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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8일 어버이날
[1956년] 어버이날 제정
매년 5월 8일이며, 공휴일은 아니다. 1913년 미국의 한 여성이 자신의 어머니를 추모하기 위해 필라델피아 교회에서 교인들에게 흰 카네이션을 하나씩 나누어준 데서 유래된 이후 전세계에 퍼졌다. 원래는 5월 둘째 일요일이었던 것을 한국에서는 1956년 5월 8일을 '어머니 날'로 지정, 기념해오다가 1973년 3월 30일 대통령령으로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이 제정·공포되면서 1974년부터 '어버이날'로 변경되었다. 이날 각 가정에서는 자녀들이 부모님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선물을 하거나 카네이션을 달아드린다. 또한 정부에서는 정부주관 기념일로 지정하여 어른들을 위한 각종 기념행사를 벌이며, 효자·효부들을 표창한다.
[1980년] WHO, 천연두 완전 퇴치 선언
← 천연두에 걸린 전형적인 아기 환자의 모습.
1980년 5월 8일 세계보건기구(WHO)는 제33차 총회에서 "지구상에서 천연두가 완벽하게 사라졌다"고 선언했다. 1977년 소말리아에서 마지막 환자를 끝으로, 단 한 건의 새 환자도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역사상 가장 혹독했던 ‘죽음의 사자’에게 인류의 이름으로 사망 선고가 내려진 순간이었다.
천연두는 고대 로마에서 군대 내에 집단으로 창궐, 군인을 따라 수많은 도시를 황폐화시켰다. 1492년 신대륙 발견 후 아메리카 대륙에선 100만 명 이상이 천연두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잉카제국과 아즈텍 문명의 종말을 앞당긴 것도 유럽인이 묻혀온 천연두 바이러스 때문이었다. 18세기 초 영국 사회에서 빼어난 미모와 지성으로 이름을 날리던 메리 몬태규 부인의 얼굴을 곰보로 만든 장본인도 바로 천연두였다. 20세기 들어와서도 지난 1967년 전 세계에서 1000만 명이 발병, 200만 명 이상이 사망했고, 한국전쟁 중인 1951년엔 1만여 명이 천연두로 목숨을 잃었다. 천연두 치료 및 예방에 전기를 마련한 사람은 영국의 외과의사 에드워드 제너였다. 제너는 소의 질병인 우두에 걸렸던 여자들은 천연두에 걸리지 않는다는 소문을 근거로 천연두 백신 실험을 했다. 제너의 실험은 성공이었다. 제너의 성공은 인류 의학이 세균 정복을 위한 첫 걸음을 내디뎠음을 의미했다. 균을 약하게 한 뒤, 사람의 면역성을 높이는 ‘백신’ 예방법의 시발이었다. 이후 백신연구는 프랑스의 파스퇴르에서 정교화-체계화됐고, 과학자들은 장티푸스 콜레라 페스트 결핵 등 각종 전염성 질병에 대한 예방백신들을 잇따라 개발해 냈다. /조선
[1922년] 김수환 추기경 출생
1922. 5. 8 경북 대구~2009. 2. 16 서울.
세례명 스테파노. 1941년 서울 동성상업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일본 조치대학[上智大學] 문학부 철학과에 진학했다. 1944년 1월 제2차 세계대전으로 학업을 중단했고, 8·15해방과 함께 귀국했다. 1947년 가톨릭대학의 전신인 서울 성신대학(聖神大學)에 입학해 신학을 전공하고 1951년에 졸업,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후 안동 천주교회에서 주임신부로 사제생활을 처음 시작했다. 1953~55년 대구 대주교의 비서신부·재정부장, 해성병원 원장을 지냈다. 1953년에는 대구교구가 설립재단인 김천시 성의(聖義)중·고등학교 교장과 김천시 황금동 천주교회의 주임신부를 겸임했다. 1956년 10월 독일에 유학하여 뮌스터대학교 대학원에서 사회학을 전공하고 1964년 귀국했으며, 그해 1964년 6월부터 2년 동안 주간 가톨릭 시보 사장을 지냈다. 1966년 2월 15일 마산교구의 주교로 서임되었으며, 5월 31일 마산교구장으로 서품되었다. 1968년 5월 29일 서울대교구장으로 승품되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교회 쇄신의 기류 속에서 노기남(盧基南) 대주교의 뒤를 이었다. 1969년 4월 25일 교황 파울루스 6세에 의하여 당시 전세계 추기경 가운데 최연소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다. 1970~75년까지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으로 1차 부임했다. 1970년에서 3년간 아시아 천주교 주교회의 구성 준비위원장으로 재임했고, 1981~87년까지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으로 2차 부임했다. 1974년 2월 서강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1977년 5월 미국 노틀담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 1988년 11월 일본 조치대학교에서 명예신학박사, 1990년 5월 고려대학교에서 명예철학박사, 1990년 10월 미국 시튼홀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68년 서울대교구장취임의 자리에서 그는 "교회의 높은 담을 헐고 사회 속에 교회를 심어야 한다"라고 말함으로써 교회쇄신과 현실참여의 원칙을 분명히 했다. 또한 교회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종교적인 양심으로 그들의 입장을 대변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교회는 정치적·사회적인 권력보다 인간 존엄성의 가치를 근본적인 신념으로 삼아 사회와 인류 안에서 빛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종교적 현실 참여를 강조했다. 