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08 주일설교
본문: 요 6:63
제목: 영이요 생명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영이요 생명인 것이다.
성경 말씀을 줄줄 외면서도 왜? 그 말씀대로 사는 것이 없는가?
먹으로 돌판에 쓰는 것들은 거기엔 영도 생명도 없기에 행함이 따르지 않는다.
사람은 마음에 있는 것을 행하고 마음에 있는 이익을 따르지
머리에 있는 것은 행하지 않는다.
머리에 있는 것은 입술용이고 남을 때려잡는 용, 잘난척하는 용일 뿐이다.
공자왈 맹자왈 어릴 때부터 외어서 과거 합격하여 벼슬을 딴 다음에는
당파싸움하며 부와 권력을 취하느라 바쁠 따름이다.
그 좋은 말씀들이 행함과는 거리가 멀고 오직 외식용에 지나지 않는다.
주님의 모든 말씀이 영이요 생명이라는 것은
영으로 받아서 생명으로 산다는 뜻이다.
영으로 마음판에 기록하여 생명으로 목숨바쳐 행하는 것이다.
그것이 초대교회와 발도인들의 신앙과 삶의 방식이었다.
오늘 우리 시대의 교회의 신앙과 삶과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크다.
말씀을 영으로 받지 않을 뿐 아니라 결코 생명으로 살지 않는 차이이다.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차이인 것이다.
“주께서 이르시되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과 더불어 새 언약을 맺으리라 또 주께서 이르시기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그들과 맺은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그들은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그들을 돌보지 아니하였노라 또 주께서 이르시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히8:8-10)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언약은 옛 언약이고 구약성경으로 주셨지만,
그들은 성경 말씀을 먹으로 머리 돌판에 쓸 뿐 행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입술로만 입으로만 하나님을 경외할 뿐 마음은 하나님과 멀리 떠나 있었다.
그들은 회칠한 무덤이었고, 잔과 대접의 겉만 깨끗이 할 뿐
속은 탐욕과 방탕,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였다.
그래서 주님은 바리새인의 누룩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신 것이다.
이 현상은 유대교회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어느 시대에나 세상을 지배하는 교회들은 같은 모습이었는데 사람들이 다 속은 것이었다.
로마교회도 개혁교회도 현대교회도 하나 같이 옛 언약으로 사는 자들이었고
겉과 속이 다른 이중인격자들이었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었다.
종교개혁을 하였으니 그 후예들은 개혁주의자로서 새 언약을 사는 사람들로 속아 넘어갔다.
아니었다.
그들도 바리새인들처럼 성경을 율법조문, 교리조문으로 신조로 요리하였을 뿐이었다.
동일한 바리새인의 누룩이었다.
이에 반발하여 나온 무리들이 사두개인들이다.
자유주의 신학이요 신정통주의 신학이다.
이들은 교리조문 대신 철학조문들을 만들어 내었다.
적극적 사고방식, 목적이 이끄는 삶, 긍정의 힘, 4차원의 영성,
상담학, 철학적 신학들이 그것이다.
동일한 사두개인의 누룩이었다.
새 언약은 주님 말씀대로 내 법을 마음에 생각에 기록하여 행하게 하는 것이다.
무엇으로? 먹으로가 아니고 영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영은 살리는 것이요 율법조문, 교리조문은 죽이는 것이다.
교리조문 철학조문 많이 안다고 사람 달라지는 것, 보았는가?
삶이 달라지는 것 보았는가?
남을 가르칠 때는 입술로 잘도 써먹지만, 삶은 오직 마음속 시커먼 이익을 따를 뿐이다.
말씀을 영으로 받아서 생명으로 살기 전에는 그 신앙과 삶은 껍데기일 뿐이다.
초대교회와 그 전통을 이어받은 발도인들은 교리조문들은 몰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고 단순한 그대로 영으로 받아서 마음에 기록하고
생명으로 목숨바쳐 살았다.
항상 세상을 장악한 교회 집단들이 이들을 핍박하고 잔인하게 학살하였다.
로마교회는 참 교회인 발도인들들을 학살하였고,
개혁교회는 초대교회로 돌아갈려고 하는 제세례파들을 잔인하게 학살하였다.
루터와 칼빈은 물론 그 후예들이 저지른 악행들이 20세기에야 드러나고 있다.
개혁주의가 알려주는 초대교회 역사를 보면, 그저 교리사일 뿐이다. 우리는 속아 왔다.
제세례파들의 일부가 초대교회의 실상에 관심을 갖고서 고대 자료들에 입각해서
초대교회의 실상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전도와 선교, 세례와 회심이, 성찬식이 얼마나 변질되었는지,
나는 읽으면서 가슴이 먹먹해지고, 그 실상에 감동에 젖고 눈물에 젖으며,
전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고, 그동안 속아 온 것에 가슴을 치게 되었다.
