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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13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성령강림절 후 제21주)
찬란한 부재: 열림이 전부입니다
욥23:1~9,(16~17); 히4:12~16; 막10:17~31
오늘 우리가 교독한 시편은 시편90편입니다. 시편90편은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기도”라는 제목이 붙어있는 시편입니다. 이 시는 인생을 오랫동안 살아냈던 사람이 인생의 허무함과 연약함을 깊이 인식하고, 한 밤의 꿈과도 같고 한 포기의 풀과도 같은 인생의 무상함을 노래하면서, 동시에 모든 것의 근원이요 영원이신 하나님께 우리의 무상한 삶을, 주님의 은총으로, 견고하게 해달라고 간구하는 기도문입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빠르게 지나가니, 마치 날아가는 것 같습니다.” 아침에 돋아서 꽃을 피우다가도 저녁이 되면 시들어서 말라버리는 한 포기 풀과 같은 인생, 그런데 우리는 그 속에서 마치 영원을 살 것처럼, 마치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웃고, 슬퍼하고, 기뻐하고, 안타까워하고, 감사하고, 불평하고, 복을 빌고, 저주하고, 사모하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그리워하고, 지루해하고, 짜증내고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 칼 세이건의 제안으로 찍은 사진, “창백한 푸른 점”을 기억하시지요? 보이저 1호가 지구로부터 61억Km 떨어진 곳에서 카메라 앵글을 지구 쪽으로 돌려 찍은 지구사진입니다. 캄캄한 화면에 픽셀 하나가 희미하게 빛나고 있는 사진이지요. (그렇게 볼 수 있는 것도 보정을 한 덕분이라면서요.) 그런데 픽셀 하나의 크기도 전체 우주의 크기에 비하면 너무나 큰 것이라면서요. 지금 인간이 측량 가능한 우주의 크기가 930억 광년이라고 하지요.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항성(태양처럼 스스로 빛나는 별) 프록시마 센타우리가 지구에서 4광년(40조Km)이 떨어져 있는데, 우리 태양계가 속한 우리 은하의 크기만도 1만 광년이 된다고 하지요. 뭐, 이 정도만 해도 우리의 모든 상상을 넘어서는 일입니다.
칼 세이건이 “창백한 푸른 점” 사진을 보면서 한 유명한 말이 있지요.
“이렇게 멀리 떨어져서 보면 지구는 특별해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 인류에게는 다릅니다. 저 점을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저 점이 우리가 있는 이곳입니다. 저 곳이 우리의 집이자, 우리 자신입니다. 여러분이 사랑하는, 여러분이 아는, 여러분이 들어본, 그리고 세상에 존재했던 모든 사람들이 바로 저 작은 점 위에서 일생을 살았습니다.
우리의 모든 기쁨과 고통이 저 점 위에서 존재했고, 인류의 역사 속에 존재한 자신만만했던 수 천 개의 종교와 이데올로기, 경제 활동가, 수렵과 채집을 했던 모든 사람들, 모든 영웅과 비겁자들이, 문명을 일으킨 사람들과 그런 문명을 파괴한 사람들, 왕과 미천한 농부들이, 사랑에 빠진 젊은 남녀들, 엄마와 아빠들, 그리고 꿈 많던 아이들이, 발명가와 탐험가, 윤리도덕을 가르친 선생님과 부패한 정치인들이, "슈퍼스타"나 "위대한 영도자"로 불리던 사람들이, 성자나 죄인들이 모두 바로 태양빛에 걸려있는 저 먼지 같은 작은 점 위에서 살았습니다.
.... 저 작은 픽셀의 한 쪽 구석에서 온 사람들이 같은 픽셀의 다른 쪽에 있는, 겉모습이 거의 분간도 안되는 사람들에게 저지른 셀 수 없는 만행을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잦은 오해가 있었는지, 얼마나 서로를 죽이려고 했는지, 그리고 그런 그들의 증오가 얼마나 강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위대한 척하는 우리의 몸짓, 스스로 중요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믿음, 우리가 우주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망상은 저 창백한 파란 불빛 하나만 봐도 그 근거를 잃습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는 우리를 둘러싼 거대한 우주의 암흑 속에 있는 외로운 하나의 점입니다. 그 광대한 우주 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지 안다면, 우리가 스스로를 파멸시킨다 해도 우리를 구원해줄 도움이 외부에서 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 인류가 느끼는 자만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우리가 사는 세상을 멀리서 보여주는 이 사진입니다. 제게 이 사진은 우리가 서로를 더 배려해야 하고, 우리가 아는 유일한 삶의 터전인 저 창백한 푸른 점을 아끼고 보존해야 한다는 책임감에 대한 강조입니다.”
지난 한 주간도 우리네 인생에서 울고 웃고 지지고 볶다가 지금 여기 앉아 있는 우리들에게는 너무 멀어서 와 닿지 않는 이야기인가요?
