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있는 조용한 집이 어쩐지 낮설기조차 합니다. 6월, 아직 날씨는 풀리지 않아 밤부터 새벽까지는 조금 춥게까지도 느껴지지만, 그래도 조금조금씩 계절은 자기의 색깔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앞마당의 라벤더들도 보랏빛 꽃망울들이 맺히기 시작했고, 뒷마당의 노란 장미도 활짝 피어났습니다. 포도알이 애기처럼 송글송글 조금씩 맺혀가는 시간, 아침에는 햇볕이 쫙 들어서 정말 예뻤습니다.
요즘 계속 느끼는 손과 다리의 통증 때문에 지압받고 침 맞고서 집에 오는 길에 와인 몇 병과 샐러드, 치킨 베이크를 사서 점심을 먹었습니다. 자주 오는 비에 낮에는 날이 더운 까닭에 금방금방 자라 손길을 기다리는 잔디를 깎아야 했고, 삐죽삐죽 솟아나는 나무들도 대략 손을 봐줘야 했습니다. 이마에 송글송글 맺히는 땀을 닦고, 손을 씻고, 뉴질랜드산 소비뇽 블랑 '클라우디 베이'를 뜯었습니다.
초여름-혹은 늦봄- 의 정원일은 정말 땀을 많이 흘리게 하지요. 이럴 때 마시는 소비뇽 블랑- 비록 낮술일지언정 딱 두 잔의 술은 요즘 말로 기분 업 되기에 딱 정량인 듯 합니다. 물론 잔 크기가 얼마만하냐... 뭐 이런 사족 달아주실 분들 있으실 요량인줄도 알지만, 그래도 딱 알맞는 잔으로 알맞게 두 잔. 그러니까 1/3 병 정도를 마셨다고 생각하면 되겠지요. 아, 병은 또 얼마만한 거냐구요? 그냥 보통 750ml 맞습니다. 클라우디 베이 매그넘으로 나오는 건 아직 이동네에선 못 봤어요. 하하.
치킨 베이크와 치킨 시저 샐러드. 늘 소비뇽 블랑 마실 때는 염소치즈 생각이 나는데, 이게 없을 때는 새콤한 크림 허브 드레싱이 들어간 샐러드도 괜찮을 듯 해서 오늘 점심은 이걸 하기로 했습니다. 어제 사온 책 잠깐 펴 들고, 바람이 불어들어오는 뒷마당에 앉아 신선 놀음을 즐깁니다. 땀이 천천히 식는 것을 느낍니다. 그것이 잔디 깎는 일이든, 가지를 치는 일이든, 정원일은 사람의 마음을 밝게 해 주는 마력 같은 것이 있습니다. 운동하는 것도 마찬가지지요. 처음에 할 때는 할까 말까 귀찮아하기도 하고, 그러다가 일단 시작해서 몸이 더워지고 땀이 송글송글 맺히다 못해 줄줄 흘러내리고, 다 끝나고 나서의 변화는 사람을 상쾌하게 만들지요. 여기에 더해진 소비뇽 블랑과 신선한 점심입니다. 사람이 꽤 행복해지는군요.
클라우디 베이. 사실 이 이름만으로도 뉴질랜드 소비뇽 블랑을 그대로 이야기해주는 와인이죠. 여기보다는 우리나라에서 더 많이 알려졌을 것 같기도 합니다. 뉴질랜드 소비뇽 블랑은 본고장 프랑스의 르와르 와인과 비견되지요. 심지어는 프랑스산보다 더 낫다는 말도 많이 듣는 듯 합니다. 마치 피노 느와의 본고장 부르고뉴보다도 어떤 때는 오리건 윌라멧 밸리의 와인이 더 높이 평가받는 경우가 있듯이. 레몬, 그리고 살구의 향. 아, 갑자기 굴 생각이 납니다. 염소치즈와도 잘 어울리지만 어쩐지 생굴 석화를 먹으면서 함께 해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듭니다. 지금 불어오는 이 산뜻한 바람만큼이나 산뜻합니다. 입안에 남는 산도 어린 피니시의 여운 때문에도, 얼른 씻고 음악 들으며 긴의자에 몸을 기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와인입니다.
분명한 건 이게 클라우디 베이가 아니라 어떤 소비뇽 블랑이라도, 땀흘리며 정원일을 마치고 나서 식사와 함께 하는 소비뇽 블랑은 분명히 최상의 휴식이며 내 몸에 줄 수 있는 최고의 상이라는 겁니다. 지금 이 와인 마시고 이렇게 시음기 쓰면서 중국 차 한잔 마시며 레코드 판 올려놓고 듣는 비발디의 음악이 지금 내게 최상의 휴식이듯이. 그렇습니다. 와인은 휴식이기에 좋은 술입니다. 잔을 기울이는 그 여유로움이 더욱 의미있으려면 땀 흘리고 노동하는 시간도 분명히 필요하다는 생각을 문득 해 봅니다.
시애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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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Seattle Story 원문보기 글쓴이: 권종상
첫댓글 외싱턴주 와인 홍보대사 같습니다..ㅎㅎㅎ
하하하... 원래는 워싱턴주 와인만 마셨는데, 요즘은 지평을 좀 넓혔죠.
와인은 다 맛있더만...

적당한 노동 후 즐기는 휴식은 꿀맛같겠지요. ^^
전 세계의 포도주 맛은 거의 다 본 편이라고 해도 그리 틀리는 말은 아닌데..물을 안데스 산맥에서 지하로 끌고 와서 재배하는 칠레산 포도주 만치 mellow 한 놈을 못 만 났습니다만..와싱턴주도 물은 좋을거니까 언제 한번 와인 맛을 봐야 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