따라서 교회는 절대로 불의와 부정과 타협하는 교회 공동체가 아닌 인간 모두가 순수한 양심에 따라 내면의 회심으로써 사회정의를 실현해야 할 것을 주장했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과도기의 혼란한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즉 물질만능주의의 현대 사회를 염려하여 모든 사람들이 마음을 비워 서로 밥이 되어주는 길이 인간회복의 길이며 민주화의 길임을 호소하여 사회인사들을 각성시켰고 소외계층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었다. 또한 아시아 주교회의와 세계 주교회의에 참석하여 세계 속에 한국의 위상을 정립하여 국위선양에 이바지했다. 1984년 5월 6일에는 100만 신도가 운집하고 교황 요한네스 파울루스 2세가 집전한 가운데 한국천주교200주년기념성회를 개최, 세계 최초로 교황청 밖의 시성식을 열어 한국의 순교자 103위를 성인의 반열에 올렸으며, 1989년 10월 9일에는 교황과 세계의 가톨릭 지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라는 주제로 가톨릭의 올림픽이라 불리는 세계적 행사인 제44차 세계성체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103위 성인). 이 자리에서는 또한 헌혈, 안구·장기(臟器) 등의 기증으로 인간의 생명을 존중하는 근본적인 나눔의 실천운동을 전개했으며, 1998년 서울대교구장을 맡은 지 30년 만에 은퇴하였다. 은퇴 이후 북방선교에 투신할 사제를 양성하기 위해 2002년 옹기장학회를 공동 설립하여 북한선교를 위해서도 애썼다. 2005년 4월 8일 바티칸에서 집전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장례미사에 참석하였고, 24일 교황 베네딕토 16세 즉위미사에서는 공동집전을 맡아 한국 가톨릭교회의 위상을 높였다.
2007년부터 건강이 악화되어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며 치료를 받아오다가, 2009년 2월 16일 호흡 곤란과 혈압 저하로 인해 87세로 선종(善終)하였다. 빈소는 명동성당에 마련되었고, 장례는 닷새간의 일정으로 치러졌는데 이 기간에 시신이 유리관에 보관되어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었다. 20일 오전 가톨릭교 서울대교구장인 정진석 추기경이 교황특사 자격으로 장례미사를 집전한 뒤, 같은 날 오후 경기도 용인 천주교 성직자묘역에 안장되었다. 생전에 생명 연장만을 위한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도록 당부함으로써, 산소호흡기나 심폐소생술 등의 처치를 받지 않고 생을 마쳤다. 이러한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은 존엄사 논란은 물론, 국내 첫 존엄사 소송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았다. 장기기증 서약에 따라 선종 직후 안구 적출수술을 받았으며, 장례 절차 등도 '다른 신부와 달리 특별하게 취급하지 말라'는 추기경의 뜻에 따라 간소하게 치러졌다. 선종 이후 그를 추모하는 국민들의 열기가 뜨거워 명동성당을 찾은 조문객이 40만 명에 이르렀으며, 장기 기증 서약도 확산되었다. 1970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2000년 제13회 십산상(성균관대학교), 2000년 제2회 인제인성대상(인제대학교), 2001년 독일연방공화국 대십자 공로훈장 등을 수상하였다. 저서로 〈사회정의〉·〈평화를 위한 기도〉·〈참으로 사람답게 살기 위하여〉 등 여러 신앙수상록이 있다./브리태니커
[1521년] 교회 박사, 예수회 학자 카니시우스 출생
← 유품
(네)Sint Petrus Canisius(Kanis)
1521. 5. 8 네덜란드 네이메겐~1597. 12. 21 스위스 프리부르.
1925년 성인으로 추증되었으며 축일은 12월 21일.
프로테스탄트를 강하게 반대하여 독일의 제2사도라고 불렸다. 쾰른대학교에서 공부한 뒤 1543년 예수회 수사가 되었으며, 쾰른·잉골슈타트·빈 등의 대학교에서 계속 가르쳐 호평을 받았다. 그는 뮌헨(1559)·인스부르크(1562)·딜링겐(1563)·뷔르츠부르크(1567)·아우크스부르크·빈에 대학을 세웠다. 보름스 회의(1557), 트리엔트 공의회, 아우크스부르크 의회(1559)에서 벌어진 종교논쟁에 참여하여 당대 어느 누구보다도 프로테스탄티즘의 확산을 지연시켰다. 그는 독일 로마 가톨릭 교회를 부흥하기 위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및 많은 부자들과 친분을 가졌고, 독일의 곳곳을 다니며 열정적으로 설교하여 예수회 조직을 확장했는데, 특히 인품과 학식을 갖춘 사제들을 배출하려는 뜻을 품었다. 그는 독일에서 전도를 하면서 황제를 포함한 모든 계층의 사람들을 쉽게 사귀었고, 독일 남부 및 오스트리아·보헤미아·스위스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냈다. 1580년 스위스 프리부르크에 정착하여 예수회 대학(지금의 프리부르크대학교)을 세웠다. 카니시우스가 남긴 가장 영향력 있는 책은 〈삼단계 교리문답서 Triple Catechism〉(1555~58)이다. 명쾌한 가톨릭 교리 해설집인 이 책은 반종교개혁 입장에서 쓴 가장 유명한 교리문답서로서, 150년 동안 400판이나 발행되었다.
