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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과 우스트랼로프에 대한 암살 시도 이후 사회혁명당을 비롯한 연립정당은 자신들이 ‘혁명적’이라는 것을 인정받기 위해서라도 전선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회혁명당을 지지하는 군부의 거목 [미하일 무라비요프]는 이들이 정파에 따라 차별받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지만, 교육 수준이 높지 못한 러시아의 농민들은 ‘땅을 나눠준 레닌을 암살하려 한 나쁜 놈들’과 ‘인민을 진정으로 생각하는 인민주의자 사회혁명당’이 서로 다른 조직인 줄 안다는 게 문제였습니다.
자신들의 핵심 지지기반이었던 농민들의 마음이 레닌을 향해 떠나가고 있다는 것은 사회혁명당도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토지의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기초로 한 ‘사회화법안’은 사회혁명당의 안건이었지만 인민위원회 시행령으로 발표되며 레닌의 명의로 전국에 배포되었고, 농민들은 자연스레 레닌이라는 두 글자 이름 정도나 알 수 있었습니다. 조금 깬 인사들은 체르노프나 스피리도노바 같은 이름은 알고 있었지만 그게 전부였죠.
결국 연립정당의 개혁정책은 전부 ‘레닌 인민위원회’의 이름값을 높여주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습니다. 자신에게 향하는 개인숭배를 혐오하면서도 이용하려 하는 레닌으로써는 매우 기꺼운 상황이었습니다. 통일전선의 유지를 바라는 우스트랼로프로써도 매우 만족스러운 상황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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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1월, 소비에트 러시아는 자신들이 선언했던 대로 [제로니마스 우보레비치우스]가 이끄는 노농적군 선봉대로 블라디보스토크를 탈환했습니다. 적백내전도 마침내 끝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발트 지역에서 백군을 이끌던 유데니치는 자신의 세력을 이끌고 통째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왕국에 의탁하였습니다. 이는 러시아와의 평화 유지를 간절히 바라던 독일 제국의 뒤통수를 치는 행위였죠. 유데니치를 끌어들인 자는 다름아닌 피우수트스키였습니다. 그는 폴란드를 독립시켜 자신이 권력을 쥐는 계획을 짜고 있었습니다.
이는 독일의 승승장구가 서서히 끝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대로 된 총과 군복도 없이 프랑스에 상륙한 미군은 독일군의 비웃는 가운데에도 기어이 제대로 된 무장을 악착같이 긁어모으는 데 성공했습니다. 프랑스제 군복과 영국제 M1917 소총으로 무장한 ‘미군’의 수가 몇 개 사단에서 몇 개 군단, 이윽고 수십만 단위로 늘어나자 독일은 경악했습니다. 벨기에-영국-미국 연합군은 기어이 파리를 탈환하는 데 성공하였고, 루덴도르프가 최후로 동원한 정예부대만이 겨우 탈출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협상국은 이것이 독일의 패망이 눈앞으로 다가온 징조라고 믿지 않았습니다. 독일군의 방어선인 힌덴부르크선까지는 군인보다 더 많은 지뢰가 매설되어 있었고, 무엇보다 프랑스에도 러시아처럼 공산혁명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우려가 팽배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기나긴 전쟁으로 인해 캐나다의 밴쿠버를 비롯한 협상국의 주요 도시에서 파업과 태업이 발생하기 시작한 것도 문제였습니다.
공세 역량이 거의 바닥났지만 방어선은 지킬 수 있게 된 독일은 한숨을 쉬다 말고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최후의 포강 공세에서 강 건너 진지 3개를 점령하는 지나가던 개도 웃을 대전과를 이루었다는 소식을 듣고 분노했습니다. 전쟁의 승기가 처음으로 협상국 쪽에 조금이라도 기우는 순간이었죠.
오스만 제국은 특히 기상천외하지만 끔찍한 방식으로 붕괴 위기를 맞고 있었습니다. 아르메니아고원을 점령한 자캅카스군의 총정치위원으로 영전한 우스트랼로프는 의용군 사령관 표트로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오스만 제국을 무너뜨리기 위해 해묵은 민족 갈등을 끌고 들어왔습니다. 아르메니아인 학살에 대해 복수한다는 명목으로, 정확히 아제리인을 포함한 ‘튀르크인 이슬람교도’와 ‘쿠르드족 이슬람교도’만을 골라 땅과 집, 사유재산을 전부 몰수하고 난민이라는 명목으로 아나톨리아 서부로 맨몸으로 추방해버린 것이었죠.
