었던 [블라디미르 볼스키]를 필두로 한 ‘사회혁명당 소수파’는 사회혁명당 우파와 민주주의자들을 선동해 콜차크 제독의 정부에서 이탈하게 했습니다. 그러한 빈틈은 바레츠노프가 구 귀족 인맥을 통해 중요 기밀을 빼돌리고, 이러한 기밀을 기반으로 체카가 콜차크를 암살할 계획을 꾸미기에 충분했습니다.
마침내 [바실리 차파예프]를 필두로 한 특공대는 콜차크 제독이 무도회장에서 마시던 술에 독을 타는 데 성공했고, 콜차크 제독은 독극물을 마시고 테라스에서 떨어져 지나가던 마차에 밟히는 확실한 확인 사살을 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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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소비에트 러시아가 기세등등해지는 동안 대전쟁의 향방은 이상한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오스만 제국이 붕괴를 향한 고속도로를 타고 달리는 가운데, 프랑스의 노동계급과 혁명가들은 리옹에 모여 대담한 선언을 발표했습니다. 바로, 그동안 프랑스의 총력전 진행을 돕기 위해 노동계급이 파업과 혁명 시도 등을 하지 않는다는 국가와 노동계급 간의 ‘신성동맹’을 파기한다고 선언한 것이었죠.
프랑스 최대의 사회주의 정당인 SFIO(사회주의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 지도부는 이를 두고 내홍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대체로 신성동맹 파기에 반대하였죠. 총비서 루도빅오스카르 프로사르는 ‘지금 신성동맹 파기를 주장하는 인사들은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라고 주장하였고, 루이 뒤브릴과 레옹 주오 등은 개량주의적인 입장에서 신성동맹의 파기를 반대했습니다.
좌익에 가까운 프로사르의 말답게, 이 신성동맹 파기 사태는 확실히 ‘무언가 이상한’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프랑스의 대전쟁 사망자만 160만 명에 달한다는 걸 지적했고 전쟁을 반대하다 암살당한 제2인터내셔널의 [장 조레스]의 이름을 외쳤지만, 이 운동을 지지하는 간부들은 확실히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니었습니다.
혁명적 조합주의자인 [조르주 소렐]이야 말할 것도 없었고, ‘극우 반자본주의’에 가까운 ‘프루동 서클’의 지도자인 [조르주 발루아]도 포함되어 있었죠. 이들은 반국제주의, 반민주주의, 반자본주의를 주장했습니다. 즉, 이들의 이념이란 ‘무언가를 한다’가 아닌 ‘무언가에 반대한다’라는 것으로 똘똘 뭉쳐 있었죠.
카튜셰프와 보그다노프를 비롯해 공산당 내 사상 전문가들이 경악해 ‘이들과 어떤 방식으로든 손을 잡아서는 안 된다’라고 열변을 토한 것에는 이유가 있었던 셈입니다. 후일의 역사는 이들의 출현이 ‘자본주의의 가장 타락한 변종은 제국주의가 아니라 이들이었다’라고 평하였습니다. 바로 파시즘의 시작이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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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터가 변경되었습니다.
첫댓글 포스터 참 잘 만드셨네요. 뭘로 포샵하심?
자작입니다.. 예전에 Trpg할때 만들었던걸 재탕했죠. 이 영문판(자작)이 원조였고요.
@렌지파일 와우
레퍼런스 자체는 존재합니다 ㅋㅋㅋ
이걸 보고 저도 삘 받아서 최신우의 원역사 행적을 담은 소설을 써봤는데 고민이 많이 되네요... 윤덕영+박춘금+박중양+우범선을 합친 수준의 친일반민족행위가 나오는지라 보시는 분들이 불편해하실까봐.
@돈이 곧 진리 보통은 쓴 것을 읽게 될 사람들한테 '무엇을 보여주고 싶은 것'인지 고민을 해보신뒤에 써보시면 됩니다..
@돈이 곧 진리 렌지파일님의 말씀은 좋은글을 쓰려 할때 적용 되는거고... 나쁜글을 피하는 방법 두개만 말해두고 가겠습니다. 1. 글을 쓰는 목적을 명확히 해라. 2. 1의 목적이 순수한 자기 만족뿐 이라면 일기장에 써라. 입니다.
일본 몰아내기까지 진행... 좀있으면 빅-이벤트 독일혁명의 시기가 오네요 ㄷㄷ
요즘 읽으면서 잘 알지도 못하는 러시아 혁명가분들과 내적친밀감이 생기는 기분입니다. 감사합니다(..)
굳이 생길 필요 없는..(?)
좀 있으면 꿈에도 한두분씩 나오실 겁니다(?)
캬... 좋네요. 전개 속도도 그렇고, 배경도 그렇고... 연참도 그렇고(?) 아니 근데 진짜 pc들 일 많이 하긴 했네요 ㅋㅋ 볼수록 저게 하루를 이틀로 쓴다는 사람들인가 싶고...?
소련 붕괴의 이유중 하나를 회의록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합니다. 20대도 많고 40대가 원로이던 1917년엔 회의를 6시간씩 했는데, 1987년엔 50대가 청년인지라 1시간 하면 다 지쳐 나가떨어졌다네요
@렌지파일 아(...) 그럼 그럴만 하네요. 세대교체의 중요성이 여기서...?
@렌지파일 중공이 괜히 나이제한을 뒀던게 아니었네요(?)
@dear0904 85년 이전까지의 지도부는 전부 스탈린이 중용한 사람이었죠 ㅋㅋ
@돈이 곧 진리 이건 진짜로 그랬을걸요 ㅋㅋ
@렌지파일 엌ㅋㅋㅋㅋ... 스탈린 시대 사람이 그때까지 지도부면... 대단하네요 ㅋㅋ
@dear0904 "아이고 이놈들아. 이 늙은이들을 언제까지 부려먹을겨?"
@돈이 곧 진리 "노망든 늙은이들이 노욕이 쩌시는구려. 이만 은퇴 할때도 되지 않으셨소?"
이제 독일 혁명과 국민혁명이 남았군요… ㅋㅋㅋ 일단 와인/마차/테라스 당한 콜차크에게 조의를 표합니다(?)
소설에서도 나름 잘 풀어냈고 원작에서도 잘 나온 부분은 과감히 스킵했더니 순식간이네요
오늘 저녁에 다음편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