[1937년] 한국의 영화배우·감독·제작자 신성일[申星一] 출생
← 신성일과 엄앵란
1937. 5. 8 경북 영덕~.
본명은 강신영. 국회의원에 출마하면서 강신성일(姜申星一)로 이름을 바꿨다.
건국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60년 '신필름'의 신인배우 모집에서 신상옥 감독에게 뽑혀 신 감독의 대표작 〈로맨스 빠빠〉로 영화계에 데뷔했다. 이어서 역시 신상옥의 작품인 〈백사부인〉 등에서 주역을 맡았다. 이후 국내 최고 미남배우의 한 사람으로서 대중의 인기를 독점하면서 500여 편의 작품에 출연했는데, 대표작품으로 〈날개〉·〈아낌없이 주련다〉·〈청춘극장〉·〈맨발의 청춘〉·〈안개〉·〈별들의 고향〉·〈장마루 촌의 이발사〉·〈흑맥〉·〈초우〉·〈하숙생〉·〈나는 왕이다〉·〈만추〉·〈방우〉·〈조용한 이별〉·〈역마〉 등이 있다. 1971년부터는 직접 연출을 하기도 했는데, 그가 감독한 작품으로는 〈연애교실〉·〈어느 사랑의 이야기〉·〈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그건 너〉가 있다. 1980년대 이후에도 완숙한 연기자로서의 깊이를 보여주면서 〈달빛 사냥꾼〉 등에 출연했으며, 1989년에 '성일 시네마트'를 설립하고 〈코리아 커넥션〉 등의 작품을 통해 제작자로도 활동하고 있다.
대한민국 16대 국회의원 선거에 한나라당 공천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어 활동하였으나, 17대에 당의 공천을 받지 못하고 무소속으로 출마하려 하다 출마를 포기하였다.
2003년도 대구 하계 유니버시아드 대회 옥외 광고물 업체 수의계약과 관련하여 업자로부터 뇌물을 받은 혐의로 구속기소되어 2005년에 징역 5년에 추징금 1억 8,700만원을 선고받아 의정부교도소에 수감되었다. 2007년 2월 12일 특별사면되었으며, 같은 해 12월 31일 특별복권됐다.
[1923년] 영화배우 허장강[許長江] 출생
1923. 5. 8 서울~1975.
본명은 장현(長顯).
서울에서 인문중학교를 졸업하고 악극단에 들어가 연예계 생활을 시작했다. 반도가극단에서 연기활동을 했으며, 1952년 육군 군예대(KAS)에 들어가서 1953년 이강천 감독의 〈아리랑〉으로 영화계에 데뷔했다. 그뒤 〈피아골〉에 출현하여 주목받기 시작했고 〈종각〉·〈흙〉·〈두만강아 잘 있거라〉·〈임꺽정〉 등에 출연하여 개성 있는 연기를 보여주었다. 이예춘·최봉 등과 함께 악역전문 조연배우로서 이미지를 굳힌 그는 허스키한 목소리와 은근한 미소, 감은 듯한 눈 등 뛰어난 '이미지 만들기'의 연기력을 보여 대중의 인기를 얻었다.
〈상록수〉(1961)로 아시아 영화제 남우조연상, 청룡영화상 남우조연상, 한국일보 연극영화상 남우조연상을 받았다. 영화인친선축구대회에서 경기 도중 심장마비로 죽었다.
[1924년] 한국의 소설가 강신재[康信哉] 출생
1924. 5. 8 서울~2001. 5. 12 서울.
1932년 함경남도 천마소학교에 입학했으나 부친의 사망으로 1938년 서울로 이주해 덕수소학교를 졸업했다. 1943년 경기여고를 거쳐 1944년 이화여전을 중퇴했다. 김동리의 추천으로 단편소설 〈얼굴〉(1949)·〈정순이〉(1949)가 〈문예〉에 추천되어 문단에 등장했다. 〈눈이 나린 날〉(1950)·〈안개〉(1950)·〈항야화 港夜話〉(1951)·〈팬터마임〉(1958)·〈젊은 느티나무〉(1960) 등의 단편소설과 단편집 〈희화 戱畵〉(1958)를 발표했다.
