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수(朴文秀, 1691∼1756)는 본관이 고령(高靈)이고, 자(字)는 성보(成甫), 호는 기은(耆隱)이다. 33세에 증광시 병과(丙科)에 급제한 후 예문관 검열(檢閱)에 기용되었고, 이듬해에는 훗날 영조가 된 세제를 가르치는 시강원의 설서(說書)가 되었다. 이런 인연으로 병조 정랑 재직시엔 세제인 영조를 보호하는 일은 물론 온갖 우서운 이야기로 불안한 영조의 마음을 달랬다.
당시 조정의 정세를 보면 숙종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영조는 어머니가 미천한 천민 출신이어서 왕으로 등극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그러나 숙종의 뒤를 이어 등극한 경종(景宗)이 몸이 허약하여 국정을 보기 어렵게 되자 그는 경종을 대신하여 대리로 국정을 보게 되었다(代理聽政). 이 때 강경파 소론이 신임사화를 이르켜 많은 선비를 죽이고, 나아가 세제인 영조까지 해치려 하였다. 박어사는 명석하고 민첩한 처신으로 세제의 보호와 등극에 힘써 마침내 왕위에 오르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1723년 영조가 즉위하자 그를 모셨던 노론이 조정에 들어섰고, 온건파 소론에 속했던 박어사는 오히려 벼슬이 삭직되었다.
이에 박어사는 벼슬에서 물러나 학문에만 열중하였다. 마침내 영조는 사사건건 임금의 비위를 거스리며 정권을 종횡하는 노론을 몰아내고, 1724년 소론인 이광좌(李光佐)를 영의정으로 기용하였다. 온건파 소론이 집권하자 이광좌는 곧 박어사를 불러 사서(司書)에 등용되었다. 이를 정미환국(丁未換局)이라 한다.
영조는 왕세제(王世弟) 당시 가까이 지냈던 일로 박어사를 극진히 신임하였고, 이어 영남 지방 암행어사로 파견하였다. 청렴하고 강직한 박어사의 성품은 나라의 정책을 거역하고, 혼란기를 이용하여 백성을 괴롭히는 부정한 관리들을 빠짐 없이 적발하고 응징하였다. 약 1년간의 암행 직무를 마친 박어사는 그 이듬해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있자, 오명항(吳命恒)의 종사관이 되어 전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분무공신(奮武功臣) 2등에 책록됨은 물론 영성군(靈城君)에 봉해졌다.
1730년에 도승지를 역임하면서 충청도 지방에 암행어사로 나아가 굶주림에 허덕이는 백성을 구제하였고, 1734년에는 예조 참판으로 진주사(陣奏使)의 부사(副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 오기도 하였다. 병조 판서에 기용된 박어사는 병조 내 자체 인신(印信)을 만들어 중간에서 군인들이 농간 부리는 것을 방지하여 군무를 신속하게 처리하였다. 1745년는 어영대장에 기용되고, 이어 호조 판서를 거쳐 한 차례의 제주도에 귀양을 갔다가 풀려나 우참판에 올랐다. 사 후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시호는 충헌(忠憲)이 내려졌다.
조선의 암행어사 암행어사란 임금의 명에 의하여 지방을 돌며 수령의 치적과 뭇 백성의 질병과 고통을 살펴 임금께 보고하는 비밀 특사이다. 먼저 암행어사의 임명을 보면, 임금이 당하관 중에서 평소 청렴하고 정직하여 특명을 충실히 받들 수 있는 사람을 추천하도록 명하면, 3정승은 각자 여러 사람을 추천하여 왕의 승인을 받는다. 사람이 선정되면 왕은 전국 360군과 현의 이름이 기입된 참댓가지를 죽통(竹筒)에서 뽑아 암행시찰할 군과 현을 정한다. 이를 추생(抽 )이라 하는데, 암행어사를 일명 '추생어사'라고 하는 말은 이에서 비롯되었다.
왕명으로 소환된 관원은 왕으로부터 군과 현의 이름이 기입된 봉서(封書)를 지급 받는다. 이 봉서는 암행어사의 임명장과 다름 없는데, 겉에 '到南(東)大門外開坼(남(동)대문 밖에 이르면 뜯어보라)'라는 글이 써 있다. 봉서를 받은 어사는 곧 승정원으로 가 승지로부터 팔도어사재거사목(八道御史재去事目) 한 권, 역말을 이용할 수 있는 마패(馬牌) 한 개, 죄인을 벌주는 형구(刑具)를 수령이 멋대로 만들었는지를 검사하거나 검시(檢屍)를 할 때 쓰는 유척(鍮尺) 두 개를 지급 받고 퇴궐한다.
