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식 기제사 1,
불제자라고 하면서 집에서의 제사 차례는 유교식(전통방식)으로 해왔습니다.
불교식의 제사 ,차례는 어떤 절차로 지내면 좋을까요?
좋은 가르침 바람니다.
내내 건강 하시고 행복 하십시요.
정리해 보니 양이 좀 많아요. 왜 간단하게 하지 않는가 하면 지금 제사를 지내는 분들의 가정과 지역마다 조금씩 다 다르기 때문에 통일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보인 것을 참고로 자신의 집안전통과 함께 생각해서 집안 고유의 제사를 지내심이 좋을 듯해서 함께 보냅니다.
절에서 기제사를 지내는 경우에는 보통 통일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집안에서는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종교가 다른분들이나 유교적 전통을 고수하는 집안어른이 계시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니 이 글을 참고로 해서 그 정신만 이어간다면 형식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집안에 맞게 정리해 보시기 바랍니다.
불교식 제사법
제1절 불교식 제사법
우리 불자들은 불교신자이면서도 그 제사법은 유교식으로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불자들의 불교식 제사라고는 절에 와서 지내는 구병시식이나 천도제가 고작인데,
이것도 본래의 성격을 상실한 채 의식만 불교식이지 그 취지나 성격은 무당이 지내는 굿과 별로 다를 바가 없이 치러지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불자는 그러한 행위를 반성하고 지금 지내는 유교식 제사법을 불교식으로 바꾸어 보기 바란다.
제1항 유교식 제사법의 폐단
유교에서의 제사는 죽은 영혼을 살아 있는 사람처럼 취급하여, 효를 행한다는 것을 그 근본 뜻으로 삼아,
그분들이 돌아가신 날에 음식을 차려 그 영혼을 불러서 대접하는 것이 그 요지이다.
그러기에 제사도 귀신들이 활동하기 좋다는 시간인 오밤중이나 새벽녘에 지내는 것이 보통이다.
효를 행한다는 생각은 옳은 생각이나. 죽은 사람을 살아있는 사람처럼 취급하여 음식을 차리고 대접한다는 것은
불교의 관점에서 보았을 땐 큰일 날 일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실제로 그 영혼이 치린 음식을 먹으러 온다면
그것은 그것은 조상들이 천도가 안되어 중음으로 남아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천도를 해 주어야 하는데,
천도를 한다는 것은
죽은 사람의 영혼이 이승에서 맺은 인연에 대한 미련을 버리게 하여 자신이 이승을 살면서 지은 업과 공덕으로
부처님의 나라든 육도윤회의 세계든 가게끔 영가에게 법문을 들려 그들을 설득하고 도와주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천도를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거꾸로 음식을 차려서 일 년에 한 번씩 대접을 함으로써 이승에 미련을 가지게 만든다면
그 집안은 누대로 쌓인 업에 의하여 움직이는 집안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유교식 제사법은 귀신을 불러들이는 제사법이므로 그러한 제사법을 행하게 되면
그 집안은 영가적인 문제가 끊임없이 일어나게 된다.
그렇다면 불교에서도 유교식으로 음식을 차려 놓고서 제사를 지내는데 그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제2항 불교식 제사법의 의의
우선 불교에서 지내는 제사의 의의부터 말하겠다.
모든 생명이 죽어서 가는 곳에는 세 군데가 있다.
첫째는 극락인 부처님의 나라이고.
둘째는 윤회의 세계이고,
세째는 중음의 세계이다.
극락은 살아 생전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어서 믿고 실천하며 살았던 이들이 가는 곳이며,
윤회의 세계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몰라 실천을 하지 못한 생물이 가는 곳이고,
중음은 자신이 죽기 전에 살았던 세계에 집착하여 극락왕생도 못하고 윤회도 못하며 이승을 떠돌아다니는 그러한 영혼들의 세계를 말한다.
