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카르멘과 춤을
1
나는 아내와 이혼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서두르진 않겠다. 원한다고 되는 건 아니니까. 상대가 있는 일은 언제나 그렇다.
댄스학원에 다닌 지 이 개월이 지났다. 오전 11시경에 전철을 타고 한강을 건너간다. 강남에서 강북으로. 다섯 정거장 밖에 오지 않았는데 꽤 낯선 동네에 온 것 같다.
댄스학원은 자동차 공업사의 옆 건물 지하에 있다. 주변이 썰렁하다. 댄스학원은 내가 사는 동네에도 있고 시설도 더 좋다. 하지만 나는 이곳을 택했다. 아내가 알게 되는 걸 원치 않아서다.
아내는 이런 동네엔 오지 않는다. 그녀가 아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강남에 있는 백화점과 골프연습장과 일식당이나 이태리식 카페 같은 델 간다. 골프를 칠 땐 더 남쪽으로 내려가고 일요일엔 강남에서 제일 큰 교회에 나간다. 그들의 동선으로부터 벗어났음으로 내가 눈에 띌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곳의 소문은 한강을 넘어오지 못할 것이다. 한강이 산맥처럼 가로막고 있으니까.
강습료로 나는 월 30만원을 지불한다. 내겐 큰돈도 작은 돈도 아니다. 춤을 배우지 않았다면 의당 했을 다른 일을 안 하니까. 예로 골프다. 나는 요사이 골프 연습장에도 나가지 않는다. 재미있는 일은 한가지면 족하다는 생각이다. 나는 매월 적정액의 지출을 초과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나는 작년에 25년 근무한 직장을 퇴직했다. 이사 승진을 기대했는데 명퇴자 후보에 오른 걸 알았다. 나는 곧바로 명퇴를 신청했다. 아내가 운영하는 음식점이 대박을 쳤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내는 나를 위로했다. 푹 쉬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의기소침해졌다. 나에 대한 평가의 실상을 알고 나자 부끄러워졌다. 오랜 세월 자신을 오해하며 살아 온 셈이다. 능력 보통. 도전의식 부족. 내 인사 서류에 적힌 평가 의견이다.
내가 퇴직한 때는 직원 정년을 이 년 앞둔 시점이었다. 퇴직 후 나는 곧 만 55세가 되었다. 나는 국민연금 조기연금을 신청했다. 월 지급액이 65만 원으로 산정되었다. 조기연금 제도는 얼마 후 폐지되었다. 누구든지 만 60세가 넘어야만 연금을 탈 수 있도록 바뀌었다. 이 점에서 나는 운이 좋다.
회사를 퇴직하면서 내가 따로 챙겨 둔 비자금은 삼천만 원이다. 명퇴자에게 주는 위로금의 일부를 아내 모르게 떼 놓았다. 일천만원은 고스란히 내 치아를 위한 것으로 정했다. 치아가 부실한 나는 인공치아를 몇 개 해박을 돈은 따로 갖고 있어야 한다. 친구가 어드바이스해준 말이다. 이 비상금은 꼭 정해진 용도로만 쓸 생각이다. 다른 일천만원은 축의금이나 부의금을 내기 위한 것이다. 집안과는 무관하게 알고 지내는 사람들의 경조사비에 쓸 돈이다. 퇴직했다고 모른 척 할 순 없다. 나머지 일천만원은 순전히 용돈이다. 남에게 한 턱 쓰거나 여행할 때 조금씩 보태 쓸 계획이다. 나는 삼천만원의 잔고를 유지하기 위해 매월 일정액을 적립한다. 아내는 매월 내게 용돈을 준다. 그동안 가족을 위해 번 돈을 생각하면 많은 편은 아니다. 그러나 그 이상은 요구하지 않는다. 대신 가정 경제는 아내가 전적으로 책임진다. 새 아파트로 옮겨가고 새 차를 사고 딸에게 혼수 감을 마련해 주는 일 등은 전적으로 아내의 몫이다. 나는 아내의 식당 수입에 대해선 간여하지 않는다. 그 대신 자유롭게 지낸다. 아내에게 손을 벌리는 순간 자유를 잃을 수도 있다.
