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펀트맨 / 이용임
사내의 코는 회색이다
잠들지 못하는 밤마다
사내는 가만히 코를 들어올린다
형광불빛에 달라붙어 벌름거리는
사내의 콧속이 붉은지는 알 수 없다
여자를 안을 때마다
사내는 수줍게 코를 말아올리고 입술을 내민다
지리멸렬한 오후 두시에
사내는 햇빛을 쬐며 서툴게 담배를 핀다
사내의 코가 능숙하게 따먹을
푸르고 싱싱한 나뭇잎들은 없다
계절은 바람과 구둣소리에 쓸려
태양의 서쪽으로 이동했다
구내식당에서 이천오백원짜리 밥을 먹을 때마다
사내는 코끝이 벌개질 때까지 힘껏 코를 들어올린다
버스가 급정거할 때마다
손잡이에 걸린 코를 황급히 움켜쥐며 한숨을 내쉰다
담배연기와 밀어와 휘파람과 잠꼬대
사내의 긴 코 어딘가에서 아직도 바깥으로 흘러나오고 있을
환절기가 되면 사내는 지독한 축농증을 앓는다
가을마다 잎이 다 떨어진 나무 아래 서서
사내는 코로 낙엽을 주워올린다
가지에 올려놓은 잎사귀가 떨어질 때마다,
다시
2007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이용임(李庸任)
1976년 경남 마산 출생
숙명여대 전산학과 및 동대학원 석사과정 졸업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과정 수료
현 ㈜핸디소프트 선임연구위원
심사평
기성 시단 상투성 벗어난 독특함 지녀
시 부문 심사를 맡은 김승희(왼쪽부터), 김사인, 남진우씨. 배우한기자
금년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심사에 임하면서 심사위원들이 가장 기대한 것은 무슨 특출난 개성의 출현이나 세련된 이미지의 조형 능력 같은 것은 아니었다. 다양함이나 분방함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이미 한국 시단에 차고 넘친다는 생각이 들었고 적어도 본심에 오른 작품의 경우 언어를 다루는 기량 면에서는 다 어느 수준 이상을 유지하고 있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박한 차원에서나마 읽는 사람을 감동시키는 절실함을 간직하고 있는 시, 삶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개안(開眼)을 보여주는 시는 의외라 할 만큼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쓴 사람 자신의 영혼이 충분히 고양되지 못한 가운데 서둘러 마무리된 흔적이 역력한 작품들이 상당수였다. 그런 응모작일수록 절제와 균형이 부족했고 산문적 요설이나 추상적 관념의 나열로 흐르는 경향이 많았다.
고심 끝에 심사위원들은 다음 두 응모자의 작품들로 선택의 폭을 좁히는 데 합의했다. <흰목물새떼> 외 2편의 작품을 투고한 박현진씨의 경우 언어를 다루는 장인적 기량이 우선 믿음을 주었다. 묘사의 구체성이 살아 있으면서도 신산스런 삶의 한 귀퉁이를 포착해내는 눈길이 범상치 않았다. 특히 투고작 가운데 <부황자국>은 여자의 몸을 공간 이미지를 빌어 생동감 있게 형상화하고 있었다. <엘리펀트맨> 외 4편을 투고한 이용임씨의 작품은 기성 시단의 상투형을 훌쩍 벗어난 독특함을 지니고 있었다. 소시민의 일상을 우화적으로 형상화한 이 작품은 평이하고 단조로운 듯하면서도 가시적 지평을 넘어선 다른 세계를 현현시키는 힘을 보여주고 있다.
논란 끝에 심사위원들은 최종적으로 <엘리펀트맨>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모범답안 같은 안정감보다는 아직 미정형이긴 하지만 뭔가 새로운 가능성을 내장하고 있는 듯 여겨지는 이 응모자의 미래를 믿어보기로 한 것이다. 앞으로도 섣부른 잠언의 유혹에 빠지지 말고 보다 긴장된 언어와의 싸움을 주문하고 싶다. 당선자에게 축하의 마음을 전하며 다른 응모자들에게도 건필을 당부하고 싶다.
심사위원=김승희(시인ㆍ서강대 국문과 교수) 김사인(시인ㆍ동덕여대 문창과 교수) 남진우(시인 문학평론가ㆍ명지대 문창과 교수)
2007 신춘문예] 詩 당선작 엘리펀트맨 / 이용임
인터뷰
"사람 발보다 낮은 詩 쓰고싶어"
이용임
이용임(30)씨는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공학 석사다.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5년차 직장인으로, 남 보기에 더없이 버젓하다. 그러나 본인은 그 삶이 무엇으로도 치유되지 않는 아픔이었다고 말한다. 프로그래머로서의 인생이 시작되자마자 그는 많이 앓았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시작할 무렵 정체성에 대해 심각한 고민에 빠졌어요. 내가 평생 이 일을 하며 살아야 하나, 이건 아닌데 싶었죠. 그때 뭔가를 끼적거리기 시작했는데 쓰다 보니 시였어요. 아, 시구나! 시면 되겠구나 생각했죠."
문학은 그에게 좌절된 욕망이었다. 어릴 때부터 꿈을 물으면 작가라고 대답했던 그이지만, 가족들의 반대로 문학을 전공하지 못했다. "엄마, 이모, 할아버지 모두 '문청'이셨어요. 그래서 더더욱 반대하셨죠. 그게 얼마나 마음을 많이 다치는 일인지 당신들이 더 잘 아셨으니까요."
억눌린 것은 귀환하기 마련이다. 시는 그를 찾아왔고, 그는 시를 만나기 위해 직장생활을 하며 야간학교를 다녔다. 늦바람이 무섭다고, 시를 배우기 시작한 이래 2년간 쓴 시가 300여편.
"당선 소식을 듣고 기쁘기보단 무서웠어요. 좋은 시, 열심히, 많이 써야 하는데 내 밑바닥이 너무 얕아 두려움이 앞서요." 문학이론도, 철학도 부족하다는 조바심이 들 때가 많지만 그럴 때마다 그는 "스무 살 때부터 문학만 바라보며 살아온 사람보다 내 시야가 더 많이 열려있을 것"이라고 위안한다.
<엘리펀트맨>은 일산 집에서 서초동 회사까지 가는 출근길 지하철에서 썼다. "손잡이를 잡고 서 있다가 문득 올려놓은 팔이 코끼리 코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들고 있던 문예지 제일 뒷장에 바로 쓰기 시작했죠." 초고에서 조사 몇 개만 고치고도 굉장히 마음에 들었던 시다. "저뿐 아니라 지하철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일상의 피로에 찌들어 있는 것 같았어요. 서서 조는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아플 때가 많은데, 사회가 왜곡하는 우리의 모습이 그런 몸의 기형으로 그려진 듯해요."
그는 앞으로 '낮은 시'를 쓰고 싶다고 했다. "시 쓰는 사람은 항상 가슴이 아파야 한다고 생각해요. 세상의 모든 아픈 것들을 대신해 앓아야 하니까요. 저는 연민이 없는 시는 싫습니다. 가장 낮은 시, 사람 발보다 더 낮은 데 있는 시를 쓰고 싶습니다. 그렇게 형체 없는 것, 다 부서진 것들에 이름을 붙여주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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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가는 판화 / 이현수
조각도 앞에 손을 둔다
순간, 조각도가 날렵하게 손에 스쳤다
아직도 내 손에 깎아내야 할 부분이
이렇게 많구나, 싶었다
어머니 얼굴은 남겨 둬야할 곳보다
파내야할 곳이 더 많았다
얼굴 윤곽보다 뚜렷한 곡선을 여러 번 파내다보면
결국에는 아무도 알아보지 못한 얼굴
그래서 더 어머니로 보였던 얼굴
동그랗게 몸을 말고
조각도를 따라 비워지는 굴곡
그 허공에도 몇 겹의 층이 있어
잉크로 찍어내면 더욱 환해졌다
어두워질수록 빛나는 주름의 공허
몇 번씩 그 결을 만지며
여백을 남기는 어머니
완성된 얼굴 판화가 내 어머니이기만 할까
하나면 충분할 것을 여러 장 찍어내며
확인하는 것이다
2007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신춘문예]시부분 심사평
"육친 정으로 밥지어 세월·삶 양념으로 비벼낸 내공"
▲ 안도현(시인, 우석대 교수,오른쪽), 이희중(시인, 문학평론가, 전주대 교수)
시가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선물 가운데 하나는 소통의 즐거움이다. 소통의 그물, 이른바 네트워크에 속한 기쁨은 이에 연루된 사람의 수가 적다고 작아지지 않는다. 시를 즐기는 사람들이 두루 엮인 그물을 긴장하게 하는 높은 안테나는 세속과 타협 않는 비판정신 또는 일종의 반골정신 같은 것으로 이루어졌음에 틀림없다. 이 도저하게 올곧은 사람됨의 바탕은 우리 같은 보통 사람을 여간 두렵게 하는 것이 아니다. 저, 학교를 졸업한 후 시에서 멀어진 사람들을 보아라. 그들은 차마 무서워서 다시 시를 펼치지 못하는 것이다.
