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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쉼터 스크랩 선시(禪詩): 시로 만나는 명상과 깨침의 세계 / <세상의 모든 시학>
ysoo 추천 0 조회 117 17.11.11 12:0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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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시학 _ 제3강.

선시(禪詩): 시로 만나는 명상과 깨침의 세계

(2015.5.22.)


순간의 미학


이진오 (예술문화영상학과 교수)



1. 마중물


순간의 개념은 무엇인가?

순간의 의미는 무엇인가?

시와 순간


순간과의 조우를 위해서는 먼저 의식 상태의 정렬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우선 십우도라는 것을 먼저 한번 보도록 하자.



2. 십우도(十牛圖)·심우도(尋牛圖)


십우도(十牛圖)는 심우도(尋牛圖)라고도 하는데 소를 찾아 나서는 것에 비유하여 선수행의 단계를 그림으로 묘사하고 있다.


예로부터 소는 인도나 중국에서 농경생활의 필수적인 동물이므로 사람과 매우 친숙하다. 세존께서 성불하기 이전에 '고타마'태자였는 데 이 '고타마'가 곧 소를 의미하기도 한다. 자급자족을 내세우는 선종에서 노동과 관련 있는 소를 등장시켜 선수행의 단계를 비유하여 마음을 조복받는 10가지 그림으로 묘사하고 있다.


십우도에 관한 여러가지 설이 있으나 宋代의 곽암사원(廓庵師遠)스 님의 작품이 가장 유명하며 석고희이(石鼓希夷)라는 스님이 화답하는 게송을 지었으며 다시 괴납대련(壞衲大璉)스님이 화답게송을 넣고 있다.


곽암의 십우도는 잃어버린 소를 찾아나서서 소를 보고 잡아 끌어서 마침내 소와 내가 하나가 되어 결국 공적(空寂)이 되고 다시 당초의 일상 생활로 되돌아가는 차례를 그리고 있다.

마음의 작용을 잘 다룬 곽암의 십우도 가 가장 널리 유행하여 오늘날 우리나라 각 사찰 벽화에는 어김없이 십우도가 그려진 것을 볼 수 있다.




 

1) 소를 찾는다. (尋牛)

소를 찾아가는 첫단계, 인간이 불법을 구하고 자신의 본성이 무엇인가를 찾기 위해 원심願心을 일으키는 단계.


아득히 펼쳐진 수풀 헤치고

소를 찾아 나서니

물 넓고 산 먼데 길은 더욱 깊구나.

힘 빠지고 마음 피로해

찾을 길 없는데

단지 들리는 건 늦가을 단풍나무 매미 소리뿐.




 

2) 소의 발자취를 보았다. (見跡)

깊은 마음속으로 들어가 알 수 없지만 망상의 잡초와 번뇌의 숲사이에 나 있는 소의 발자국을 발견한 경지. 자신의 본성을 본 경지이다.


물가 나무 아래 발자국 어지러우니

방초 헤치고서 그대는 보았는가?

설사 깊은 산 깊은 곳에 있다 해도

하늘 향한 그 코를 어찌 숨기리.





3) 소를 발견하였다. (見牛)

수행자가 마침내 마음의 깊은 숲속에서 스스로 자생하면서 방목되고 있는 소를 보았다. 즉 자신의 성품을 보아 견성한 것이다.


노란 꾀꼬리 가지 위에서 지저귀고

햇볕은 따사하고 바람은 부드러운데

강가 언덕엔 푸른 버들

이곳을 마다하고 어디로 갈거나

늠름한 쇠뿔(頭角)은 그리기가 어려워라





4) 소를 붙잡았다. (得牛)

마음속에 들어 있는 소를 보았으니 도망치지 않도록 물러서지 않고 단단히 붙들어야 한다. 자성은 기회만 있으면 도망치거나 자신을 망치도록 저항을 하기 때문에 단단히 묶어야 한다.


온 정신 다하여 그 소를 붙잡았지만

힘 세고 마음 강해 다스리기 어려워라

어느 땐 고원(高原) 위에 올라갔다가

어느 땐 구름 깊은 곳으로 숨어들고 만다네





5) 소를 먹여 길들인다. (牧牛)

소의 야성을 길들이기 위해 코뚜레를 꿴 뒤 풀을 먹여 소를 길들여야 한다.즉 자성을 키워 내 뜻대로 움직이게 한다


채찍과 고삐 잠시도 떼어놓지 않음은

제멋대로 걸어서 티끌 세계 들어갈까 두려운 것

서로 잘 이끌고 이끌려 온순해지면

고삐 잡지 않아도 저 스스로 사람을 따르리





6)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 온다. (騎牛歸家)

잘 길들인 소를 내 것으로 하여 소를 타고 마음의 본향인 자기자신으로 돌아가는 단계이다.이제 번뇌도 끊기고, 망상도 끊기고 욕망도 끊겨 소는 무심하고 그 등 위에 있는 목동 역시 무심하다.


