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두 번에 걸쳐서 먹임의 기적 사건을 행하십니다. 하나는 일명 “오병이어”사건입니다. 다른 하나는 칠병이어 사건입니다. 두 사건의 주인공이 제자들입니다.
먼저 오병이어 기적을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줄 때 많아졌습니까? 제자들이 무리에게 줄 때 많아졌습니까? 제자들이 무리에게 줄 때 많아졌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떡 사건의 의미를 몰랐습니다. 마가복음 6:52절을 보면 “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라고 말씀합니다. 결국 오병이어는 예수님의 이해를 위한 중요한 사건이요 열쇠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두 번째 떡 기적을 행합니다. 마가복음 8:1~5절을 보면 무리가 사흘 동안 있는데, 먹을 것이 없습니다. 이 사람들은 이방인입니다. 데가볼리 경내에 있는 갈릴리 바다(갈릴리 동편)입니다. 사흘 동안 있는데 제자들이 무리에게 먹을 것을 걱정하지 않습니다.
유대인들 대상인 오병이어 사건에서는 무리가 하루 동안 있었는데, 제자들이 무리의 먹을 것을 걱정합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에게는 사흘 동안 있었는데 먹을 것을 걱정 안 합니다. 결국 제자들이 이방인 걱정을 안 합니다. 이방인들이 사흘 동안 있었는데, 관심이 없습니다.
마가복음 8:3절을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대책을 세우라고 했는데, 분명히 제자들에게 오병이어 기적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있었을 텐데, 대책을 세우지 않습니다. 의도적으로 기억 안 하고 대책도 세우지 않습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이방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8:6~7절을 보면 오병이어 사건이 제자들이 주도하였다면, 이번에는 예수님이 주도합니다. 요한복음 6:11절을 보면 제자들의 중간 역할(사제 역할) 없이 예수님이 무리에게 직접 분배하고 그들을 먹이십니다.
첫 번째 먹임의 사건이 유대인을 대상으로 하였다면, 두 번째 먹임의 사건은 데가볼리 사람들, 즉 이방인들입니다. 예수님에게 데가볼리 사람들이 모여들게 한 결정적인 원인은 마가복음 5:1~20절 보면 군대 귀신 들린 자입니다. 군대 귀신 들린 사람이 데가볼리에 전파하였기 때문입니다(마가복음 5:20). 마가복음 7:31절을 보면 “데가볼리를 통과하여”라고 말씀합니다. 영어 성경 번역을 보면 “데가볼리 지방에 있는”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데가볼리를 예수님이 지금 있는 장소로 소개합니다.
두 번째 먹임 사건은 이방인 지역에서 행하여 집니다. 그 거라사 지방의 귀신 들렸다가 나은 기적을 체험한 사람이 그사이 전도하고 전도하여 그 결과로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로 왔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음식이 깨끗하다는 사실을 선언하십니다. 마가복음 7:15~16절을 보면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아무 음식이든 먹으면 된다는 강조가 아니라 이제 예수님이 구원 사역을 하셨으니,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인종적 구분이 철폐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제 이방인도 유대인처럼 구원받을 때가 눈앞에 왔다는 강조입니다. 그것을 선언하고, 두로 지방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가서 간청 듣고, 그녀의 딸을 귀신으로부터 자유롭게 행하는 사역을 하십니다(마가복음 7:24~30).
마가복음 8:1절을 보면 사흘이 지나서 예수님이 무리를 먹이시는 두 번째 사건이 일어납니다. 결국 오병이어, 칠병이어 먹이시는 사건은 눈이 열리느냐? 안 열리느냐? 이는 예수님의 사역에 있어서 제자들에게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마가복음 8:17~18절을 보면 “눈이 있어도 못 보느냐? 귀가 있어도 못 듣느냐?” 예수님의 기적을 보면 깨달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으면 깨달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합니다. 그 두 차례 먹이심의 참뜻을 기억지도 깨닫지도 못합니다. 그들은 아둔합니다. 마가복음 8:17절을 보면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도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다시 한번 “제자들의 마음이 둔함”을 지적합니다(마가복음 3:5, 6:52, 8:17). 결국 이 마음의 둔함 중심에 두 가지 먹임 사건이 있습니다.
