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모레 설이라고 오랜만에 이발소에 갔다.
일부러 옛날식 이발소를 골라서 찾아갔더니 50대 부부가 함께 일하며
면도도 해주고 머리도 감겨주는 집이었다. 기다리는 손님들도 나이 많은 '틀딱' 들이었다.
티브이 화면에는 평창동계올림픽 실황을 중계하고 있었다.
개중에는 국가유공자인지 월계수 모자를 쓰고 가슴에 (팔각회?) 배지를 단 사람도 있었다.
대부분 '틀딱'들이라 그런지 평창올림픽 후의 시국을 은근히 걱정하며
우리 정부의 북한에 대한 저자세에 불평을 터뜨렸다.
전쟁을 방지하는 건 좋지만 지금까지 한 번 두 번 속은 것도 아닌데
'새파란 김정은의 미소작전'에 말려들고 있다고 우려했다.
나는 평소에는 이발소에 잘 안가고 집에서 샤워를 하면서 조립식 헤어커트로 머리를 잘랐다.
내 뒤통수가 삐딱한데, 갓난아이 때 어머니가 나 혼자 눕혀 놓고 논밭에 일하러 갔는데
좁쌀베개를 한 쪽으로 너무 오래 베고 있어 뒤통수가 삐뚤어졌다고 한다.
배에서 외국 선원들이 머리를 깍아줄 때마다 이상하다고 혼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후 일본에서 조립식 헤에커트를 사서 내가 거울을 보며 머리를 자르기 시작했다.
집에서도 그랬는데, 마누라가 명절이라고 "손자, 며느리도 오는데,
시아버지, 뒤통수에 고구마 쥐 파먹은 듯, 버즘 앓은 듯이 흉한 꼴을 보이지 말라!"고
하도 지청구를 해서 이발소를 찾았다.
눈을 감고 면도칼을 든 부인에게 목을 맡기고 있으니 이발소 간판 생각이 났다.
이발관의 표식인 빨강, 파랑, 흰색의 삼색 원통 싸인볼은 만국 공통으로
빙글빙글 돌아가면 영업을 하고 있으니 들어오라는 말이다.
그 유래는 유럽에서 시작되었는데, 1500년대 유럽에서는 외과의사의
수입이 쉬원찮아 이빨 치료도 하고 머리도 깍아주었다고 한다.
1540년 파리에 살던 외과의사 <메야나킬>이라는 사람이 처음으로 삼색 원통
간판을 고안했는데, 빨강은 동맥, 파랑은 정맥, 흰색은 붕대를 의미하며
[응급처치]의 표시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의 최초의 이발사는 1895년 김홍집 내각에 의해 단발령이 시행된 후
왕실 이발사였던 안종호라는 사람이고 최초의 이발관은 1900년경에 생긴
동흥이발관이라고 한다.
고등학교 때, ( 학생들의 소원을 들어주어) 마산에서는 우리학교 학생들만
막깎기 (빡빡머리)를 안 하고 '니부가리'를 허락해 타학교 학생들의 부러움을
받았던 일도 떠올랐다.
1998년, COSCO (중국 원양해운공사)소속 선원들과 배를 탈 때였다.
배가 중국 장인(江陰) 항에 입항했다. 선원들의 권유로 상륙을 해서 이발소를 찾았다.
이발소 표식은 만국공통이라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이발소에 들어가니 손님은 한 사람도 없고 하얀 가운을 입은 이발사만
이발의자를 차지하고 앉아 머리를 까딱거리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었다. 출입문에 달아놓은 방울소리를 듣고
이발사가 나를 쳐다보았다. 스물 예닐곱 살쯤 돼 보이는 여자였다.
"리파(理髮) 오케이?"
"리파? 아아 지앤파,(剪髮) 오케이, 오케이!"
이발사는 내 서툰 '리파' 발음이 재미있는지 흉내내며 생글생글 웃었다.
그러면서 두 손바닥을 펴서 융단 까는 시늉을 하며 어서 앉으라고 했다.