소를 타고 유유히 집으로 향하니

오랑캐 피리 소리 마디마디 저녁 노을에 실려 간다

한 박자, 한 가락이 한량없는 뜻이러니

곡조를 아는 이여, 굳이 무슨 말이 필요하랴





7) 소는 없어지고 사람은 있다. (忘牛存人)

깨쳤다는 즉 소라는 자성조차 사라진 경지를 의미한다. 깨쳤다는 병은 수행인이 뛰어넘어야 할 가장 무서운 덫이다. 깨쳤으면 그 깨침을 잊어버려야 한다. 깨쳐 소를 얻었다는 것도 잊어야 한다.


소를 타고 이미 고향집에 이르렀으니

소 또한 공(空)하고 사람까지 한가롭네

붉은 해 높이 솟아도 여전히 꿈꾸는 것 같으니

채찍과 고삐는 초당에 부질없이 놓여 있네





8) 사람도 없고 소도 없다. (人牛俱忘)

깨친 소도 잊고 마침내 깨친 자신 마저 잊어버리는 경지다.깨침도, 깨쳤다는 법도, 깨쳤다는 사람도 없으니 이는 모두 공(空)이다. 십우도에선 원으로 그려졌다.


채찍과 고삐, 사람과 소 모두 비어 있으니

푸른 허공만 아득히 펼쳐져 소식 전하기 어렵구나

붉은 화로의 불이 어찌 눈(雪)을 용납하리오

이 경지 이르러야 조사의 마음과 합치게 되리





9) 본래로 돌아간다.(返本還源)

그저 그대의 모습, 깨쳤다는 성인의 모습과 범부의 모습이 다를 바가 없다.


근원으로 돌아오고자 무척이나 공을 들였구나

그러나 어찌 그냥 귀머거리 장님됨만 같으리

암자 속에 앉아 암자 밖의 사물 보지 않나니

물은 절로 아득하고 꽃은 절로 붉구나.





10) 시가지에 들어간다. (入廛垂手)

이제 거리로 돌아가 손을 사용하여 중생을 제도하는 경지이다.


가슴을 풀어헤치고 맨발로 저자에 들어가니

재투성이 흙투성이라도 얼굴 가득 함박웃음

신 선의 비법 따윈 쓰진 않아도

그냥 저절로 마른 나무 위에 꽃을 피우는구나.




3. 선에서의 순간


1) 一旨禪

天龍和尙-俱?和尙-상좌


2) 香嚴擊竹


3) 원효(신라)가 무덤에서 얻은 깨달음


마음이 생겨나면 가지가지 법도 생겨나고    心生卽種種法生

마음이 사라지면 해골뼈다귀와 다름 아니네 心滅卽??不二

이 세상은 오직 마음뿐이며              三界唯心

만법은 오직 생각일 따름이네           萬法唯識

마음 밖에 법이 없으니                    心外無法

어찌 따로 구할 것이 있으리오 (원효) 胡用別求


4) 서산대사(조선)

지리산에서 수행하던 중 남원 부근을 지나다가 닭이 홰를 치며 길게 우짖는 소리를 듣고서 대오하여 다음과 같은 오도송을 지었다.


머리 희어도 마음은 희지 않다고 髮白心非白

일찍이 고인이 토로했었지         古人曾漏洩

꼬끼오 소리 한 번 듣고 나니      今聞一鷄聲

대장부가 할 일을 마쳐버렸네     丈夫能事畢


홀연히 자기의 일 깨쳐 버리니      忽得自家底

이 물건 저 물건 그저 그대로일 뿐 頭頭只此爾

팔만 사천 대장경 가르침조차       千萬金寶藏

애당초 하나의 텅빈 종이라네       元是一空紙


5) 영운지근(靈雲志勤, 당나라)

30년 수행 끝에,


삼십년 동안 칼을 찾던 나그네여              三十年來尋劍客

몇 번이나 낙엽 지고 또 가지 돋아났던가? 幾回落葉又抽枝

복사꽃 핀 것 한번 보고난 후로는             自從一見桃花後

이제는 다시 의심이 더 나지 않는다네       直至如今更不疑


6) 진각국사 혜심(眞覺國師 慧諶,고려)


백운암에 도착하니 대중들이 시 한 수를 부탁하기에(到白雲庵請示衆),


아이 부르는 소리 소나무 숲 사이로 떨어져 내리더니 呼兒響落松蘿霧

차 끓이는 향기가 오솔길 바람 따라 전해 오누나       煮茗香傳石徑風

백운산 아래로 접어들자마자                                 才入白雲山下路

암자에 계신 노스님들 이미 인사를 마쳤도다            已參庵內老師翁


7) 장경혜릉(長慶慧稜, 당나라)


