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바흐의 얼굴이 크게 그려진 바흐 박물관은 멀리서도 식별이 가능했다. 조붓한 실내는 바흐의 다양한 흔적들로 가득했다. 몇몇 사람들이 헤드폰을 통해 흘러나오는 바로크 음악에 귀를 기울였다.
라이프치히Leipzig. 베를린에서 남서쪽으로 180km 떨어진 이곳은 중세부터 교통의 요지로 유명했다. 라이프치히를 중심으로 프랑크푸르트와 드레스덴, 베를린, 하노버, 도르트문트가 바둑집처럼 둘러싸여 있어 사통팔달의 입지를 자랑했다. 폴란드와 체코, 오스트리아로 이동하기도 편하다. 그런 연유로 이 도시는 이미 15세기부터 유럽 각국의 ‘거상’이 참여하는 무역박람회로 이름을 떨쳤다. 그 활발한 교류의 물결에 당대의 유명한 음악가도 가세했다. 바흐는 1723년부터 1750년까지 이곳에서 음악적 영감을 불태웠으며 리하르트 바그너, 로베르 슈만, 펠릭스 멘델스존 역시 이곳을 둥지 삼아 작곡하고 연주했다. 그들의 영향으로 라이프치히는 음악의 도시로 진화했다. 바흐 페스티벌은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며, 콘서트홀 게반트하우스는 슈케가 만든 거대한 오르간으로 유명하다. 탄생 200주년을 맞아 더욱 주목받는 멘델스존을 기념해 지은 멘델스존 홀에서는 한 해 수백 회의 공연과 콘서트가 열린다. 괴테의 숨결은 그러한 음악적 낭만에 색다른 즐거움을 더한다. 이 시대 최고의 문학가 중 한 명이 된 그는 이곳 라이프치히에서 세기의 걸작 <파우스트>의 아이디어를 얻었다.
2 바흐가 음악적 열정을 불살랐던 토마스 교회 앞에 그의 동상이 우뚝 서 있다. 장건한 동상에서는 그의 신산한 삶이 만져지지 않았다. 3 토마스 교회 내부는 정갈했다. 스테인드글라스에 바흐와 멘델스존의 초상이 표현돼 있다.
바로크 음악의 정점이 묻힌 곳 라이프치히에서 가장 먼저 찾은 곳은 토마스 교회Thomaskirche였다. 교회 앞에 있는 바흐의 동상은 그의 곡절 많은 인생과 무관한 듯 견고해 보였다. 1685년 아이제나흐에서 출생한 바흐는 ‘은숟가락을 입에 물고 태어난’ 멘델스존과는 확연히 다른 인생 항로를 겪었다. 멘델스존은 어릴 때부터 최고의 스승으로부터 영재교육을 받았던 반면, 조실부모한 바흐에게 대학 입학은 언감생심이었다. 멘델스존이 런던, 스코틀랜드, 빈, 나폴리 등 유럽 각지를 여행하며 음악적 영감을 키웠던 반면, 바흐는 평생을 오르간 연주자와 궁정 악장 자리를 찾아 이곳저곳을 옮겨 다녀야 했다. 음악은 그에게 재능의 발현이기에 앞서 직업이자 생계 수단이었다. 라이프치히로 건너오기 전 10년간 머물렀던 도시 쾨텐에서 바흐는 행복했다. 젊은 영주 레오폴트의 전폭적인 후원 하에 6년 동안 궁정 악장으로 재직하며 자신의 전성기를 열어갔던 그는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전곡, 13곡의 칸타타, 그리고 실내악과 기악 독주곡의 대부분을 이 시절 작곡했다. 보수도 넉넉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레오폴트의 결혼과 함께 그의 인생에 먹구름이 다시 몰려왔다. 음악에 무관심했던 영주의 아내는 남편이 음악에 열중하는 것을 탐탁지 않아 했을 뿐만 아니라 바흐와의 교유를 대놓고 싫어했다. 결국 바흐는 정들었던 ‘쾨텐 시대’를 정리하고 라이프치히로 향했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라이프치히 성 토마스 교회의 칸토르(음악감독)로 선정되기에 이른다. 1723년 4월 22일의 일이다.