작품 초기에는 주로 남녀간의 애정관을 감각적이고 회화적인 수법으로 다루었다. 1959년에는 이혼한 한 여인의 비극적 고뇌를 그린 〈절벽〉으로 한국문인협회상을 받기도 했다. 그후 장편 〈임진강의 민들레〉(1962)와 〈파도〉(1963)를 통해 작가의 사회의식과 현실의식의 세계를 표출하기도 했다. 특히 〈파도〉에서는 일제시대 북국의 한 항구를 배경으로 한 소녀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갖가지의 모습들을 사실적 수법으로 그렸다. 1966년에 〈한국문학〉의 동인이 되었으며, 이듬해에는 〈이 찬란한 슬픔을〉로 여류문학상을 받았다. 이외에 〈신설〉(1964)·〈이브 변신〉(1965)·〈명성황후〉(1987) 등의 작품이 있다. 예술원 회원 및 소설가협회 대표위원 등을 역임했다.
[1919년] 지리학자 홍경희(洪慶姬) 출생
1919. 5. 8 경북 영천~2001. 6. 6 미국 하와이.
1937~41년 일본에 유학, 나라[奈良] 여자고등사범학교 문과를 졸업했다. 1941년 귀국하여 8·15해방 때까지 조선공립고등여학교와 경북공립고등여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그후 3년간은 경상북도 학무국 장학사로도 근무했다.
1948년 4월 대구사범대학 교수로 부임, 1950년에 지리과를 개설했다. 1955년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지리교육과 교수가 되었고 1984년 정년퇴임시까지 재직했다. 1959~60년 1년간 미국 조지피보디대학에서 수학했으며, 1968년 2월 경북대학교에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주로 도시지리학을 중심으로 강의했고, 대구와 경상북도 일원의 중심지 및 도시세력권에 관한 연구논문이 많다. 그 가운데 〈경상북도 도시세력권 획정 및 분석〉(1970~71)·〈대구시 주변지역 중심지들의 기능〉(1975)이 대표적이다. 저서로 〈도시지리학〉(1981)·〈취락지리학〉(1985) 등과 회갑을 기념하여 그간의 연구논문들을 모아 제자들이 펴낸 〈한국도시연구〉(1979)가 있다. 경북대 교육대학원 원장(1977~80년)을 지낸 이외에는 학내외에서 일체의 보직을 맡지 않고 일생을 교육과 연구로 일관했다. 1984년 정년퇴임과 더불어 경북대학교 명예교수로 재직했다./브리태니커
[1828년] 국제적십자 창시자 앙리 뒤낭 출생
← 제1회 노벨상 수상자이기도 했던 앙리 뒤낭.
국제적십자의 창시자 앙리 뒤낭이 1828년 5월 8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태어났다. 본래 사업가였던 뒤낭은 1859년 이탈리아 북부 솔페리노 지역을 여행하다가 오스트리아군과 프랑스·사르디니아 연합군 전투에서 부상병들의 비참한 상황을 보고, ‘전쟁과 재해현장에서 헌신적이고 자격 있는 국제구호단체를 설치할 것’을 제안했다. 1864년 12개국 대표가 제네바에 모여 ‘제네바 협약’을 채택ㆍ조인하면서 적십자운동이 시작됐다.
그는 결국 사업을 제대로 돌보지 못해 파산했고, 그 뒤 1867년 제네바를 떠나 가난하게 살았으나 계속해서 전쟁 포로에 대한 대우, 노예제도 폐지, 국제적 중재, 무장해제, 유대인 국가수립을 위해 힘썼다.
뒤낭은 1901년 스웨덴 스톡홀름 개최된 제1회 노벨상 시상식에서 적십자 운동의 공로로 ‘제1호’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노벨상의 수상 시비는 첫 해부터 계속돼, 뒤낭의 노벨평화상 수상 역시 노벨의 유언 취지와 어긋난다는 비난을 받았다. 뒤낭이 한 일은 ‘평화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전쟁의 공포를 어루만지면서 전쟁을 기정사실화하고, 오히려 전쟁을 인간화했다’는 것이었다.
오늘날 국제적십자운동은 평상시 재난구호와 취약계층 지원을 주 임무로 하는 국제적십자연맹(IFRC)과 무장충돌지역의 희생자 보호지원을 하는 국제적십자위원회(ICRC) 그리고 IFRC의 179개 회원국이 3대 축을 이뤄 사업을 펼치고 있다. 우리나라는 1905년 고종황제 칙령 47호로 대한적십자사 규칙을 제정하면서 대한적십자사가 탄생했으며, 1949년 대한적십자사조직법이 공포되면서 오늘의 조직에 이르고 있다.
[1889년] 고하 송진우[宋鎭禹] 출생
1889. 5. 8 전남 담양~1945. 12. 30 서울.
