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실록이 산으로간 까닭?
편찬이 완료된 조선왕조실록은 춘추관에서 실록을 봉안하는 의식을 치룬 후에 서울의 춘추관과 지방의 사고(史庫)에 1부씩 보관하였다.
사고는 실록 등 주요한 기록물을 체계적으로 보관하기 위해 설치한 건물이었다.
조선전기에는 서울의 춘추관을 비롯하여 충주 · 전주 · 성주 등 지방의 중심지에 보관하였다.
그러나 지방의 중심지는 화재와 약탈 등 분실의 위험이 제기되었으며, 실제 중종대에는 비둘기를 잡으려다가 성주사고가 화재를 당한 적도 있다.
급기야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전주사고본의 실록을 제외한 모든 사고의 실록이 소실되면서 사고를 험준한 산지에 보관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1592년의 임진왜란은 교통과 인구가 밀집한 읍치에 소재한 사고의 위험성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즉 왜적들의 주요 침입루트가 된 서울의 춘추관, 충주, 성주의 사고는 모두 병화의 피해를 입고 그 존재가 사라졌다. 다행히 전주사고본의 책들은 사고 참봉(參奉)인 오희길(吳希吉, 1556~1623)과 전주 지역 유생인 손홍록(孫弘綠, ?~?), 안의(安義, 1529~1596)와 같은 사람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내장산까지 옮겨지는 등의 우여곡절 끝에 보존될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 사고가 지역 중심지에서 험준한 산 위로 올라간 것은 바로 이러한 경험 때문이었다.
여러 곳에 분산하여 보관함으로써 완전한 소실은 면했지만 교통이 편리한 지역은 전쟁이나, 화재, 도난의 우려가 커서 완벽하게 보존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직접 체험하였던 것이다.
조선후기에 사고들이 산으로 간 까닭이 여기에 있다.
당대인들이 관리하고 보존하기에는 훨씬 힘이 들지만 후대에까지 길이 자료를 보존하기 위해 험준한 산지만을 골라 사고를 설치했던 것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광해군대 이후 조선의 사고는 5사고체제로 운영되었다.
서울의 춘추관사고를 비롯하여
강화도의 마니산사고(병자호란 후에 인근 정족산으로 이전)
평안도 영변의 묘향산사고(청나라 침입에 대비하여 무주 적상산으로 이전)
경상도 봉화의 태백산사고,
강원도 평창의 오대산사고가 그것이다.
춘추관사고를 제외한 모든 사고를 지역별 안배를 한 후에 험준한 산지에 배치한 것이다.
그 후 묘향산 사고는 후금(뒤의 청나라)의 침입을 대비하여 적상산성이라는 천연의 요새로 둘러싸인 전라도 무주의 적상산사고로 이전했으며, 강화의 마니산사고는 병자호란으로 크게 파손되고 1653년(효종 4) 화재가 일어나면서 1660년(현종 1)에 인근의 정족산사고로 이전하였다. 따라서 조선후기 지방의 4사고는 정족산, 적상산, 태백산, 오대산으로 확정되었고 이 체제는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그대로 지속되었다. 그리고 사고 주변에는 수호사찰을 배치하여 보다 안전하게 사고를 지키게 했는데 전등사(정족산사고) , 안국사(적상산사고) , 각화사(태백산사고) , 월정사(오대산사고) 가 이러한 기능을 하였다.
실록의 관리에서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3년을 주기로 하는 정기적인 포쇄 작업이었다. 포쇄는 책을 바람에 말려 습기를 제거하여 부식 및 충해를 방지시킴으로써 서적을 오랫동안 보존하기 위한 것이었다.
포쇄 작업은 사관들의 주요 업무이기도 했다. 왕명을 받은 전임 사관들은 사고에 가는 것을 영예로 생각했으며, 포쇄를 한 정황을 모두 기록하였다. 이러한 기록은 ‘실록형지안’ 과 ‘실록포쇄 제명기’의 기록으로 전해지고 있다.
포쇄는 지방의 4대 사고를 거친 현존 『조선왕조실록』이 대부분 원형을 유지할 수 있게 되는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실록 중에서 정족산본 실록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유일하게 보존된 전주사고본의 원본 실록이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으로, 조선 전기에 편찬된 실록의 원형을 그대로 보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료적 가치가 뛰어나다.
『조선왕조실록』은 1997년 10월 1일 유네스코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어 세계적으로도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우리가 현재까지도 실록의 실물을 접할 수 있는 것에는 조선후기에 사고를 가장 안전한 곳에 배치한 선인들의 지혜가 큰 몫을 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책임의식으로 무장한 사관들이 철저 히 사초를 작성하고, 실록을 관리, 점검한 모습들은 오늘날에도 많은 울림을 주고 있다
조선왕조실록과 사고(史庫)朝鮮王朝實錄 1392년~1863년
어느 시대나 당대의 일들을 후세에 전하려는 노력은 끊임없이 시도되었다. 특히 왕조의 역사를 담은 왕조실록은 중국이나 일본, 베트남 등 여러 나라에서도 쓰여졌지만 대부분 왕에 의해 그 내용이 변개되어 사실적이지 못하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부터 철종까지 25대 472년간(1392~1863)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방대한 양의 역사서이다.
국왕별로 쓰여진 조선왕조실록은 전왕(前王)의 죽음과 함께 실록청이 설치되어 총재관 이하의 관원이 사초(史草)를 주요 자료로 하여 전왕의 실록을 편찬했다. 사초를 기록하는 사관은 왕의 곁에서 왕의 언행일체를 매일매일 작성하였다. 사관은 사초를 절대 발설할 수 없었으며, 작성 후 춘추관에 보관하여 함부로 열람할 수 없게 했다. 실록은 왕의 언행뿐만 아니라 당대의 정치, 경제, 생활 모습 등 모든 분야에 대해서도 기록하였다.
간혹 실록의 초안인 사초가 정치적으로 악용되기도 하였으며, 선조·경종 때에는 기존 실록을 수정한 수정실록이 작성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은 비록 임금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열람할 수 없을 만큼 비밀 유지와 공정성이 보장되어 있었다.
태조 이성계는 자신에 관한 기록이 궁금하여 사초를 보고자 했으나, 거센 반대에 부딪혀 좌절되고 말았다. 이처럼 조선왕조실록은 외국의 실록에 비해 상대적으로 공정하게 기술되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완성된 실록은 4곳의 사고(史庫)에 각각 1부씩 보관하였다. 조일전쟁과 조만전쟁을 치르면서 많은 실록이 소실되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다시 만들어 보존하였다.
특히 조일전쟁 때는 서울, 충주, 성주에 보관되었던 실록 3부가 불타버리고, 전주에 보관되었던 실록만이 남게 되었다. 이때 전주 사고의 실록을 정읍의 내장산으로 옮겼다가 다시 강화도에서 묘향산으로 옮겨 보관함으로써 오늘날까지 전해질 수 있었다.
이후 20세기 초까지 정족산, 태백산, 적상산, 오대산의 사고에 각 1부씩 전하여 내려왔다. 정족산, 태백산 사고의 실록은 1910년 일제가 당시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하였다가 광복 후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그대로 소장하게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국보 제 151호로 지정된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의 인쇄 문화 발전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으며, 1997년 10월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었다. ******
첫댓글 정보보호보안쪽에서는 소산백업 , 이중화 , 백업센터라는 용어들을 쓰고 았죠. 문헌정보학과 계보학 , 신문방송학에서 지하 수장고 보안시설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