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년 여름 방학이 끝날 무렵
나는 서울로 간다고 아부지께 인사를 드리고
대구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2시간 후에 나는
대구의 신도시가 들어설
황량한 황토바람이부는 곳에서 버스를 내렸다.
그곳에서 나는 대구 삼촌이 계신다는
부동산 사무소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나는 조심서레 문을 열고 들어가서 삼촌을 찾았다.
삼촌은 출타중이라 곧 오신 다며 여직원은
나를 기다리게 했다.
짧지만 너무나 오랜 시간처럼 지루하게 느껴졌다.
어쩌다 내가 여기 까지 왔는가
눈을 감고 가만히 생각하니
내 자신이 처량하고 한심했다.
얼마 안 있어
삼촌의 큰 키가 구부정한 어깨를 안고
멀리 걸어오고 계셨다.
나는 잰걸음에 뛰어가 인사를 하고
찾아온 목적을 이야기했다.
말없이 듣고만 있던 삼촌은,
한숨을 내쉬며 띄엄띄엄 어눌하게
어려움을 말씀하시며 막연히
기다리라고만 하셨다.
침묵이 잠깐 흐른 후
오른쪽 바지 주머니에서 만원짜리 한 장을 건내 주며
여비에 보태라고 하셨다.
그 돈은 손때가 너무 많이 묻어
허불 허불 한, 다 헤진 상태였다.
아까부터 계속 오른손이
바지 주머니에서 꼼지락 꺼리더니
그 만원조차도
주어야할지 말아야할지 갈등하고 계셨을
삼촌이 안 서러워
돌아오는 길에 시린 하늘을 쳐다보며 눈물을 말렸다.
나는 서울행 버스를 타고 오면서
다시 한번 내 자신에게 굳은 약속을 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꼭
대학을 졸업해야겠다고.
내가 방학 때 별 아르바이트가 없어
집에 내려가니
아버지는 문전 옥답과
당신이 사는 집을 팔고 빚을 정리하고
어디엔 가로 횅하니
현실에서 도피하시겠다는 계획이셨다.
이유인즉 대구 삼촌이 죽는소리를 하며
돈을 빌려달라기에
30년 형제간 의리로
분동댁이 돈을 빌렸는데
그 돈은 그 집 사위 돈이었다.
삼촌은 이자는 커녕 원금 상환 때가 되어도
가타부타 말이 없어
아부지는 매월이자를
쌀팔아 넣고,
염소 팔아 넣고,
보리 팔아 넣어,
꼬박 꼬박 물고
원금까지 상환해야 했는데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홧김에 극단적인 생각을 하신 것 같았다.
당신 아들 대학 등록금도
한번 못 내 주었는데
빚쟁이한데 씨달리니
여리신 마음에 천불이 일어
탄식을 하시던 아부지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때 내가 급히 구포 누님께 달려가
텃밭을 파는 양하고 급한 위기는 넘겼는데
구포 자형께 큰 은혜를 입었다.
구포 누님은 우리 형제들의 든든한 피난처였다.
그래서 항상
친정 아부지 동생들 걱정에
자신을 죽이고
인내하며 속태우며 사신 누님이
정말 아름답고 안타깝다.
그런 난리 후에
시간이 흐르면서 집안이 안정되고
몇년이 못 가 아부지는
노인의 길로 점점 들어섰다.
그러다 득병 하시어
외로운 몸 아들 곁으로 가시겠다고
8순이 다되어
포항으로 이사를 결심하시고도
많은 번뇌를 하셨다.
정든 땅 정든 고향
친척 친지 친구
선산 조상....
태어나서 부터
온갖 추억과 아픔이 함께 했던
고향집을 떠나는 날
살아서 다시 오겠느냐며
허허한 눈으로 한숨 쉬시던
노구의 아부지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을 지켜보며
가슴을 쓸어 내렸다.
누구나 그러하겠지만
내게 이 고향 땅은
정말 특별한 의미를 가졌는데,
그곳에는 엄마와 아부지가 있었기 때문인데
아부지 없는 고향을
어떻게 상상하나,
실제로 아부지가 떠나고 나서
나는 고향을 잊고 살았다.
내 자신 부초처럼 수없이 떠다니며
이사를 다니지만,
마음으로 항상
나의 뿌리인 고향에 대한 동경과 사랑이 있고
그기에 아부지의 넓은 등이 있었기에,
이렇게 떠돌다
언제라도 돌아갈 고향의 품
아부지의 품이 있었기에
나는 외롭거나 두렵지 않았는데
아부지가 고향을 등뒤에 두고
떠나시던 날
나는
나의
고향을 잃고 말았다.
이제 아부지마저
돌아오지 못할 먼길을 가셨으니
내 고향에 대한 향수를 어떻게 달랠까?
한 가닥 위안은
이렇게 절절하고 애절한
고향을 가진 내가,
고향과 대자연과 흙을 모르는
내 아들보다
행복할 것 같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