심사를 맡은 우리는, 심사를 통해 새로운 소통을 체험하게 되었음을 영광스럽게 고백한다. 이 소통이 더러 잔치의 성격을 띠기도 함을 우리는, 예심을 거쳐 올라온 20여 예비시인이 쓴 70여 편의 시를 읽으며 깨닫게 되었다. 특히 우리는, 정재영, 문정희, 임상훈, 김정경, 최민영, 신은영, 이현수의 작품들을 남겨 거듭 읽어보았다. 정재영의 ‘손이 쥔 손’, 문정희의 ‘붉은 다라이 공장에서’, 임상훈의 ‘덕지덕지’ 등은 당선작으로 올려도 손색이 없을 작품이라는 데 우리는 흔쾌히 동의했다. 다만 ‘신춘문예답다’고 말할 유형적 한계를 나누어 가지고 있었고 동봉한 다른 작품들이 이런 의구심을 다 지워 주지 못했다. 김정경의 ‘몸의 곶간’, 최민영의 ‘애벌레의 꿈’, 신은영의 ‘춤추는 애벌레’, 이현수의 ‘늙어가는 판화’ 등은, 시의 전통적 미덕이 젊은 상상력으로 되살아나는 진경을 엿보게 했다. 그러나 신춘문예가 사람이 아니라 작품에 주는 격려라는 점에서 우리의 선택은 편치 않았다.
신은영과 이현수의 작품을 두고 고심하던 우리는 후자를 남기기로 결정했다. 신은영은 보낸 작품들의 전반적 수준에서는 더 나았으나, 집중된 한 편을 보여주는 데는 이현수에게 뒤졌다. 당선작은 상황의 개연성은 약했으나, 육친의 정으로 밥을 지어 세월과 삶의 양념으로 비벼낸 간단치 않은 내공을 보여주었다. 당선자에게 축하한다. 또 낙선자들에게도 격려의 갈채를 보낸다. 낙선이야말로 뜻있는 글꾼에게는 한때의 양식이 아니었던가. 시적 소통을 놓지 않는 우리 모두에게 시적 축복이 폭설처럼 내리기를!
안도현(시인, 우석대 교수)
이희중(시인, 문학평론가, 전주대 교수)
신춘문예 당선소감 - 이현수
"앞으로 농부의 딸이 얼마나 예쁘고 고운 것들을 길러내는지 보여드릴게요"
평생 신문구독 한 번 하신 적 없는 아버지가, 신문에 글이 실린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아버지가, 딸에게 좋은 소식인 것만은 확실해서 웃으셨나 봅니다. 대학가서 글 쓰겠다고 했을 때에도, 졸업하고 공부를 더 하고 싶다고 했을 때에도 아무 말 없이 고개 끄덕여 주셨던 아버지와 어머니. 그 농부의 마음이 영 팔아먹지 못할 것을 길렀던 것은 아니었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전화 한 번 넣기가 그렇게 어려웠을까요. 아버지, 조금만 더 지켜봐 주세요. 앞으로 농부의 딸이 얼마나 예쁘고 고운 것들을 길러내는지 보여드릴께요. 그 텃밭에서 뽑아 올린 것들로 우리 가족 모두 모여 푸짐한 저녁을 함께 해요.
늘 존경하는 송수권 선생님, 신귀백 선생님 그리고 원광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정동란 선생님, 최정주 선생님, 류경동 선생님, 전동진 선생님 감사합니다. ‘따오기’라고 불러주는 박성우 선생님, 아울러 누나, 언니 또는 현수야 라고 불러주는 ‘詩공간’과 대학원 가족들, 그 다정한 얼굴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부족한 작품을 뽑아주신 전북일보와 심사위원님, 누가 되지 않도록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어깨 토닥여주시며 격려해 주시던 이상복 교수님, 묵묵히 믿어주신 정영길 교수님, 그리고 늘 그리운 강연호 교수님께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약력>
1982년 전북 진안 출생
2005년 원광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현재 동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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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쟁이를 맛보다 / 한창석
하늘과 수면 사이
왈츠처럼 경쾌하게 미끄러지는 사내는
愁心이 깊어 차라리 소금이 되면
감옥의 水深을 가늠해 볼 수 있을까 마음을 절였다
蓮塘의 가장 깊은 곳까지 가라앉고 싶지만
후들거리던 다리 그 어디에
그처럼 완강한 삶의 근육이 붙어 있었는지
그래도 살고 싶다 살고 싶다
도무지 가라앉을 수가 없다
차라리 발을 굴러 하늘로 날아오르려 해도
날개가 없어 새의 그림자를 따라 못의 언저리까지 질주해 볼 뿐
潛泳도 昇天도 하지 못한 채 세상 바람이 죄다 그의 몫이다
젖을 수 없는 못은 도리어 沙漠
내려다봐야 보이는 하늘은 도리어 苦海
잔비를 맞으며 세상을 미끄러진 하루
잔비에도 등허리가 시큰했을 사내 생각에 코허리가 시큰하다
圓과 圓이 부딪쳐 깨어지는 수면
바람과 바람이 부딪쳐 흐느끼는 세상
하루 종일 위태롭게 뒤뚱거렸을 사내
盡人事의 땀이 마르고 응답하지 않는 神을 향한
巫女의 눈물마저 다 마르고 境界에 갇힌 자
마른 영혼을 찔러 혀에 가만히 대 보니
몸서리쳐지도록 짜다
타들어간 鹽田의 까만 소금
刑期를 가늠할 길 없는 사내 어느 새
철없이 겁없이 세상을 지치는 어린 새끼들을 수습하여
水草 사이로 부끄럽게 여윈 몸을 감춘다
2007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심사평 / 김정환·도종환
"생활속 현상 잡아낸 감각적 눈 삶의 철학 이끌어낸 힘 돋보여"
시를 쓰는 우리도 늘 경계에 서 있다.
그 경계에 서서 "하루 종일 위태롭게 뒤뚱거리며" 산다. 연못가에서 소금쟁이를 바라보다가 시의 화자가 느꼈던 그 경계의 아슬함과 위태로움은 시에도, 시를 쓰는 삶에도 역시 매일 찾아온다. "잠영도 승천도 하지 못한 채" 우리는 가라앉을 수도 날아오를 수도 없는 진퇴유곡의 경계에 갇혀 살아야 한다.
그러나 그 고해(苦海)를 회피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응시하면서 건너가는 일, 그게 우리의 선택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소금쟁이를 맛보다'는 밀도 높게 형상화 하고 있다.
미세한 현상을 놓치지 않는 감각적인 눈이 있고 그것을 깊이 있는 삶의 철학으로 끌고 갈 줄 아는 힘이 있다. 시적 긴장이 살아 있고 시의 내면이 꽉 차 있다.
심사위원들이 당선작으로 합의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아울러 언어에 의존하고 싶은 유혹에 끌려가기보다는 '호랑이가 없다'와 같은 시에서처럼 삶에서 우러난 시가 좋은 시라는 믿음을 견지하면 좋겠다.
'바닷가에 서서','곰국'과 같은 시들도 충분히 당선작이 될 만한 수준을 보여주고 있었다. '야영'도 삶과 언어가 육화되어 있는 탄탄한 작품이었다. 다만 함께 응모한 다른 작품들이 이런 작품과 같은 완성도를 보여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포클레인','바다는','종착역에 대한 세 개의 레토릭'등도 모두 가능성을 보여주는 작품들이었다. 이번에 선정되지 않은 것이 더 좋은 시를 쓰는 계기가 되리라 믿는다.
당선소감
"당선소식에 힘든시간 떠올라 눈물 등 푸른 삶을 살아가는 시인될터"
어떤 음성도 수신되지 않는 묵음과 잡음뿐인 라디오를 붙잡고 상심해도 그는 당신의 때가 이르기 전에는 응답하시지 않는다. 내가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입을 닫고 맘을 놓아야 당신의 꿈을 나를 도구삼아 이루심을 믿는다. 하나님이 열어 주시지 않으면 호리병에 다시 나를 가두고 네 번째 천년을 기다리려고 했다. 가나안에 다다를 수만 있다면 광야의 시간은 셈하지 않겠다고 기도했다. 그 때 당선 소식을 들었다. 필마단기로 시와 씨름한 시간들을 떠올리며 눈이 젖었다.
사랑하는 할아버지 할머니와 부모님. 그 분들이 당신의 살을 남김없이 발라내어 나를 먹이신 것을 잘 안다. 당연한 일인 양 받아먹어 온 부끄러움에 목이 메인다. 송하춘 선생님! 내게는 너무도 푸르고 넓은 바다인 그 분의 품에서 나는 영혼의 뼈마디까지 틀어 퍼덕이고 싶었다. 나의 헤엄으로 선생님께 작은 미소라도 드릴 수 있기를 바란 것은 이미 너무 오래된 소원이었다. 정진규 선생님, 최동호 선생님과 김인환 선생님, 이남호 선생님께서도 나의 서툰 헤엄을 지켜보아 주실 것이다. 떠나온 모천의 이상우 선생님, 박범신 선생님, 김석환 선생님, 이재명 선생님, 고운기 선생님을 뵙고 떠나온 나날들만큼 이마를 땅에 대고 아가미를 벌름거려야 할 일이다. 연두부 같은 오빠를 응원해준 동생 정화와 승덕이에게도 언제나 고맙다. 깜깜한 지난 외로움이 달콤했다고 위증하지만 사실 무수한 멀미들은 맵고 썼다. 고비마다 산호섬이 되어 준 소중한 동무들, 대학원 식구들에게 마음으로부터의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옹알이에 귀 기울여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시시한 시, 시들시들한 시, 급기야 허연 배를 위로하고 떠오르는 시체가 되지 않고 늘 등 푸른 시를 쓰겠다고, 아니 등 푸른 삶을 살겠다고 약속드린다. 끝으로, 귀한 지면을 통해 시인의 삶을 다짐하게 해 주신 경인일보사에 감사드린다.
