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 박철홍,
역사 속 숨은 인물도 흐른다. 23
ㅡ 희대의 간신(?) 유자광 2 ㅡ
유자광은 서얼 중에서도 얼자였다.
조선시대에는 아무리 좋은 가문 아버지 자식으로 태어나도 정실부인 자식이 아니면 서얼이라 했다.
즉 정실부인이 아니고 일반 백성출신을 첩으로 취해 자식을 얻으면 '서자'라 했고, 일반백성도 아닌 노비나 기생등 천한신분 여성을 첩으로 얻어 자녀를 얻으면 '얼자'라 했다. 이 둘 을 합쳐 '서얼'이라고 한다.
유자광을 말 하려면 조선시대 '서얼제도'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해야 한다.
조선은 고려와 달랐다.
고려는 조선과 달리 '일부일처제'가 기본으로 '처첩제'도 공인되어 있지 않았다. 고려시대에도 실제로는 당연히 존재했던 첩과 서얼들은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불륜으로 인한 사생아 개념에 가까웠다. 그래서 서얼이 법적으로 존재하지 않은 데다 기득권층 되는 길 자체가 좁아 고려시대에는 서얼이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지 않았다.
정도전은 조선으로 말하면 서얼출신이었다. 그러나 정몽주가 정도전을 공격할 때 서얼이라 하지않고 사생아라는 표현을 썼다.
고려 여인들은 조선보나 여권이 더 강했고 혼인 후에도 친가 재산을 물려 받을 수 있었으며 이혼 후 재가도 마음대로 할 수도 있었다.
이러니 남편들이 맘대로 첩을 둘 수도 없었을 것이다.^^
고려 말기에 들어서 고려 지도층에서 중혼이 성행했다. 이성계 예에서 보듯이 경처, 향처를 공식적으로 두었다.
이런 상황이었음에도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유교를 국시로 받드는 상황에서 '일부다처제'를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본인이 중혼을 한 상태라 처첩은 눈을 감아주다 이게 공식화 된다. 그래서 조선은 처첩제가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이 처첩제가 초기에는 별 문제가 없었지만 조금지나자 서얼의 수가 늘어나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관직 수는 적은데 할 사람이 많아진 것이다.
그래서 본시부터 서자에 대한 인식이 안 좋았던 (왕자의 난 원인 이기도 했음) 조선 태종 이방원이 적서차별을 공고히하기 위해서 '서얼차대법'을 시행한다. 서얼의 벼슬자리를 원천적으로 차단한 것이다.
그래도 태종 때까지는 서얼이 되는 것은 '종부법'에 따랐다.
즉 아버지가 양반이면 엄마가 누구라도 상관없이 양반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성군으로 아는 세종 때 '종부법'을 폐지하고 '종모법'으로 바꾼다.
'종모법'을 간단하게 말하자면 양인 남자와 천인처첩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은 모계를 따라 전부 노비가 되게 하는 법이다. 하지만 반대로 어머니 혈통이 양인 신분이고, 아버지 신분이 노비일 경우에는 자식들이 무조건 어머니의 신분을 따라서 양인 신분이 되는 법이기도 했다.
이때부터 서얼들의 천추의 한이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가 아는 세종같은 성군이 '종모법'이라는 악법을 시행했을까?
그 이유가 참 웃프다.
당시는 친자를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이 서로 닯은 것 빼고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노비나 기생등 천한신분 여자들이 양반이나 양인(일반평민)들하고 하룻 밤만 자고나면 아이를 임신했다고 들이미는 경우가 많이 발생한다. 이러한게 너무 자주있어 사회문제화 되자 세종이 고민 끝에 엄마만큼우 확실하니 엄마 신분을 따르라는 것이었다.
'서얼차대법'이나 '종모법'은 쪼잔한 조선사대부들이 여자들은 많이 취하고 싶고 그러나 한정 된 벼슬자리는 자기들 자녀하고도 나누고 싶어하지 않는 가장 쩨쩨하고 이기적인 악법이다.
어쨌던 종모법이 시행되자
서얼출신들은 아버지가 영의정이라고 해도 벼슬 길이 제한되었고 문과 과거시험은 아예 볼 자격조차 안 줬다. 무과나 잡과에만 응시가 가능했다.
종모법 시행으로 생각지 못한 부작용도 발생한다. 종모법을 시행하자 일반 양인 남자들이 노비 여자와 결혼해 자식을 노비로 만드는 경우가 꽤 있었다. 그 이유는 당시 노비들은 군역과 세금에서 면제되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당시 일반평민들에게 군역과 과세는 큰 부담이었다.
