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를 내는 데
꼭 큰 꽃이어야 하는 건 아니라네
고진하(시인, 목사)
나는 그를 그냥 ‘생수’라 부르련다. 그가 살아 있을 때 그렇게 불렀듯이! 나는 아직도 그가 이 산하 어딘가에 살아 있는 것만 같다. 해마다 충주 사과가 익을 무렵이면 사과 박스를 들고 그가 불쑥 나타나듯이 큰 덩치를 뒤뚱거리며 내 앞에 나타날 것만 같다. 얼마 전에는 인도 여행을 가서 푸른 들길을 걷다가 들판 여기저기에 어슬렁거리는 소들을 보면서 나는 생수 생각을 했다. 언젠가 그는 목회생활에서 자유로워지면 고향으로 가서 소나 몇 마리 키우고 싶다고 했다. 그가 그렇게 얘기할 때면 나는 참으로 그다운 생각이라고 여겼다. 아마도 그것이 욕심 없이 세상을 살아온 그의 마지막 욕심이었으리라.
나는 지금 그가 남긴 유고집에 붙일 글을 몇 줄 쓰고 있지만, 그가 과연 이렇게 자기가 쓴 글이 책으로 묶이기를 바랐는지 모르겠다. 자주 만나면서도 그는 자기가 무슨 글을 쓴다는 얘기를 한 적이 없었다. 함께 만나 식사를 하고 차라도 나눌 때면, 그는 자기의 속내를 숨김없이 드러내곤 했는데, 사실 나는 그가 남긴 유언장도 장례식장에서 처음으로 보았다. 그리고 출판사에서 보내준 그의 유고들을 읽으면서 나는 뒤통수를 한 방 맞은 기분이었다. 그가 남긴 꼼꼼한 삶의 기록들을 보며, 그에게 이처럼 글쓰기의 욕심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하면, 나 같은 글쟁이처럼 그런 욕심이 그에게 있었다고는 여기지 않는다. 해서 나는 이 지면을 통해 그의 유고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무슨 토를 달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가 섬긴 시골교회 노인들이라도 읽으면 다 알 만한 내용이니까. 다만 나는 여기서 그와 길벗으로 만나 사귀며 함께 누린 기쁨과 행복의 순간들을, 그의 유고집을 읽는 독자들과 나누고 싶을 뿐이다.
그를 처음 만난 건 동해안에서 함께 목회할 때였다. 나는 강릉 변두리의 한 시골교회를 섬겼고, 그는 강릉 도심에서 교우들이 많지 않은 작은 교회를 섬겼다. 당시 그가 섬기던 교회는 여러 모로 힘들어 보였다. 그러나 그는 교회 안팎의 어려움들을 친구인 내게도 쉽사리 드러내지 않았다. ‘예수의 도(道)’를 따르는 이는 마땅히 어렵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그 당시, 그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스스로 선택한 자발적 가난, 그 가난에 대해 주변의 동료 목회자들에게조차 이해받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도 그가 불평하는 것을 들어본 기억이 없다. 인생 초년 목회지인 강릉에서도 그렇고 그의 마지막 목회지인 추평교회에서도 그는 그리스도라는 큰 나무의 ‘작은 그루터기’로 살아가는 것에 만족해했던 것 같다. 예수의 도를 따르는 사람으로서 그 “향기를 내는 데 꼭 큰 꽃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이리라.
그가 섬기던 예배당 작은 뜰에 핀 풀협죽도꽃이 그 향기로 벌 나비를 불러 모으듯이, 작은 그루터기의 삶을 지향한 그의 그늘 아래에는 항상 인생의 갈증에 시달리는 많은 이들이 모여들곤 했다. 유고에서 고백하듯이 그가 평범한 가정생활에 충실하지 못한 데는, 푸근하고 넉넉한 그의 그늘을 찾아드는 숱한 길동무들과의 사귐이 그 한 원인이었으리라. 그가 주로 정을 주고 삶을 나누던 이들 중에는, 틀에 박힌 삶을 견디지 못하는 주변인들이 많았던 것 같다. 제도종교의 고정된 틀을 깨뜨리고 예수의 자유혼(自由魂)을 추구하는 이들, 농부, 시인, 예술가, 사진작가 등등 다양한 층의 사람들이 그와 어울렸다. 일찍이 조부에게 한학을 배워 동양철학에 관심을 가진 그는 최근 몇 년간 후배들과 도덕경, 불경 등 동양경전을 공부하며 자기 사유의 폭을 넓히기에 힘쓰기도 했다. 물론 이런 공부조차 무슨 지적인 역량을 키우기 위함은 아니었던 것처럼 보인다.
