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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 이야기 ① 대동강맥주 서울 실종 사건…주역은 MB? ② 맥주가 없었으면 피라미드도 없었다? ③ 오비·하이트에 지친 당신, '순창 맥주' 한잔? |
일본크래프트맥주협회(JCBA, Japan Craft Beer Association)에 따르면 일본에는 2010년 10월 현재 238개의 맥주 양조장이 있다. 각각의 양조장에서 이른바 로컬 맥주, 지비루(地ビール)가 만들어져 유통된다. 이미 '일본 10대 지방 맥주' 같은 말이 만들어질 정도로 맛 좋기로 유명하다. 지역 양조장끼리 '맛있는 맥주'를 향한 경쟁도 치열하게 벌이고 있다. 지비루의 종류는 실로 다양하며 만들어지는 맥주가 1000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지비루가 생긴 것은 20년이 채 되지 않았다. 1994년 일본의 주세법이 바뀌면서 소형 양조장 설립과 크래프트 맥주 유통이 가능해지면서다.
한국은 어떨까. 일본보다 8년 늦은 2002년 주세법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이른바 하우스 맥주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기존 주세법 체제에서는 연간 생산량 6000킬로리터 이상의 생산량을 갖춰야 제조 맥주 면허가 발급됐다. 사실상 대기업만 맥주 사업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것을 2002년에 연간 60~300킬로리터 생산 규모만 갖춰도 맥주를 생산할 수 있도록 기준을 완화한 것이다. 마이크로브루어리가 탄생할 조건을 갖춘 것이긴 하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정철 서울벤처정보대학원대학교 교수는 2002년의 입법 배경과 관련해 "기업 활동 촉진과 내수 증진을 위한 것이었지만 2002년 월드컵과 부산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정부는 EU의 통상 압력을 더 이상 방치하고 있을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정 교수는 "그러나 취지와 달리 한정된 공간 내에서 판매해야 하는 소비자 유통 제약 등으로 소규모 맥주 제조 업체의 수익성 및 사업성은 본래 취지와 다르게 악화일로에 서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이는 허가 초기부터 우려되던 문제였으며 대부분의 업체들이 도산 위기에 몰려 있는 현시점에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문제"라고 설명했다.
일본이 맥주 제조 기준을 완화함과 동시에 유통 규제를 푼 것과 달리 한국에서는 '반쪽 법안'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2002년 주세법에 따르면, 마이크로브루어리에서 만든 맥주는 사실상 유통 자체가 불가능했다. 하우스 맥주는 매장 안에서만 팔도록 엄격하게 제한했다. 예를 들어 60킬로리터짜리 맥주 제조 장비를 마련했는데 매장 내 테이블이 채 스무 개도 되지 않는다면, 적자만 보다 문을 닫을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는 말이다.
설비 관련 규제는 계속 풀렸다. 정부는 2010년 12월 맥주 제조 시설과 관련된 규제를 추가로 완화했다. 전발효조(발효 탱크) 기준은 92만5000리터에서 5만 리터로 낮췄고, 후발효조(저장 탱크) 기준은 185만 리터에서 10만 리터로 낮췄다. 이를 계기로 2011년 11월 한국 최초의 중소형 맥주 회사로 맥주 제조 일반 면허 1호를 획득한 세븐브로이가 탄생한다. 세븐브로이는 이듬해인 2012년 1월부터 본격적인 시장 진출에 나섰다.
그러나 어려움은 여전하다. 세븐브로이 김강삼 대표이사는 "유통 때문에 별짓을 다 해봤다. 준비를 착실히 했는데 장벽이 너무 높다. 군납도 알아봤지만 벽에 부딛히기도 했다"고 말했다. 지난 수십년간 대기업의 유통 독과점 구조가 형성돼 신규 업체의 진입은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을 그대로 두고 설립 관련 규제만 풀어서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나마 세븐브로이처럼 캔맥주나 병맥주를 생산하는 시설을 갖추면 유통 자체는 가능하다. 그런 설비조차 갖추지 못한 하우스 맥주는 여전히 매장 바깥에서는 판매할 수 없게 돼 있다. 일례로 품질 좋은 맥주를 생산하기로 유명한 서울의 한 마이크로브루어리는 수천만 원을 들여 케그(생맥주통) 주입 기구를 들여놓았지만, 생맥주의 외부 유통이 되지 않는 탓에 사실상 무용지물로 전락한 설비를 방치하고 있다. '매장 외부 반출 금지' 규정은 맥주 축제도 열기 어렵게 만들었다. 마이크로 브루어리들이 자신들이 만든 맥주를 대중에게 소개할 수 있는 기회 자체가 사실상 막힌 것은 물론, 업체들끼리 맛을 비교하는 것 조차 허용되지 않는 상황이다.
다음은 차보윤 한국마이크로브루어리협회 회장의 설명이다.
"과거 150개 업체의 하우스 맥주가 성황이었는데 2013년 현재 전국에서 35개 업체만 영업 중이다. 몇몇 업체를 제외하면 대부분 설비 가동률이 30% 정도로 극히 저조하고 매년 적자에 시달리고 있다. 최소 5억~10억 원을 투자했지만 대부분 높은 세금으로 매년 문을 닫는 업체가 속출하고 있다."