1975년 서울생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고려대학교 국문과 박사 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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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랜딩 증후군 / 김초영
파일럿 고래들이
피아노의 검은 건반처럼 일렬로 누워 있다.
그들은 바다가 아닌 육지에서 자살을 시도하려고 했다.
중앙병원 307호실,
누워있는 엄마의 팔뚝에 옅은 햇빛이 스며든다.
오늘도 멍이 하나 더 늘었다.
의사는 건조한 표정으로 엄마의 굳어가는
관절들을 만져보곤 했다.
스스로 돌아오려 하지 않는 겁니다.
일종의 무의식 상태의 자살이죠.
의사는 녹음테이프를 재생하듯 또박또박 말한다.
녹색 페인트칠이 벗겨진 산소통이
조용한 병실의 오후를 조금씩 갉아 먹고 있다.
결국 대부분의 고래떼는 죽고 말았다, 고 보도 되었다.
중장비를 동원해 바다로 돌려보내는 작업을
감행했지만 전부 살려 내지는 못했단다.
파일럿 고래들은 하늘로 날려던 것이었을까.
자살하기 위해 육지까지 올라온 고래들처럼
엄마가 가는 물줄기를 내뿜는다.
밀린 병원비가 불어나듯
투명한 오줌비닐이 노랗게 부풀어 올랐다.
신문에 죽어있는 고래들의 사진이 실렸다.
죽은 고래들의 미약한 주파수가 좁은
병실 안을 맴돌다 사라진다.
엄마도 저 주파수를 쫓아 육지로 가고 있을지 몰라.
흑백의 고래 사진을 오려 엄마의 머리맡에 붙여두었다.
고래의 순한 눈이 감기고 있다.
눈알이 오랫동안 따끔거렸다.
대구 매일신문 당선작
심사평
예심을 거쳐 올라온 40여편의 작품을 검토한 결과 '스트랜딩 증후군' '에어워시' '비온 뒤' '타워버그' '길' '오래된 가족' '2007 봄, 누드찍는 남자' '셋방' '젤리 시계를 차고 있는 소설가 P씨!' '장독대를 생각하며' '우물이 땀을 흘리네' '원진다방' '겨울 나방들의 초상'이 남았다.
여기서 최후까지 남은 작품은 김초영의 '스트랜딩 증후군'과 한의준의 '에어워시', 구민숙의 '비온 뒤', 김미숙의 '타워버그'였다. 신춘문예의 특성상 참신성에 몰두한 나머지 제목부터 특이한 것을 들고 나온 것들이 많았는데 그 대부분 시의 구조와 겉도는 것들이어서 아쉬웠다. 아니면 현대적 의미의 묘사적 능력은 돋보였으나 깊은
시적 비전을 동반하지 못하고 있는 것들이었다.
김미숙의 '타워버그'가 그런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사물을 그려내는 입심이 남다른데가 있었으나 묘사 그것에 그쳐 시적 무게를 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 흠이었다. 구미숙의 '비온 뒤'는 차분하게 처리하는 서정적 진행이 위트와 더불어 어떤 울림으로 살아나고 있었다. 그런데 참신성이 다른 작품에 비해 덜하다는 점에서 제외시켰다.
김초영의 '스트랜딩 증후군'과 한의준의 '에어워시'는 둘다 당선권에 손색이 없는 작품이었다. 한의준의 또 다른 작품 '보일듯이 보일듯이'도 '에어워시'와 더불어 충분히 매력을 주고 있었다. 그러나 고래와 어머니의 이미지를 무리없이 연결시켜 나가는 '스트랜딩 증후군'이 상상력의 폭이 크다는 점에서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권기호(시인.경북대 명예교수) 정호승(시인)
당선소감
언제 툭 하고 끊어질지 모르는 다리를 건너가는 기분이었습니다. 다리는 늘 위태롭게 흔들리고 갈수록 낡아가고 있었습니다. 한 발짝 내밀고 숨을 몰아쉬고, 또 한 발짝 내밀고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던 날들. 영화관의 관객처럼 오늘은 제 모습을 지켜보며 석양을 맞이하겠습니다.
시를 쓰며 사는 것이 어쩌면 집착이 아닐까 싶은 마음에 힘들었던 날들이었습니다. 시에게 집착하는 것이 아닌 가만히 시를 보듬을 수 있도록, 온전히 삶의 진솔한 무게를 시 속에 실어줄 수 있도록, 부족한 제 손을 잡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꼭 약속드립니다.
지금 떠오르는 사람도 많고 감사드려야할 사람들도 너무 많습니다. 글로써 아파하고, 눈물짓는 나의 글동무 해경·주희·영미·나진. 글을 쓰는 한 영원한 나의 동반자인 선미와 오랜 우정의 결과인 재근·창민·학종에게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또 학교 다니는 동안 글이 무엇인지, 글을 쓰며 사는 삶이 무엇인지를 가슴 깊이 새겨주신 곽재구·안광·김길수·박청호 교수님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예상치 못한 당선소식에 아무 말 없이 눈물만 쏟으시던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하나뿐인 동생에게도 감사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저를 눈물로 낳으시고, 눈물로 키우신 어머니! 이제야 당신에게 떳떳한 아들이 될 수 있어 기쁩니다. 마지막으로 자식을 키우듯 내게 시를 길러주신 나의 영원한 스승, 이름만 들어도 가슴 한 쪽이 저릿하게 울렁이는 나의 영원한 스승이신 송수권 선생님께 오체투지 마음으로 깊이 머리 숙여 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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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에 관한 몇 가지 오해 / 김륭
1.
실직 한 달 만에 알았지 구름이 콜택시처럼 집 앞에 와 기다리고 있다는 걸
2.
구름을 몰아본 적 있나, 당신
누군가를 죽일 수 있는 단 한번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내가 내 머리에 총구멍을 낼 거라는 확신만 선다면 얼마든지 운전이 가능하지
총각이나 처녀 딱지를 떼지 않은 초보들은 오줌부터 지릴지 몰라
해와 달, 새떼들과 충돌할지 모른다며 추락할지 모른다며 울상을 짓겠지만
당신과 당신 애인의 배꼽이 하나인 것처럼 하늘과 땅의 경계를 가위질하는 것은 주차딱지를 끊는 말단공무원들이나 할 짓이지
하늘에 뜬 새들은 나무들이 가래침처럼 뱉어놓은 거추장스런 문장일 뿐이야
쉼표가 너무 많아 탈이지 브레이크만 살짝, 밟아주면 물고기로 변하지
3.
구름을 몇 번 몰아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해나 달을 로터리로 낀 사거리에서 마음 내키는 데로 핸들만 꺾으면 집이 나오지
붉은 신호등에 걸린 당신의 내일과 고층아파트 화장실 물 내리는 소리보다 깊은 어머니 한숨소리에 눈과 귀를 깜빡거리거나 성냥불을 긋진 마
운전 중에 담배는 금물이야
차라리 손목과 발목 몇 개 더 피우는 건 어때? 당신
꽃 피우지 않고도 살아남는 건 세상에 단 하나, 사람뿐이지 왔던 길을 되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건 새가 아니라 벌레야
구름이란 눈이나 귀가 아니라 발가락을 담아내는 그릇이란 얘기지 잘 익은 포도송이처럼 말이야 그걸 아는 나무들은 새를 신발로 사용하지
종종 물구나무도 서고 말이야 생각만 해도 끔찍해
구름이 없으면 세상이 얼마나 소란스러울까
4.
아주 드문 일이지만 콜택시처럼 와 있는 구름의 트렁크를 열어보면
죽은 애인의 머리통이나 쩍, 금간 수박이 발견되기도 해
초보들은 그걸 태양이라고 난리법석을 떨지
2007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심사평
“시적 발상·상상력 뛰어나… 현실고통을 경쾌하게 노래”
• 구름에 관한 몇 가지 오해 : 1.
최종심까지 논의된 작품은 최찬상의 ‘폐가 앞에서’, 이용헌의 ‘게발’, 김륭의 ‘구름에 관한 몇 가지 오해’ 등 3편이었다. ‘폐가 앞에서’는 지나칠 정도로 무난하고 안정돼 있다는 점에서, ‘게발’은 시적 형성력이 뛰어나고 감동을 주는 부분이 있으나 외국인 노동자 문제를 다룬 점이 다소 진부하다는 점에서 먼저 제외되어 ‘구름에 관한 몇 가지 오해’를 당선작으로 결정하게 되었다.
‘구름에 관한 몇 가지 오해’는 시적 발상과 그 상상력이 뛰어나다. 그의 상상력은 기발하고 재미있을 뿐만 아니라 경쾌하기까지 하다. 그의 시를 읽다 보면 현실의 크고 작은 고통을 잠시나마 잊게 될 정도로 마취당한 느낌을 갖게 된다. 그러나 그의 상상력에서 오는 이 위안의 마취력은 실은 현실의 고통에서 나온 것이다.
이 시는 화자의 능청스러운 독백이 시종일관 시 전체를 끌고 가는데, 그 화자는 실은 대응력이 결핍된 실직자다. 실직당한 이의 고통스러운 현실적 상상력이 이러한 역설적 상상력의 시를 낳은 것이다.