호는 고하(古下). 어렸을 때의 이름은 옥윤(玉潤)이고, 7세 때부터 15세가 되던 1903년까지 성리학자인 노사(蘆沙) 기정진의 친척인 기삼연(奇參衍)으로부터 한학을 배웠으며, 고하라는 아호도 그가 지어준 것이다. 러일전쟁이 일어나던 1904년 당시의 조혼풍습에 따라 정읍의 유씨와 결혼하여 딸을 하나 얻었다. 그러나 그 딸이 3세 때 죽고 이후 자식을 얻지 못해 후사가 끊기게 되자 큰형의 아들을 양자로 맞이했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 체결로 조선이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하자 전라남도 장성군의 백양사에 들어가 다시 한학을 닦다가 부친의 권유로 1년 반 만에 집으로 돌아와 신학문을 배울 것을 결심했다. 그의 부친은 그를 창평(지금의 담양군 창평면)에 있는 신학문학교인 영학숙(英學塾)에 보내 신학문을 배우게 했다. 비록 이곳에서의 수학은 3개월 만에 그치고 말았지만, 이곳에서 평생지기인 김성수를 만나게 되었다. 1908년 가을 당시 도쿄[東京] 다이세이 중학교[大成中學校] 유학생이었던 홍명희의 강력한 권유로 김성수와 함께 일본 유학길에 올라 세이소쿠 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와 긴조중학교[錦城中學校]를 거쳐 1910년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에 입학했으나, 그해에 한일합병이 되자 충격을 받고 귀국했다. 이듬해 다시 도일(渡日)하여 와세다대학을 자퇴하고 메이지대학[明治大學]으로 옮겨 법학을 공부했다. 대학 재학중 '유학생 친목회'를 조직하여 최남선·현준호·신익희·조소앙·김준연·장덕수 등과 깊은 교우관계를 맺었다. 또한 '유학생 친목회'의 산하단체로서 '호남유학생 다화회(茶話會)'를 만들어 회장직을 맡는 한편, 이들 단체가 단순한 사교모임으로 그치는 것을 막기 위해 김병로 등과 함께 유학생회의 기관지인 〈학지광 學之光〉을 펴내기도 했다. 1915년 메이지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했다. 그 이듬해 김성수가 중앙중학교(中央中學校)를 인수하자 학감으로 취임하여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는 데 주력했다. 3·1운동 때는 이 운동의 뒷일을 맡은 48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검거되어 1년 반의 구금생활을 했다. 1921년 동아일보사 사장에 취임한 이후 김성수와 함께 〈동아일보〉를 중심으로 한 민립대학 설립운동, 충무공 유적 보존운동, 농촌계몽운동 등을 전개했으며, 1925년 6월 하와이에서 개최된 범(汎)태평양회의에 신흥우와 함께 참석하여 각국 대표들에게 한민족의 실상을 알리기도 했다. 동아일보사에 재직하고 있는 동안 그의 직책은 사장·고문·주필 등 시세와 상황에 따라 달라졌지만, 김성수를 대신하여 그는 언제나 〈동아일보〉 간행의 중추역을 담당했으며 이로 인해 투옥되기도 했다. 1940년 〈동아일보〉가 폐간되자 동본사(東本社)를 설립하여 동아일보사의 명맥을 유지하는 데 각별한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일본의 패망이 거의 확실시된 1945년 8월 10일 조선총독부로부터 정권 인수 교섭을 받았으나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해방직후 여운형이 주축이 된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맞서기 위해 충칭[重慶]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절대 지지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국민대회준비회를 결성하고 위원장에 추대되었다. 이후 고려민주당과 조선민족당 및 한국국민당의 결합체인 한국민주당의 수석총무가 되어 우익세력의 규합에 앞장서는 한편, 미군정에 적극 협력하여 주한미군사령관인 J. R. 하지의 행정고문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또한 환국지사후원회를 조직하여 이승만과 임시정부 요인들의 국내생활의 편의를 도모함과 아울러, 이들과 함께 정부수립을 위해 노력했고 복간된 〈동아일보〉의 사장에 취임하여 언론보국의 활동도 재개했다. 그러나 1945년 12월 27일의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정된 한국 신탁통치안에 대한 찬반양론의 첨예한 소용돌이 속에서 12월 30일 종로구 원서동 자택에서 한현우에게 암살당했다./브리태니커
[1940년] 민족 3당, 한국독립당으로 통합
←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 중국 상하이 프랑스 조계 마랑도 보강리
1940년 5월 8일 우익 민족 3당인 한국독립당·한국국민당·조선혁명당이 한국독립당으로 통합되었다.
1930년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결성된 한국독립당은 항저우[杭州]에 본부를, 광둥[廣東]·난징[南京]·베이징[北京] 등지에 지부를 두고 활동해왔다. 독립운동계의 전반적인 부진과 당의 분열로 신당이 잇따라 결성되자 중국 관내 민족주의 진영은 한국국민당·재건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의 3당으로 정립되었다.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집약된 대일항전을 위해 3당연합을 모색한 끝에 새로운 한국독립당이 결성되었다.
간부는 집행위원장 김구, 집행위원 홍진·조소앙·조시원·지청천·김학규·유동열 등이었다. 삼균주의를 근간으로 한 한국독립당은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역할을 하면서 항일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다./브리태니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식
[1884년] 미국 대통령 트루먼(Truman, Harry S., 1884~1972) 출생
미주리주(州) 출생.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1906∼1917년 가족과 함께 농장에서 일하였으며, 1917∼1918년 야전포병학교 교육을 받고 제1차 세계대전에 포병 소위로 참전하였다.
