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평 시조
윤신달(尹莘達) (태사공(太師公))
893년(癸丑 신라 진성왕 7년) 8월 15일 탄생.
태사공께서 26세(신라 경명왕 2년 서기 918년)에 신숭겸, 홍유 등 동료들과 협력하여 궁예를 무찌르고, 왕건을 국왕으로 추대하여 백성의 옹호를 얻으니, 이로써 고려 왕조를 수립 하셨다.
신라 경순왕 9년 을미년(서기 939년)에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신라를 멸하고 삼한을 통합함으로 개국공신으로 통합삼한위 벽상삼한익찬공신 삼중대광태사(統合三韓爲 壁上三韓翊贊功臣 三重大匡太師) 가 되었다.
혜종 원년 갑진년(서기 944년)에 동경(경주)유수가 되었으며 광종 24년 계유년(서기 973년)에 경주에서 81세로 세상을 떠나셨다.
(태사공의 생몰년은 종인의 개인적 기록에 의한 것일 뿐 역사적 사실을 적시할 수 없기에 확실한 것이라 단정하기는 어렵다)
태사공께서 동경유수로 출수하신 것은 태조 왕건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혜종의 왕권 강화를 위한 훈공신 축출의 일환이었다.
평소 의심이 많고 심협한 혜종은 큰 권세를 가지고 있었던 공신들에게 불안을 느꼈고 이를 제거하기 위해 자녀들은 송도에 인질로 잡아 놓고 지방 관리로 출수시킨 것이다.
공께서도 경주에서 30년을 지내셨어도 이후 돌아가시기까지 그 자녀분들을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부인은 문화유씨(文化柳氏)로 대승공(大承公) 유차달(柳車達)의 누이이며 월흑산장(月黑山長) 보림(普林)의 딸이며 그의 조부는 해평산장(海平山長) 무선(茂先)이고 증조부는 진부(振阜)이다. 또한 고려 개국 공신 신숭겸의 아내와 자매(姨)이다.
시호는 소양(昭襄).
묘소는 경주 기계현 벌치동(현: 포항시 기계면 봉계리) 구봉산 아래에 장례를 모셨고, 묘 앞에 표석을 세웠는데 조선시대(朝鮮時代) 중엽 경주의 토호 이지하라는 자가 묘소의 표석을 분질러 땅에 묻고 투장 하였다.
그러나 1737년(영조 13년)에 본주(本州-경주) 영장(營將)으로 부임한 25세손 휘 봉정(鳳廷)이 깨어진 비석 한 조각에 대부윤(大夫尹)이란 글씨가 양각된 것을 발견하고 심증을 굳힌 뒤 종인들과 상의하고 2년 뒤 1739년(己未)에 주변을 파헤쳐 선지 금강(先之 金剛)이란 넉자의 음각된 비석 조각을 얻으므로 확실한 물증을 잡고 1740년(庚申)에 묘표를 세우고 부묘를 다시금 모시고 수호하게 되었다.
그리고 1751년(辛未)에 묘암(墓庵)을 창건하고 제실을 묘(墓) 좌편에 지었는데 이곳을 봉강재(鳳岡齋)라 한다.
28세손(世孫)인 휘 광소(尹光紹)가 안동부사로 있을 때 헌금 50량과 목재 15칸분을 헌납하여 창건하였다.
그 후 1762년 경상감사로 있던 26세손 휘 동도(尹東度)에 의하여 수축(修築)되었고, 다시 1763년 경상감사 휘 광안(尹光顔)과 안동부사 휘 성대(尹聲大)가 위토(位土)를 늘리고 재사(齋舍)를 중수하였으며 1821년 30세손 휘 자승(尹滋承)이 본도 관찰사(觀察使)로 있을 때 재실을 중수(重修齋室)했다.
태사공의 묘소에는 묘표(墓表)와 묘지(墓誌)가 있는데 묘표는 25세손 이조판서 휘 혜교(惠敎)가 지으시고, 24세손 경주부윤 휘 휘정(彙貞)이 쓰셨으며, 묘지는 공의 사적과 탄생에 대한 설화를 기록 하였는데 이는 30세손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 겸 홍문관부제학 휘 태준이 쓰셨다.
그 후 묘소 2리 근방에 봉강서원(鳳岡書院)을 창건하고 공을 향사하여 봄, 가을로 제전(祭典)을 드리게 하였는데
1868년(고종 5년)에 대원군에 의한 서원 폐지로 철폐되었다.
1949년 토지개혁령에 의해 묘소에 속한 토지 등이 분가되어 30세손 휘 석훈(尹奭勳)이 보원회(保原會)를 설립하고 인허가를 교섭하여(認許交涉) 3년 뒤 1951년(辛卯)에 원상회복 되었다.
현재는 한식날에 춘향제를 지내고, 음력 10월 1일 추향제를 지내고 있다.
문화유씨의 유래 *. 유차달(柳車達)은 원래 차(車)씨이며 차무일(車無一)의 38세손이다. 유차달의 5대 조상인 차승색은 신라 애장왕 때 벼슬이 좌승상이었는데 809년(신라 애장왕 10년) 애장왕의 숙부 김언승(金彦昇, 41대 헌덕왕)이 애장왕을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차승색은 애장왕의 복수를 위해 좌승상의 벼슬을 버리고 아들 차공숙과 함께 헌덕왕을 죽이려 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체포령이 내려지자 차공숙을 데리고 도피하여 유주(문화의 당시 지명) 구월산 목방동에 들어가 숨어 살면서 할머니의 성인 양(楊)씨를 모방하여 유씨로 성을 바꾸고 이름도 색으로 고쳤으며 아들 공숙도 숙으로 이름을 바꾸어 정착하여 살았다. 그 후 유차달에 이르러 그 지방의 호부가 되었다. 문화 유씨의 원파록(源派錄)에 의하면 유차달이 고려개국 2등 공신으로 태조 왕건에게 사성 받을 때에 그의 구성(舊姓)인 차씨의 공적도 잊을 수 없고 또 류씨로 5대를 내려 왔으니 이도 폐할 수 없다 하여 그의 큰 아들 효전(孝全)은 차씨 성을 따르게 하고 둘째 아들 효금(孝金)은 류씨 성을 따르게 하였다고 한다. 동국여지승람의 황해도 문화현(黃海道 文化縣)의 인물편에 『류차달(柳車達)은 고려 태조가 남방(南方)을 정벌할 때 수레를 많이 내어 군량을 공급함으로써 그 공으로 대승에 제수함과 아울러 삼한공신으로 사호(賜號)하였다.』 유차달은 태조가 견훤을 치는데 일천 대의 수레를 내어 식량수송에 공을 세워 대승(大丞)에 오르고 삼한공신(三韓功臣)에 봉해지고 차운달량(車運達糧)의 뜻을 취하여 차달(車達)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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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탄생의 전설이 서려있는 파주 용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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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윤씨 가문의 성지 용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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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연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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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마대 : 태사공께서 말을 달리며 수련하셨던 곳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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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강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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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강재에서 바라 본 태사공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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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사공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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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사공 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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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사공 묘소
첫댓글 역시나 철우가 제일이네 쨩이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