이런 부작용들 때문에 세조시기에는 더 악법이 시행된다.
경국대전에 '일천즉천'의 원리가 세워지게 되면서 노비종모법은 폐지되고 고려시대 때 시행되었던 '일천즉천제'로 다시 노비제도가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일천즉천'은 부모 가운데 한 쪽이 천민이라면 자식 역시도 무조건 천민이라는 뜻이다. 아예 종부법 종모법을 합친 것이다.
이런 시대 얼자로 태어난 유자광은 자신이 얼자출신임을 너무 잘 인지하고 있었다.
조선시대 서얼출신이 살아내는 인생 방향은 두 가지였다.
허균이 쓴 홍길동전에 나오는 것처럼 나라를 뒤 엎으려 하는 도적이 되거나, 부모를 잘 만나 당시 제도에 순응하며 그럭저럭 놈팽이 짓을 하며 화려한 백수로 살던 가 하는 것이었다.
유자광은 홍길동 이전
사람이었기에 홍길동 같은 인생을 생각하지는 못 했다. 본인이 홍길동 이 되겠다는 생각도 없었다. 당시 제도에 순응하고 살기로 하면서도 서얼차대법의 한계를 뛰어 넘으려 꾸준히 노력했다.
당시 조선에서 그럴 수 있는 방법은 딱 한 가지 뿐이었다. 왕실에 공을 세워 공신이 되는 것이었다.
공신이 되기위해서는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거나 역모를 고변하여 사전에 진압하도록 하는 것, 그리고 태종이나 세조처럼 아예 역모를 성공시켜 새로운 왕을 만들어 내는 것 뿐이었다.
서얼출신으로서 출세를 꿈꾸며 출세할 수 있는 이유를 잘 알고 있던 유자광에게 절호의 기회가 왔다.
이시애가 난을 일으킨 것이다.
이시애 난(1467)은 세조의 중앙 집권 정책 때문에 북도인(함길도, 지금 함경남북도) 불만이 쌓일 대로 쌓였 터진 난이었다. 즉 지나친 중앙집권에 반발하여 지방분권을 주장하며 일으킨 난이었다. 이시애는 거의6 00년을 앞서 풀뿌리민주주의를 주장하며 난을 일으킨 것이다^^
유자광은 동물적 감각으로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당시 유자광은 서얼들이 볼 수 있는 무과에 합격해서 하급관리로서 궁궐을 지키는 경비병에 불과했다. 그런 유자광이 당돌하게 세조에게 직접 편지를 써서 보낸다. 이시애 난 때 자진 출병을 원하며 왕실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겠다는 내용이었다. 세조는 편지를 보고 그런 유자광이 너무 기특했다. 세조는 유자광을 직접 궁으로 불러 시험을 해본다. 그런데 유자광이 너무 날새고 무예가 뛰어 났다. 실록에는 당시 유자광이 원숭이처럼 재빠른 몸동작으로 궁궐 기둥을 타 오르고 그랬다 한다
이런 유자광 무예에 반한 세조는 이시애 난에 남이와 함께 출정하도록 한다. 유자광은 남이 밑에서 뛰어난 무예로 혁혁한 공을 세운다. 당시 남이가 세운 대부분 공은 유자광이 했다고 알려져 있기도 한다.
그러나 유자광이 이시애 난을 진압하고 병부 좌랑(현 국방부 과장급)이라는 몇 단계를 뛰어 넘는 고속승진은 했지만 꿈에 그리던 공신까지 되지는 못했다.
유자광보다 나이가 한 살 어렸지만 신분은 하늘과 땅 차이였던 남이는 이시애 난을 평정한 공을 인정 받아 공신도 되고 병조판서 자리까지 오른다. 사실 전장에서는 유자광이 훨씬 더 뛰어난 활약을 했었다.
유자광은 그런 남이를 시기와 질투의 눈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남이를 자기 출세 발판의 목표로 삼기로 결심한다.
이어서 유자광 3편이 이어집니다.
ㅡ 초롱박철홍 ㅡ
유자광의 실물 초상화는 남아있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제 올린 초상화를 보고 간사하게 생겼다고 댓글을 단 분이 계신데 진짜 초상화가 아닙니다. 그냥 인터넷에 떠도는 초상화를 올렸습니다. 오늘 올리는 초상화도 마찬가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