전후에는 법률학교를 나와 잭슨군 재판소 판사를 거쳐 1926년 수석판사가 되었다. 1934년 미주리주에서 연방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940년 재선되어 각종 위원회 위원과 국방계획조사 특별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1944년 대통령 F.D.루스벨트 때 부통령에 선출되었고 1945년 루스벨트의 급서(急逝)로 대통령직을 승계하였다. 1947년 반소·반공을 내세운 트루먼독트린은 제2차 세계대전 후 국제정치의 방향을 결정한 것으로서 중요하다.
1948년 대통령에 재선되어 6·25전쟁으로 인한 한국 파병에 이르기까지 내정 ·외교를 지도하였다.
그의 재임 중 6·25전쟁에 참전한 중국군을 공격하자고 주장했던 유엔군 총사령관 D.맥아더를 해임시킨 일은 세계여론을 모은 큰 사건이다. 저서에 《회고록》(2권, 1955∼1956)이 있다.
[1880년] 프랑스의 소설가 플로베르(Flaubert, Gustave, 1821-1880) 사망
루앙 출생.
시립병원 외과부 의사의 아들로 중학시절부터 소설 《광인일기(狂人日記)》 《11월》 등을 습작하였다. 파리대학 법학부에 재학 중 간질(癎疾)과 유사한 신경증이 발작한 것을 계기로 문학에 전념하여, 《감정교육(感情敎育)》의 초고와 《성(聖)앙투안의 유혹》의 초고를 썼다. 그 뒤 낭만파의 영향에 중독된 공상(空想)의 과잉이나 산만한 작풍을 극복하고 확고한 문체와 긴밀한 구성을 가진 《보바리 부인》(1857)을 발표함으로써, 프랑스 당대의 최고 작가라는 명성을 얻었다. 이 소설을 쓰기 시작할 무렵부터 그는 루앙 근교 센 강변에 있는 크로와세라는 곳에서 살았는데, 독신의 연금생활자(年金生活者)로서 어머니와, 일찍 죽은 누이동생의 딸, 그리고 늙은 하녀와 함께 조용히 칩거생활을 했기 때문에 세상에서 그를 은둔자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가 가끔 파리로 나가서 E.D.공쿠르, A.도데, E.졸라, I.S.투르게네프 등과 만나서 저녁 식사를 할 때에는 좌담의 명수이기도 하였다. 《보바리 부인》의 극명한 현대 풍속의 묘사에서 일전하여 고대 카르타고의 서사시를 환기시키는 역사소설 《살람보》(1862), 그리고 다시 자전적 요소가 짙은 현대소설 《감정교육》(1869), 또다시 일전하여 고대 이집트 수도사의 환상을 그린 대화형식의 《성(聖)앙투안의 유혹》(1874) 등, 플로베르의 대작은 수없이 많은데 모두가 독자적인 문체를 자랑하는 것들이었고, 주옥 같은 단편집 《세 가지 이야기》(1877)는 그러한 다채로운 문체의 표본처럼 보인다.
그의 마지막 소설 《부바르와 페퀴셰》(1881)는 그가 급서함으로써 미완성으로 남은 것이다. 그가 젊은 날에 사귄 친구의 누이동생의 아들인 모파상은 그가 만년에 가장 사랑한 제자였다. 문학사상으로 플로베르가 본격적 사실주의 소설의 창시자였다는 것은 너무나도 유명하다. 사실 그는 면밀한 자료수집과 현지조사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작자의 주관이나 선입견을 작품 속에 반영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작가는 몰개성적 태도로써 객관에 철저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문학관이었다. 그러나 고백이 금지된 작가의 자아(自我)는 오히려 더욱 깊이 침잠된 진실한 모습을 작품 속에 나타내는 결과가 되는 것이므로, “보바리 부인은 나였다”고 전해지는 그 자신의 말에는 거짓이 없을 것이다.
플로베르는 결코 단순히 겉으로 보는 풍속의 갖가지 양상을 그려내는 작가가 아니었다. 그의 내부에는 꿈 많은 로마네스크한 자기 자신, 또는 무언가를 천착하기를 좋아하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우스꽝스러운 존재로 관조하는 소설가의 눈이 항상 번득이고 있어서, 그렇게 관찰되고 있는 자기 자신을 보편적인 인간상으로서 보바리 부인이나 부바르나 페퀴셰의 모습으로 그려 내지 않고서는 견디지를 못하였을 것이다. 이와 같은 작가와 작품 사이의 ‘단절(斷絶)’이 바로 ‘관련’이라는 미묘한 존재양식을 밝히는 귀중한 문헌이 그가 죽은 후에 간행된 《서간집》(9권:1926∼1933) 및 그 보충 4권(1954)이다.