초대교회와 발도인들은 참으로 말씀을 영으로 마음에 기록하여 생명으로 살았다.
그들은 새 언약으로 살았고, 하나님은 참으로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참으로 하나님에게 백성이 되는 관계로 살았다.
주린 자에게 양식을 주고, 멍에의 줄을 끌러주고,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병든 자와 옥에 갇힌 자들을 돌보았다.
그들은 전도니 선교니 하는 것을 입에 달지 않고 살았다.
그들은 변화된 성품과 삶으로 그 매력에 사람들이 이끌리어 교회로 오게 만들었다.
또 그들은 온 사람들을 무조건 세례 주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적어도 2,3년동안 가르치며 함께 살며 성품과 삶이 변화되는 확실한 증거를 보고서야,
확실한 회심을 확인하고서야 세례를 주었고, 성만찬에 참여하게 하였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 그대로 세상의 빛이 되고 세상의 소금이 되어
그 핍박과 학살 가운데서도 유럽 전체를 변화시키며 참 교회를 세우고 성장하였다.
발도인들은 알프스 피에몽 계곡을 중심으로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며 교회를 세웠다.
13세기에는 발도인교회가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그 영향으로 14,15세기에 르네상스가 일어났다.
역사적으로 자료에 의해 증거되고 있고 분명한 사실인 것이다.
초대교회와 발도인교회는 무엇이 그들을 이렇게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켰을까요?
한마디로, 그들은 새 언약으로 살았고, 말씀을 순수하고 단순하게 영으로 생명으로 살아서였다.
새 언약의 일꾼들이었고, 영으로 생명을 살리는 사람들이었고 참 교회였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 —--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고후3:3,6)
우리도 참으로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어야 한다.
그럴려면 먹으로 돌판에 쓴 그리스도인에서 벗어나야 한다.
새 언약의 일꾼으로 거듭나야 한다.
교리조문 철학조문들도 ‘죽이는 율법조문’인 것을 깨달아야 한다.
교리조문들의 늪에서 하루 속히 빠져나와야 한다.
다른 교훈들을 전하는 자들과는 인사도 하지 말고 집에 들이지도 말아야 한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큰 문, 넓은 길, 큰 교단, 큰 교회, 사람 많은 것, 그만 좋아하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 협착한 길로, 찾는 이도 적은 참 교회를 찾아나서야 한다.
초대교회의 실상과 발도인교회 역사를 찾아나서야 한다.
진짜 하얀 것을 만나기 전에는 검은 것을 알아볼 수 없고,
참 교회를 만나기 전에는 거짓 교회를 분별할 수 없다.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다.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갈아 입을 때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아야 한다.
주님의 말씀을 영으로 생명으로 살려면
무엇보다 영의 사람이 먼저 되어야 한다.
성령을 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11:13)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다.
주님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성령으로 거듭남과 성령으로 세례받는 것을 다른 것으로 구분하는 것에 조심해야 한다.
이 구별 때문에, 사람들이 예수 믿으니까 성령으로 거듭난 줄 알고 있다.
성령 세례 없이, 성령으로 거듭날 수 없다.
예수 믿더라도, 성품과 삶에 코페르니쿠스적인 획기적인 변화가 없다면,
-그것이 바로 회심이다! 그것이 바로 회개이다!-
그 사람은 아직 거듭난 사람이 아니다.
거듭남, 회개, 회심, 성령 세례!
다 합친 것이 성령세례이다.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 것이 되는 변화가 성령 세례에 의해 이루어진다.
영혼은 오직 거듭날 때만 다시 태어날 수 있다.
육으로 난 것은 여전히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기 때문이다.
뷰캐넌의 말대로, 엄청나게 위대하고 영적이며 완전히 전인적인 변화가 거듭남이요 회심이다.
예수를 아무리 오래 믿었더라도 획기적이며 코페르니쿠스적인 변화가
성품과 삶에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아직 성령 세례로 거듭난 것이 아니다.
회개하고 회심한 것이 아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때로부터, 소위 기독교국가(크리스텐덤)가 되면서부터,
세력을 키우기 급급하여 세례와 성만찬을 남용한 것이 오늘의 기독교를 낳았다.
어거스틴이 회심과 거듭남의 변질, 성만찬의 변질에 선두주자 역할을 하였다.
루터와 칼빈도 유아세례를 받아들이며 회심과 참된 세례를 변질시켰다.
구하는 자에게 주시지 않겠느냐 하신 주님의 말씀 따라 성령을 구하고 의지하자.
주님의 말씀을 영으로 생명으로 사는 참된 그리스도인,
성품과 삶의 참된 변화로 세상의 빛, 세상의 소금이 되자.
나의 개혁과 교회의 개혁과 함께 르네상스를 일으키자.
정치와 경제, 사회와 문화가 무엇인지 말씀으로 영으로 다시 배우고 삶으로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