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한국인들에게 칠레축구가 과거부터 남미의 빅3니 빅4니 하는 그러한 ‘빅’의 범주에 포함되었던 기억은 없다. 그저 코파아메리카나 월드컵 남미예선 중계방송을 통해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에겐 항상 아니면 거의 패하는 그리고 다른 국가들과 피튀기는 접전을 벌이는 그저그런 팀 정도로만 인식되어 있을 뿐...
하지만 칠레는 62년 자국에서 개최한 월드컵에서 당당히 4강에도 올라봤고, 74년 서독 월드컵에선 비록 좋은 성적을 올리지 못했지만 개최국이자 그 대회 우승국 서독과 치열한 승부를 펼쳐 찬사를 받기도 했으며 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3무승부로 16강 진출도 해봤다.
연령별 대회에선 특히 2000년 시드니올림픽 동메달의 쾌거를 이룩했는데 특히 이 부분이 우리 축구팬들의 뇌리에 선명한 것은 바로 한국 올림픽대표팀과 같은 조에 편성되어 조별예선 마지막 경기를 치렀던 팀이라는데 있다.
이 칠레축구가 가장 최근 전성기를 구가했던 시기는 96~2000년이다.
칠레축구 역사상 최강의 투톱으로 평가받는 '사모라노-살라스’가 프랑스월드컵 남미예선에서 최다득점을 쏟아부었고, ‘마르가스-레예스’가 포진한 중앙수비는 기복이 심하다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어느정도 제 몫은 해줬으며 ‘아쿠냐-시에라-에스타이’등의 미드필드진은 전체적으로 단신이라는 신체적 약점에도 불구하고 스피드와 뛰어난 기술로 게임을 조율했다.
이 멤버들을 주축으로 프랑스 월드컵에선 ‘이탈리아-카메룬-오스트리아’ 등 비교적 버거운 상대들과 같은 조에 편성되었음에도 단 1승도 없었지만 역시나 단 1패도 기록하지 않으며 16강에 진출했다. 그리고 이런 상승세를 바탕으로 1년뒤 파라과이에서 열린 ‘99 코파아메리카’에서도 4강이라는 호성적을 기록하며 칠레축구의 중흥을 예고하는 듯 했다.
여기에 이것이 단순한 예고가 아닌 현실로 승화될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을 칠레 국민들에게 주는 쾌거가 있었으니...바로 2000년 시드니올림픽 축구에서 칠레축구 역사상 최초로 동메달을 획득했던 사건이었다.
올림픽 본선 1년전...
브라질에서 열린 'U-23 Pre-Olimpico(올림픽축구 남미예선)‘에서 대회 마지막날 남은 1장의 티켓을 놓고 벌인 경기에서 캄비아소,아이마르,사무엘,리켈메 등 2년전 말레이시아 U-20 세계청소년대회 우승의 주역들이 고스란히 포진한 아르헨티나를 1:0으로 꺾고 본선진출을 확정짓는 이변을 일으켰을 때만 해도 칠레올대의 전력을 그다지 높에 평가하는 전문가들은 없었다. 단지 당연히 나올 줄 알았던 아르헨티나를 제치고 올라온 만큼 경계는 소홀히 할 팀은 아니라는게 그들에게 붙여줄 수 있는 최고의 예우였을 만큼.
하지만 와일드카드 선정에 있어서 한 차례 우여곡절을 겪는 등 본선 준비과정이 그다지 순탄치는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본선에 들어가선 조별예선부터 폭발적인 공격력을 선보이며 승점을 쌓아간다. 1차전 모로코전에서 4:1승...2차전 스페인전에선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2:0완승...그리고 마지막 한국전에선 0:1로 패했지만 이미 8강진출이 확정된 상황에서 와일드카드로 합류한 간판 골잡이 사모라노를 쉬게 해주는 여유를 부리기도 했다.
이어 8강전에서도 나이지리아를 4:1로 맹폭하며 4강에 진출했지만 아쉽게도 대회 우승국 카메룬에 선제골을 넣고도 역전패를 당하며 3~4위전으로 밀리고 말았다.
하지만 선수들의 투쟁심과 의욕은 사그러들지 않았고 남은 순위 결정전에서 미국을 2:0으로 완파하며 조국에 사상 첫 올림픽 메달을 선사했다.
이 시드니올림픽을 통해 한꺼번에 쏟아진 '영건‘들...
나비아, 피사로, 말도나도, 올라라, 콘트레라스, 알바레즈 등은 대회 직후 유럽의 유수 클럽들로부터 입단제의가 쏟아져 들어왔으며 이미 칠레 축구계는 물론 국민들로부터도 세대교체를 꾸준히 요구받아온 A대표팀에 새로운 활력소로서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위치로 올라섰다.