엄격하게 문체를 다듬는 작가로서의 플로베르상(像)은 이미 정착된 지 오래이지만,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일어난 신비평파의 비평가들은 높은 관점에서, 문학을 결연히 언어의 문제로 환원시킨 최초의 작가로서 플로베르를 누보 로망(nouveau roman:新小說)의 원류(源流)라는 위치에 두었다.
[1790년] 탈레랑의 제안으로 파리과학아카데미가 미터법을 만듬
미터법(metric system)은 1790년 프랑스의 정치가, 외교관, 성직자 탈레랑(Talleyrand, Charles-Maurice de, 1754~1838)의 제안에 의해 파리과학아카데미가 정부의 위탁(委託)을 받고 만든 것이다. 지구자오선 길이의 1/4000만을 1m, 각 모서리의 길이가 1/10m인 정육면체와 같은 부피의 4℃ 물의 질량을 1kg, 그 부피를 1ℓ로 하고, 배량(倍量:곱하기 양)에는 그리스어, 분량(分量:나누기 양)에는 라틴어에서 따온 접두어 등을 각각 붙였다.
미터법의 보급은 순조롭지 않았고, 프랑스에서는 1840년 강제 집행하기에 이르렀다. 1875년 국제적인 미터조약이 성립되었고, 이어 1889년 국제원기가 제정되었으며, 1960년 제11차 국제도량형총회에서 국제적인 단위의 길이표준을 크립톤 86(86Kr)의 원자가 방사하는 오렌지색의 스펙트럼선 파장으로 바꾸는 등, 개정의 노력이 장기간에 걸쳐 계속되었다. 그러는 동안 각 국가들도 이 미터법의 전용에 힘쓰게 되어 1967년에는 미터법을 국법으로 채용한 나라가 70개국을 넘어섰고, 학술적인 제반 단위는 거의 전부가 미터법을 토대로 하여 짜여졌다.
파리에서 태어난 탈레랑은 귀족 출신으로 루이왕조 역대의 군인 가계(家系)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에 한쪽 다리를 다쳤기 때문에 성직자가 되었다. 1775년 랭스의 생드니 수도원 원장의 직위를 얻었다. 파리에 머물러 있으면서 성직자회의 사무관이라는 직함을 겸한 채 사교계에 출입하여 염문을 퍼뜨리면서도 재상 J.F.P.모르파의 비호 속에 정치적 견식을 넓혔다.
A.R.J.튀르고 등과 가까워지면서 국정개혁에 뜻을 두었고 1788년 오툉의 주교로 임명됨과 동시에 명사회(名士會)의 칙선의원(勅選議員)으로 선출되었다. 1789년 삼부회(三部會) 위원에도 당선되었는데, 혁명이 일어나자 교회재산의 국유화를 제안하여 교회로부터 파문당하였다. 1792년 영국에 파견되어 비공식사절로서 W.피트에게 양국 상호영토보전을 제의하였다. 혁명전쟁의 발발로 왕정이 폐지되자 미국으로 망명하여 토지매매 ·투기 등으로 거부가 되었고 방탕한 생활에 빠졌다. 산악파(山岳派)가 몰락한 후, 1796년 다시 프랑스로 돌아와 총재정부의 외무를 담당하였다.
나폴레옹의 뛰어난 재능을 인정하여 나폴레옹을 정계에 등장시키는 데 성공하였고, 1799년 나폴레옹의 정권 획득과 동시에 외무장관에 취임, 능란한 수완을 발휘하여 권력과 재력을 잡았다. 1806년 대륙봉쇄를 계기로 나폴레옹의 정책에 의혹을 느끼고,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 및 러시아 황제 등과 내통하였고, 1810년 외무장관직을 사임하였다. 나폴레옹의 몰락에 앞서 연합국의 괴뢰정권을 수립하였으며, 1814년 빈회의에서는 전권대사로서 비상한 수단으로 전승국을 우롱하여 각국 국민을 놀라게 하였다. 백일천하 후에 다시 외무장관이 되었는데, 왕가(王家)와 하원으로부터 미움을 받아 사임하였다. 1830년 7월혁명 후, 고령의 몸으로 영국 주재 대사가 되어 벨기에의 독립을 도왔다. 화가 F.V.들라크루아(1798∼1863)는 그의 사생아라는 설이 있다
[1864년] 한국 근대불교의 개혁운동가 백용성[白龍城] 스님 출생
← 백용성 번역 저서 <상역과해금강경>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며 대각교(大覺敎)를 창시했다. 본관은 수원. 속명은 상규(相奎), 법명은 진종(震鍾), 법호(法號)는 용성이다. 아버지는 남현(南賢)이며 어머니는 밀양손씨이다. 1879년(고종 16) 16세 되던 해에 해인사로 출가하여 화월화상(華月和尙)을 은사로, 상허혜조율사(相虛慧造律師)를 수계사(授戒師)로 삼아 승려가 되었다. 1884년 통도사 금강계단(金剛戒壇)에서 선곡율사(禪谷律師)로부터 비구 및 보살계를 받고 칠불암(七佛庵) 대은율사(大隱律師)의 맥을 이었다. 그뒤 지리산 금강대(金剛臺)와 송광사 삼일암(三日庵)에서 수도했다.