선자들은 그의 상상력의 뿌리가 견딜 수 없는 삶의 고통스러움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에 크게 신뢰가 갔다. 엄숙함과 진지함에서 벗어나 이토록 경쾌하게 고통을 노래함으로써 우리를 위로해주는 시도 드물다. 축하의 박수를 보낸다.
심사위원 천양희·정호승
“詩는 지독한 슬픔의 일종, 평생 데리고 살아야 해”
당선 소감
당신, 이젠 절망할 일만 남았군.”
마산 우무석 시인이 내게 한 첫마디다. 도대체 이건 또 뭔가? 역시 나보다 수가 높군. 빙그레 웃는 데는 몇 초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당선소식을 푸드덕, 한 마리 새처럼 날려보냈더니 번쩍, 한 마리 물고기로 토막쳐 되돌려주는 솜씨란. 좀더 깊고 아프게 울어야겠다는 내 가슴을 뒤집어 절망이란 검은 비닐봉지 하나를 만들어주는 시인이 곁에 있다는 건 행복인가, 불행인가?
그러니까 최근 내가 알게 된 몇 가지를 말하자면 이렇다. 구름이 택시보다 빠르다는 것, 허공도 축구공 같은 공이어서 요리조리 잘 몰고 다녀야 한다는 것, 가끔씩은 발을 헛디뎌야 한다는 것, 그래야만 나를 좀더 두들겨 패고 비워낼 수 있다는 것이다.
느낌이 왔다. 얼마나 편한 일인가. 좀 상투적으로 말하자면 죽음이 삶을 살살 달래가며 데리고 산다는 느낌이 당선통보와 함께 뒤통수를 쳤다. 고백건대 나는 아직도 시(詩)를 잘 모른다. 다만 삶도 죽음도 간섭할 수 없는 아주 지독한 슬픔의 일종이어서 평생 데리고 살아야 한다는 사실만은 알고 있다.
한참을 울었다. 외롭다는 말이 뿔 같다는 생각을 하며 다시 웃었다. 겨울 하늘보다 꽁꽁 얼어붙은 가슴으로 웃는 일이란, 부끄러운 일이지만 고마운 사람들이 너무 많아 온몸에 돋아난 뿔부터 삭여야 했다.
감히 부를 수 없는 이름들이 너무 많아 가뜩이나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가 복잡하다.
동국대 김선학 교수님께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마산대 이성모 교수님, 시사랑경남지회 회원들께도 감사드린다. 그리고 무엇보다 부족한 내게 지리산의 힘을 안겨주신 지리산 시인들의 큰형님인 선덕형과 병우형께, 나의 보물 권갑점, 정경화 시인을 비롯한 함양문협 회원들과 지리산문학회 회원들께 이 영광을 돌린다. 마지막으로 내가 사랑하는 부모님과 단미, 문화일보사와 심사위원님들께 큰절 올리며 평생 그 은혜 잊지 않고 살 것을 약속드린다.
본명 김영건
1961년 경남 진주 출생
1988년 불교문학 신인상
1989년 조선대 중국어과 졸업
2005년 제1회 월하지역문학상 수상
2007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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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 / 김영식
아이가
굴렁쇠를 굴린다
빈 골목이 출렁거린다
투명한 바퀴가 오후의 적막을 감는다
파닥거리며 햇살과 바람이
허공이 한 아름씩 감겨든다
감긴 것들이 말려들어가
둥근 시간이 된다 제 몸 속
길을 떠밀며 달려가는 아이
플라타너스 강둑 위
굴렁쇠가 아이를 굴린다
나무그늘 아래서 아이는
새소리처럼 지저귄다
자궁처럼 환한,
굴렁쇠 안 깊숙이 둥근 산이 눕는다
둥근 물소리도 따라 눕는다
들녘 끝
은빛실타래가 천천히
감긴 길을 풀어낸다
고요하던 풍경이 수런거린다
물비늘처럼 반짝이는 길섶
햇살과 바람이 풀린다
노을 몇 점 걸어 나와
강가에 걸터앉는다
텅 빈,
허공을 밀고 가는 아이
우주 한켠, 챠르르
지구가 굴러간다 오월이
푸르게 자전한다
13회 동양일보 신인문학상 시부문-당선작
심사평
신문사로부터 내게 넘어온 원고분량은 266편이었다. 많은 분량이다. 이상한 일은 시가 사회의 반향이나 눈에 띄지 않는 수요에도 이렇게 많은 시의 지망생이 있다는 일이다. 그 이유야 어디에 있든 나무랄 일은 아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든 아니든 시인의 위의(威儀)와 자존심과 겸손함을 견지해야 되리라고 생각된다. 각설하고 본심에 올라온 266편의 시편 가운데 내 손에 최종으로 남은 시편은 김영식의 ‘오월’외 4편과 김민영의 ‘내 오두막의 낡은 문’외 8편, 김은실의 ‘입동’외 5편이다.
김영식의 시편들은 밝고 경쾌하며 속도감과 감각적인 언어교직으로 이뤄져 있다. 그중에서도 ‘오월’은 작품의 소도구들인 소년, 굴렁쇠, 5월의 하늘과 푸르름, 강둑과 플라타너스들이 모두 ‘오월’이란 시를 위해 동질적으로 기여하고 헌신하고 있는 점이 그의 다른 작품 ‘단단한 틈’처럼 서로 견고하게 엉켜 있다.
김민영의 ‘내 오두막의 낡은 문’외 8편은 전 편이 모두 산문성 시의 특장들을 지니고 있다 하겠다. 행의 길이가 길고 유연함이 읽는 이로 하여금 마음 편하게 하고 있는 점이다. 행과 행간이 서로 주어와 서술 형식으로 이뤄진 점도 그렇다. ‘문을 열면 온전한 것은 오직 문뿐이고/ 그냥 무너져버릴 것만 같은 오두막,/ 아주 낡은 문과 같은 내 마음이 사랑이었다고 말한다면/ 우리의 관계는 오두막처럼 금세 무너질지도 모른다.’ 이 시중에 일부 인용한 것임. 그는 장시를 쓰면 좋은 시인이 될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김은실의 ‘입동’외 5편은 입동 무렵의 스산한 농촌풍경을 아주 리얼하게 승화시켜준 작품이다.
‘메주를 쑤는 일은 마실길을 끓이는 일이다/ 이곳저곳 쥐구멍 숭숭난 마을안 소문을 메우는 일이며/ 겨우내 헐거운 낮잠에 빠져 있을 농기구들의 텅빈 시장기를 달래어주는 일이다’에 이르러서는 절창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기성 시인의 입동시편들에서도 이렇게 가슴에 닿는 표현을 본적이 없다. 그러나 앞뒤의 표현이 이 중심표현을 떠 받치지 못한 듯한 점이 아쉽다. 위 세편 모두 훌륭한 특장들을 지니고 있으나 현대적 감각에 좀더 어필한다고 생각되는 김영식의 ‘오월’을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당선을 축하하며 다른 두 사람에게도 분발할 것을 기대한다.
심사위원:양채영(시인)
당선소감
창가로 숭어 떼처럼 참방참방 밀려오는 겨울바다를 바라보며 저 해안선의 어디쯤으로 밀려갈까 생각하던 오후 느닷없이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갑자기 텅 비워버린 머리 속으로 일제히 수많은 갈매기 날갯짓 소리 날아오르고 나는 잠시 중력을 잃어버린 것처럼 휘청거렸던가 모르겠습니다.
먼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시가 무엇인가를 정직하게 가르쳐주셨던 이근식 선생님, 무엇보다 엎드려 있던 글에 날개를 달아주시고 벼랑 끝의 허공을 보여주신 경주대 문예창작학과 손진은 교수님 그리고 노심초사 지켜보던 아내와 경주대 문창과 문우들 고맙습니다.
모자라는 글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의 말 올립니다.
더욱 노력해 좋은 시를 쓰라는 채찍질로 알고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머리 속으로 들어왔던 수 만 마리 갈매기들이 허공으로 부챗살처럼 날아오릅니다.
