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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감고 손끝으로 사진을 더듬는다. 손가락 끝에 오톨도톨한 것들이 만져진다. 사진 위에 점자가 박혀 있다. 이 사진을 찍은 작가 헤라르도 니헨다(Gerardo Nigenda)는 전맹 시각장애인으로 사진 찍을 당시의 분위기, 느낌 등을 짧은 시로 써 점자타자기로 사진에 새겨 넣었다.
그러나 관람객은 그 점자를 읽을 수 없다. 점자는 스페인어로 쓰여있고 이에 대한 해설은 어디에도 없다. 그렇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해석할 수 없음’이 해석을 더욱 자극한다.
점자는 사진 속 풍경 위에 작가의 의도대로 의도된 자리에 배치된 듯하다. 사진을 보고 난 뒤, 눈 감고 점자를 훑으면―설령 점자를 읽지 못한다 하여도― 풍경과 점자가 포개져 손끝에 만져지는 것 같다. 이러한 상상은 니헨다 작품 후반에 이르러 더욱 풍부해진다.
사진 후반은 그의 연인에 대한 사진들로 채워져 있다. 사진 속엔 연인의 몸을 만지는 니헨다의 손과 연인의 몸이 함께 담겨 있다. 사진에서 점자는 그녀의 몸을 타고 흐르듯 세로로 새겨져 있고 관람객 또한 그녀의 몸을 타며 사진을 읽게 된다.
관람객은 그와 같은 방식으로 사진-보기를 시도하며 그녀의 부드러운 턱, 가슴 사이, 허벅지, 무릎, 발등, 다섯 발가락 하나하나에, 그리고 그 둘을 둘러싼 공간에 박혀 있는 해독되지 않는 언어를 손끝으로 읽는다. 사진을 읽을수록 그들의 설렘과 사랑의 시간으로 사진 앞에 선 이들은 이끌려 들어간다.
‘Sight Unseen(사이트 언씬) : 보이지 않는 이들의 시각’ 사진전이 6월 3일까지 세종문화회관 1층 전시관에서 열리고 있다. 이번 전시회는 세계적인 11명의 시각장애인 사진작가들이 제작한 119점의 대표작품들을 한곳에 모은 국제 순회전으로 이번 한국 전시회는 12번째로 열리고 있다.
‘시각장애인들이 사진을 찍는다’는 행위에 대해서는 여러 물음이 오간다.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이 ‘어떻게’ 사진을 찍느냐는 물음에서부터 이 또한 ‘장애 극복’의 신화가 아니냐는 비판까지.
이에 대해 유명한 시각장애인 사진작가로서 이번 전시회에도 초대된 유진 바오차르(Evgen Bavcar)는 “시각장애인이 어떻게 사진을 찍느냐는 물음보다는 왜 그들이 이미지를 그토록 원하는지 이유를 물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이번 전시회가 이에 대한 명쾌한 답을 주진 않는다. 아니, ‘어떻게 찍느냐’에 대한 답은 오히려 쉽게 구할 수 있을지 모르되, 그들이 왜 이미지를 그토록 원하는지에 대한 물음은 그들 삶과 맞닿으며 ‘사진’과 ‘본다’는 행위에 대해 사유토록 하고 사진 너머에 있는 세계와 존재자들이 그들과 어떻게 관계 맺는지 호기심을 일게 한다.
자기 가까이에 있는 세계는 만짐으로써 알아챌 수 있으나 저 멀리 있는 산은 어떻게 인지할까. 손끝에 닿는 신전 기둥의 곡선은 느낄 수 있으나 신전의 전체 구조는 어떻게 파악할 수 있을까.
그래서 로지타 맥킨지(Rosita McKenzie)는 ‘촉각그림’을 제작한다. 일본 후지산을 만져보고 싶으나(시각장애인에겐 만지는 것이 곧 보는 것이기에) 시각장애인인 맥킨지가 만질 수 있는 것은 흙, 나무뿐이었다.
맥킨지는 사진을 찍은 후, 점자와 같은 기술을 이용해 자신이 찍은 사진과 동일한 크기의 촉각그림을 만든다. 선을 이용해 표면을 점자처럼 올록볼록하게 만든 촉각그림으로 맥킨지는 자신의 신체가 닿을 수 있는 세계의 한 단면이 아닌 자신이 담은 사진 속 전체를 느낄 수 있다.
비시각장애인은 눈앞의 이미지에 매료되어 카메라를 든다. 눈앞의 이미지가 후각, 청각, 촉각을 압도한다. 그러나 시각장애인이 카메라 셔터를 누르게 되는 순간은 시각을 제외한 모든 감각이 일깨워지는 순간이다.
“저는 얼굴에 비치는 빛을 감지합니다. 나무 사이의 나뭇잎이 바람에 의해 살랑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공기 중에 있는 꽃의 향기를 맡으며 ‘지금 이 순간은 꼭 담아야겠다’라고 생각해요.” - 로지타 맥킨지(Rosita McKenzie)
그래서 애니 헤쎄(Annie Hesse)는 ‘시차를 두고 사진을 찍는다’라고도 한다. 끊임없이 낯선 세계를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는 헤쎄는 무언가의 앞에 서 있는 순간엔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우선 그 순간을, 그 공간을 카메라에 담는다. 후에 인화된 사진을 통해 자신이 그때 무엇을 보았는지 알아챈다.
자신의 내면으로 시선이 향하는 사람도 있다. 동성애자이자 에이즈 진단을 받은 시각장애인 커트 웨스턴(Kurt Weston)은 낙인찍힌 자신의 삶을 정면에 내세운다.
웨스턴은 평판스캐너에 얼굴을 납작하게 대고 인화하는 방식을 택한다. 프레임 안엔 웨스턴과 노년의 남자 얼굴이 서로를 향해 있지만 둘의 시선은 만나지 않는다. 같은 공간에 공존하나 둘은 마치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듯하다. 웨스턴은 그렇게 자신이 바라보는 뿌옇고 균열적인 세계를 그대로 내보인다.
사진이야말로 가장 강렬한 이미지다. 그러나 이곳에 초대된 사진들은 이미지 자체에 갇히길 거부하며 끊임없이 작가 자신과 연결되려 한다. 작가가 경험한 세계의 파편에서 떨어져 나온 사진은 다시 작가 자신에게 깊숙이 들어가려는 동시에 작가와 바깥 세계 사이에 둥실한 징검다리를 놓는다.
- ‘Sight Unseen(사이트 언씬) : 보이지 않는 이들의 시각’ 누리집
- 문의 : 1544-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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