과거에 장경 선사는 20년을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오직 좌복에 앉기 만을 했다. 좌복이 7개가 완전히 구멍이 날 정도로 좌선을 했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했지만 견성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바로 하늘이 훤히 보이는 곳에서 문 앞에 내려쳐놓은 발을 걷어치우는 순간에 천하를 보고 홀연히 크게 깨달아 더 닦아 증득해야 할 여지가 없어졌다고 한다. 그리고는 게송을 읊었다.


내가 크게 그르치고 그르쳤더니.

발을 걷어 올리는 데에서 내가 천하를 보았노라.

어떤 사람이 나에게 무슨 종(宗)이냐고 묻는다면

내가 불자(拂子)를 들어 그의 주둥이를 쳐버릴 것이로다.


8) 운문문언(雲門文偃, 당나라)


운문이 목주화상을 처음 참례할 때, 목주화상은 운문을 보자 곧바로 문을 닫아버렸다.

운문이 문을 두드리자, 문을 닫는 채로 ‘너는 누구냐’고 물었다. 이름을 말하자,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다.

운문은 ‘자신은 참다운 자신을 찾고자 한다’고 대답하였다.

목주는 문을 열고 운문을 한 번 보고는 다시 문을 닫아버렸다.


이후 계속해서 문을 두드렸지만 거절을 당하였다. 이렇게 이틀을 두드렸다.

3일째 되는 날, 목주가 다시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자, 운문은 이때다 싶어서 힘껏 문을 밀고 들어갔다,

그러자 목주는 운문을 붙잡고, 큰소리로 ‘말해봐!’, ‘말해봐!’ 외쳤다.

운문이 아무런 말도 못하자, 목주는 문밖으로 내밀치면서 문을 닫아 버렸다. 이때 문에 끼인 운문의 한쪽 다리가 크게 다치게 되었다. 하지만, 이 순간에 운문은 선의 이치를 깨닫게 되었다.


9) 경허선사(조선말기) 오도송(悟道頌)


하루는 경허선사의 시자승의 은사인 학명 도일이 아랫마을에 내려갔다가 이 처사를 만나 잠시 다담(茶談)을 나누었는데 이 처사의 말씀이 “중이 중노릇 잘못하면 중이 마침내 소가 됩니다”고 하였다.


학명 도일이 이 말을 듣고 “중이 되어 마음을 밝게 하지 못하고 다만 신도의 시주만 받으면, 소가 되어서 그 시주의 은혜를 갚게 됩니다”고 대답하자, 이 처사가 꾸짖으며 말했다. “어찌 사문의 대답이 이렇게 꽉 막혀 도리에 맞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학명 도일이 물었다. “나는 선지(禪旨)를 잘 알지 못하여서 그러하오니 어떻게 대답하여야 옳습니까.”

이 처사가 대답했다. “어찌 소가 되어도 콧구멍 뚫을 곳이 없다고 이르지 않습니까?”

이에 학명 도일은 더 이상 대답을 못하고 동학사로 돌아왔다.


학명 도일이 선사를 찾아가 예를 갖추고 앉아서 이 처사의 말을 전하였다. 이때 ‘소가 콧구멍이 없다’는 말에 선사는 활연대오(豁然大悟)하였다. 때는 고종 16년(1879) 겨울 11월 15일 선사의 나이 31세였다.


문득 콧구멍이 없다고 하는 말을 듣고      忽聞人語無鼻孔

삼천대천세계가 내 집임을 몰록 깨달았네 頓覺三千是我家

유월의 연암산 아랫길에서                     六月燕巖山下路

시골 촌놈이 일 없이 태평가를 부르네      野人無事太平歌


10) 고봉원묘(高峯原妙, 남송말-원)의 깨달음


22세(1259)에 3년 기한을 정하고 단교화상으로부터‘태어날 때에는 어디에서 오고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 (生從何來 死從何去)’라는 화두를 받아 정진하였으나 생각이 두 갈래로 나뉘어져서 마음이 하나로 모아지지 않았다.


고봉은 3년의 기한이 임박해지자 초조해졌고 마침내 23세(1260)에 북간탑에 주석하고 있는 설암화상을 찾아갔다. 조주의 ‘無字話頭’를 받아 다시 공부를 시작하였지만 무자화두에서도 큰 의심을 일으키지 못하였던 것 같다.설암은 매일 공부의 점검을 받으러 오는 고봉을 향하여

“누가 네 시체를 끌고 왔느냐?「阿誰拖?死屍來」”라고 소리치며 곧 ?아버렸다.