눈이 부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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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캡슐에 저장한 나쁜 이야기 하나 / 정태화
놋쇠숟가락 하나가 여닫이문 깊숙이 빠져 있었어 문고리 구멍에 꽂혀 타다닥 불
꽃 튀어 오르는 길 척추脊椎를 느끼는 그림자가 일렁이는 달빛 파도에 쓸리며 흐느
적거리고 있었어
사내들 깊은 밤 주막거리 화투짝 속살에 파묻혀 놀고 있는 동안 공산명월空山明月
밝은 달이 만삭滿朔의 몸 쏟아져 내리고 때때로 주인 버리고 오는 신발들이 보이는
시간
그 신발 뒷굽을 척척 빠져나온 발자국들
저희들끼리 우루루 나뭇잎 따라 구르다가
돌담장 호박넝쿨 아래로 숨어들어가 잠잠했어
이른 아침 백주에 궁둥이 까고 있는 호박덩이 몇몇에
어머니가 짚으로 엮은 똬리를 받쳐주다가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오줌을 누셨어
그곳에 둥글고 하얀 어머니 궁둥이가 오래도록
내려앉아 있었어
밭두렁 무성한 잎새 바지 안에 잘 익은 오이들 매달려 있었지 이웃집 밭이랑에서
물오른 가지들이 불쑥불쑥 일어섰어 마음껏 부풀어 팽팽한 그것들과 함께 고추밭에
태양초 고추가 어찌 그리 뜨겁던지 퍼질러 앉은 밭고랑에
매끈매끈 고구마들이 얼굴 내밀고 있었어
저녁놀이 아궁이에서 왈칵 숯불을 뒤집어 놓을 때
어머니 볼 발그레 익어서 돌아오셨지
참 이쁘다 우리 어머니 태양초 고추 하나 머금은 듯 입술 붉은 어머니 고무신 탈
탈 털어낼 때쯤이면 명命 짧은 어머니의 사내가 내려놓은 울음들이 달려 나왔지
왈칵 기다림이 반가운 아이들
앞장세운 변성기의 아이 하나가
감나무 키 큰 그림자
사립문 밖 보내놓고 있었지
호롱불 밝혀야 어른어른 떠오르는 밥상
주춤주춤 아랫목이 내어놓은 보리밥 속에
언제 숨어들었나 고구마들 숨죽이고 있었지
등뼈를 쓰다듬는 어머니 능숙한 손길에
씨앗들 모두 빼앗기고 얌전해진
가지나물 오이냉채가 입맛을 당겼지
놋쇠숟가락으로 식구食口들이 밥을 먹고 있었어
2007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심사평
자연에서의 삶 개성있고 건강하게 풀어
최하림 정일근 최영철 시인
시대가 어려울수록 시는 빛나는 법이다. 예년에 비해 크게 늘어난 시를 읽으면 행복했다. 전국 각 지역에서, 외국에서, 고등학생과 노인들까지 다양한 작품이 투고됐으며 남성들의 투고가 많아져 신춘문예 여성화의 비율이 다소 주는 현상도 보였다. 그러나 신춘문예가 요구하는 신인의 패기와 개성, 가능성을 보여주는 작품보다는 잘 만들어진, 신춘문예의 새로운 전형을 이루는 시들이 많았다.
최종심에 '아버지, 꽃시를 심어요'(석지영·대구), '기차 떠나는 새벽'(이미정·울산), '스트랜딩 증후군'(김초영· 전남 순천), '무늬의 힘'(이현수·전북 진안), '권태'(김성순·울산) '타임캡술에 저장한 나쁜 이야기 하나'(정경화· 경남 함양)등 6편이 남았다.
'아버지 꽃시를…'과 '기차 떠나는 새벽'은 시적 성숙을 보여주었으나 시인의 힘이 부족해, '스트랜딩 증후군'은 신인의 힘을 가졌으나 시의 성숙이 부족해, '무늬의 힘'은 완벽한 시였으나 자신의 틀에 안주하고 있어 '권태'와 '타임캡슐에…'가 마지막 경합을 가졌다.
두 편의 시 모두 신인의 자격을 갖춘 시였다. '권태'는 물 흐르는 듯이 흘러가는 상상력이 빛났으며 '타임캡슐에…'는 싱싱한 상상력이 가득했다.
심사위원들은 오랜 토론을 통해 '권태'가 시적 완성도가 더 높은 작품이나, 다소 산만하지만 좀 더 가능성을 보여주는 '타임캡슐에…'를 당선작으로 정했다. 자연에서의 삶을 건강하게 풀어간 당선시는 시인이 오랜 시간 꾸준하게 독학 으로 개성적인 습작을 해왔음을 짐작케 해주었다.
또한 남성적인 힘과 당당한 시적 스케일을 가지고 있어, 분명 자신만의 독특한 시세계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좀더 깊어지는 용맹정진을 바란다. 당선자에게는 축하의 박수를 나머지 분에게는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심사위원 최하림 정일근 최영철 (시인)
당선소감
"바람이 물었습니다 왜 거기 있냐고…"
정태화
지나가는 바람이 어린아이에게 묻습니다. 너는 왜 하필 그 곳에 쪼그리고 앉아 있니. 여기 이곳에 민들레가 보여서요. 호기심 많은 바람이 다시 묻습니다. 그래 그 동무와 지금 소꿉놀이 재미있니. 글쎄요? 그런데요 동무의 몸이 너무 가벼워 둥둥 떠오르려고 하는 것을 이렇게 말리고 있는데, 제 겨드랑이에 솜털이 막 솟아 올라오는지 자꾸 근지러워요. 이제는 지금 이 자리 떠나야 할 것 같아요 더 묻고 싶은 말은 없으세요.
세상을 향해 날아가는 마음들, 그들이 뿌리내려 걸어간, 걸어가고 있는 이야기들을 은밀히 이렇게 엿듣고 있다는 것은 내게 있어 희열이다. 알고 보면 사람도, 사람의 마음 그 열정도 한 알의 민들레 홀씨처럼 자갈밭 척박한 땅 가리지 않고 내려 마침내 말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일 때문에 나는 많이 눈물겹기도 하면서 또한 스스로 이해할 수 없이 기쁘기도 하다.
국제신문 신춘문예의 자리에 어느날 문득 날려와 뿌리내린 민들레 마음 하나의 꿈이 오랜 시간 참은 뒤 아하 그렇구나 무릎을 탁 치면서 마음껏 날아올라 어디론가 떠나가는 홀씨의 이름, 그 아이들이 세상을 향해 발음이 정확한 말을 걸어 갈 것이라고 믿기로 한다.
당선소식을 듣고 한참을 말없이 울먹였던 아내와 지금 막 옹알이를 시작한 딸에게 지금 한없이 행복한 마음을 전하면서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이 못난 아들을 위해 자신의 일생을 송두리째 헌납하시고도 눈물이셨던 어머니 그리고 내게 오직 하나밖에 없는 형과 동생, 나 때문에 영혼이 아팠던 수많은 그 분들에게 지금 가리늦게 '많이 죄송스러웠다'는 말 전하면서 고개를 숙입니다.
〈약력〉▲본명 정경화 ▲1958년 경남 함양 출생 ▲지리산문학회 회원 ▲주간 함양신문 편집부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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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엄한 모자 / 이기홍
오늘 예식장에 그를 데려가기로 합니다
그는 내 가슴속에 살면서도
맨 위에 올라가 군림하기를 좋아합니다
어쩌면 그는 나와 전혀 상관없는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가끔, 내 든든한 밑바탕이 되어주는 그가
차갑고 근엄한 얼굴을 치켜들면
사람들은 그에게 다가가
다소곳이 머리를 조아립니다
예식장에 초대받아 온 사람들도
나보다는 그에게
더 깊은 관심을 표하기도 해 속이 몹시 상합니다
이제 그가 없으면 나는
사람들의 괄호 밖으로 밀려날지 모릅니다
그래서 난 외려 그의 보디가드가 됐습니다
그의 뾰족한 코가 땅바닥에 곤두박질치진 않을까
낯선 바람에라도 끌려가 낭패를 당하지 않을까
조금도 맘놓지 못하고 그를 지켜봐야 합니다
슬그머니 내 위까지 올라와 상전이 된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나 나는 이렇게
나와 다르게 살아야 하나요
그를 몰아내고 청바지 입기를 좋아하는
나를 데려올 수는 없나요
심사평
유종호·신경림
비슷비슷한 내용, 비슷비슷한 형식의 작품들이 너무 많았다. 불필요하게 산문 형식을 취하고 있거나, 억지로 만든 흔적이 앙상하게 드러나 있는 시도 적지 않았다. 무언가 깊이 생각하고 대상을 주의 깊게 보려는 자세를 보기 어렵다는 점이 아쉬웠다. 널리 유행하는 시 창작 강좌 등의 부정적 영향이 아닌가 싶었다. 아무리 시를 보는 눈이 바뀌어도 지극히 개성적이고 다른 사람이 가지지 못한 시각을 가졌을 때 좋은 시가 된다는 점만은 달라질 수 없을 것이다.
구민숙의 시들은 시의 전개도 날렵하고 말의 구사도 자못 신선하다. 특히 ‘자꾸 헛것처럼’ 같은 시는 흠잡을 데 없이 꽉 짜인 시로 읽히며, ‘귀가’ 같은 시도 기성 시인의 것이라면 충분히 우수한 시로 거론될 법하다. 하지만 투고돼온 다른 사람들의 시와 내용이나 형식에 있어 크게 다르지가 않다. 문정인의 시 가운데서는 외국인 노동자를 다룬 것으로 보이는 ‘오카리나 부는 오빠’가 속도감도 있고 가장 재미있게 읽힌다. ‘옥탑방 여자’도 밝고 환하면서도 서글픈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작자의 만만찮은 솜씨를 보여준다. 다만 어디서 많이 본 것 같고 많이 들은 것 같은 이미지요 정서인 것이 흠이다. 이들 둘에 비해 최찬상의 시들은 덜 다듬어진 듯하면서도 개성적이다. 그러나 ‘쿵’이 발상이나 시법에 있어 아주 새로운 데 반하여, ‘자전거’나 ‘희망의 길’ 같은 시는 아직 치기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걱정을 떨쳐버리기 어렵게 만든다.