인륜과 정의는 온데간데없이 ‘자국 민간인이 전선으로 밀고 들어오는 상황’에 오스만 제국은 대혼란에 빠졌습니다. 수많은 난민은 오스만 제국의 국경을 넘은 뒤에도 식수와 식량은커녕 추위를 막을 천막 하나 없는 채 수용, 아니 방치되었습니다.
이 사태의 정점은 우스트랼로프가 인민위원회를 설득하는 데 성공해 러시아가 정식으로 개입을 선언하면서 다다랐습니다. 자캅카스-러시아 자치권 조약의 실체를 공개하고 그 조약이 이미 작년부터 존재했다는 사실을 지적한 우스트랼로프는 ‘자캅카스는 러시아의 보호를 받는 특수관계국이므로, 자캅카스와 오스만 제국의 전쟁에서 러시아는 자캅카스를 보호하기 위해 행동할 권리가 있다’라는 기상천외한 논리로 러시아의 전쟁 개입을 옹호했습니다.
이는 오스트리아-헝가리가 휘청대고 있다는 첩보에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브레스트-리토프츠크 조약을 통해 베사라비아를 할양받고 동맹국 측으로 편을 바꾼 루마니아도 러시아를 상대로는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았죠. 즉 소비에트 러시아로써는 총력전 체제를 해제하면서 여력을 아나톨리아에 쏟아부을 수 있는 최적의 상황을 맘껏 이용할 수 있었습니다.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통한 아나톨리아 전선의 재개에 독일은 격분했습니다. 하지만 동맹국들이 쓰러지는 와중에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죠. 특히, 1월 16일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붕괴해버렸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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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차크 암살을 성공리에 이끈 파우코이는 확대 개편된 노농적군 정보총국의 국장으로 영전했습니다. 독립적 기관의 수장이 된 셈이었기에 그 권한은 이루 말할 수 커졌습니다. 파우코이는 외동딸 클로에를 집무실에 앉혀 놓고 업무에 매진할 정도로 열성적으로 정보총국의 발전에 힘썼습니다.
사실 임무가 크게 달라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름부터 대놓고 ‘반혁명 대처 특별위원회’였던 체카와는 달리 정보총국은 군사적인 쪽에 치중되어 있기는 했지만, 결국 군사와 전쟁은 정치의 연속선상에 있으니까요. 사회주의라는 이념 아래에 모든 것이 고도로 정치화되고 독립된 관료조직이나 군부 등을 혐오하는 소비에트 러시아에서는 특히 그것이 심했습니다.
특히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붕괴하며 국장으로써 파우코이가 맡은 임무는 행정업무의 최종 결재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잔해 위에서 일어나는 국가들을 세계혁명의 중간기지로 만들 것’이라는 엄청난 규모로 커졌습니다. 이는 정보총국과 노농적군의 창설자인 트로츠키의 직접적인 지시였습니다.
특히 러시아에 전해진 몇 가지 놀라운 소식은 인민위원회를 흥분시키고 정보총국의 긴장을 고조시켰습니다. 옛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한 축이던 헝가리에서 민주공화국이 선포되고 사회주의자들이 대거 정치권에 진출했다는 소식이었죠.
물론 중부유럽의 사회주의 정권 수립은 난관이 많았습니다. 여러 제민족은 강한 민족주의에 물들어 있었고, 같은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도 노동계급이라는 단일 정체성을 강조하기보다는 독일인, 체코인, 헝가리인 등으로 자신들을 구분하곤 했죠.
그나마 다행으로 도움이 된 이들은 본국으로 귀환하는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무리였습니다. 소비에트 러시아는 이들에게 열심히 선전을 한 바 있었고, 군단원들은 공산주의라는 극단적인 사상에 물들지는 않더라도 사회민주주의를 비롯한 좌익 개혁정책 자체에는 우호적으로 변신한 뒤였습니다. 치안을 확립하고 독립국의 건설에 이바지하는 체코 군단이 좌익을 지원하기 시작하자, 좌익 정당인 사회민주당과 중도 좌익 정당인 사회당 등은 약진했습니다. 그리고 체코 군단의 뒤에는 GRU의 지원이 있었죠.