손님도 없는데 '봉'이 제발로 찾아 왔으니 그럴만도 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이발사가 가운을 씌워주며 말했다.
"한꾸우(韓國) 이벤? (日本)?" 내가 말했다."한국!"
"아, 한꾸우! 한꾸우 굿!" 이발사가 내심 봉 하나 잡았다고 아첨을 떨었다.
"샤오제(少姐), 스포츠 컷, 단두안파! (短頭髮)"
"단두안파? 지또우! (短頭髮, 知道) 에에에..."
이발사는 알아들었다고 큰소리 치고는 할 말이 남았다는 듯 말끝을 더듬었다.
"에에, 우 부시샤오제(我不是少姐 나는 아가씨가 아니다) 에에... 아이 엠 우먼!"
이발사는 자기가 임자 있는 몸이라고 단호히 경고했다.
전기 바리깡을 목덜미에 바짝 붙여 짧게 머리를 깎았다. 면도를 하고 머리를 감았다.
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린 뒤 이마와 목덜미, 그리고 어깨를 몇 번 주물러주고는
손바닥을 탁탁 치며 소리쳤다. "하오러! (好了, 잘 됐다)"
그러고는 손가락으로 거울을 가리켰다. 얼마나 멋지게 깎았는지 보라는 소리였다.
내가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며 인사치례로 말했다. "오케이, 굿!"
그러자 이발사는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노,노."
나는 뭐가 잘못됐나 싶어 이발사를 바라보았다. 이발사는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며 소리를 팩 질렀다. "베리 베리 굿!"
나는 그만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러나 이발사는 웃지도 않고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선원들에게 들은 말이 있어, 묻지도 않고 이발비 20위안을 내밀었다.
그러자 이발사는 어림도 없다는 듯이
손바닥을 절레절레 흔들며 손가락 네 개를 펴서 내 눈앞에 흔들며 소리쳤다.
"쓰시(四十) 쓰시 위안!" 나도 지지않고 서툰 중국어로 떠들었다."
"우 지또우, 리파페이 시얼 위안마? (나도 안다. 이발비 십이 위안 아니냐?)"
"그래, 맞다. 중국인은 십이 위안이다." "그런데 왜 사십 위안 달라느냐?"
"당신이 중국인이냐? 외국인한테는 서비스도 잘하고 이발비도 더 받는다.
중국인한테는 마사지( 어깨 몇 번 주물러준 것)도 해 주지 않는다."
이발사는 표독스럽게 눈쌀을 찌푸리며 40위안을 내놓지 않으면 팔목이라도 물어뜯을 기세였다.
그 표정이 밉지 않았다. 20위안을 더 받기 위해 저 고운 얼굴을 마귀할멈으로 만들다니.
나는 십 위안 짜리 한 장을 더 내밀었다. 이발사는 돈을 받지도 않고 빤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십 위안을 더 내밀자 그제야 슬그머니 받아챙겼다. 그러고는 금방 표정이 펴지며
중얼거렸다. "유, 굿맨!" 받은 돈을 딩동댕! 소리가 나는 작은 손금고에 넣고서야
하얀 이를 드러내며 해죽 웃었다. 벽시계는 7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몇 시에 마치느냐? 시내 안내 좀 해줄 수 있나?" 내가 장난삼아 말했다.
이발사는 싫지는 않은지 깔깔 웃었다. 그러나 사양했다.
"그건 안 돼, 내 남편이 알면 이거야! " 손바닥을 목 자르는 시늉을 했다.
그러고는 길 건너편에 대기하고 있는 택시를 기리키며 친절히 설명해주었다.
"여기서 번화가까지는 가까워. 츄쭈(出組 택시)를 타고 렌민쭝루(人民中路)로 가면 돼.
츄쭈페이(出組費)는 17위안이야!"
내가 못 알아들었을 까봐 종이에 이렇게 적어주었다.
『江陰 客船場 坐 出組 → 下 人民中路 路得福 飯館 出組費 17元 』
택시비는 절대로 더 주지 말라고, (바가지 쓰지 말라고) 거듭 주의를 주었다.
(당시 1달러는 8위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