이기홍의 시도 개성적이라는 점이 먼저 호감을 갖게 한다. 특히 ‘근엄한 모자’는 속물화돼 가고 있는 주변에 대한 야유이면서 동시에 똑같이 속물화돼 가고 있는 자신에 대한 야유이기도 함으로써 감동의 깊이를 더하고 있다. 사색과 고뇌의 궤적도 엿보일뿐더러 문명비평적인 시각까지 담보하고 있는 수작이다. 이에 비해서 ‘푸른 바람의 집’이나 ‘내 몸속을 구르는 돌’은 내용이나 형식에 있어 미흡하다.
이상 네 사람의 작품을 놓고 논의한 끝에, 작품의 편차가 좀 불안하기는 했으나, 드물게 개성적이라는 점, 동세대 시인에게 결여돼 있는 사색적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는 점 등을 높이 평가해서, 어쩌면 모험일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심사자들은 이기홍의 ‘근엄한 모자’를 당선작으로 뽑는 데 합의했다.
2006.12.31 (일) 21:07
▲2005년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과정 수료
▲현재 대한설비건설협회 근무
2007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당선소감
밝은 날을 뒤로하고 나는 어둠 속으로 걸어갔었다 거기서 그대가 먼 종소리로 날 부르고 있었으므로. 그러나 다가갈수록 꽁꽁 숨어버리던 그대 그대를 찾아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다 나는 깊은 어둠이 되었다, 숯이 되었다. 그 깊은 밤, 비로소 내가 암흑이 되고 나서야 그대가, 해맑은 그대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숯이 된 내 몸이 뜨겁게 타면서 빛을 낸 것이다
이제 내가 타는 빛으로 세상은 다시 환해지고 나는 그대를 어슴푸레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 시가 내 앞에 다가와도 나는 그것을 알지 못했고 겨우 눈치 채고 마음을 고백하려고 달려갔을 땐 이미 시는 점점 더 내게서 멀어져만 갔었다. 그럴 때, 시를 알아보는 방법과 불러들이는 방법을 알려주셨던 선생님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학과 감태준·정희성·이승하 선생님들과 선후배님 그리고 함께 길잡이가 되어준 문학아카데미와 ‘정동진역 동인’ 형들, 사랑하는 어머니와 가족들, 길을 열어주신 세계일보사와 부족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께 무한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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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갈나무 약국 / 임수련 (본명 임외자)
밤새 앓고 난 후엔
딱따구리구리 마요네즈 케챱은 맛있어
인도사이다 인도사이다,
콧노랠 흥얼대며 떡갈나무약국을 찾아가죠
솜털 가운을 걸친 새들
자잘한 열매 알약들과 이슬 드링크 들고
분주하고요 떡갈잎 의자에 앉아 깔깔대는 노란 햇살들
눈꼽 씻은 바람이 흔드는 나뭇가지 소파
꼬마전구 도토리알 켜져있는 조제실 구석에선
약봉지 바스락대는 사슴벌레랑
무당벌레의 그루잠도 훔쳐볼 수 있어요
당신도 어디 아프신가요?
딱따구리구리 마요네즈 인도사이다,
콧노랠 흥얼거리며 향과 색과 소리들이 화답하는
떡갈나무 약국을 찾아가 보시죠
어린 살결처럼 싱싱한 푸른그늘 대기실에 앉아
깨알같이 쓰여진 마음의 처방전 읽고 있으면
어떤 상처도 아물게 한다는
까만 눈속에 당신을 태운 다람쥐 한 마리
지구보다 더 너른 나무의 세계로 안내해 드리고요
떡갈나무약국의 주인장 오색딱따구리와
구름트럭 끌고 약배달 온 빗방울의 경쾌한 대화도 들을 수 있죠
가끔 늦은 시간에 찾아가면 밤의 이마에 새겨진
따갑고 노란 눈동자들 등을 파고 들고
약국 처마의 기둥들이 굵어지는 걸 볼 수도 있는 곳
참 그곳엔 그 기둥들도 혼신으로 즙을 짜낸다는군요
마음이 푸석하게 부어올 땐, 딱따구리구리 마요네즈
케챱은 맛있어 인도사이다 인도사이다,
콧노랠 흥얼대며 떡갈나무약국을 찾아가봐요
2007년 영남일보 문학상 당선작
심사평
"이야기시·노래시 조화 돋보여"
이기철 최동호
예심을 거쳐 올라온 작품들은 비교적 고른 수준을 보였다. 전체적으로 보면 작품의 다양성이 부족하고 불필요한 요설의 노출이 거슬리는 점이었다. 이는 아마도 신인들의 의욕 과잉이나 신춘문예의 흐름을 그릇 인식하고 있음에서 온 현상이 아닌가 생각된다.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실험시, 현실고발시, 민중시의 모습은 별로 보이지 않았고 내면 의식과 삶에의 통찰을 노래한 시들이 많았다. 시의 풍토가 안정되어 가고 있다는 징조로 읽어도 될듯하다. 그런 가운데서 심사위원을 숙고하게 한 작품은 '칸나가 피는 가계부' '떡갈나무 약국' '먼지의 안쪽' '유방암을 앓는 여자' '치자나무의 마음' 등이었다. 이 작품들을 두고 두 심사위원은 비교적 오랜 대화를 나누어 마침내 '떡갈나무 약국'을 당선작으로 미는 데 합의했다.
'칸나가 피는 가계부'는 언어구사가 탐스럽고 현란하나 가끔은 우발적인 시행이 불필요하게 개입하고 있는 것이 흠이었지만 당선권으로밀어도 손색이 없는 작품으로 여겨진다. '먼지의 안쪽'은 생각의 깊이와 휴머니티라고 할 인간미를 지니고 있으나 관념시로 흐를 가능성이 결함으로 지적되었고 '유방암을 앓는 여자'는 요즘 유행하는 '몸담론'을 체현하고 있어 읽는 재미를 더하고 있으나 소품(小品)이고 결말 처리에 모호함이 있었다.
'치자나무의 마음'은 사물에 대한 애정과 일종의 물활론적 사유가 담겨 있으나 지나치게 소박하고 평이함이 결함으로 지적되었다. 당선작인 '떡갈나무 약국'은 시어의 경쾌한 흐름과 발랄한 상상력이 시를 읽는 마음을 견인하는 힘이 있다. 이야기시와 노래시의 양면을 함께 지니며 비약적인 어휘와 에그조틱한 상상의 모험을 독자에게 선사한다. 아마도 가볍지 않은 감각적 훈련을 쌓은 듯하다.
당선자와 그 밖의 모든 응모자에게 문운 있기를 바란다.
◇심시위원=이기철(시인·영남대 교수), 최동호(문학평론가·고려대 교수
당선소감
"구석서 울던 詩 꺼내 줘 감사"
나에겐 깊고 푸른 골짜기가 있어요
많은 생각과 낱말들
촉루처럼 흩어져 있는.
어떤 힘에 끌려 난 그 골짜기로 가서 자주
뒹굴고 있는 뼈들을 바라보죠
푸른 이끼 깔고 앉아 성근 이빨 꾸욱 깨물고
동굴 같은 텅 빈 눈은 들고
힘줄과 살 입히고 생기 불어넣어* 달라며
눈물 뚝뚝 흘리는 캄캄한 촉루의 눈빛
몰랐어요, 나는
어떻게 하면 그들이 살아날 수 있는지
해골과 뼈들 서로 연락하여*
인디에나존스에서처럼 후두두 일어나 몸을 이루는지
내가 가슴 저린 짝사랑을 오래 앓으면 앓을수록
알 수 없는 바람이 일고 시내가 흘러
튀어오르는 봄꽃들처럼
각기 뼈를 맞추며 몸을 입고 걸어나오는 것인지
내 사랑, 詩는 촉루로 이루어져
늘 이렇듯 난 아픈 것인가요
* 성경 에스겔서 37장
내 시를 간섭하시고 영감과 문장력을 주시는
하나님께 이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구석진 곳에서 무릎 꿇고 울고 또 울던
제 시를 밝은 곳으로 이끌어내신 이기철, 최동호 두 분 심사위원님께
감사드립니다. 낮은 자세로 언어와 삶을 공굴리는 시인이 되겠습니다.
영혼이 맑아야만 올바른 시가 온다, 며
곁에서 제 부족한 인격과 시를 매질하시는
경주대학교 손진은 교수님께 감사와 존경을 표합니다.
오래 감성을 나누며 서로 격려해준 경주대학교 문창반 식구들,
한 소식 틔우기를 고대하고 고대한 방송대, 문예대 선후배들과
태중의 아기에게 시를 들려주며 딸이 시인 되기를 바라신 어머니께
저를 오랫동안 묵묵히 믿어준 남편에게도 고맙다는 인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시를 아끼는 모든 분들과도
기쁨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시를 아끼는 모든 분들과도 기쁨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
경남 통영 출생
한국방송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경주문예대학 수료
경주대학교 시회교육원 문예창작반 재학 중
현대중공업주최 전국백일장 시부문 은상 수상
신라문화재백일장 시 부문 최우수상 수상
방송대 학우문학상 시 부문 최우수상 수상
2003년 대전일보 시 부문 최종심
2006년 서울신문 시 부문 최종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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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라여인숙 / 김영식
어린물떼새 발자국 안테나처럼 찍힌
해변가 모퉁이 외딴 집 한 채
대문 푸른 그 집의 적막을 떠밀자 능소화
꽃잎마다 출렁! 노을이 밀려든다
「자는 방 잇섬」 걸어놓고 주인은
종일 갯바위 너머 일 갔는지
마당엔 젖은 파도소리만 무성하다
집이 그리운 집게처럼 나는
풍랑주의보 내린 어로漁撈를 정박시키고
소금기 반짝이는 그 집 빈방에 들어
하룻밤 묵고 가기로 한다
바람소리 켜켜이 비닐장판처럼 깔린
방바닥에 지긋이 손을 넣으면
오래 흘러온 것들이 제 상처를 들여다보는 시간
공중을 내려놓은 갈매기들이
깃 속에 낮의 시린 부리를 묻는다
등 굽은 주인은 아직 돌아오지 않고
모서리 둥글게 닳은 물결무늬 숙박계
세상에 없는 주소 꾹꾹 눌러 적으면
누군가의 등을 안아주던 흰 바람벽
위로 참방참방 헤엄쳐오는 숭어 떼
방파제 끝에서 인부 몇 돌아오고 나는
옆으로 누워 밤을 견디는 긴발가락집게처럼
온 몸이 녹아드는 아랫목에 누워
홑이불 같은 수평선 한 자락 당겨 덮는다
2007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심사평
본심에서 마지막까지 논의된 작품은 김영식의 `소라 여인숙' 외 4편과 박창호의 `오십견'외 4편이었다.