마가복음 8:19절을 보면 떡 다섯 개, 오천 명, 열두 바구니입니다. 마가복음 8:20절을 보면 떡 일곱 개, 사천 명, 일곱 광주리입니다. 생선은 어디 갔습니까? 의도적으로 생선은 예수님의 교훈, 의미 전달에 중요하지 않아서 빠지었습니다.
오병이어 기적을 먼저 행했습니다. 대상은 유대인입니다. 칠병이어 기적을 두 번째 행하였습니다. 대상은 이방인입니다. 지역은 이방입니다. 바구니는 버드나무 가지로 엮어 만든 것으로서, 손잡이가 달려 한 손으로 들 정도로 작은 그릇입니다. 유대인이 사용하던 그릇입니다(마가복음 6:43, 8:19). 열두 바구니는 열두 지파입니다. 오천 명은 오 곱하기 십의 삼승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빚어진 하나님의 백성 숫자입니다.
마가복음 8:3절의 “멀리서 온 사람들”은 이방인을 지칭합니다. 숫자 “칠”은 이방인 숫자입니다. 가나안이 일곱 종족입니다. 칠십인 제자는 하나님의 전 백성을 의미합니다. 노아의 세 아들에서 칠십 종족이 나옵니다(창세기 10장). 예루살렘 교회는 그 최초의 역사에서 히브리파(국내파 유대인)와 헬라파(해외파 또는 디아스포라 유대인) 사이의 갈등을 겪고 있었습니다. 갈등의 해소와 문제의 해결은, “그 열둘”이 히브리파 출신의 집단지도부인 것처럼 이방계 헬라파 사람들을 대표하고 대변할 수 있는 “그 일곱”의 지도부를 선출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열둘”과 “그 일곱”의 존재와 역할로서 히브리파와 헬라파가 연합하였습니다(사도행전 6:1~6).
광주리는 두 손을 써야 들 수 있는 충분한 큰 그릇으로(마가복음 8:8, 20), 나중에 바울은 밤중에 이것을 타고 몸을 숨깁니다(사도행전 9:25). 이방인의 그릇인 것입니다. 그래서 칠병이어는 이방인 땅에서 이방인에게 흐르는 구원을 말씀합니다.
이 궁극적 구원이 어디서 성취되고 완성됩니까? 마가복음 6:41절을 보면 연속적인 동작을 가리키는 네 개의 동사가 사용됩니다. 즉, “가지다 – 축사하다 – 떼다 – 주다 ”입니다. 이들은 두 번째 먹이심의 기적(마가복음 8:6)과 최후의 만찬(마가복음 14:22)에서도 고스란히 반복됩니다. 물론 이 네 가지 연속적인 동작은, 고린도교회의 경우에서 보듯, 성만찬 동작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만찬의 자리에서 결정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어 축사하신 후 때어주면서 “이것은 내 몸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마가복음 14:22, 고린도전서 11:24). 식탁에 있는 빵을 당신의 몸과 동일시합니다. 빈 들에서 무리가 먹어야 할 빵은 다름 아닌 예수님 자신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양식인 바로 예수님의 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먹임으로써 자신의 다가오는 죽음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자기 죽음으로써 무리를 먹입니다. 예수님의 몸을 함께 먹는 무리는 그들의 함께 먹음(식탁 교체)으로써, “그리스도의 몸”, 즉 교회를 형성합니다(고린도전서 12:27, 에베소서 1:23). 예수님의 죽음이 새 백성을 형성시키는 근거가 여기에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나라 공동체는 말씀과 빵의 공동체 곧 그리스도인들의 성찬 공동체입니다. 유대인만이 아닌 이방인 전체가 그 대상입니다. 이 사실을 두 먹임 기적이 강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