 4 서거 200주년을 기념해 토마스 교회로 옮겨진 바흐의 무덤 위에 추모의 꽃이 놓여 있었다. 5 새롭게 거듭난 멘델스존 하우스의 외관은 흠잡을 데 없이 매끈해 보였다. 나치 정권과 동독 시절을 거치며 거의 황폐화되다시피 했던 것을 통일 이후 각지에서 보내온 후원금을 통해 아름답게 되살렸다.
13세기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졌으나 15세기 고딕 양식으로 재건된 토마스 교회에 사람들의 발길은 계속 이어졌다. 바로크 음악을 완성시켰으며 동시에 고전파 음악의 씨앗을 뿌린 바흐의 무덤을 너나 할 것 없이 카메라에 담아갔다. 무덤은 1950년, 그러니까 바흐 서거 200주년이 되는 해에 이곳으로 옮겨져 제단 아래 묻혔다. 바흐는 1750년 유명을 달리할 때까지 토마스 교회를 위해 봉직했다. 도시의 교회음악을 총괄하는 칸토르는 몹시 바쁘고 중차대한 자리였다. 매주 토마스 교회와 인근의 니콜라이 교회Nikolaikirche에서 거행되는 예배를 위해 모테트motet(중세 르네상스 시대가 전성기인 중요한 성악곡)와 칸타타cantata(17세기에서 18세기까지 바로크 시대에 발전한 성악곡의 한 형식)를 작곡해야 했다. 더불어 성 금요일을 위한 수난곡, 장례식을 위한 모테트, 결혼식 음악, 주문 받은 오르간 곡 등도 만들고 성 토마스 학교의 학생들도 가르쳐야 했다. 그는 빗살처럼 줄지어 늘어선 빡빡한 일정과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엄청난 수완과 에너지를 발휘했다. 그 유명한 <마태 수난곡>도 이때 탄생했다.
 1 멘델스존 하우스 내부에 있는 멘델스존의 흉상. 얼굴에서 그의 넉넉했던 환경이 느껴지는 듯했다. 2 멘델스존의 자취를 더듬을 수 있는 멘델스존 하우스는 찾는 이가 많지 않아 생각보다 고즈넉했다. 찬찬히 둘러보기 좋았다.
젊은 멘델스존, 죽은 바흐를 불러내다 독일의 합창단은 역사 속에서 전통과 권위를 축적한 교회 합창단, 종교와 상관없는 공적 기관에 속한 합창단, 오페라 소속 합창단, 일반 합창단 등 크게 네 갈래로 나뉜다. 라이프치히의 성 토마스 교회 성가대가 바로 대표적인 교회 합창단이다. 바흐가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간 지 260여 년이 흐른 지금도 주말이면 교회 제단 맞은편 2층에서 ‘천사들의 합창’이 울려 퍼진다. 경사가 급한 토마스 교회 지붕을 타고 흐르는 바흐의 장중한 음악을 뒤로한 채 바흐 박물관Bach Museum으로 발걸음을 놓았다. 박물관은 원래 바흐의 친구인 보제의 집이었는데, 1985년 대규모 보수 공사를 거쳐 지금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음악의 아버지’가 남긴 자필 악보, 라이프치히 생활 및 제자들에 관한 자료 등을 그러모아놓았다. 그리 크지 않은 박물관 내부에 들어서니 몇몇 사람들이 헤드폰을 낀 채 불후의 선율을 듣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저마다 표정이 온화했다. 거듭 말하거니와 멘델스존은 유복했다. 그의 할아버지는 베를린의 철학자, 아버지는 은행가였다. 어머니도 넉넉한 형편의 집안에서 시집온 지적이고 교양 있는 여성이었다. 어린 멘델스존의 배움터는 공립학교가 아니라 집이었다. 당대 최고의 기라성 같은 가정 교사들이 그에게 일반 교양, 그리스어, 음악, 데생 등을 가르쳤다. 음악의 경우 바이올린, 피아노, 화성, 작곡 담당 교사를 따로 둘 정도였다. 괴테의 절친한 친구이자 그의 작곡 선생님인 첼터가 수장으로 있는 징 아카데미에 들어간 때가 1820년. 여기서 멘델스존은 바흐의 작품을 접하게 되고 이듬해 바이마르에 있는 괴테의 집을 찾아 바흐를 직접 연주하기에 이른다. 대문호는 소년의 재능을 어여삐 여겼으며, 자신의 시를 선물로 주었다.