박창호의 시는 일정한 작품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문체가 담백하고 과장된 진술이 없다. 죽음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씌어진 듯한 그의 시들은 죽음이라는 주제를 형상화한다. 상실감과 회한과 생의 덧없음, 차분한 어조는 시의 내용을 실감나게 하면서 독자를 숙연하게 하는 조용한 힘이 된다. 이런 미덕에도 불구하고 감상성은 그의 시의 큰 흠이라고 할 수 있다. “여문 마늘을 먹으면/ 아버지 지금도 눈물이 납니다” 같은 진술이 그렇다. 감상을 절제할 수 있는 냉정한 가슴, 객관의 자리에서 세계를 응시하는 차가운 눈이 필요하다고 본다.
당선작으로 뽑은 김영식의 `소라 여인숙'은 선이 굵고 힘이 있는 작품이다. 새로운 표현에 대한 열정이 있고 사물들과 자신의 심리에 대한 섬세한 관찰이 돋보인다. “대문 푸른 그 집의 적막을 떠밀자 능소화/ 꽃잎마다 출렁! 노을이 밀려든다”와 “모서리 둥글게 닳은 물결무늬 숙박계” 같은 묘사도 빼어나지만 “누군가의 등을 안아주던 흰 바람벽/ 위로 참방참방 헤엄쳐오는 숭어 떼” 같은 표현은 탁월하면서도 참신한 맛과 멋이 있다. 신인에게는, 그리고 문학에는 독자를 설레게 하고 놀라게 하는 이런 새로움이 있어야 한다. `소라 여인숙'은 표현에 공을 들이고 자연스럽게 읽히도록 언어의 선택과 배치에 무척 신경을 쓴 작품이다. 그러나 함께 응모한 다른 시들은 `소라 여인숙'과 다소 질적인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다와 썩은 생선들과 고래냄새, 그리고 범죄와 죽음의 냄새를 물씬 풍기는 이 신인의 독특한 시시계를 우리를 주목할 것이다.
김영기·최승호
당선소감
해안선 같은 차창으로 어둠이
숭어 떼처럼 참방참방 밀려드는 것을 바라보면서 나는
먼 곳의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겨울 들판 같은 내 안의 나를 만나러가는 길이었을까요.
마을의 불빛들이 따뜻하게 엎드린,
수평선을 닮은 산자락 어디쯤 나도 흘러가 눕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때
해조음인 듯 낯선 음성 하나가 귓바퀴를 파고들었습니다.
잠시, 그리고 오래 목이 메었습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아울러 속이 빈 제 시의 항아리에 형형한 눈빛과 생기를 채워
세상 밖으로 출렁이게 해주신
경주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손진은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가족들과 문창반 문우 여러분 그리고 멀고 가까운 곳에서 따순 눈동자로
지켜보아주신 여러분들 모두 고맙습니다.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께도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낮게 걸린 저 불빛이 어둠의 심해를 건너가듯
뚜벅뚜벅 시의 행보를 쉼 없이 내딛는 것으로 보답을 드리겠다는 약속을 심습니다.
밀물에 밀물이 섞여 만조를 이루듯
어둠이 먼저 온 어둠에 살을 섞고
은하를 흘러가던 별 몇 개도 내려와 발목을 담급니다. 별들의 굽은 등뼈가 둥글게 빛납니다. 나는
오래 이 바닷가에 앉아있어도 괜찮다는 생각을 문득 했습니다.
1960년 경북 포항生
방송통신대 국문학과 졸업
경주대 문예창작학과 재학중
2006공무원문예대전 수필부문 최우수상
동해지방해양경찰청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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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고 향기로운 실탄 / 정재영
드티봉 숲길을 타다가 느닷없이 총을 겨누고 나오는
딱총나무에게 딱 걸려 발을 뗄 수가 없다
우듬지마다 한 클립씩 장전된 다크레드의 탄환들
그 와글와글 불땀을 일으킨 잉걸 빛 열매를 따 네게 건넨다
실은 햇솜처럼 피어오르는 네 영혼을 향하여
붉게 무르익은 과육을 팡팡 쏘고 싶은 것이다
선홍빛에 조금 어둠이 밴 딱총나무 열매에 붙어
이놈들 보게, 알락수염노린재 두 마리가 꽁지를 맞대고
저희들도 한창 실탄을 장전 중이다
딱총을 쏘듯 불같은 알을 낳고 싶은 것이다
그게 네 뺨에 딱총나무 붉은 과육 빛을 번지게 해서
갑자기 확 산색이 짙어지고
내 가슴에서 때 아닌 다듬이질 소리가 들리고…
막장 같은 초록에 갇히면 누구든 한 번쯤 쏘고 싶을 것이다
새처럼 여린 가슴에 붉고 향긋한 과육의 실탄을
딱총나무만이 총알을 장전하는 게 아니라고
딱따구리가 나무둥치에 화약을 넣고
여문 외로움을 딱딱 쪼아대는 해 설핏 기운 오후
멀리서 뻐꾸기 짝을 부르는 소리 딱총나무 열매 빛 목청
딱총나무의 초록이 슬어 놓은 잉걸 빛 알들이
겨누는 위험한 숲 내 손을 꼭 잡는다.
2007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심사평
역동적인 생명력 거대 물결 이뤄
장시간 600명에 가까운 이들의 시를 읽으면서도 그다지 지루한 줄 몰랐다. 문학의 위기니,시의 죽음이니들 해도,상당수의 투고작들이 저마다의 얼굴을 반듯하게 갖추고 있었고,저마다의 매력적인 향기를 뿜고 있었다. 전반적인 수준이 만족할 만했다.
고른 수준을 보이는 이,앞으로의 창작 활동에 대한 신뢰감을 주는 이 등을 골라서 열다섯 명을 뽑았다. 모두 손색없는 작품들이었다.
그래도 어쩌랴,서정적 진정성,언어적 숙련도와 개성의 깊이 등을 기준으로 다시 다섯 명을 뽑았다. 모두 수작들이었다. 그러나 한 편의 당선작을 위해 다섯 명의 흠을 잡아보기로 했다.
김경미씨의 투고작들은 참신한 언어감각이 돋보였다. 동시에 이 장점은 씨의 한계로 지적되기도 했다. 젊은 언어감각이 언어적 경박성으로까지 치달아 버린 것이다.
김명희씨는 사물과 일체되는 물활론적 감수성으로 단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산문적인 서술을 지양하고 보다 응축된 표현을 해야 하겠다는 주문이 따랐다.
김영건씨는 지나친 노련함과 산문성이 트집 잡혔다. 하지만 위트가 시적 재능의 기반이 된다는 점에서 그의 유쾌한 상상력은 돋보였다.
정재영씨는 이들 중에서 가장 많은 시를 투고하였을 뿐 아니라 한결같이 높은 수준의 역작들을 보여주었다. 그중에서 당선작으로 정한 시 '붉고 향기로운 실탄'은 한마디로 역동적인 생명력을 보여주는 시이다. 산문적인 서술로는 이를 수 없는,말소리의 조직과 오감을 통해 서정을 주입하는 시이다. 불필요한 이인칭 청자,수사적 어법의 과용 등이 흠이 된다는 지적도 있긴 하였으나 이를 당선작으로 정하는 데는 반대가 없었다.
한 편을 뽑는 일은 괴로웠다. 하지만 심사자 셋은 한동안 향기로운 시의 바다를 유영하고 나오는 달콤한 나른함을 나눌 수 있었다.
시인 김종해 신진 안도현
당선소감
"치열한 삶 속 시 '담금질'은 계속돼"
어느 날 갑자기 시가 내게 온 지 꼭 20년이 지났다. 시는 고향역의 대합실 벤치에 새우처럼 웅크리고 잠에 빠진 노숙자의 등을 타고 내게 왔다. 시에서는 모름지기 사람 냄새가 나야 한다는 스승의 가르침을 받기 이전에 시는 이미 그 단서를 가지고 내게 온 것이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습작기의 내 의식을 지배해 온 것은 새우처럼 웅크린 노숙자의 그 등이었다. 내 시는 웅크렸던 등을 대고 잠 한번 깊이 청할 수 있는 따뜻한 구들장이 되지 못한다. 다만, 나에게 있어 시는 남루한 생의 뜯어진 옷자락 사이로 언뜻언뜻 내비치는 흰 살빛 같은 각성이면 되었다.