마패는 둥근 형태로 초승달 모양의 귀가 달렸고, 그 귀에는 끈을 묶을 수 있는 구멍이 뚫어져 있다. 안에는 말 형상을 새기었는데, 그 말의 숫효는 한 마리에서 다섯 마리까지 5종이 있었다. 암행어사에게는 주로 2마패가 지급되었는데, 마패는 그 소지자가 왕명을 받들어 업무 수행중임을 입증하는 신분 확인용으로 쓰였을 뿐만 아니라, 출도 후 관청 창고나 서류에 찍는 직인의 역할까지 하여 한 번 이 패를 날인하면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였다.
명을 받은 어사는 그 날로 출발하는 것이 원칙으로, 남(동)대문 밖으로 나와 봉서를 뜯어 암행 감찰할 임지를 안 뒤 바로 한 두 명의 대리(帶吏)를 데리고 목적지로 향한다. 어사는 신분을 감추기 위해 헤어진 옷과 찢어진 갓을 쓰고, 밥은 빌어먹고, 잠은 허름한 주막이나 길가에서 잤다. 목적지에 이르면 고을 수령의 치정(治政)과 백성의 억울함이나 고통을 몰래 탐문하여 '어사 출도'를 명하게 된다. 어사출도는 먼저 역졸과 대리가 관가의 3문을 두드리며 '출도'를 외치고, 암행어사는 아무도 모르는 장소에서 유유히 관가로 행차하여 고을 수령과 관리의 영접을 받는다. 동헌 대청안방에 앉은 어사는 공문서와 관가 창고를 검사하여 장부와 현물이 맞는지 조사하고, 불법 문서가 밝혀지면 수령의 관인과 병부(兵符)을 몰수함은 물론 창고를 봉한다는 '봉고(封庫)'라는 글자를 쓴 종이에 마패를 날인하여 창고에 붙인다. 또한 옥에 갇힌 사람 중 억울한 사람이 있으면 재심하여 풀어주고, 백성을 괴롭힌 관리는 영장을 발급하여 직위를 해제하고 감금하였으며, 억울한 고소장은 면밀히 재검토하여 원한을 풀어주기도 하였다.
소임을 마친 어사는 귀환과 동시에 복명서를 제출하였는데, 이는 임무 수행에 대한 특별 지시 사항을 서한 형식으로 조목조목 기술한 서계(書啓)와 서계에서 빠진 미진한 사항과 시찰 내용, 폐정 사항에 대한 개선책 등을 적은 별단(別單)이 있었다. 복명서는 어사의 교양과 정치적 식견을 개진한 것으로 간주되어 인물 평가에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었으며 서계를 제출치 않거나 다른 사람에게 대필(代筆)한 것이 적발되면 처벌을 받았다. 암행어사의 덕목으로는 첫째, 마을을 돌며 백성의 억울함을 들을 것. 둘째, 각 고을 수령의 대접을 거절하고 말린 밥을 휴대하고 다니며 먹을 것. 셋째, 힘써 번거로움과 폐를 끼치는 일은 삼가할 것 등이 요구되어 임금의 명령을 행하는 일이면서도 고충은 대단하였다.
귀신이 가르쳐 준 급제 시(詩) 전하는 일화로 박어사가 한양에 과거를 보러 갈 때 어느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그런데 밤이 되자 갑자기 집 주인이 죽었다며 곡소리가 났는데, 아무래도 곡소리가 이상하였다. 곧 잠이 든 박어사의 꿈에 한 젊은이가 풀로 만든 초립(草笠)을 쓰고 나타나 말하기를 자기는 억울하게 죽었으니 훗날 높은 사람이 되면 자기의 원수를 갚아 달라고 하면서, 만약 자기 소원을 들어 준다면 이번 과거에 합격하도록 도와주겠다고 하였다.
이어 귀신은 이번 과거의 시제(詩題)는 '낙조(落照)'가 날 것이며, 자기가 이르는대로 써내면 틀림 없이 급제할 것이라 하였다. 귀신이 읊어 준 시(詩)는 다음과 같다.
