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라는 것은 없습니다. 남성과 여성, 개개인이 존재할 뿐이고 개별적인 가족 공동체가 존재할 뿐입니다.-마거릿 대처
대처리즘은 확실히 프로젝트를 가지고 있었다...우리를 대처리즘의 언어로 사고하게 말하게 만드는 것이 목표였던 것이다...한마디로 ‘사회 같은 것은 없다’고 배웠다.-스튜어트 홀
가장 첫 번째로 신자유주의를 논할 때 우리가 얘기할 수 있는 인물은 영국의 고(故) 마거릿 대처 전 총리일 것이다. 대처의 ‘대처주의’는 여러모로 어떠한 의미로든 영국에 큰 족점을 남겼고, 대처의 흔적은 현재 영국에도 남아있다. 한편으로는 그녀의 사망만 으로도 영국서 극명한 차이와 논쟁이 벌어진 것을 보면, 살아서든 죽어서든 그녀가 현대 영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인 것만은 확실하다. 그녀의 정책과 사상이 옳든, 그르든 간에 그녀의 정책은 이후 영국의 존 메이저 정부와 토니 블레어 정부에게서 상당수 계승된 점과, 이후 신자유주의 정부 중 그녀의 정부가 가장 먼저 ‘신자유주의적’정책을 실시했다는 점에서 그녀가 신자유주의 정부를 논할 때 가장 먼저 이야기될 수 있다는 건 분명하다. 그렇다면 대처의 정책은 정확히 어떤 방식이었을까?
대처와 그녀의 참모였던 레튄 등이 당시 영국을 바라보는 시점에서 가장 ‘옳은’ 영국은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이었다. ‘개인의 경제의 자유’가 극도로 인정되었고, 어떠한 경위에서도 ‘사회주의’적인 것은 용납되지 않은, 그런 사회였던 것이다.
그러나 대처의 사상이 단순하게 빅토리아 시대로 돌아가자는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빅토리아 시대 특유의 가부장적, 보수적 이미지를 적절히 사용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신자유주의적) ‘진보’적 개혁을 같이 실행하면서 자신들을 지금까지의 보수와는 완전히 다른 이미지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대처주의는 단순한 보수주의가 아닌, ‘유지하려면 끊임없이 혁신하고 개혁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자기 혁신적 프로젝트였으며, 사회 민주적 청치, 경제체제를 혁신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던 사상이었다.;
대처는 이에 따라 노동당 정부가 케인즈 주의가 포디즘 등을 수용해서 절대 고용을 실시한 부작용으로 인해 내려갈 기미가 없던 인플레이션을 잡는데 주력했다. 문제는 홉스봄이 지적한 “정치가들에게서는 자유방임이론가들이 주장하는, ’자연적 실업률‘(인플레 압박을 유발하지 않는 수준서의 실업률)’이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명제가 정치가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적용된다는 것이다. 대처 정부 하에서 실업률은 1983년에 이미 11퍼센트를 돌파했고,(집권 직후인 1979년에 5.45퍼센트였었다.) 이는 북아일랜드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되어, 1988년에 16퍼센트를 돌파했던 결과를 낳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대처의 정책은 주택의 소유율을 25퍼센트에서 50퍼센트까지 늘릴 정도로 성공적인 면모도 보였고, 남부 잉글랜드의 금융업을 크게 신장시키기도 했으나, 대처의 정책은 결과적으로 북부 잉글랜드와 북아일랜드, 스코틀랜드를 중점으로 한 제조업의 몰락을 가져왔고, 이는 필연적으로 영국의 양극화의 증대를 낳게 되었다.