어설프게 규제를 풀어놓으니, 시장에 진입한 소규모 업체들은 아사하고 있다. 현재 민주통합당 홍종학 의원은 이 같은 '소규모 맥주 장벽'을 풀기 위해 주세법 개정안 등을 준비하고 있다. 가까운 이웃 일본의 사례는 참고할 만하다. 일본은 제조와 유통 규제를 완화한 데 이어 130만 리터 이하 맥주 제조 업체에는 세제 지원까지 하고 있다.
일본 맥주의 힘, 지비루
일본에서 맥주는 1850년 무렵 처음 등장했다. 맥주를 일본에 들여온 것도 유럽인이었고 소비한 것도 주로 유럽 상인이나 선원들이었다. 일본 최초의 맥주 양조장은 1869년 요코하마에 설립된 스프링밸리였다. 이 양조장은 1884년 일본맥주주식회사(Japan Brewery Company)에 인수된다. 4년 후 일본맥주주식회사는 기린맥주를 만들어 시장에 내놓는다.
일본에서 맥주는 제2차 세계대전 후 큰 인기를 얻게 되는데, 1960년대에는 사케를 제치고 일본에서 가장 사랑받는 술이 됐다고 한다. 오늘날에도 일본에서는 '빅4'(기린, 아사히, 삿포로, 산토리)가 맥주 시장을 좌지우지하고 있다(빅4가 맥주 시장의 96% 점유). 술은 여전히 국가가 통제하는 산업이었고 일본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런 일본에서 다양한 맥주가 나오게 된 계기는 1994년 연간 6만 리터 이상의 양조장 설립이 허용된 것이다. 그 이전에는 200만 리터 생산량을 담보해야만 맥주 양조장 설립이 허용됐었다. 1994년의 '충격'은 대단했다. 일본 전역에서 마이크로브루어리 붐이 일었다. 그 결과 2010년 10월 현재 오키나와부터 홋카이도까지 일본 전역에 있는 238개의 양조장에서 독특한 맥주들을 생산하고 있다. 규제가 풀리면서 다양한 양질의 맥주가 시장의 평가를 받을 수 있게 된 셈이다.
한국, 미국과 마찬가지로 일본에도 크게 세 부류의 맥주 시장이 존재한다. 국내 브랜드 맥주, 마이크로브루어리에서 생산되는 크래프트 맥주, 그리고 수입 맥주 시장이다.
JCBA에 따르면 일본에서는 눈부신 경제성장에 따라 1960년대 이후 맥주 소비량이 꾸준히 증가했지만, 2000년을 전후로 침체 국면에 들어섰다고 한다. 장기 불황과 함께 '건강 중시' 경향이 부상하면서 소비량이 점차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값싼 '하포수'(맥아 비율 25% 이하의 맥주)나 '제3의 맥주'(맥주처럼 도수가 5~6도인 비맥아 탄산음료) 등의 소비가 늘어나면서 '빅4'로 불리는 맥주 회사들은 맥주 대신 다른 음료들을 만들어 팔았다. '빅4' 회사의 '진짜 맥주' 생산 비율은 2009년 약 356만 킬로리터를 기록했는데, 이는 1994년(713만 킬로리터)의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
이런 현실 속에서 일본 '맥주 애호가'들의 구세주 역할을 한 것이 크래프트 맥주다. 일본 국내 브랜드 맥주 회사들이 대부분 가벼운 라거 스타일의 맥주를 생산한 반면 1994년 이후 붐을 타고 전국에 생긴 양조장들에서는 페일 에일, 브라운 에일, 스타우트, 포터, 올드 에일을 비롯해 유럽 스타일의 다양한 맥주를 생산했다. 각종 과일이나 향신료를 넣은 맥주 등 실험적인 맥주도 시장에 등장했다. 매운 맥주, 쓰고 달콤한 맥주, 낮은 알코올 도수 혹은 높은 알코올 도수의 맥주 등, '맥주 순수령'을 만든 독일의 빌헬름 4세가 맛을 보면 깜짝 놀랄 만한 맥주들이다.
현재 일본 크래프트 맥주는 2009년 기준으로 연간 3만4000킬로리터가 생산된다. 1994년에는 거의 제로에 가까운 상황이었는데 2003년 기준으로 연간 1만4700킬로리터까지 성장한 후, 6년 만에 2.3배로 성장한 것이다. 기네스와 하이네켄이 전체 소비량의 6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일본의 수입 맥주 소비량은 2005년 기준으로 연간 3만3400킬로리터로 추정된다. 단순 비교는 어렵지만, 크래프트 맥주 시장이 수입 맥주 시장을 위협할 수준까지 와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 2012년 세계맥주대회에서 우승한 크래프트 맥주 회사 '파이브스톤 워커 브루잉'이 선보인 '시즌 맥주' 솔라스. ⓒ파이어스톤 워커 브루잉 홈페이지 |
일본 크래프트 맥주 성장세의 비결은 또 있다. 인터넷으로 맥주를 판매하는 시스템이다. 일본 크래프트 맥주의 41%는 인터넷에서 판매된다. 펍이나 바에서 판매되는 비율이 약 27%, 양조장이 직접 운영하는 식당 등에서 판매되는 비율이 18% 정도인데, 이 둘을 합한 정도의 양이 온라인으로 판매되는 것이다. 일본에서 크래프트 맥주에 대한 관심도를 알 수 있는 지표는 또 있다. JCBA가 주관하는 일본 맥주 축제에 2005년에는 5500명이 방문했지만, 2010년 축제에는 2만 명 이상이 방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