낙조는 붉게 푸른 산을 물드리고 (落照吐紅掛碧山) 해(금오)는 흰구름 사이를 자로 재듯 (金烏尺盡白雲間) 넘어가는구나 소치는 동산엔 소의 긴 그림자 (放牧園裏牛帶影) 띠를 둘렀고(소그림) 망부산 꼭대기엔 아낙네의 머리쪽이 (望夫山頭妾低 ) 낮아졌구나(고개 숙임) 강 건너는 나그네는 말채찍이 급해지고 (渡津去客鞭馬急) 절로 돌아가는 중의 지팡이는 (尋寺歸僧杖不閒) 바쁘기만 하다
그러나 귀신이 여기까지 시를 읊자 갑자기 닭 우는 소리가 들렸다. 귀신은 더 이상 일러주지 못하고 다시 한번 간곡하게 부탁만 하고 급히 사라졌다. 과거에 응시한 박어사가 과시(科詩)를 보니 귀신이 말하여 준대로 '낙조(落照)'였다. 이에 그는 일필휘지로 6구(句)까지 써 내려 갔다. 그러나 귀신이 알려 주지 않은 7, 8구(句)는 직접 지어야만 하는데 좋은 시상이 떠오르지 않았다. 몇 번이고 앞 뒤를 살핀 그는 이내 7, 8구를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깊은 마을 늙은 나뭇가지엔 석양이 비꼈는데 (深村枯木斜陽裡) 더먹머리 초동은 피리를 불며 돌아오는구나 (短髮樵童弄笛還)
첫번째로 답안을 제출한 박어사의 시를 보고 시험관(上試官)은 눈이 휘둥그래져 글자마다 비점(批點:글에서 가장 잘 된 글자위에 찍는 점)과 구구(句句)마다 관주(貫珠:잘 된 글이나 시문위에 그리는 고리점)를 찍으며 여러 시관(試官)에게 장원급제를 주도록 하였다. 그러나 한 시관이 제지하며 말하기를, "아무래도 사람이 지은 것이 아닌 귀신이 지은 시 같읍니다" 라며 불합격시키자고 하였다. 그러자 시관이 다시 면밀히 살피며 말하기를, "1구에서 6구(句)까지는 귀신의 냄새가 나지만, 7구와 8구(句)는 사람 냄새가 나니 장원(壯元)으로는 안되더라도 병과(丙科)로는 합격시킵시다." 라고 추천하여 박어사는 3등에 급제하였다.
경상도와 충청도에는 박어사가 암행어사가 되어 관리의 부정과 백성의 고민을 공정하게 해결한 재미있는 일화가 많이 전해져 온다. 암행어사는 꼭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신분을 숨기며 활약하기 때문에 실제로 박어사와 관련 없는 일들도 기이한 사건이 해결되면 모두 박어사의 행적이라고 생각하여 그를 칭송하니, 세상 사람들은 암행어사하면 '박문수'만을 떠올리게 되었다.
떠돌아 다니는 풍문이 아니라 실제 박어사의 치적으로 전해져 오는 실화가 있는데, 그가 호조 판서로 재직할 때의 일이다. 그의 직책 중에는 5년에 한 번씩 궁궐을 수리하고 3년마다 봄·가을에는 부분적인 보수를 하는 업무가 있었다. 그는 담장을 쌓을 때에는 언제나 벽을 쌓는 일을 맡은 관리의 이름을 벽에 새겨 넣었다. 이렇게 되자 관리 책임자는 그 담장이 허물어지면 책임을 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만대에 그 이름이 전해지게 되므로 앞다투어 튼튼하고 보기 좋게 공사를 하게 되었다. 이를 보고 임금은 박어사의 지혜에 감탄하였다.
그가 경상도 어영대장으로 있을 때 하루는 바닷가를 돌아 보러 나갔다. 그런데 바다에 부서진 집과 가재 도구가 어지럽게 물에 떠 다니고 있었다. 직감적으로 함경도 지방에 큰 홍수가 났음을 안 박어사는 수령에게 곧 제민창(濟民倉)을 열어 곡식 300석을 싣고 함경도로 가자고 권하였다. 그러나 그 곳의 수령은 조정의 허락도 없이 곡식을 다른 도(道)로 옮기는 것은 훗날 큰 책임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반대하였으나, 박어사는 모든 책임은 자신이 지겠다고 하며 식량을 날랐다. 한편 홍수가 난 함경도는 집과 가재 도구를 모두 잃고 굶어 죽는 자가 속출하여, 민심도 매우 흉흉하였다.
함흥감사는 급히 파발을 보내 조정에 구제를 요청하였으나, 당시의 교통편으로 연락을 보내고 식량을 모아 함경도까지 오려면 2∼3개월은 족히 소요되어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답답한 함흥감사는 매일 바닷가에 나와 소식이 오기를 기다렸는데, 하루는 식량을 가득 실은 배들이 정박하여 있자 그 곡식을 풀어 이재민을 구제하고 민심을 수습하였다. 이 배는 당시의 식량 사정을 감안할 때 함경도에 식량을 보낼 수 있는 지방은 경상도밖에 없음을 미리 간파하고 식량을 실어온 박어사의 배였다. 이 일로 박어사는 문책이 아닌 칭찬을 들었다. 300석의 식량으로 목숨을 건진 함경도 사람들은 박어사의 은덕을 못잊어 함흥 만세교 다리 앞에 박어사 송덕비(頌德碑)를 세워 그 은혜를 기렸다 한다.