 3 라이프치히는 음악의 도시답게 거리 곳곳의 담벼락조차 ‘음악적’이다.
1835년 멘델스존이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Gewandhaus Orchestra의 지휘자로 취임하면서 바흐와의 운명적인 재회가 이뤄졌다. 멘델스존은 1847년 11월 숨을 거둘 때까지 천부의 음악적 감각과 기획력을 발휘, 오케스트라의 이름을 드높이고 라이프치히를 유럽 음악의 중심지로 올려놓았다. 그 혁혁한 성과 중 하나가 바로 ‘바흐의 재발견’이다. 거의 한 세기 동안 세간의 관심 밖에 놓여 있던 바흐의 작품을 성공적인 콘서트를 통해 무대의 전면으로 다시 불러낸 것이다. 그런데 바흐에 대한 멘델스존의 관심이 재점화된 데는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숨어 있다. 어느 날 멘델스존 부부가 푸줏간에 들렀는데, 마침 주인장이 어떤 여자 손님의 주문에 맞춰 고기를 포장하는 모습을 보게 됐다. 순간, 멘델스존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고기 포장지가 바로 바흐의 <마태 수난곡> 악보였던 것이다. 어릴 적 맹렬히 연습한 기억 때문에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이 ‘사소한’ 사건은 멘델스존이 바흐를 ‘부활’시킨 결정적 단초가 되었다.
4 옛 증권거래소 건물 앞에는 독일의 대문호 괴테의 동상이 먼 곳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파우스트>, 첫 단추를 꿰다 세계 최고最古의 오케스트라인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의 다섯 번째 지휘자 멘델스존은 바흐 이외에도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등의 숨겨진 곡들을 새롭게 조명했다. 청중은 그의 깊은 안목과 예민한 귀, 폭넓은 식견에 탄복했고 오케스트라는 탄탄대로를 걸었다. 멘델스존 사후에도 아르투르 니키슈,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브루노 발터 등의 거장이 오케스트라의 쩌렁쩌렁한 명성을 유지해나갔다. 특히 한국의 클래식 애호가들 중에는 성 토마스 합창단과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가 2004년 첫 내한 때 연주한 <마태 수난곡>의 감동을 잊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올해는 특히 멘델스존이 태어난 지 200주년이 되는 해라 더욱 많은 관심이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에 쏠리고 있다. 재능과 환경 어느 측면에서도 모자랄 것 없는 멘델스존에게 있어 거의 유일한 불행은 너무도 이른 나이에 유명을 달리했다는 점이다. 돈독한 사이를 유지하던 누이 파니 멘델스존의 죽음이 결정적이었다. 형언할 수 없는 충격과 가눌 수 없는 슬픔으로 인해 신경 장애를 앓게 됐고, 스위스 등지에서 요양을 하다 결국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 그가 마지막 숨을 쉬었던 멘델스존 하우스Mendelssohn Haus는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활동 근거지인 신 게반트하우스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정원의 초록과 지붕의 빨강과 외벽의 흰색이 어울린 정경이 새뜻했다. 멘델스존 하우스는 독일 통일 이후 전 세계에서 답지한 후원금을 통해 기념관으로 복원된 경우다. 다양한 자료와 유품이 전시된 건물 내부에서 그림 같은 낭만을 연주했던 그의 남다른 재능과 짧은 생애를 추억했다. 라이프치히에는 멘델스존과 관련된 명소가 한 군데 더 있다. 라이프치히 역사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는 구 시청사 건물이다.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어진 좌우 비대칭의 아름다운 건물 안에 멘델스존을 위시한 19세기 위대한 음악가들의 흔적이 쌓여 있다.
 1 구 시청사 부근 매들러 파사주 지하에 자리 잡은 아우어바흐 켈리. 괴테가 즐겨 찾던 곳이자 <파우스트>에도 등장하는 술집이다. 라이프치히의 ‘괴테 루트’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소로 대접받고 있었다.