또한, 재정을 중앙정부가 통제하게 되는 경향이 두드러지는데, 대표적인 예가 ‘인두세’관련 논쟁이다. 1989년 세금의 기준을 재산이 아닌 인구로 부과하려는 인두세 논쟁은 결국 이로 인한 반발 여론 탓에 세금의 기준을 재산으로 하되 그 지역의 인구를 고려하는 구역세(council tax)로 수정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기업들이 지방정부에 내는 지역세를 지방정부가 아닌 중앙정부에서 부과하게 되며, 그 세를 중앙정부가 지방정부에 나누는 형식으로 되면서 중앙이 재정을 꽉 쥐는 형태의 구조는 더욱 강대해졌다. 또한, 1984년 대처는 지방정부의 특정 한도 내에서 공공지출을 늘릴 수 없게 하는 ‘지방세 한도제’를 도입했으며, 1985년, 영국의 상위정부인 카운티-하위정부인 디스트릭트 이중체제의 상징이었던 런던광역의회 등의 카운티를 철폐했는데, 이에 따라 리버풀 등지의 도시좌파 노동당 의원들이 저항하는 것을 한도 위로 지출한 세금을 추징하면서 그 의원들의 자격을 정지하는 등의 행위로 억눌렀다. 또한, 대처리즘의 칼은 교육에도 미치게 되어서, 1988년 교육법에 따라, 모든 교육은 종교 교육 의무화 등이 포함된 커리귤럼서 이루어지며, 중앙정부는 학교가 이를 시행하는지 감시했다. 이러한 행위의 결과는 위에 스튜어트 홀이 언급하듯이, 어떠한 경우에서도 대처리즘의 ‘이외’로 생각하는 건 허용되지 않게 되는 결과를 낳았고, 중앙에서 대처가 실시하는 모든 행위에 대한 ‘반역’은 격퇴되었다. 대처의 위대한 개혁에 방해되는 모든 것은 철폐되는 것이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대처의 정부가 빅토리아시대로써의 복고라면, 왜 연방왕국으로써의 영국의 전통이 담긴 이중통치체계를 박살내면서까지 그 개혁을 실행하는 것인가?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봐야할 것은 대처의 정부는 전술했듯이 단순한 ‘보수주의’가 아니란 것이다. 대처의 정부는 엄밀히 따져 복고주의가 아닌, 자유방임주의자에 가깝게 행동했고, 그들은 빅토리아적 복고적 가부장주의를 아주 정치적으로 사용했다. ‘국민’프레임을 통해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이들과 비우호적인 이들을 철저히 나누었고, ‘계급’과 같은 전통적 구분을 거부하며 당시 잦은 파업과 나아질 기미가 안보였던 경기로 피로증세를 보였던 중산층이나 보수 성향 시민들의 민심을 아주 정확히 노려 선거전을 나섰다. 한편으로 대처가 중시했던 것은 ‘법’이었는데, 그녀는 이에 따라서 그녀에게 반항적인 지방정부를 제압할 때나, 그녀의 정권서 악으로 규정된 거나 다름없는 노조와 파업을 제압할 때에 법을 주로 활용했다. 이는 필연적으로 종래의 연방왕국의 기틀서 이중통치체제 등의 연방제적 성격이 강력했던 영국의 정부를 점점 중앙정부위주로 나아가게 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이런 면에서 스튜어트 홀은 대처의 선거 전략이 정치를 단순히 계급적으로 나서지 않고 계급을 뛰어넘는 이데올로기를 제시해서 집권했다는 점에서 굉장히 그람시 적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이러한 점에서 대처의 집권을 종합해보다면 그것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인가? 가장 중요한건, 민중은 그들을 선택할 정부를 계급적으로 선택하지 않는다. 당시 영국은 젊은 층 내부에서의 향락주의와 함께, 내부에서는 사실상 계급적 이득에 몰두한 파업들로 인해 몸서리를 앓고 있었고, 경제적 성장은 둔화되어가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대처는 빅토리아시대의 ‘금욕적, 기독교적, 자유주의적’분위기를 이상향으로 제시해 몰락해가는 제국에서 아직도 제국시절의 복귀를 원하는 전통세력의 지지를 얻고, 한편으로는 (노동자를 포함한) 아래계층으로부터는 침체되어가는 사회의 개혁을 주장하면서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로, 그녀의 정부 하에서 영국의 양극화는 더욱 심해져갔으며, 그녀의 주도하에서 공공주택의 개념같은, 사회민주주의적 요소는 ‘사회주의’라는 이유로 철폐되었고, 중앙정부의 권위는 하늘을 모르고 찌르게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대처의 정부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것인가? 대처의 정부가 내건 이상에 대해서 영국의 노동당의 대응은 구태의연했다. 그저 노동자들의 지지만 얻을 수 있다면, ‘계급’적인 정책만 내세우면 선거서 승리할 수 있을것이라 여겼다. 그 결과로, 노동당은 대처와 메이저로 이어지는 보수당 정권에 연전연패했으며, 결과적으로 토니 블레어에 와서야 정권을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처-메이저-블레어로 이어지는 영국정부의 신자유주의적 연계는 영국을 일시적으로 발달시킨 것으로 보였으나, 그것은 회광반조에 불과했고, 최종적으로 윌가 사태로 이어져 이것이 폭발하게 되는 것이다.
에...간단히 과제로 써볼겸 써봤습니다. 다들 보시고 평가좀 부탁드립니다...헤헤....
첫댓글 대처도 복잡하게 평가해야 하는데.본인자체가 아주 철저히 완고한 이미지를 보여준지라.
쉽지가 않네요.솔직히 가장 복잡한 대처를 어느쪽에 치우치지않고 평가하시는 것 같아서 저는 괜찮다고 봅니다.
흠... 무난하게 보이는데 혹시 참고서적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까요??
스튜어트 홀 저작의 "대처리즘의 교훈:그람시적인, 너무나 그람시적인"이 메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