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을 넘은 한국사》에서 저자는 21세기 세계 속에서 대한민국이 주도적으로 역량을 발휘하는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개방화, 포용력, 국제감각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 예로 동아시아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가장 과학기술문화 모든 분야에서 최고였던 시기였던 조선 초 세종대왕 때를 이야기하고 있다. 세종이 찬란한 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은 통일신라와 고려 때 다져졌던 개방화, 포용력, 국제감각의 산물이었다고 한다.
민족 개념이 지금과 달랐던 삼국 시대를 통일한 사람은 김춘추였다. 당시 김춘추는 고위공직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바다 건너 당나라와 일본, 적지와 다를바 없었던 고구려를 직접 찾아가 주변의 정세를 살핀다. 그의 국제감각은 책상에서 길러진 것이 아니라 목숨을 건 외교 행보에서 체득된 것이다. 주변의 정세를 파악한 김춘추는 당시 세계 최대의 강국이었던 당나라와 협상을 이끌어내며 한반도 내의 삼국을 통일하며 민족 개념을 만들어낸다. 일각에서는 우리의 국경을 좁히게 했고 외세에 의존한 통일이라고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역사적 평가가 팽배하다. 당시의 시대적 외교적 상황으로 바라본다면 저자가 주장한 내용이 결코 허황된 논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저자는 국제화 시대를 주도하며 강력한 송나라로부터 대접받았던 고려 시대를 우리 민족 역사상 최고의 시기라고 말하고 있다. 조공품보다 하사품이 많았고, 거란과의 관계에서 주도권을 장악하며 송나라가 고려로부터 지원받기 위해 애썼다는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제시한다. 고려 시대에는 무슬림을 포함하여 많은 외국들이 정착할 정도로 포용력 있는 사회였다. 고려의 재상 최승로가 외국인들이 높은 관직을 받고 고려에 정착하는 모습을 보고 왕에게 비판했던 일화가 전해 내려 오고 있다.
당시 고려가 처했던 국제 상황은 지금 대한민국이 놓여져 있는 상황만큼이나 녹록지 않았다. 거대한 거란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세 차례나 공격을 당한 상태였다. 고려 후기에는 세계 강국이었던 원나라 통치 하에 세계 유일무이하게 국가 다운 형태로 유지할 수 있었으며 원나라 최측근 국가로 군림하며 세계 정세의 중심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조선 초 여진족을 포용하며 지금의 국토 경계를 확정지을 수 있었고 세종 대에 이르러 번성할 수 있었다. 노비였던 장영실을 관리로 포용한 것은 당시의 사회문화가 지금과 달랐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밖으로 문을 활짝 열고 개방화를 향해 나아갔던 시기에는 국제적으로 확실한 위치를 선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쇄국정책으로 일관했던 시기에는 우리보다 열등하다고 여겼던 일본으로부터 지배를 당해야 했다. 중국의 명나라도 동아시아 국제 체계를 자국을 중심으로 한 사대 체계로 바꾸고 무역 체계도 조공 체제로 바꾸자 활발한 물적, 인적 교류가 끊기고 거대한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는 반동이 일어났다. 결국 왕조는 힘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역사는 교훈한다. 세계화가 정답이라고. 활짝 문을 열고 왕성한 교류를 해야 한다고 말이다. 우리가 존경하는 세종대왕이 그렇게 통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