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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4월 10일, 독일에 파견되어 있던 러시아 공산당 내 능변가 3위를 차지하는 카를 라데크는 페트로그라드에 긴급한 전보를 보냈습니다. 독일 제국군 총참모부가 킬 군항의 대양함대에 무리한 출격 명령을 내렸고, 이에 반발한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예정된 사태였습니다. 독일 군부는 기계와도 같은 효율성으로 전국의 물자를 쥐어짜 전선에서의 총체적 패배만은 면하고 있었고, 이는 독일 내의 생필품이 단 몇 주 치만 남는 결과를 불러왔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불가리아, 편을 바꿔 들었던 루마니아까지 협상국에 항복하는 상황에서 독일군은 버티고 있었죠. 하지만 독일 인민은 버티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후방의 민간인과 만남이 잦았던 수병들은 다른 모든 동맹국이 항복해버린 상황에서 버틴다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 중이었고, 대양함대에 대한 출격 명령은 협상 자리를 좀 더 유리하게 만들려는 자살 공격에 불과하다는 것도 간파한 뒤였습니다.
마침내 4월 10일 빌헬름스하펜과 킬이라는 독일 제국해군 2대 군항에서 대규모의 파업이 발생했습니다. 거의 모든 주력함의 수병들이 파업을 선언하고 길거리를 행진하자 독일 제국은 붕괴하기 시작했습니다. 실권을 쥐고 있던 루덴도르프 장군은 이미 한 달 전 빌헬름 2세와 협의하여 입헌군주제를 선포하고 유럽 최대의 사회주의 정당 중 하나였던 독일 사회민주당에 대권을 넘겨준다는 명목으로 물러난 ‘척’하고 있었죠.
긴급회의를 연 소비에트 러시아의 지도부는 갑론을박에 휩싸였습니다. 그 누구도 독일 혁명의 중요성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그러한 대사건을 앞두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에 대해선 이견이 많았습니다. 당장 브레스트-리토프츠크 조약을 파기하고 폴란드로 진격하자는 주장, 아예 그걸 넘어 독일까지 진격하자는 주장 등 약간 허황한 말도 나왔지만, 대체로 무기와 물자, 의용군을 독일로 당장 파병해야 한다는 결론이 내려졌습니다.
이와 동시에 독일어가 조금이라도 가능한 우스트랼로프를 비롯한 유대계 혁명가들과 독일 혁명에 목숨을 걸고 있던 트로츠키의 심복 표트로프는 즉시 독일로 파견되었습니다.
소비에트 러시아의 인사들이 도착한 독일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습니다. 베를린에서 선포된 독일 민주 정부는 사회민주당의 우익 인사인 [프리드리히 에베르트]가 지도하고 있었지만, 좌우 막론하고 각 정당이 하루마다 정권 참여와 불참을 번복해대는 탓에 정국은 전혀 안정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협상국은 휴전 협상에 대한 문서를 계속해서 보내왔지만, 독일 외무성은 답신할 수도 없었죠. 루덴도르프와 힌덴부르크가 실각 후 숨어버린 상태에서 전선의 독일 제국군은 지휘체계가 완전히 붕괴하여 군벌화되기 직전이었습니다.
카우츠키, 리프크네히트, 룩셈부르크, [루돌프 힐퍼딩]을 비롯한 전설적인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만난 러시아 대표단은 더군다나 뜻밖의 발언을 들었습니다. 독일 내 공산주의 조직인 스파르타쿠스 연맹을 이끄는 리프크네히트와 룩셈부르크가 무장봉기에 대해 반대한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룩셈부르크는 다가오는 총선거에 참여하여 ‘합법적인’ 플랫폼을 세우고 진지전을 펼쳐가며 인민대중을 끌어모아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일으키겠다는 이상적이지만 야심 찬 주장을 하였죠.
이러한 계획은 노동계급이라고는 대도시에만 있던 러시아와는 달리 세계 자본주의의 총본산 중 하나였던 독일이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더군다나 하나의 거대 수권정당처럼 보였던 사민당이 독립사민당 탈당 이후로도 계속된 내홍과 분쟁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도 이러한 이상주의적 주장이 나오는 데 한몫했습니다.
사민당이 내홍에 시달리는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사민당은 ‘사회민주주의’ 정당 답지 않게 노동계급이 전면적인 사회주의 개혁을 주장하자 독립사민당과의 관계를 아예 절연해버리고 우익과 손을 잡는 초유의 선택을 해 버렸습니다. 사민당 당내의 뚝심 있는 정치인 몇몇, 예를 들어 [오토 벨스]는 이에 분노해 탈당해 독립사민당에 가담해버렸고, [파울 뢰베]는 어떻게든 사민당을 정상화하려고 했지만 어림도 없었죠.