윤회의 세계는 천상, 인간, 수라, 축생, 아귀, 지옥의 세계를 말하는데,
이 중에서 인간의 세계를 제외한 모든 세계는 인간계에서 지은 업을 받기 위한 세계이며,
인간계는 이러한 세계들을 떠돌아다니며 업을 소멸시키고 남은 잔업을 가지고 오는 세계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세계를 살면서 사람들은
선행도 하고, 화도 내고, 어리석은 짓도 하고, 욕심도 부리고, 악행도 하곤 한다.
그 정도에 따라서 육신을 버린 후 각기 머무는 세계에 길고 짧음이 있을지언정 한번씩은 지은 업을 받는 것이다.
즉, 선행을 많이 한 사람은 천상에 머물 것이며,
화를 많이 낸 사람은 수라에 갈 것이며,
어리석은 짓을 많이 한 사람은 축생이 될 것이며,
욕심을 많이 부린 사람은 아귀가 될 것이며,
나쁜 짓을 많이 한 사람은 지옥으로 갈 것이다.
이렇게 지은 업에 따라 다른 세계를 떠돌아다니며 업을 받았으나
그 양이 너무 적어서 다른 세계에서는 소멸시킬 수 없는 잔업이 남게 되는데,
그것을 소멸시키지 위하여 우리는 인간계에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인간 몸을 받아 태어났다고 하는 것은 남은 잔업을 다 소멸시켜서 극락왕생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하는 것을 말함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업장을 소멸시키지는 커녕 업을 짓는 행위들을 일삼고 있다.
그래서 윤회의 세계는 끝이 없이 계속되기만 하는 것이다.
그러면 업장을 소멸시킨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업이 있다' 함은 우리들의 영혼은 가난하고 병들어 있음을 말하는 것인데,
인간들은 그것을 모르기에 자신의 고통의 원인을 육신의 가난과 질병 등으로 생각하기가 일쑤이다.
그러기에 영혼의 가난과 질병을 치료하지 않고서 거꾸로 자신의 육신의 질병이나 가난만을 문제삼으니 말이다.
육신의 질병이나 가난이 찾아 온 것은 자신의 영혼의 가난이나 질병을 치료키 위함인데,
그것을 모르고 거꾸로 업만 지으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 범부중생들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들은 육신이 없으면 자신의 영혼의 가난과 질병을 치료할 수 없다.
왜냐하면 육신이란 자신의 영혼을 담는 그릇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육신은 누구 덕분에 있는 것일까? 우리들 위에 우리들의 부모님이 계시고, 그 위에 또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셨고,
또 그 위에 그분들을 낳으신 할아버지 할머니의 부모님이 계셨고. 이러한 식으로 이 지구에 생명이 탄생하던
순간까지만이라도 거슬러 올라가 보자.
오늘날 나의 육신이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존재하였을까?
만약 그분들이 안계셨다면 오늘날 내가 이러한 육신을 받을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그분들이 존재하였음으로 받은 육신이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업장을 소멸시켜 성불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우리들은 자신이 가지고 태어난 환경에 대하여 조상님들을 원망할 때가 있다.
하지만 내가 그러한 조상님을 만난 것은 나의 업이 그 조상님과 같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조상님은 나에게 업장을 소멸시킬 수 있는 육신을 주신 감사한 분이면서 또 전생의 나의 업의 상징이기도 하다.
오늘날의 내가 있음으로 나의 자손이 있고, 그 자손이 있음으로 또 그들의 자손이 생길 것이고,
이와 같은 식으로 이 지구가 멸망하는 날까지 내려가 보자. 내가 지금 존재함으로써 앞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존재하겠는가?
즉 나의 육신의 존재로 인하여 앞으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생명들이 업장을 소멸하여 성불할 기회를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기에
불교에서 제사의 의의는 나의 업이 소멸될 수 있는 기회에 연이 되어주신 조상님들께 감사하며,
지금 존재하는 나의 육신이 과연 나의 업장을 소멸시키는 생활을 하고 있는가를 돌이켜 참회함과 동시에 조상님들의 삶이
나의 업장소멸의 연이 되었던 것처럼,
나의 후손들에게도 나의 삶이 그들의 업장소멸의 기회에 연이 되었다는 것을 교육하여
그들이 이 세상에 태어난 의미를 바르게 잡아주는 것이 그 의의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