헝가리의 경우 사회주의자들의 세력이 훨씬 거대했기에 GRU의 공작에도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카로이 미하이] 백작이 대통령으로, [베링키 데네스]를 총리로 해 선출된 헝가리 공화국의 초대 공화정부는 불안정하기 그지없었고, 오스트리아-헝가리군으로 대전쟁에 참전했다가 러시아군에 의해 포로로 잡혔던 헝가리 공산당의 당수 [쿤 벨러]는 붕괴 후 혼란기를 이용해 선전을 퍼뜨리며 일약 스타로 부상했습니다.
노농적군이 러시아를 평정했다는 소문을 들은 헝가리 사회민주당의 온건 사회주의자들은 좀 과격하지만 같은 사회주의 동지인 레닌과 소비에트 러시아의 지원을 받으려는 명목으로 비밀리에 쿤에게 접근, 미하이 백작의 정부를 무너뜨리고 러시아에서와 같이 ‘사회주의자로 이뤄진 정부’를 건설할 것을 제안하였죠. 레닌과 연락을 할 수 있었던 쿤은 이를 즉시 받아들였고, 사회주의 국가 설립의 채비를 서둘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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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이 꽂아 넣은 낙하산에서 공산당 내의 중요한 사상 전문가 중 한 명으로 올라선 카튜셰프는 본격적으로 자기 생각을 펼칠 기회를 얻었습니다. 교육위원회의 간부로 임명된 그는 부하린, [아나톨리 루나차르스키] 등의 좌파공산주의자들의 이념을 참고하여 대단히 도전적인 구상을 내놓았습니다.
그것은 교육제도 개편을 통해 러시아인들의 깊은 신앙심과 종교적 사고방식을 ‘과학에 대한 신앙과 숭배’로 바꾸겠다는 것이었죠. 프랑스 혁명기의 이성 숭배나 최고 존재 숭배를 떠올리게 한다는 일각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과학적 사회주의에 맞는 새로운 교육제도란 것은 많은 이들의 흥미를 끌었습니다.
그러나 카튜셰프가 급진적인 주장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고등교육에서만은 폭넓은 학문의 자유를 통해 인재를 영입해야 한다고 주장한 그는 당원 교육기관을 전문적으로 설립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다당합작제’라는 특수한 러시아의 정치체제의 특성상 공산당만의 교육기관의 설립은 쉽지 않았지만, 그의 제안은 ‘모스크바 세계노동자우호대학’이라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외국인, 소수민족, 자국민 노동자들을 전문 지식인이자 사회주의자로 교육하는 기관이 설립된 것이었죠.
죽은 스워지니치니와의 연관성을 끊기 위해 그동안의 샌님 이미지까지 내던지고 현장에서 발로 뛴 바레츠노프 또한 마침내 오명을 벗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서서히 불리해지는 전황에 위기를 겪고 있는 독일로 ‘대표대리’의 직함을 달고 향해 ‘중부 유럽의 사회주의 혁명 가능성’에 대한 보고서를 맡는 위험하지만, 대단히 중요한 임무를 맡게 되었습니다.
레닌이 말했듯이, ‘러시아 혁명은 독일 혁명의 전초전’에 불과했으니까요. 독일과 러시아 간에 공식적인 기본조약이 체결된 것은 아니었기에 직함은 대표대리에 불과했고 권한도 제한적이었지만, 바레츠노프는 자기 장기를 발휘할 수 있는 상황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주독대표대리 바레츠노프는 독일에 파견되자마자 식량 부족과 변화 없는 전황으로 인한 암울한 분위기 속에서도 베를린의 좌익조직과 접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이전부터 변호사 역할을 하며 연줄이 있던 독일 내 노동조합총연맹 두 곳에 접근했습니다.
급진 좌익 성향의 ‘독일노동조합자유연합(FVdG)’과 온건 개량주의 성향의 ‘독일노동조합중앙위원회(GGD)’ 모두와 접촉한 바레츠노프는 무턱대고 소비에트 러시아와 레닌의 공산당에 대한 찬양을 퍼뜨리는 대신 다른 접근법을 사용했습니다. 바로 독일 최대의 사회주의 정당인 독일 사회민주당에서 갈라져 나간 ‘독립사회민주당(USPD)’에 대한 지지를 요구하는 것이었죠.
율리우스 마르토프를 비롯한 멘셰비키 국제파와 유사한 성향을 보인 독립사민당은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가 이끄는 내부 공산주의 세력인 ‘스파르타쿠스 연맹’이 포함된 중간 규모의 정당이었습니다. 이들은 독일 사민당이 대전쟁에 찬성할 뿐만 아니라 전쟁 수행을 열렬히 돕는 것을 극렬히 비판하며 국제주의적인 위치에서 당장 전쟁을 멈추고 급진적인 사회·정치·경제적인 개혁을 시행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죠.