댄스학원에선 춤을 사교댄스와 스포츠댄스로 구분한다. 내가 배우는 지르박과 블루스는 사교댄스로, 라틴아메리카 춤인 자이브나 룸바 그리고 왈츠는 스포츠 댄스로 분류한다. 나는 사교댄스의 초보과정에 등록했다. 다른 수강생들은 주로 자이브나 룸바를 배운다.
스텝을 익히기가 내겐 어렵다. 솔직히 발놀림이 어눌한 건 선천적이다. 게다가 나는 정신적인 장애가 있는 것 같다. 긴장하면 잡념이 생긴다. 젊을 적 군대 가서 제식훈련 받으며 애를 먹었었다. 도무지 구령에 발맞추기가 힘들었다. 틀리면 잡념이 기승을 부렸다. 기합 받는데도 잡념이 떠올랐다. 나는 고문관이란 별명을 듣곤 했다. 춤을 배우면서 비슷한 악몽이 재현되었다. 첫 스텝부터 헤맸다. 창피했다. 그러자 잡념이 떠올랐다. 내가 지금 뭐하는 거지? 여긴 왜 와서 이 고생이람. 마누라가 보면 웃겠는걸. 스텝이 자꾸 틀리는데다 집중 못하는 나를 여선생이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내 얼굴에 무슨 표정이 떠올랐는가 보다. 다른 교습생들이 웃었다.
"걱정 마세요. 처음엔 다 그래요."
한 여자 교습생이 의기소침해진 나를 응원해 주었다. 삼십대 후반의 나이로 보였는데 가정주부인 것 같다. 화장을 짙게 했다. 그래선지 예쁘다. 옷도 특이하게 입었다. 한편으론 좀 푼수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그녀가 마음에 든다. 그녀가 추는 춤은 자이브나 룸바이다. 꽤 잘 춘다.
지르박을 배운지 일 개 월이 넘은 지금 나는 열개의 스텝 정도는 연속해서 이어갈 수 있다. 능숙한 건 아니지만 음악 한곡이 끝날 때까지 춤을 출 수 있다. 원장이 격려하며 말했다. 춤은 누구나 잘 출 수 있다고. 단지 시간이 걸릴 뿐이란다. 언젠간 왈츠도 출 수 있다고 말했다. 중도에 포기하지 말라고 했다. 기본을 아는 데만 일 년 이상 배워야한다면서. 특히 왈츠를 잘 추려면 최소한 3년. 나는 원장의 진정성을 믿는다. 수강료도 중요하겠지만 그는 춤의 전도사이다.
나와 같은 시간대에 나오는 교습생은 남녀 열 명이다. 그들 중 네 명은 여자이다. 모두 사십 세 전 후로 보였다. 소위 화장발 때문인지 모두 예뻐 보인다. 날씬한 몸매들은 아니지만. 이곳에선 여자들에게 이름이나 나이나 사는 동네나 그런 건 묻지 않는 게 불문율 같았다. 친절하게 함께 춤을 쳐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여섯 명의 남자들은 신분이 불분명하다. 젊은이도 있고 나와 같은 중늙은이도 있다. 노인에 가까운 남자도 있다. 칠십이 넘었다고 한다. 그 남자는 나처럼 사교춤 초보과정이다. 한 달 먼저 시작했다는데 진도는 비슷하다. 나이 탓으로 보였다. 시종 거울 앞에서 혼자 열심히 연습한다. 파트너의 회전을 유도하는 '오른 손 들기'를 할 때면 웃음이 저절로 나온다. 허공에서 부드럽게 오므린 손가락을 보면 그 늙은 남자가 귀엽다는 생각이 든다.
"돈은 있는 영감인가 본데."
소파에서 쉬고 있던 한 남자 교습생이 말했다. 행색을 보고 한 말이었다.
"동네에서 춤 잘 추는 할머니가 기다리고 있데요."