‘괴테’라는 한 가지 테마만으로도 독일 여행의 몸피는 두두룩해진다. 프랑크푸르트의 괴테 생가를 시작으로 독일 곳곳에서 이 무비無比의 지성이 남긴 이야깃거리가 끊임없이 속살거리기 때문이다. 라이프치히의 괴테는 공교롭게도 그가 생전에 애중하던 멘델스존 가까이 있었다. 구 시청사 뒤편에 자리한 옛 증권거래소 앞에서 괴테의 동상을 발견했다. 역동적이고 화려한 장식미를 자랑하는 바로크 양식의 건물을 배경으로 괴테는 더욱 도도하고 기품이 있어 보였다. 아버지의 강요에 못 이긴 젊은 괴테가 법학을 공부했던 라이프치히 대학은 한때 독일 최대의 대학이었다. 동독 시절 칼 마르크스 대학으로 문패를 바꿔 달았다가 통일 이후 본래의 이름을 되찾았다. 사실은 ‘괴테 대학’으로 변경하고 싶었지만 프랑크푸르트에 이미 괴테의 이름을 딴 대학이 있어 어쩔 수 없이 포기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올해로 설립 600주년을 맞은 라이프치히 대학은 그동안 슈만, 바그너, 니체 등 역사의 ‘거인’들을 수두룩하게 배출했다.
 2, 3 매들러 파사주에 들어서니 불후의 명작 <파우스트>에 나오는 주요 인물들의 조각상이 보였다. 단체 관광객들은 동상의 유래를 설명하는 가이드의 입에 집중했다. 파사주에는 동상 이외에도 아담한 상점들이 많다.
라이프치히는 괴테의 <파우스트>와도 연관이 있다. 괴테가 <파우스트> 집필을 위한 첫 구상을 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이 당대의 희곡에 등장하는 술집도 만나볼 수 있다. 라이프치히는 국제적 견본시답게 아케이드가 유난히 많은데, 매들러 파사주Madler Passage 지하에 자리를 틀고 있는 아우어바흐 켈러Auerbachs Keller도 그중의 하나다. 제임스 조이스의 대표작 <율리시스>에 나오며 실제 조이스가 즐겨 찾았던 더블린의 데이비 번스Davy Byrnes 퍼브pub가 소설 출간 이후 매출이 크게 오른 것처럼, 이곳 역시 <파우스트>의 ‘후광 효과’를 톡톡히 누리고 있다. 괴테는 죽어서도 독일 경제에 엄청나게 이바지하고 있는 것이다. 지하로 내려가는 입구에서는 파우스트 등장인물들의 조각이 사람들의 시선을 기다린다. 발을 만지며 소원을 빌면 틀림없이 이뤄진다고 해서 유독 발 부분만 색깔이 누렇게 변해 있다. 생생한 조각상을 들여다보니 현세적 욕망과 쾌락을 경계하라는 <파우스트>의 메시지가 언뜻 읽히는 것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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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el Information
가는 길 대한항공, 아시아나항공, 루프트한자 독일항공이 인천~프랑크푸르트 간 직항 편을 운항한다. 비행 시간 약 11시간. 초고속열차인 ICE를 이용할 경우 프랑크푸르트에서 라이프치히까지 3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독일의 각 도시에서는 지정된 박물관 및 시내 교통수단 무료 이용, 레스토랑 할인 혜택 등을 받을 수 있는 시티 카드를 구입하면 좋다.
호텔 라이프치히 역에서 도보로 3분 거리에 위치한 노보텔(www.novotel.com)은 시설과 접근성 면에서 라이프치히 최고의 호텔이다. 토마스 교회, 게반트하우스 등 명소들과도 가깝다. 12개의 스위트룸을 비롯해 총 200개의 객실을 갖추고 있다. 카페 바움 1566년에 문을 연 유서 깊은 레스토랑이다. 바그너와 실러도 생전에 자주 들렀다고 한다. 1층은 레스토랑, 2층은 카페로 꾸며져 있다. 커피 박물관도 있다. 축제 오는 6월 11일부터 21일까지 바흐 페스티벌(www.bach-leipzig.de)이 열린다. 바흐의 작품을 들을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멘델스존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는 프로그램이 풍성하게 마련된다. 가을에는 라이프치히 재즈 페스티벌(www.leipjazzig.de)이 열린다. 세계 각지에서 날아든 재즈 음악인들의 연주가 밤이 이슥하도록 이어지고, 사람들은 즉흥 연주의 신명에 사로잡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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