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급이 발생한 청동기 시대 이후, 철기 문화를 토대로 정복 전쟁이 활발히 진행되는 속에 부족이 해체되면서 기존 지배층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한 정치 신분제도가 마련되었고,삼국시대,고려시대를 통해 조선 초,중,후
기에 따라 시대에 맞는 신분제도의 변화가 있었다. 시대의 흐름속에 가장 천대시 받았던 계층속에 바로 광대(재인)가 있었다. 시대의 변천에 따라 계급의 구조가 바뀌었고 지금은 반상의 구분을 나누는 신분제도는 영원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신분제도는 역사속에서 많이 발전될 수 있었던 여러 문화적 요인들을 저해하는 대표적인 것이었고, 특히 하층계급에 속해있던 천민계급의 광대들은 상류계급층의 착취와 유희의 대상이었다. 뿐이랴. 일제시대에는 민족말살정책의 일환으로 경기와 충청을 중심으로한 중고제소리의 탄압으로 중고제는 지금 세상에 그 자취만있을 뿐 명맥이 끊어져 버렸다.
그러한 착취와 억압의 대상 중 하나의 부류였던 소리광대들이 지금까지 훌륭한 문화유산으로 인정받을만한 예술세계를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였을까? 물론 세습적인 신분의 전이는 피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그러한 억압과 착취에 대한 탈출구는 분명히 있었을 텐데 말이다.
판소리가 갖는 음악미학적, 또는 문학적이며 문헌학적인 고찰과 연구는 많이 이루어져왔다고 알고 있지만 실상 세계문화사적으로도 손색이 없는 판소리를 연주하는 소리광대들이 갖고 있었던 정신사적인 고찰은 앞으로의 판소리의 발전을 위해서 없어서는 않될 중요한 사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여기에서 집중하고자 하는 것은 소리광대들의 삶이다. 어떠한 예술도 인간이 갖고 있는 삶을 뛰어넘어서 이야기 되어서는 않된다. 왜냐하면 예술은 인간의 삶을 먹고 살기때문이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소리꾼은 임방울 명창이다. 난 그의 삶을 존경한다. 그는 시대의 암울을 뛰어넘어 자신의 삶으로 소리를 이야기했던 시대의 정신이였다. 예술적인 삶, 미학적 삶을 살아갔던 그를 여기서 잠깐 소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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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복을 거부하고 평생 흰색두루마기를 즐겨입은 그는 공연때 마이크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공연후 공치사나 돈받기를 꺼려했다. 화려하게 꾸며진 무대보단 마당에 멍석 하나 펴고 관객과 살부비며 목청을 돋웠다. 어쩌다 생긴 돈은 불우 이웃에게 나눠줬다. 밥 굶어가면서 자신을 원하는 곳은 어디든지 갔다. 죽음도 부산공연중 피 토하며 맞았다. 이름 날리기 위해 예술하지 않은 사람. 뼈를 깍아 이룬 득공의 힘을 핍박받는 민중에게 기꺼이 돌려준 장인. 기교를 부리지 않았으며 겉포장에 관심없었다. 바로 이것이 남도예술정신의 핵심이다. 2000년 ‘문화 세기’에 지역문화는 이래야 성공한다. 가짜 예술인이 많은 시대, 1999년에 그를 다시 불러세운 이유는 제2의 임방울이 그립기 때문이다. 폼 재지 않았으나 펄펄 끓는 정열로 ‘희망’을 주는 예술, 그것이 목마르기 때문이다[김병종의 화첩기행] 임방울과 광산
낡은 소리북 하나로 명창 주인 그리네… .
임방울을 흠모하여 그의 소리판을 지켰던 명창 강도근이 생전에 내게 들려준 말. 『선생님이 한창 날리던 언젠가였지. 공연이 끝나고 환호와 박수가 쏟아지는디 정작 선생님은 코웃음을 치며, 「병신들 내 목이 넘 어진 줄도 모르고…」 허더란 말이시. 놀라서 쳐다보니 선생님 눈에 물 기가 어려 있었어. 도근아, 너는 다 알고 있었제? 허시면서. 아무래도 목을 다시 세워야 쓰것다고, 실성한 사람처럼 중얼대며 나가셨는데 3년 동안이나 소리를 다시 들을 수 없었네. 알고보니 종적을 감춘 채 소리 처음 허는 사람처럼 목에 피를 토하며 매달린 거였어. 소리도 소리지만 그징한 근성 땜시 내가그 냥반 환장허게 좋아했던 것 아닌가.』.
그 명창 임방울의 북은 이제 홀로 울고 있었다. 선풍기만 돌아가는 광산문화원의 빈 사무실 낡은 캐비닛 위에서. 한 시대의 심금을 울렸던 임방울의 북은 주인 떠난 뒤 오랜 세월 짐짝처럼 그렇게 놓여 있었던 것 이다.
천하 명창 임방울의 소리혼을 퍼내던 그 북은 생전 그에게는 피붙이 같던 물건. 그러나 이제는 너무 늙어 제대로 소리를 낼 수조차 없을 것 같았다. 수없이 금 가고 갈라져 세월의 숨결만이 묻어 있을 뿐. 1960년 가을 수궁가 한 대목을 부르던 주인이 마지막 무대에서 쓰러진 뒤로부터 저 소리북은 사십 년 세월을 울리지 못했던 것이다. 임방울은 생애의 정 점에서 소리를 토하다 쓰러져 최후를 맞는다.
고수 주봉신 씨의 임종 증언.
『…「수궁가」의 토끼와 용왕문답하는 장면을 부르시다가 느닷없이 평생에 별로 부르지 않던 「흥부가」로 건너뛰더란 말입니다. …그러더 니 다시 「적벽가」의 장비 출두 장면으로 옮아가시지 않겠어요? …중도 에서 그치고 내려오시는데 …결국 그 길로 세상을 뜨신 것이지요.』 (천 이두, 「천하명창 임방울」).