1910년 한일합병을 계기로 이제까지의 수행과 참선을 중심으로 한 삶에서 사바세계의 현실로 눈을 돌렸다. 이해에 〈귀원정종 歸源正宗〉을 저술하여 그리스도교의 불교비방을 비판했다. 1911년에는 참선만일결사회(參禪萬日結社會)를 하동 칠불사(七佛寺)에서 발족하여 도봉산 망월사(望月寺), 천성산(千聖山) 내원사(內院寺) 등에서 중생을 교화했다. 또한 1919년 한용운과 함께 민족대표 33인에 불교 대표로 참가, 앞장서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 6개월을 복역했다. 1921년 출옥과 더불어 우리 민족이 불법에 귀의하여 민족의 위기상황을 극복해야 한다고 제창하면서 대각사(大覺寺)를 창건하고 대각교(大覺敎)를 창설했다.
대각사상은 심(心) 이외의 것은 모두 부인하고 불(佛)과 진심(眞心)과 아(我)를 일체로 보며, 이 진심에 의하여 천지만법이 창조된다는 사상이다. 대각의 근원은 여래장(如來藏)으로, 대각이란 모든 중생이 갖고 있는 근본심성인 불성을 자기 스스로 깨치고 또 다른 사람을 깨우치게 하는 것(自覺覺他)을 말한다. 이러한 사상에 입각하여 대사회적 실천운동인 대각운동을 전개했다. 우선 그는 삼장역회(三藏譯會)를 조직하여 〈심조만유론 心造萬有論〉·〈각해일륜 覺海日輪〉 등 30여 종을 저술하고, 대각사에서 〈화엄경〉·〈원각금강경 圓覺金剛經〉 등 30여 종의 경전을 번역했다. 우리말, 우리글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었던 시기의 이러한 번역작업은 항일운동의 일환이었다. 선종 포교당을 건립하여 포교에 힘썼는데, 이때부터 '참선'이라는 말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또 불교의식을 한글화하여 포교의 대중화와 현대화를 꾀했다. 한편 교단의 청정을 주장했으며 1926년 사이토[齋藤實] 총독에게 2차에 걸친 건백서(建白書)를 127명의 승려 연서로 제출하여 일제의 불교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또 사원경제의 자립화를 위해 선농병행설(禪農竝行說)을 주창하여 함양 백운산과 북간도에 농장을 만들기도 했다.
1925년 대각사에서 글을 보다가 왼쪽 이 사이에서 자흑색의 사리(舍利) 일립(一粒)이 나왔는데 그 사리탑이 현재 해인사 용탑전(龍塔殿)에 있다. 1940년 2월에 대각사에서 77세를 일기로 입적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그밖에
2005 노무현대통령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순방
2003 한국 농구의 ‘별’ 전규삼씨 별세
1996 팔라우공화국 쿠니오 나카무라 대통령 방한
1994 가키누마 센신 스님, 안중근 의사 유품 기증
1993 1987~1991년까지 부정 입학생 명단 공개
1993 남북한 첫 직교역 실시 - 설탕, 소주 교환
1991 김기설 전민련 사회부장 분신자살
1985 카프(KAPF)의 실질적 지도자인 팔봉 김기진 사망
1984 소련 LA올림픽 불참 선언
1981 한국-일본 의원연맹 재구성
1980 자원개발연구소, 충북 옥천서 우라늄광 발견 발표
1979 미국 사회학자 탈코트 파슨스 사망
1973 어버이 날 제정
1973 레바논 군사정부 수립
1972 닉슨 미국 대통령, 북베트남 모든 항만에 대해 기뢰봉쇄 선언
1972 해방후 처음으로 일본인 학교, 유치원 서울에 개설
1954 인도지나 문제를 토의하는 제네바회담 개막
1951 국회 정-부의장 개선 (의장 신익희)
1948 국제적십자의 날 제정
1945 알제리아에서 반프랑스 폭동
1945 자렛 출생 - 20세기 후반의 가장 독창적이고 활동적인 재즈 음악가
1939 스페인 국제연맹 탈퇴
1936 독일 역사학자 오스발트 슈펭글러 사망
1931 세계최초의 TV 야외방송, 런던에서 시작
1926 영국의 방송인, 작가 애튼버러 출생 - 혁신적인 텔레비전 교육 프로그램으로 유명
1919 한국의 지리학자 홍경희 출생
1911 영국 청국 아편 협정 체결
1903 프랑스 화가 고갱, 남태평양의 섬에서 심장병 발작으로 사망
1902 경의선(서울-개성) 기공
1871 미국 영국 워싱턴조약 체결
1800 영국의 차티스트 운동가 러벳 출생 - 선거개혁을 요구하는 ‘인민헌장’(1838)의 초안 작성
1788 에드워드 기번 ‘로마제국 흥망사’ 전6권 완간
1660 영국 왕정복고
1442 측우제도 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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