오래 전, “우리에게 우리의 날을 세는 법을 가르쳐 주셔서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해주십시오.” 노래했던 시편을 오늘 읽으면서, 우리는 정말 지혜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까요? 정말 언제쯤 우리는 지혜로워질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복음서 본문은 여러분이 잘 아는 본문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 앞에 한 사람이 찾아와 무릎까지 꿇고 질문을 합니다. “선하신 선생님, 내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아마도 이 질문에는 평소 이 사람이 지향하는 삶의 태도가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무엇인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당시 유대종교가 제시했던 이상적인 삶의 목표와 관련이 있겠지요.
그러자 예수님은 짐짓 유대교의 계율인 십계명을 들이대시면서 “네가 계명을 알고 있지 않느냐. 그 계명에 살인하지 말아라, 간음하지 말아라, 도둑질 하지 말아라, 속여서 빼앗지 말아라, 네 부모를 공경하여라, 하지 않았느냐.” 라고 반문하십니다. 이런 것들을 잘 지키면 되지 않겠느냐고 대답하시는 것 같이 보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젊은이는 선뜻 “제가 이 모든 것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이 젊은이는 자기 종교에서 명하는 계율들을 잘 지키면서 열심히 살았던 진지하고 성실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그의 진정성을 아셨는지 예수님도 “그를 눈여겨보시며 사랑스럽게 여기셨다”고 오늘 복음서는 기록합니다. (사실, 이 사람이 ‘젊은이’였다는 말은 마가복음에 없습니다. 그냥 ‘한 사람’이라고 하지요. 마태복음이 이 사람을 ‘젊은이’라고 부르고, 누가복음은 ‘지도자’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가 말씀하시기를, “너에게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복음서에 보면, 이 사람은 재산이 많은 고로 울상을 짓고, 근심하면서 떠나갔다고 합니다. 이런 걸 보고 혹을 떼러 왔다가 혹을 붙이고 간다고 하지요.
그냥 자기 종교가 말하는 계명들을 잘 지킴으로서 거기서 잘했다 위안을 받고, 자타가 인정하는 소위 “믿음 좋은 신앙인”으로 인정받는 것으로 끝났으면 좋았을 것입니다. 여기서 어려서부터 종교계명들을 잘 지켰다는 것은, 당시 유대사회가 제시하는 가치관에 잘 적응하고 그 체제가 요구하는 의무들을 잘 지켜내는, 그야말로 훌륭한 교양인, 적응 잘한 사회인이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훌륭한 신앙인만이 아니라). 말 그대로 부족한 것이 하나 없는 인생 아닙니까?
지금으로 말하면, 삶에 질서가 잡혀있는, 좋은 습관과 건강한 에고가 형성되어 있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거기다 돈까지 많았다는 거 아닙니까? 이런 부류의 사람들, 우리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사람 아닙니까? 한번 상상을 해보십시오. 사회적으로 명망이 있고(누가복음은 이 사람을 지도자라고 부릅니다), 많이 배운 사람인데다가, 엄청나게 부자이기까지 한 훌륭하고 젊은 장로님, 권사님! (크고 유명한 교회에 가면 이런 사람들 꽤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네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가서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너는 와서 나를 따라라” 라고 말씀하시지요. 이 젊은이가 행하기 가장 어려운 일을 말씀한 것 같습니다. 그러자 이 돈 많은 젊은이는 울상을 짓고, 근심하면서 떠나갔다고 합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에서 여러분은 어디에 방점이 찍히고 있습니까?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남자? 아니면, 어려서부터 계명을 다 지킨 성실함? 아니면,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라는 예수님의 명령? 아니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한 가지 부족한 것?
저는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예수님께서 정말 이 젊은이에게 무엇을 말씀한 것일까 생각해 봅니다. 부족한 것 하나 없다고 자타가 인정하는 이 젊은이에게 “네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꼭 집어서 말씀하신 것은 뭘까 생각해 봅니다. 정말, 제자들이 이해한 대로,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것 자체가 이 젊은이가 “한 가지 부족한 것”을 채우는 일이었을까요? 그러니까 다시 말해, 자신의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내어놓았다면 이 사람은 행복하게(이 젊은이의 표현으로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을까요? 그랬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었을 때 그가 이전에 알지 못했던 어떤 결정적이고 궁극적인 체험을 했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었다고 해도, 그가 여전히 붙잡고 있는 어떤 것, 어쩌면 돈보다 더 큰 어떤 것을 쥐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가령, “나는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내 준 사람”이라는 자의식 같은 것 말입니다. 어쩌면 이런 자의식은 “나는 어려서부터 이 모든 계명을 다 지켰습니다”라는 자의식보다 이 사람을 더 “안전 담요”에 앉혔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악순환을 깊이 꿰뚫은 사도바울은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몸부림쳤던 것 아니겠습니까?
오늘 예수님은 한술 더 떠서 “부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참으로 어렵다”고 말씀하시면서, 비유컨대,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이 더 쉽다”고 하십니다. 제자들은 깜짝 놀라지요. 이 말씀을 읽는 많은 후대 사람들도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낙타는 “배 밧줄”을 의미한다는 둥(헬라어에서 두 단어는 발음이 비슷합니다), “바늘 귀”는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성벽의 작은 출입구를 의미한다는 둥, 여러 가지 그럴듯한 해석을 내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 앞에는 이런 해석들은 모두 구차해 보입니다.