은석산의 박어사 묘 경부고속도로 '독립기념관' 인터체인지를 나와 독립기념관 입구에서 21번 국도로 우회전하여 천안군 병천쪽으로 가다보면, 왼쪽에 '어사 박문수 묘'라는 입간판이 보인다. 1km 정도 좁은 시멘트 길을 따라가면 마을이 있고, 그 앞에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서 있다. 느티나무 밑을 지나 마을 어귀를 돌면 마을 끝에 고택(古宅)이 보이는데, 이 집은 박어사의 후손이 사는 종갓댁이다. 박어사의 묘는 마을에서 계곡을 건너 산을 끼고 오른다. 길 가로는 맑은 계곡물이 흘러 운치를 더하는데, 이 나지막한 산에 박어사 묘가 있게 된 이야기가 '독립기념관'과 연관되어 전한다.
박어사의 묘자리는 본래 '독립기념관'이 있는 천안군 목천면 흑성산(黑성山, 519m)이었다. 그런데 한 지관이 그 묘자리를 보고 말하기를, 7nbsp;"흑성산의 풍수를 보면 그 맥과 혈이 금계포란형(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에 해당되는 길지(吉地)입니다. 한양의 외청룡에 해당되고, 본명이 검은성(儉隱城)으로 '좌우동천승적지(左右洞天勝敵地)'입니다. '좌우동천승적지'란 석천리의 승적골〔勝敵谷〕과 지산리의 승적골을 말하는데, 석천리 승적골은 5목(덜목·재목·칙목·사리목·돌목) 사이로 사람 살기가 좋은 땅이며, 지산리 승적골은 매우 아늑하여 예부터 피난처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니 흑성산에 묘를 쓰면 반드시 2∼3백 년 뒤에 나라에서 이 산을 요긴하게 쓸 일이 생겨 이장할 처지가 되니 미리 이 자리 보다는 10리 남쪽 모처에 묘를 쓰시오." 라고 말하니 후손들이 이 곳 은석산에 묘소를 정하였다고 한다.
박어사의 묘는 사당이 있는 종가에서 약 40여 분을 더 올라가야 하는 산 정상 부근에 있어, 한적한 산길을 오르는 동안 답사가 아닌 선계로 드는 착각이 든다. 계곡을 끼고 한참을 오르면 정자 모양을 한 참나무 옆에 요사채 겸 불당으로 쓰는 보광전(普光殿)이 있다. 이 절은 은석사(銀石寺)로 신라 시대에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 하며, 공주 마곡사(麻谷寺)의 말사이다. 한창 번창할 때에는 주변 밭들이 모두 경내였던 큰 절이었다 한다.
절 앞 텃밭에는 당시 당우를 세웠던 주춧돌이 남아 있으나, 지금은 퇴락하여 한적한 절일 뿐이다. 비록 당우는 초라하게 변하였다 하더라도 주위 경관이 뛰어나 박어사의 일화를 주고 받으며 산책하기는 알맞은 곳이다. 이 곳 주지 원해(元海) 스님에게 산사의 생활에 대해 물으니, '중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라고 부처님같은 말씀을 하신다. 거친 숨을 약수로 달래니, 시원한 맛으로 새로운 힘이 솟는다.
박어사 묘는 이 절에서 약 300m쯤 떨어진 아주 가파른 산등성이에 있으며 묘 앞쪽에 1단의 기단을 쌓았다. 묘는 호석도 없이 산 아래를 굽어보는데, 이 곳에서는 병천 시내를 비롯하여 멀리 천안까지 한 눈에 보인다. 문신이었으나 무신석을 세워 의아한 생각이 든다. 이 무신석은 칼을 짚고 투구에 갑옷은 입었지만 커다란 눈망울과 벌린 입으로 위엄스럽다기 보다는 저절로 웃음을 짓게 해학적이다. 화강암 기단에 팔작지붕을 얹은 오석 비신에는 '朝鮮行兵曹判書靈城君領議政忠憲朴公文秀墓'라 쓰여 있고, 화강암 2매를 겹으로 쌓아 만든 상석 앞에 있는 향로석에는 검은 이끼가 끼어 옛스러움을 나타내고 있다. 주변에는 잡목이 뒤덮혀 있으나 뒷쪽과 오른쪽에 겨우 푸른 소나무가 한 그루씩 있어 그나마 어사의 체면을 세워주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