「택리지」의 이중환은 『산수가 인물을 낳는다』고 했지만, 산수는 소리를 낳는다고도 할 만하다.
큰 음 큰 곡은 아(큰 산)와 양(큰 물·바다)에서 오는 법. 박유전,정 응민, 정권진으로 이어지는 「강산제」의 보성땅에 오봉산과 보성강이 있듯, 국창 김창환과 임방울의 탯자리 광산에는 지리산 줄기 아래 황룡 강, 극락강이 흐른다. 임방울은 새벽이면 물안개 피어오르는 저 극락강 가에 서서 서편제 가락처럼 멀어지는 강줄기 향해 소리를 연습했을 것이 다. 그는 이 광산땅에서 십사 세 소년 나이로 「소리」에 뜻을 둔 후 박 재실, 공창실, 유성준 등 허다한 스승을 거쳤지만 결국에는 독공으로 저 만의 소리샘을 파낸다.
전해지는 그의 공부과정은 흡사 생사를 건 싸움. 한증막 같은 삼복더 위에도 헛간에서 나오지 않고 곰삭은 마알간 「똥물」을 마셔 가며 뼈 깎고 피말리기 3년이었다. 웅장 호방하면서 고졸하고, 애잔하면서도 감 칠맛 나는 임방울류의 천(청)구성(힘있게 튀어나오면서도 윤기 있는 소 리)과 수리성(쉰 듯하면서도 구성진 소리)은 그렇게 하여 얻어진다.
대중성과 예술성, 시대감각과 소리기교에 있어서 임방울은 하나의 분 수령. 일찍이 김산호주라는 사랑했던 여인을 임종하면서 만들었다는 창 가「추억」은 마치 리릭테너의 노래처럼 감미로우면서도 애잔하다.
물론 정통 동편제의 소리법제를 고수하는 쪽에서는 동, 서편제를 자 유자재 오간 임방울 소리를 「판소리의 역적」이라고 공격하기도 했지만.
현란한 컴퓨터음에 휩싸인 요즘 노래에서는 맛볼 수 없는, 목소리 하 나로 끌고가는 그 힘과 맛은 요새 같은 복중더위에 제격이다. 전율을 느 낄만한 그 소리에 의해 여름이 한결 서늘하게 지나갈 것이다.
광산의 송정공원은 임방울의 노래비가 있는 곳.
이곳 출신 용아 박용철 시인의 시비와 길 하나를 사이에 하고 마주 서 있다. 중노인 몇이 부채를 부치고 있는 앞으로 가 임방울을 아시느냐 고 물었다. 『임방울을 아느냐고? 허허 조용필이는 아시는가?』.
광산 명창 임방울 모를 사람이 어디 있느냐는 반응을 그렇게 한다.하 긴「쑥대머리」 SP판이 수십만 장씩이나 팔렸다 하니 그 인기는 오늘의 조용필, 서태지 못지 않았을 것이다.
특히 『적막 옥방 찬 자리에 생각난 것이 임뿐이라…』의 「쑥대머리」 는 모진 매 맞고 시련의 나날을 보내며 이몽룡을 기다리는 춘향의 노래 이자 해방을 기다리는 이 나라 백성의 노래이기도 했다.
임방울의 손녀딸과 초등학교를 함께 다녔다는, 공원에서 만난 박동선 씨의 말.
『임방울의 미망인이 기거했던 소촌동 집에 가면 수많은 SP판이 있었 지요. 그러나 흰 고무신에 흰 두루마기의 임방울 흑백사진이 하나 걸려 있었을뿐, 유명세에 비해 믿기 어려우리만치 가난한 살림이었어요. 공항 이 들어서고 아파트촌이 서면서 그 집마저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지만….』.
가정도, 돈도, 제자 양성하여 계보를 만드는 일에도 무심한 채 오직 소릿줄 하나만 부여잡고 살다간 예인. 미리 꾸미고 나와 일일이 연출의 지시를 받아야 한다는 점 때문에 창극을 꺼려했고, 기가 흐트러진다고 타령이나 잡가마저 한사코 피했던 그였다.
그는 살아서 이미 신화적 명성을 뿌렸지만 장례 또한 서울 장안의 화 제였다. 전국의 국악인과 동호인들이 모여 그 행렬만도 2km가 넘었다 한 다. 특이했던 것은 조선일보사 앞에서 오랫동안 상여가 세워져 하직을 고 했던 점. 생전에 그의 예술을 알아보고 20여년 세월을 지근의 거리에 서 후원했던 방일영 당시 사장과의 정리를 표하기 위해서였다. 그 장엄 한 행렬은 광화문 네거리를 돌아 국악예술학교를 거쳐 망우리로 향했다.
그러나 속절없다. 한시대의 별은 그토록 화려하게 떠났건만 불과 40 년이 지난 오늘은 천지간에 그 흔적마저 더듬을 길이 없다.
남겨진 것은 오직 평생을 두드렸던 쇠가죽 낡은 소리북 하나뿐.
< 글 김병종·서울대 미대 교수>.
임방울(1904∼61).
명창. 전남 광산(지금의 광주광역시) 출신. 본명 승근. 방울은 아명 이라는 설과 그가 소리를 할때면 방울 굴러가는 듯 하대서 붙여졌다는 설이 있다. 타고난 미성으로 일세를 풍미했고 1928년 중앙무대에선 후콜 롬비아, 빅터, OK레코드 등의 전속으로 활동하며 폭넓은 인기를 누렸다. 창극으로의 전환을 거부하고 끝까지 판소리를 지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