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창 金錫昌 (1876 ~ 1950)】 "1920년 선천경찰서 폭탄 투척 지원"
1876년 12월 21일 평안북도 철산(鐵山)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준명(俊明), 준선(濬宣)이다.
8세부터 13세까지는 서당에 다녔고, 이후 농업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23세에 기독교에 입교하면서 대영성서공회(大英聖書公會)에서 서적을 판매하는 일에 종사하였다. 36세가 되던 해, 장로회평양신학교(長老會平壤神學校)를 졸업하고 선천남교회(宣川南敎會) 목사로 취임하였다. 목사로 취임하기 이전인 1906년 미국인 선교사와 선천 신성(信聖)중학교를 설립해 교육사업을 벌였다. 선천남교회 목사로 재직 중 1911년 데라우치(寺內正毅) 총독을 암살하고자 했다는 이른바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고초를 겪었다. 그러나 이는 날조된 사건이었기에 석방되어 이후 목회 활동을 이어갔다.
1920년 8월 24일 미국 의원단 일행이 한국을 방문한다는 기사가 보도되었다. 이에 서간도 콴뎬현(寬甸縣)에 본부를 둔 독립군단인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은 국내로 결사대를 파견하였다. 미 의원단 일행이 한국에 머무는 동안 한국인들이 독립을 원하고 있음을 알리는 거사를 일으키고자 한 것이다. 결사대는 3개 대로 구성되었는데, 제1대는 서울로, 제2대는 평양으로, 제3대는 신의주와 선천으로, 그리고 이학필(李學弼)·임용일(林龍日)·김응식(金應植) 등으로 구성된 제3대는 선천으로 파견되었다.
선천으로 들어온 결사대는 현지의 지원을 받으려고 신성중학교 재학생인 17세의 소년 박치의(朴治毅)를 만났다. 결사대는 미 의원단이 선천을 지나갈 때 진정서를 제출하고 선천경찰서와 선천역 등에 폭탄을 던져 국내외의 이목을 끈 후, 대규모 만세 시위를 전개할 것이란 계획을 설명하였다. 이에 박치의도 동참의 뜻을 밝혔다. 결사대는 폭탄과 권총 등 무기를 준비하고 박치의는 선천의 애국지사들에게 의거 계획을 알리며 협조를 부탁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철통같은 경계 탓에 무기 준비가 늦어져 결사대가 무기를 준비했을 때는 이미 미 의원단이 선천을 통과한 뒤였다. 이에 결사대와 박치의는 1920년 9월 1일 두 조로 나뉘어 선천군청과 선천경찰서에 폭탄을 던졌다. 선천군청의 것은 불발되었으나 경찰서에 던진 폭탄은 벽이 무너지고 유리창을 산산조각냈다. 거사가 성공하자 박치의와 대원들은 「최급경고문(最急警告文)」 등 일제의 수뇌와 친일의 무리들을 훈계하는 경고장을 뿌리고 현장을 벗어났다.
이들은 일시 피신하였으나 거사 1주일 만에 전원 체포되었고, 박치의의 연락을 받고 의거를 지원하였던 인사도 모두 검거되었다. 당시 진정서를 만들어 미 의원단에게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다가 붙잡혔다. 취조 과정에서 다리가 부러진 상태로 재판을 받고 징역 8년 형을 선고받았다. 또한 중심인물인 박치의에게 사형이 선고되자, 17세 소년에게 사형을 선고한 일제의 사법제도에 항거하는 의미로 경성복심법원에 항소하였으나 기각되었다. 경성감옥에서 6년간 옥고를 겪고 1925년 8월 14일 가출옥하였다.
이후 선천남교회 목사로 돌아와 목회 활동과 교육사업에 전념하였다. 신성학교의 이사장직을 맡았으나 재정 때문에 폐교 위기에 몰리자 유지들에게 호소해 학교의 재정을 충당하는 한편, 진남포(鎭南浦)에 억양기(億兩機)야학교를 개설해 문맹퇴치에 노력하였다. 또 선천여자고등보통학교(宣川女子高等普通學校) 설립에도 적극적으로 앞장서 일을 추진하였다. 1927년에는 예수교장로회 총회장에 취임하였다. 이후 전국을 돌며 청년들의 자각을 촉구하는 연설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와 친분이 있어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 당시 일시적으로 일제의 주시를 받기도 하였다.
선천에서 광복을 맞았고, 6·25전쟁 당시 유엔군이 들어오자 이를 환영하였다가 북한군에게 총살당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