독일의 패전 가능성을 과장해 퍼뜨린 바레츠노프는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독일이 뜯어먹히는 것을 막으려면 독립사민당을 지지해 선제적으로 정권을 탈취해야 한다’라는 민족주의적인 과격한 선전까지 이어가며 양대 노총이 독립사민당을 지지하도록 유도했습니다. 이는 상당한 효과가 있었습니다. 양대 노총은 비밀리에 총파업을 논의하기 시작하였고, 바레츠노프의 입지는 크게 상승했습니다. 그는 주독대표 아돌프 요페를 뒤를 이어 부대표로 임명되었고, 독일의 사회주의 혁명을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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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독일혁명이..!
첫댓글 참으로 촉진주의적인 연참이십니다.
최고 존재의 제전 ㄷㄷㄷㄷ
카튜셰프가 로베스피에르가 됐네요 ㅋㅋㅋ
레닌 장례위원회의 이름이 불멸화위원회인 이유가 과학이 발전하면 레닌을 부활시키기 위한 것이었단것 제가 언급했었죠 (...)
@렌지파일 예... 예? 레닌 부활요?
@돈이 곧 진리 드립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본래 엠버밍은 신격화가 아니라 부활이 목적이었습니다
@렌지파일 What the...
@렌지파일 소련이 30년만 더 버텼으면 AI 메카레닌을 볼 수 있었을텐데 아쉽네요(…)
와... 클라이막스로 가는 길이군요 ㅋㅋㅋ 파우코이도 신경 안 써줬는데 여기선 벌써 딸도 있고... 보기 좋네요 ㅋㅋ
+ 과학이 신앙이 되는것도 사실 바람직한 길은 아니긴 한데요 ㅋㅋ 그래도 신앙이 과학이 되는것보단 낫죠 암(...)
참고로 실제 소련도 저 루트 탔습니다. 보그다노프는 영생을 위해 수혈 실험하다가 사망했고, 이러한 사고방식은 이게 후일 우주개발시대까지도 이어집니다.
https://www.jstor.org/stable/40207005
https://www.theguardian.com/world/2015/sep/17/ussr-space-exploration-religion-russia
https://www.calvertjournal.com/features/show/4645/space-propaganda-posters-songs-soviet-religion
https://sniffingthepast.wordpress.com/2017/02/28/science-sentiment-and-soviet-space-dogs/
@렌지파일 ... 아니 이게 왜 진짜(...) 솔직히 그... 사이비 종교 대립 (민주당이 겜 던진 그거요(...)) 때문에 나왔다고 생각했고, 이거 재밌네 했는데 ㅋㅋㅋ... 저게 사실 고-증이라니 ㄷㄷㄷ...
@dear0904 기초과학기술(핵기술이나 우주기술)은 쩔게 발전했는데 소비재나 실생활에 관련된건 별반 발전이 없다는 부작용도 있었죠;
@렌지파일 ... 그럴만 하네요 ㅋㅋ... 신앙의 대상이 될 것은 짱짱하게 올려야 하지만, 아닌건...?
@렌지파일 “신은 없다!”
가가린은 거의 과학교의 성자처럼 취급됐겠네요… ㄷㄷㄷ
@E.E.샤츠슈나이더 정교회가 부활한 러시아가 제국 시절보다도 더 막장인 외교관계로 돌아간걸 보면 정말...
+ 명색이 'Cult of Science'인 주제에 에이즈 음모론(CIA가 만들었다!!), 리셴코와 처녀지개간운동, 학문에 대한 무시무시한 검열(미래로의 공산사회를 향해 발전해야 하므로 '발전을 논하지 않는 학문'은 '부르주아학문') 등을 보면, 한계도 뚜렷했던것 아닌가 싶습니다
@렌지파일 솔직히 코로나 음모론 (중국이 만들었다!), 중합수 연구와 불소 음모론등등을 보면 그런건 어디든 있는가 싶지만, 과학을 신앙으로 믿는 곳이 저래버리면 뭐지 싶긴 하죠(...)
@dear0904 보통은 대중의 음모론생산이 많았는데, 소련은 KGB의 음모론생산이 더 많았죠(;)
@렌지파일 ... 대체... 신기한 국가네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