20년 세월, 내 지각은 너무 느려터지고 아둔했던 것일까? 내게 주어진 단서는 자명한 것이었지만 내 앞에는 늘 왜곡과 착시의 갈림길이 가지를 뻗고 있었다. 내 시에서 한 조각 살빛의 각성이 읽히고 삶의 결이 잡힐 때까지 나는 얼마나 더 내 무딤을 벼려야 하는가?
내 습작기는 지금부터가 새로운 시작이다. 생의 치열한 연소 속에서 내 시의 담금질과 메질은 계속될 것이다. 시와 삶이 서로의 경계를 넘나드는 상호작용만이 내 시의 방법론임을 잘 알기에 내 범상한 일상을 탓하기에 앞서 나는 앞으로 낯설고 거친 풍경을 찾아 모험도 불사하는 생의 에너지를 키우는 쪽으로 관심을 집중할 것이다.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께 엎드려 감사의 말씀 올린다.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빗나간 내 시의 안목을 바뤄 주시느라 노심초사 애쓰시고 심려가 많으신 박제천 선생님께 큰절 올린다.
직장 동료로서 늘 격려를 마지않았던 이영식,황상순 시인님 그리고 문학아카데미 시창작반 문우들과도 당선의 기쁨을 함께하고 싶다. 곁에서 묵묵히 지켜봐 준 아내와 두 아이들과도 이 기쁨을 나누고 싶다.
◇1952년 전남 승주 출생.
광주대,한양대 행정대학원 졸업. 국세청 행정사무관, 현재 국세청 전산정보관리관실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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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싱 페이퍼 - 김윤이
잘 마른 잎사귀가 바스락거리며 나를 읽네
몇 장 겹쳐도 한 장의 생시 같은,
서늘한 바람 뒤편
달처럼 떠오른 내가 텅 빈 아가리 벌리네
지루한 긴긴 꿈을 들여다봐주지 않아 어둠이 흐느끼는 밤
백태처럼 달무리 지네
일순간 소낙비 가로수 이파리, 눈꺼풀이 축축하게 부풀어 오르고
거리마다 지렁이가 흘러넘치네
아아 무서워 무서워
깨어진 잠처럼 튀어 오른 보도블록,
불거져 나온 나무뿌리
갈라진 혓바닥이 배배 꼬이네
비명이 목젖에 달라붙어 꿈틀대네
나는 이 길이 맞을까 저 길이 맞을까
손바닥에 침을 퉤퉤 뱉고 싶지만
손금이 보이지 않는 손
금 밟지 않기 놀이하듯 두 다리가 버둥대네
두 동강난 지렁이 이리저리 기어가고
구름을 찢고 나온 투명한 달
내 그림자는 여태도록 나를 베끼고 있네
2007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심사평
사근사근 풀어내는 언어감각 돋보여
시와 인간이 만나는 장소는 언어와 리듬이다. 산문과 시의 경계를 구분할 수 없는 많은 응모작들을 읽으며, 이 광활한 시대에 개성적이면서도 깊은 시정신을 내포한 시인을 찾는 작업이 지난함을 느꼈다.
수천통의 응모작 가운데 예심을 통과한 작품들이어서 그런지 대체로 긴장감이 팽팽했지만, 삶의 삼투압이 시 속에 스며들지 못한 작품들이 많았고, 이는 곧 언어의 낭비로 이어졌다.
마지막까지 논의되었던 작품은 이주연의 ‘21세기,실낙원’, 박여주의 ‘신호대기’, 권지희의 ‘직소 퍼즐’, 이산의 ‘낭만적인 잠수부의 작은 눈’, 김윤이의 ‘트레이싱페이퍼’ 등이었다.
이 중에 이주연의 ‘21세기, 실낙원’은 검은 비닐속에 자라는 생명을 통하여 이 시대의 불임성을 묘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끝마무리가 허전하여 읽는 이를 깊은 감동으로 이끌지 못한 점이 아쉬었다. 박여주의 ‘신호대기’는 자연스러운 솜씨로써 삶을 투시하는 힘이 느껴졌지만, 관념어의 돌출과 몇 군데 표현이 클리쉐(cliche)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당선작으로 김윤이의 ‘트레이싱페이퍼’를 정하는 데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가쁜 숨결 속에서도 잘 유지되는 묘사력과 활달한 상상력으로 개성을 한껏 발휘하고 있었다. 이 작품과 함께 응모한 작품에서 보여지는 다소 시류적인 어투와 산문성은 이 시인이 앞으로 극복해야 할 문제이기도 하지만, 사근사근 시를 풀어내는 언어감각은 앞으로 한 시인으로서의 항해에 눈부신 햇살을 예고하고도 남는 것이었다. 새 시인의 출발을 축하한다. 한국시의 가장 예민한 촉수로서, 힘차게 비상해 줄 것을 믿는다.
시인 문정희·황지우
당선소감
벌컥 우울해지는 내가 너무 신기해
'진정한 의미의 공적인 분노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분노나 슬픔을 불특정 다수의 동포와 나누어 가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아름다운 환상에 불과하다. 아픔이란 우선 개인에 머물러 있음으로 해서 구체화 되는 것이다. ‘(호리에 도시유키 ‘곰의 포석’ 중에서)
올여름, 선풍기 없이 폭염에 시달리면서 이 글을 옮겨 적었다. 선풍기 바람이 싫기도 했지만, 선풍기가 없었기 때문에 악창처럼 달라붙은 더위를 떨치지 못하고 그 속에서 나에 대해 골몰해보기로 했다. 너무나도 평이하게 살 것이다, 라는 내 생각과 달리 살고 있다는 것.
자다가도 벌컥벌컥 가슴이 열리고 우울해지는 내가 너무 신기하다. 그러니 인생은 내게 아름다운 것일까? 끔찍한 것일까? 존경하는 분이 일러주신 것처럼 좀 더 절실해지기를. 그래서 내 시에도 부디 그 깊이가 드러나기를 바랄 뿐이다.
문학의 깊이와 열정을 몸소 보여주신 서울예대 교수님들, 머리가 희끗해진 지금까지도 재봉일로 생계를 꾸리시는 부모님, 편벽한 나를 이해해주는 언니와 동생 그리고 보인, 05학번 친구들, 도움을 주신 많은 분들, 오랫동안 나를 지켜봐준 친구들, 선해주신 심사위원님께 특별한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다. 그리고 여태도록 나를 놓지 않는 하나님께도.
▲1976 서울 출생. 본명 김윤희
▲2006 연세대 윤동주 문학상 시부문 수상
▲2006 계명대 계명문화상 시부문 수상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2년 재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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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레옥잠 / 신미나
한편의 시의 탄생은 한 생명의 탄생 만큼 눈부신 일이다. 수많은 독자의 기대를 받으며 신춘 정월 초하루에 태어난 시는 분명 축복받은 시임에 틀림없다. 금년도에도 그런 시가 태어났다. 당선작으로 뽑힌 신미나의 ‘부레옥잠’은 부유성 수초인 ‘부레옥잠’이라는 작은 사물을 섬세하게 묘사하여 서정성의 깊은 완성을 획득한 시이다. “몸때가 오면 열 손톱마다 비린 낮달이 선명했다//…가만 숨 고르면 몸물 오르는 소리 한 시절 너의 몸에 신전을 들였으니…” 시대와 삶을 투시하는 사상성이나 새로운 언어의 탐색은 없다 하더라도 사물에 대한 정감과 생명에 대한 여성적 상상력으로 넘치고 있는 빼어난 작품이다. 이 작품과 함께 끝까지 선자들의 손에 남았던 작품으로는 유병록의 ‘흰 와이셔츠오리떼’, 김서영의 ‘자벌레’, 박미산의 ‘파티마는 천왕봉에서 나를’, 박성준의 ‘에스컬레이터도 밟으면 꿈틀한다’, 김초영의 ‘스트렌딩 증후군’, 박도준의 ‘젖은 구두’ 등이었다. 볼링장의 레인과 벗어나지 못하는 일상을 절묘한 비유로 풀어낸 ‘흰 와이셔츠오리떼’, 엎드린 당신의 발을 끈질기게 물고 있는 삶의 늪을 묘사한 |
‘젖은 구두’, 작은 생명에 대한 놀라운 순간을 환희로 포착해낸 ‘자벌레’ 등은 충분한 수준을 보여주는 가편이었다. 시는 언어 예술의 정점이다. 필연성 없는 산문성의 경향, 언어의 무절제한 낭비, 소통 불가의 시들이 범람하는 이 시대에 치열한 시정신과 절제된 언어로서 서정시 본래의 감동을 획득하는 시인이 되기를 기대한다. 〈시인 김종해·문정희〉 |
▲ 1978년 충남 청양 생 ▲ 강릉대 대학원 국어교육과 석사 5학기 | |
어릴 적 길을 가다 빛나는 돌 하나를 발견한 적이 있었다. 먼지를 뒤집어 쓴 돌들 사이, 햇빛에 반사되어 이상한 광채를 뿜는 돌이었다. 친구와 나는 그 어떤 표시도 하지 않은 채 보물을 숨기듯 그 돌을 땅에 묻었다. 그리고 약속했다. 잊지 말고 돌을 찾으러 가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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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 Fariborz Lachini 연주곡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