28세(1265)에는 또 설암을 찾아가 시봉하면서 정진을 계속하였다. 하루는 설암이 “잠이 들어 꿈도 없고 생각도 없고 보지도 않고 듣지도 않을 때 주인공은 어디에 있는가?”라고 물었고, 끝내 대답을 하지 못한 고봉은 큰 의문 덩어리를 품고 확철대오를 맹세하며 29세(1266)에 임한의 용수사(龍鬚寺)로 떠난다.

그 곳에서 5년간 각고수행하던 어느 날 함께 잠자던 도반의 베개가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 순간 의단을 타파하고 확철대오를 하였다.


如泗州見大聖   온 세상의 대성인을 친견한 듯하고

遠客還故鄕      멀리 떠난 객 고향에 돌아온 것 같네

元來只是舊時人 원래 다만 옛날 그 사람일 뿐

不改舊時行履處 예전부터 해 오던 일 그대로라네.



3. 순간의 의미


1) 천태학: 한 생각 속에 온 우주가 들어 있다 (一念三千)


2) 화엄일승법계도(의상) : 영원함이 곧 한 생각이요, 한 생각이 곧 영원함이다.

(無量遠劫卽一念 一念卽是無量劫)

~ 순간 속에 영원이 있다.

   순간에서 영원으로 (직통)


3) 시간은 지속적인가/순간순간을 파편화되어 있는가?

선형적 시간(수평적 시간)

수직적 시간 (선형에서 수시로 이탈한다)

순간은 선형 상의 한 점이 아니라, 그 자체로 공간을 가지고 있는 것같다.

선형적 시간으로부터 이탈할 때 과거와 미래를 포괄하는 영원의 시간으로 승화한다.


4) 바슐라르 : ?시적 순간과 형이상학적 순간? (?순간의 미학?, 영언, 2002)


“포에지는 순간화된 형이상학이다. 그것은 한 편의 짧은 시 속에서 전 우주의 비전과 , 하나의 혼의 비밀, 존재의 비밀, 그리고 여러 대상의 비밀을 동시에 드러낸다. 만약 포에지가 단순하게 삶의 시간만을 따르는 것이라면, 그것은 삶 이하의 것이 될 것이다.....


모든 참다운 시 속에서, 우리는 정지된 시간, 척도에 따르지 않는 시간, 즉, 강물이나 바람처럼 수평적으로 사라져버리는 보통 일반적인 시간과 구별이 가능한, 특히, ‘수직적’이라 부르고 싶은 시간의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시적 순간이란 두 개의 상반되는 조화로운 관계이다. 시인의 정열적 순간 속에서도 다소의 이성은 항상 존재하고, 이성에 의한 거부 속에도 다소의 정열은 항상 남아 있기 마련이다. 계속적인 반대명제들은 이미 시인의 마음에 드는 것이다. 그러나, 열중하기 위해, 황홀에 빠지기 위해, 반대명제들이 서로 ‘양면감정병존’을 지니면서 결합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때 시적 순간이 출현하는 것이다.“


- 시간의 수직성

- 순간의 양면감정병존 ⇒ ‘양가동시성(兩價同時性)’

~ 두 가지 상반되는 값이 동시에 성립하는 차원은 순간의 이탈을 통해 가능!


5) 다시 장경혜릉(長慶慧稜, 당나라) 선사의 시를 한번 보자.


만 가지 형상 가운데 홀로 들어난 몸을             萬像之中獨露身

사람이 스스로 알아채야만 가까이 할 수 있나니 惟人自肯乃方親

지난날 엉뚱한 길에서 찾아 헤매던 것을           昔年謬向途中覓

오늘 보니 불속의 얼음이로구나.                     今日看來火裏氷


⇒ 오늘 한 순간 선형적 시간으로부터 이탈

→ 평범함과 비범함의 양면감정병존

→ 불과 얼음의 양면감정병존



4. 마무리하면서

- 화로 속의 눈 한 송이


서산대사 임종게(臨終偈)


천 가지 만 가지 생각들이란 千思萬思量

불타는 화로에 눈 한 송이.   紅爐一點雪

진흙소가 물 위로 걸어다니고 泥牛水上行

대지와 허공이 찢어져 흩어지네. 大地虛空裂


- 한 개인의 인생도, 인류의 역사란 것도 불타는 화로 속의 눈 한 송이에 불과한 것이 아니던가!

하지만, 화로에 녹기 직전까지는 분명 눈은 눈이었다.

한 점 눈이 불기운을 만나 녹는 바로 그 순간, 선형의 시간을 이탈하여 알지 못할 그 어느 곳으로 접속하리라! 황홀경(?惚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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