도회지 교회를 섬길 때보다 충주 변두리에 있는 추평리로 가서 농촌교회를 섬길 때 그의 삶이 훨씬 더 안정되어 보였는데, 그것은 아마도 그가 ‘농부의 가슴’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오늘도 햇살은 눈부시고
꽤 오랫동안 기울어
이파리 시들시들한
고추밭에서
농부가 먼지 팍팍 나는
제 가슴에
말뚝을 박고 있다
눈물은 나지 않는다
피도 나지 않는다
다만, 말뚝이 박히는 구멍에서
뽀얀 한숨만
푹! 푹! 터져나온다
이 짧은 글을 읽고 있으면, 백 키로가 넘는 그 거구의 몸 어디에 이런 섬세한 구석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늙은 농부의 가슴에서 터져 나오는 뽀얀 한숨, 그건 곧 늙은 농부들과의 동병상린의 마음에서 쏟아져 나오는 그의 한숨이고, 그가 한 숨결로 모신 예수의 한숨이며 아픔이었으리라. 그는 사순절 무렵이면 금식을 했다. 나는 금식을 해도 사흘을 넘겨본 기억이 없는데, 그는 금식을 시작하면 보름쯤은 식은 죽 먹듯이(?) 했다. 언젠가 그가 금식중이라고 했을 때, 나는 그의 두툼한 뱃살을 어루만지며 농 삼아 “암, 살 좀 빼야지!” 했지만, 그의 금식은 ‘폭! 폭!’ 한숨만 터지는 황량한 농촌에서의 삶을 견디기 위한 몸부림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그 힘겨운 삶의 견딤 속에 자칫 황폐해지기 쉬운 자기 영혼을 돌보려는 수행의 한 방편이었을 것이다.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소리도
항문을 통해 나가는 소리도
잠시 내 몸에서 떠났다.
아직 남은 것은
빈 창자에서 들리는 꼬르륵 소리,
이 소리도 오늘이면 떠나고
이제부터는 내게
씹지 않아도 되고
배설하지 않아도 되는
어떤 신령한 먹거리로 채워지려나?
귀로는 들을 수 없는
우주 속에 가득한 어떤
내밀(內密)한 소리가 들리려나?
― <금식>
그는 그렇듯 자주 금식을 하며 육신의 귀로는 들을 수 없는 우주의 무슨 ‘내밀한 소리’를 들은 것일까. 그 소리를 듣고파 자신의 아호를 ‘허이’(虛耳)라 했던 것일까. 그는 그 무슨 ‘신령한 먹거리’로 그 배를 채웠기에 그토록 홀연히 세상을 버린 것일까.
죽은 벗은 말이 없으니 알 수 없는 일이다. 아무튼 그는 2년인가 3년간을 예배당 제단에서 소위 ‘장좌불와’(長坐不臥)를 했다고 한다. 장좌불와는 불가의 수행자들이 누워서 잠드는 편안한 잠자리를 거부하고 꼿꼿이 앉아서 자기를 채찍질하며 오랜 날들을 수행에 임하는 것이다. 그는 고행에 가까운 치열한 수련을 온몸으로 한 셈이다. 그 치열한 수련이 그의 죽음을 앞당겼는지도 모른다. 살아생전 그는 자기가 아끼는 후배들에게 “기도하다가 죽으련다!”고도 말했다고 한다. 나는 그 얘기를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 듣고 쉽사리 믿기지 않아 농 삼아 ‘뭘 보기는 본 모양이군!’ 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다운 죽음이란 생각을 버릴 수 없다. 그가 혼신을 다해 섬기던 하나님 앞에 기꺼이 순명(順命)하려는 지고지순한 몸짓이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홀로 들판을 걷다가 작은 풀꽃들이 바람결에 흔들리는 걸 보면, 나는 자주 그가 보고 싶다. 저 세상으로 그를 보내고 난 뒤 첫봄을 맞이하면서 연분홍 꽃봉오리 벙그는 사과밭 옆을 지나다 보면, 사과밭 속에서 홀연 그의 모습이 나타날 것만 같다. 나는 요즘도 이따금씩 그가 추평 땅에 살 때 자기만의 성소(聖所)라며 안내해 준 추평 저수지 옆의 고요한 솔밭이 그리워지곤 한다. 그는 이제 그 솔밭보다 더 아늑하고 고요한 성소에 들었다. 그가 애달아 그리던 분과 온전한 합일의 자리에 들었다. 농부의 마음을 간직한 목사로서, 치열한 수행자로서 평생을 하늘에 순명하고 살았던 자신의 삶의 깨달음을 오롯이 표출하고 있는 그의 뛰어난 시 한 편을 읽는 것으로, 나의 벗 허이(虛耳) 전생수 목사의 명복을 빌고 또 빈다. 부디 평안히 쉬시라!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도
본디 제 맘이 아닌
우주의 움직임!
사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낙담하지 말라.
그대 속에 그대보다 더 큰 숨이
물결치고 있나니.
그 숨결 속에 그대 삶을 묻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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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다시 뵐 수 없다니 너무 안타까워요 유고집인데 책속에서 만날 수 있어 다행입니다 가난한 농촌에서 정겨운 이들과의 길지않은 세월속에 외로운 농촌노인들의 아픔을 그들보다 더 아파했던 ..한번 뵈면 따뜻한 모습과 그 마음을 잊을 수 없는 분이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