우리의 속마음을 아시는 듯, “그럼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어?” 제자들이 서로 수군대는 소리를 들으시고,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시지요. “사람에게는 불가능하나, 하나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 아직 우리에게는 선문답처럼 들리는 말씀이지만, 예수님은 모든 분명 결론을 아시는 듯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아직 예수님의 이 말씀의 의미를 다 모릅니다. 마치 이 지구라는 행성에서 지지고 볶으며 살고 있는 우리가 우주라는 어마어마한 자리에서 보는 우리의 모습을 다 알 수 없는 것과도 같습니다. 칼 세이건이 말한 대로, 창백한 푸른 점을 보면서, 우리 인간의 위치나 모습이 어떠한지를, 우리는 마치 영원할 것 같은 삶을 살고 있지만, 그것이 얼마나 무상하고 덧없는지를 상상해 볼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정말 우리의 삶의 태도가 당장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창백한 푸른 점에서 70억의 인구 중의 하나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좀더 거시적으로(일원론적으로, 일치적으로) 알고 있다면, 오늘 시편의 시인이 말한 대로, 정말 우리 인생이 한 순간의 꿈이고, 아침에 돋아난 한 포기 풀과 같은 우리 인생을 우리의 바탕이요 원천이신 영원하신 하나님의 시선으로(일치적이고 일원론적인 시선으로) 진정 볼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의 태도는 아마도 크게 달라져 있을 것입니다.
칼 세이건이 말한 대로, 창백한 푸른 점에 살고 있는 우리가 정말 우리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다면, 우리가 갖는 자만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깨닫고, (동시에 우리가 느끼는 열등감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깨닫고), 좀더 넓은 마음으로 배려하며, 우리의 유일한 삶의 터전인 이 자리를 소중하게 지키며 살 수 있을 것이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어 우리 손으로 하는 일이 좀더 견실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그렇지 못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 황량한 전쟁터에서 나 혼자 모든 것을 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토머스 머튼이 1968년 10월 중순, 그의 마지막이 된 아시아로의 여행을 앞두고 그의 친구들과 함께 캘리포니아 어느 수녀원에서 며칠을 묵으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때 그 자리에 함께 했던 베네딕도회 수도승인 데이빗 슈타인들 라스트 수사가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었다는 이원적인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고 있으며, 따라서 여전히 이 세상에서 고통을 받고 있다고 말했을 때, 머튼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실제로 이원성은 없지만, 동시에 이원성은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의지와 하느님의 의지를 오랫동안 이원적으로 따로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원성이 존재하지 않다는 것을 알 때까지 오랫동안 이원성을 경험해야 합니다. ....이원적인 기도를 낮은 수준의 기도로 여기지 마십시오. 더 낮은 것이 더 높은 것입니다. 어떠한 수준도 없습니다. 당신은 어떤 순간에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느님의 선물인 숨겨져 있는 일치를 돌파할 수 있습니다. 종국에, 찬미가 찬미합니다. 감사가 감사합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십니다. 열림(Openness)이 전부입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이 전부입니다. 후회하는 것은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이렇게 하겠다 저렇게 하겠다 결심하는 것도 그다지 도움이 안됩니다. 지금 여러분이 하고 있는 생각, 지금 여러분의 마음 태도, 지금 여러분의 행동이 전부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진정 지혜의 마음을 얻기 전까지 오랫동안, 오늘 욥기의 말씀처럼, 어디에도 하나님은 안 계신 것 같고, 이 황량한 전쟁터에서 홀로 살아남아야 하는 불행하고 외로운 존재라고 생각하며 살아가게 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순간순간 우리의 처지를 다시금 알아차리면서 지금, 한계 많고 연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우리네 삶이 눈에 뻔히 보임에도 불구하고, 목숨이 붙어 있는 지금 우리 삶 속에 깃들여 있는 어떤 자비와 은총,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선한 의지를 믿으며, 지금 마음에 일어난 우리의 선한 의지를 인식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지금 당장 재산을 다 팔아 내놓을 수는 없다 하더라도, 내가 가게 놓아둘 수 있는 것들을 가게 놓아두고, 붙잡고 있어 봐야 내 행복에 도움이 안되는 것들 좀 가게 놓아두고, 근심과 염려 좀 가게 놓아두고, 지금 우리 자신을 열어내는 수련, 내 안에 연민과 자비를 넓혀가는 수련을 계속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씩 조금씩 내 안에 어떤 열림을 통해 내 곁의 소중한 것들을 소중하게 바라볼 수 있고, 내 삶의 아름다움을 아름답게 느껴보고, 나의 아픔만이 아니라 다른 이의 아픔도 보아 줄 수 있습니다.
오늘 단톡방에 올라온 히브리서 말씀을 기억합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우리가 자비를 받고 은혜를 입어서, 제때에 주시는 도움을 받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