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장(斷腸)의 고통
이종태(83세) 집사님!
광주 42년 삶을 끝내고 동해시로 보금자리를 옮겼다.
군무원 퇴직 후 교회 앞 골목 연립 1층에서 20년을 지냈다.
아내의 기도와 큰 자부의 권면으로 교회에 나오셨다.
남전도회 삼총사와 어울리며 차 담회를 자주 가졌다.
정치 성향이 짙고 바른말을 하셨지만 주의 종을 잘 섬겼다.
신세 지기 싫어한 성품에 상처(喪妻)하고 50대 막둥이를 말없이 돌봤다.
고등학생 친손녀가 세상 떠난 슬픔을 딛고 아내 곁에 뒀다.
난 주일 예배 때 인사하고 갈 줄 알아 여비를 담았다.
이삿짐 꾸리다 불참한 사실에 섭섭한 생각이 들었다.
장로님께 전달하도록 맡겼다.
월요일 아침, 처가 근처 군 생활의 흔적이 남은 강원도로 떠났다.
기력이 쇠한 연령에 큰 결단이지만 봄 노회 참석하느라 못 뵈었다.
한밤중 전화받고 ‘집사님, 이사 잘하셨어요.
아파트 구입 축하합니다.
가까운 교회 정하여 믿음 생활 잘하시고 건강하세요.’
‘예, 목사님, 노잣돈 잘 받았습니다.
주인은 집 망가뜨렸다고 보증금 1백만 원 뺐는데..
덥고 추운 집으로 곰팡이 쓸어 말이 안 되지만 그냥 왔네요.
아파트 주변에 장로교회가 없어 고민이어요.
교회 결정하면 연락드릴게요.
한 번 방문해 주세요?’
쉽지 않은 거리라 망설였다.
다음 날, 요양병원 예배에 장로님을 모셨다.
기도 순서를 맡은 든든한 멤버였다.
갈수록 새로운 얼굴에 보람을 느꼈다.
휠체어 봉사와 동행으로 섬기는 손길에 어머니와 장모님도 참석하셨다.
병원 출입에 아는 분들이 늘어 환대 받은 발걸음이었다.
오후 4시! 첫 추도 예배드릴 가정으로 함께 갔다.
87세 홀 몸이라 새벽 기도 마치고 말씀드렸다.
‘할머니! 걸음 불편하신데 차 한 잔씩 준비하세요.
예배만 드리게요. 간식으로 빵 사서 갈게요.’
‘목사님, 할아버지 떠나시고 차 마실 사람 없어 다 버렸어요.
제가 부담스러워요. 그냥 오세요.’
그 뜻을 존중하고 두 분 권사님, 장로님, 안수 집사님과 예배드렸다.
1년 전 할아버지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어 만날 틈이 없었다.
예수 영접시키지 못한 아쉬움이 남았다.
치료비 긴급 지원만 도왔다.
감사할 일은 할머니가 늦은 막이 예수 믿었다.
학습, 세례 후 성찬 참여의 복을 누렸다.
공 예배 자리 지키며 은혜를 받았다.
첫 번 제사지만 추도 예배로 대신한 결심에 두 여동생의 기도가 컸다.
노회 때 받은 ‘장례 매뉴얼’ 책에 나온 내용을 가르쳤다.
죽음을 기억하고 준비하도록 경각심을 높였다.
주님 재림하신 날 썩지 아니할 몸,
영광스러운 몸, 강한 몸, 신령한 몸..
완전한 인격체를 이뤄 몸과 영혼이 영생의 복락 누릴 것을 확신시켰다.
딸기. 수박, 참외, 음료수를 내오셨다.
대접한 손길과 헌금 위해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딸 투병 소식에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6년 전 폐암 초기 진단에 수술하고 괜찮았어요.
최근 재발하여 뇌로 전이된 상태라 수술했지요.
딸이 순식간에 못 쓰게 되었어요.
재활 병원에 입원했어요.
서울 세브란스 진료 다니지만 어쩔랑가 모르것소.’
그 고통을 기도 제목 삼고 나섰다.
과일, 음료수를 챙겨 주셔서 외출 나온 어머니가 수박 맛을 보셨다.
익산 동생과 어머니 간병 일로 종종 만났다.
대화중 교회 재정이 넘침을 알았다.
어려운 교회 도움 요청 많다는 거였다.
나실인교회 사택 전소 사실을 알렸다.
재정 맡은 안수집사라 위임 목사님께 대면이 쉬웠다.
정식 공문으로 보내라기에 김 목사님께 전했다.
감동시킬만한 문서가 아닌지 보완을 요구해 대필자로 나섰다.
결국 접수하게 도왔지만 당회의 결정이 어떻게 날지 모르겠다.
큰 보탬이 되도록 기도하는데 문자가 떴다.
‘목사님! 너무 감사드려요.
밥 한번 대접할 기회 좀 주세요. ㅎㅎ’
‘김 목사님! 밥 먹자고 한 일 아닌데욤..
선배는 영원한 물주!’
아무 말 없었다.
큰 힘을 실어 줘 일상이 회복됐으면 좋겠다.
은행가는 길, 우리 밀 식빵을 사서 식탁에 뒀다.
아내가 맛없는 빵이라는 말에 뻘쭘했는데 게 눈 감추듯 사라졌다.
이튿날 맛있는 빵을 사러 갔다.
추도 예배드린 할머니가 목에 걸려 두 개씩 담았다.
오는 길에 들렀다.
이불 빨래를 거두었다.
할아버지 벌초 문제로 고민한 일을 돕고 싶었다.
손자 손녀 반대로 진행하지 못한 사정을 들었다.
아들이 없음을 물었다.
‘목사님, 담양에서 다 키운 아들을 2년 사이 둘이나 잃었어요.
갑자기 아파 손쓸 틈 없이 갔어요.
병원으로 옮겼지만 소용..
동네 사람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묻었어요.
낯부끄러워 못 나갔어요.
말할 수 없는 죄인이라 죽지 못해 살았네요.
대꼬챙이처럼 말라 실성한 사람이 됐어요.
여수로 시집간 딸도 질병으로 마흔다섯에 죽었어요.
딸은 시집가서 떠나 덜했어요.
자손 귀하다고 6남매 낳았는데 여섯 살 막내는 누나들이 키웠지요.
명절이면 엄마 생각에 우리 집에서 지냈어요.
이제 결혼해 안 오지요.
자식 잃고 무서운 게 없었어요.
남편도 나이 들어 떠나 괜찮았어요.’
험악한 세월 버틴 장한 할머니!
창자 끊어진 단장(斷腸)의 고통을 쓸어 담았다.
50대 독신녀가 밤중 괴한의 피습에 생명을 빼앗긴 때였다.
서울 아들 품의 유골을 골목 권사님이 받았다.
남부끄럽다고 날 불러 안방 장례 치른 일이 스쳤다.
난 외할머니가 반란군에게 두 아들 총살당한 말로 덮었다.
정월 초하루에 낳아 키운 큰딸을 어머니가 잃은 상처를 나눴다.
미어진 가슴은 아직도 아물지 않아 눈물에 젖는다.
계령 큰엄마는 아홉 자식을 하나도 앞세우지 않는 것 부러워하셨다.
난 할머니의 협력자로 약속하고 위로 기도 후 무겁게 나섰다.
2024. 4. 20 서당골 생명샘 발행인 광주신광교회 이상래 목사 010 4793 01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