하지만 예로부터 ‘花無十日紅에 權不十年’이라고는 했어도 그 말 속엔 적어도 9일 동안은 꽃이 그 싱그러움을 맘껏 뽐내고, 9년 동안은 나는 새도 떨어뜨릴 수 있는 그러한 권력의 달콤함을 향유하는 것에 대한 부러움과 환상이 어느정도는 내포되어 있음을 우리는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칠레축구의 반짝거림은 고작 3년이 그 한계였다. 비유하자면 ‘花無三日紅에 權不三年’이었다고나 할까.
2002년 한국월드컵 본선진출을 목표로 여전히 건재한 사모라노-살라스의 투톱을 중심으로 국내리그서 돋보이는 중진들 몇몇에 시드니올림픽에서 쏟아져나온 유망주들을 대거 포함시켜 새롭게 출범시킨 대표팀의 출발은 말 그대로 최악이었다.
월드컵 남미지역 예선 첫 경기서 아르헨티나에 1:4로 참패를 당하면서 지역예선 내내 고전을 면치 못했고 더군다나 비슷비슷한 전력의 상대팀들을 상대로 반드시 잡아야만 하는 홈경기들이나 베네수엘라처럼 승점관리 대상들에게서 조차도 완벽하게 승점을 뽑아내는데 실패하는 난조를 보인다.
이는 결국 2001년 ‘연말결산’에서 칠레축구 역사상 최초로 월드컵 축구 남미지역 예선에서 지역예선 참가 10개국 가운데 최하위인 10위를 차지하는 치욕으로 귀결되고야 말았다.
단골 꼴찌였던 베네수엘라에도 못미치는 순위...몰락도 이런 완벽한 몰락이 없을 정도로 너무나 처절히...
물론 변명꺼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사모라노의 노쇠화에 그의 파트너인 살라스가 부상 등 각종 이유로 대표팀에 자주 차출될 수 없었던게 가장 컸고, 미드필드와 수비진 곳곳에 포진시킨 올림픽 동메달리스트 출신의 영건들은 기대에 훨씬 못미치는 기량을 펼쳐보였다.
한국행 비행기 티켓확보가 좌절된 직후 사모라노는 2001년 연말 대표팀 은퇴를 공식 선언했다. 여기에 97년부터 칠레축구의 중흥을 이끈 우루과이 출신의 넬손 아코스타 감독이 성적부진의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레예스,마르가스,에스타이 등 사모라노와 더불어 한 시대를 풍미했던 노장들 역시 흐르는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대표팀에서 물러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2002년을 맞이하는 칠레대표팀은 물론 칠레축구계 전체는 암울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2004년 아테네올림픽 본선진출과 함께 장기적으론 2006년 독일월드컵 본선진출을 목표로 하는 새로운 로드맵을 작성하고 본격적인 세부사항의 실천에 돌입한다. A대표팀의 공격진은 이제 살라스와 나비아가 축을 이루게 되었고 피사로와 함께 최근 칠레 국내무대서 높은 인기를 구가하던 발디비아가 그 뒤를 받치게 했다.
그리고 4년간의 혹독한 경험을 통해 이젠 미숙한 U-23 선수들이 아닌 완벽한 성인 선수들로 성장한 시드니 올림픽대표 출신의 선수들을 대표팀의 주축으로 포진시켰다.
칠레는 독일월드컵 남미예선에서 그다지 놀랍지도 하지만 그다지 실망스럽다고도 볼 수 없는 레이스를 펼쳤다. 가장 좋을때는 본선직행권인 4위를 기록했었고 가장 나빴을때는 7위로 항상 그정도에서 왔다갔다 하는 수준. 그래도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2전2무를 기록했고 브라질을 상대로는 홈에서 승점을 뽑아내기도 했다. 하지만 레이스의 판도를 뒤흔들만한 ‘한 건’을 터뜨리지 못한 상태로 그저 밋밋하지만 했으며 특히나 호주와의 플레이오프를 치를 수 있는 5위에 들기 위해 반드시 그것도 대량득점으로 잡아야 했던 에콰도르와의 홈경기에서 1:1 무승부를 기록하는 바람에 최종예선 7위로 저번 월드컵 최종예선을 마쳤었다.
2연속 월드컵 본선진출 실패...
8년...그리고 혹 2010년에 본선진출이 확정된다 해도 그때가 되면 칠레 국민들은 12년을 기다리게 되는 셈이다. 뭐,웬만한 남미국가들 치고 8년~12년이라는 기간은 월드컵에 한 번 서기 위해선 반드시(?) 인고해야 하는 시기인지 모른다.
더구나 칠레의 경우 74년 이후 98년 프랑스 땅에 서기까지 24년을 인고해야 했지 않았던가?
30일 한국A대표팀이 칠레와 A매치를 치른다고 들었다. 90년대 필자는 칠레축구에 깊은 관심을 나타낸바 있고 현재도 칠레에 대한 애정이 상당하다. 허정무호로선 더없이 좋은 평가전일것이다. 나른한 토요일 오후.. 간만에 추억의 칠레축구를 돌아보았다!
첫댓글 사-살 라인...
살라스어디갔나요.00`01때 유베있지않았나;;?
살라스~생각난다~조낸 멋졋는디~
살라스 자국리그에 있다고 합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