사민당의 반쪽짜리 준군사조직은 우익 군사조직인 자유군단과 영합해 총파업에 나서는 노동자들을 강경 진압 중이었고, 심지어 여기에는 더 큰 비화가 숨어 있었습니다. 바로 숨어 있는 것처럼 보였던 루덴도르프였죠.
루덴도르프는 절대로 자신의 권력을 순순히 내려놓을 생각이 없었고, 기회가 온다면 모든 좌익과 심지어는 사민당까지 쓸어버리고 다시 한번 독일의 대권을 잡을 야심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GRU가 이 정보를 입수한 것은 그야말로 천운인듯 싶었습니다. 독일 군부 중 일부가 좌익에 투신할 것을 이때는 몰랐을테니까요.
독일 우익이 사민당이 아무리 박쥐 짓거리를 하든 좌익을 봐 줄 생각이 없고 다 쓸어버릴 생각만 하는 중이라는 소식에, 모스크바의 소비에트 러시아 지도부도 ‘룩셈부르크를 한번 믿어보자’라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우스트랼로프의 필사적인 중재 끝에 독립사민당과 스파르타쿠스단은 별도의 명의로 출마하되 같은 선거구에서 경쟁하지 않는 정당 간 후보단일화를 진행하였고, 심지어는 사민당 내에서 아직 남아있는 양심 있는 인사들과는 당 대 당이 아닌 후보 대 후보로 개인별 후보단일화를 진행하기까지 했습니다.
특히 마지막 선택은 사민당 지도부에 제대로 된 폭탄을 날렸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보수당, 중앙당과 정당 간 후보단일화를 진행하려던 사민당의 노력이 실패한 것이었죠. 연정 상대와 선거에서 경쟁을 해야 하는 대참사가 일어나자, 6월 19일로 예정된 독일의 초대 총선거의 결과는 미궁으로 빠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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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대양해군을 위한 킬 군항을 만들었는가? 누가 400만 제국군을 위한 식량을 만들었는가?
누가 베르됭에서 포탄 소리에 벌벌 떨었던가? 누가 솜에서 기관총을 향해 달려갔던가? 누가 참호로 갔나? 누가 서부로 갔나?
다른 누구도 아닌 너희다.
그러나 너희를 보낸 ‘그들’은 아직 너희를 짓밟고 있다. 마치 하찮은 풀꽃마냥.
그렇다. 너희는 지금 풀꽃이다. 풀꽃은 바람을 따라가기에 오래 살아남지만, 그만큼 빨리 사라지고 누구의 기억 속에도 남지 못한다.
이제 너희는 거목이 되어야 한다. 뿌리를 내리고 버텨야 한다. 그래야 흔적을 남기고, 더욱 많은 나무가 자라나 숲이 될 수 있다. 뿌리를 내리고 버텨보자.”
[베르톨트 브레히트]와 함께 적은 연설문을 어눌한 독일어로 읽은 표트로프가 엄청난 인기를 얻어가는 사이, 독립사민당과 스파르타쿠스 연맹이 창당한 독일공산당은 우익이 보기에 ‘수상한 침묵’을 지켰습니다. 선거 결과를 본 빌헬름 2세가 황가의 남은 인사들과 함께 즉시 네덜란드로 망명한 가운데, 혁명주의자들의 소요 사태에도 오히려 사민당에 책임을 돌리던 두 정당은 엄청난 지지세를 모았습니다.
모든 책임을 사민당에 떠넘겼던 루덴도르프와 군부, 파업에 불만을 가진 부르주아, 태업으로 마비되는 행정부, 빠른 전쟁의 종결을 원하는 협상국 열강, 보수주의자와의 영합에 불만을 가진 기존 사민당 지지층 대부분이 사민당을 비판하고 비토했습니다. 하루가 멀다고 탈당한 당원들이 독립사민당에 가입하며, ‘독립’사민당과 ‘다수파’ 사민당이라는 분류가 무색해질 지경이었죠.
그리고 4월 29일, 총선 결과가 발표되며 모두가 예측한 ‘가장 끔찍한 결과’가 공개되었습니다.
독립사민당 및 공산당 27%(16+11%)
사민당(중도좌파 개량주의) 16%
보수당(보수주의 우파) 15%
중앙당(중도우파) 15%
민주당(중도 사회자유주의) 14%
농민당, 독일노동당 등(기타) 13%
독립사민당과 공산당에 가담한 모든 혁명가와 소비에트 러시아의 대표단마저도 이번에는 이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좌익에 대한 인민의 지지를 직접적으로 확인받은 상황을 절대로 망칠 생각이 없었습니다. 독립사민당과 공산당은 카우츠키를 수반으로 공산당과 사민당, 민주당과 농민당까지 포함한 중도좌익 거국내각 조각안을 모든 신문 1면에 발표하였습니다.
민주당과 농민당은 내분에 빠져버렸고, 사민당 내 최후의 정상인 파울 뢰베는 당내 우파의 흔들기로 인해 조각안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독립사민당에 ‘사과문’을 보냈습니다.
사민당을 포함한 좌익을 처음부터 쓸어버릴 계획이었던 독일 우익은 거병을 준비했습니다. 1919년의 5월 1일 노동절이 ‘이상하리만치 조용하게’ 지나가는 가운데, 5월 5일 [볼프강 카프], [발터 폰 뤼트비츠] 장군, 루덴도르프는 손잡고 군사정변을 감행했습니다.
군사정변 시도에 대해 무시하면서 보고도 제대로 하지 않았던 사민당 소속의 전쟁장관 [구스타브 노스케]는 베를린을 탈출하지 못하고 사살되었고, [필립 샤이데만], 에베르트를 비롯한 사민당 지도부는 산산이 조각나 일부는 카프 반란군에, 일부는 독립사민당에 가담하거나 네덜란드 등지로 망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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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이라도 협상장에 나올 것 같았던 독일의 민주주의 임시정부가 제대로 된 출범도 하지 못한 채 붕괴해버리자 협상국은 충격에 빠졌습니다. 전쟁을 지속하고 싶어 하는 카프 반란군을 지지하는 건 말이 되지 않았고, 사회주의 세력을 지지하는 것은 더 말이 되지 않았죠. 무엇보다 힌덴부르크 선의 독일군은 명령체계가 무너졌음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지키는 데에만큼은 열심이었습니다.
독일 본토로 진입하는 대공세를 계획했음에도 프랑스 전시경제의 붕괴로 실행하지 못하고 있었던 협상국은 그제야 공세의 성공 가능성을 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문민 정치인들은 ‘지금 공격하면 독일 좌우익이 단결해 대전쟁이 연장되는 대참사가 일어나지 않겠는가’라며 공세에 대해 극렬히 반대하였습니다. 그렇게 협상국은 1919년 8월까지 3개월이라는 피 같은 시간을 아무것도 못 한 채 독일의 상황을 지켜만 봐야 했습니다.
한편, 독일 제국이 마침내 몰락하는 사이 독일로 파견되지 않은 소비에트 러시아의 인사들은 모스크바에서 대폴란드 대책 회의를 열고 있었습니다. 폴란드-리투아니아라는 독일의 괴뢰국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내야만 했으니까요. GRU가 ‘바르샤바 사회주의 전선’을 통해 얻어온 정보에 따르면 폴란드의 상황은 꽤 놀라웠습니다.
정보에 따르면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으로 선출된 카지미에시 5세가 모처에 연금된 가운데,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는 마침내 유데니치의 백군 병력을 바탕으로 폴란드의 실권을 잡는 데 성공했습니다. 현실주의자 피우수트스키는 냉정하게 상황 파악을 시도했지만, 리투아니아와 쿠를란트를 거저먹은 폴란드의 민족주의자들은 피우수트스키가 정권을 잡으며 알린 선전을 그대로 믿고 있었습니다.
이 선전의 내용은 대단히 과장된 것이었습니다. 유데니치에게 에스토니아 대통령을 제안했다느니, 미엥지모제라는 연합체를 만드느니 직접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고토를 모두 회복하여 공산주의의 방패로 삼자느니 하는 것들이었죠. 즉 좌익 일부를 제외하면 모두가 ‘고토 회복’이라는 말도 안 되는 환상에 젖은 것이었습니다.
국방위원 트로츠키는 즉시 소비에트 러시아의 최고 군사기관인 혁명군사위원회에 노농적군 병력을 비밀리에 폴란드 국경에 가깝게 전진 배치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트로츠키와 인민위원회의 기대는 민족주의적 광신에 젖은 폴란드군이 어떤 방식으로든 ‘사고’를 쳐서, 폴란드로 노농적군이 쳐들어갈 기회를 주는 것이었죠. 폴란드에는 안타깝게도, 그 기회는 정말로 사실이 될 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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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독일 혁명도 나왔으니 곧 제 무대인 국민혁명의 순간이 나오겠군요.
폴란드가 어찌될지 궁금...
빠알갛게 물들어가는 유럽... 그나마 해피엔딩이었던 세계였지만(...)
현실의 맛인거죠(?
”발터 폰 뤼프“는 뤼트비츠 맞나요?
맞습니다 아니 이게 이렇게 짤리다니..
와... 부제 좋네요. 공산당 선언의 그 맛...!
그러고보니 지난 편(피와 살) 부제를 어디에도 안 적었었는데, 여기서 따왔습니다
'생명과 뼈가 부서지는 소리보다 더 큰 즐거움도, 더 좋은 음악도 없다'
- 체카 요원들의 시 선집 『체카 요원의 미소』 중에서 (인용 출처 자체는 존 그레이의 불멸화위원회입니다)
@렌지파일 ... 아니... 이 요원들은 저래서 저기를 갔나... 대단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