여선생이 속삭이듯이 알려주었다. 동사무소가 운영하는 댄스교실에 나가기 위해 배우는 중이라고 했다. 먼저 배운 회원들의 앞선 실력을 따라가기 위해서라고 했다. 애인으로 삼고 싶은 할머니가 춤을 잘 추기 때문에 저렇게 열심이란다. 꾸며낸 이야기 같기도 하다.
30대 초반의 남자는 자기를 나이트클럽의 웨이터라고 소개했다. 클럽 밖에서 자신을 웨이터라고 소개하는 배짱은 처음 보았다. 체면 같은 건 신경도 안 쓰는지 명함도 돌렸다. 키가 크고 잘생긴 편이다. 운동선수처럼 체격이 건장하다. 자이브와 룸바를 배우는 중이다.
경동 시장에서 한약재 장사를 하는 사십대 중반의 남자가 내게 친절하게 대했다. 눈썹이 길게 자라 있어서 사람들은 그를 눈썹사장이라고 불렀다. 없을 땐 그냥 눈썹이라고 불렀다. 나는 그를 '눈썹 휘날리고'로 부르고 싶다. 몸집이 큰데도 날렵하게 춤을 추기 때문이다. 자이브와 룸바를 열심히 배우고 있다.
보습학원의 원장도 있다. 나이는 사십대 초반. 수학을 가르친다고 했다. 키가 작지만 날씬하고 단정한 외모이다. 교습생 중에선 춤을 제일 잘 춘다. 신고 있는 댄스화가 반질반질하게 광이 나 있다. 왈츠에 열심이다. 나는 그를 '왈츠 추는 파스칼'이라고 부르겠다.
소리 없이 나타나고 말없이 가버리는 남자가 있다. 나이는 사십 정도. 항상 양복 차림인 것으로 보아 직장인 같다. 구청 공무원이란 말도 들린다.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춤을 배우는 것 같았다. 허겁지겁 나타났다간 어느 틈에 사라진다. 자이브를 배우는 초보이다. 별명을 지어준다면 '로보캅'. 반듯한 인상에 얼굴에 각이 지고 머리를 짧게 깎아서 그렇게 보인다. 생각난 김에 칠십 먹은 남자는 '오른 손 들기'로, 나이트클럽 웨이터는 '명랑한 웨이터'로 부르고 싶다. 별명 짓는 게 내 취미다. 그리고, 나를 격려해준 그 여자. 나는 그녀를 카르멘이라고 부르고 싶다. 집시, 꽃향기 그리고 자유. 이게 그녀의 이미지다.
댄스학원은 남자 원장과 여선생이 공동 운영한다. 두 사람은 전문 댄서답게 호리호리하다. 남자 원장은 쉰 살이 넘어 보인다. 옛날 영화배우를 닮았다. 오래된 멋진 가구 같다고나 할까. 옛날 동네 사진관에 걸린 잘생긴 남자의 얼굴 같다. 반면 여선생은 모던하다. 날씬한 몸매와 입고 있는 드레스 때문인가 싶다. 나이는 사십대 후반? 멋진 드레스를 입고 있다. 회전 할 때 드레스가 회오리바람처럼 위로 솟아올랐다. 어떤 땐 바다 속 해초처럼 흔들렸다. 그 모양은 참 멋있다. 처음 보았을 때 눈물이 핑 돌았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멋지고 아름다운 걸 보면 순간 그랬다. 요사이 그랬다. 직장을 퇴직하고 빈둥빈둥 지내다보니 우울증에 걸린 건지도.
원장과 여선생을 부부로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애인일지 모른다. 춤의 파트너는 왠지 그런 인상을 준다. 성관계를 맺는 사이로. 여선생은 가까이서 보니 눈가에 주름살이 자글자글했다. 세상살이로부터 해방된 사람은 없는 것 같다.
원장과 여선생은 열한 시에 출근한다. 나는 열한 시 40분쯤에 그곳엘 간다. 동업자인 두 사람이 홀 청소를 끝내고 음악을 틀어놓는 시간이 대충 열한 시 반이 넘어서인 걸 알았기 때문이다. 처음엔 멋모르고 그 전에 들어 간 적이 있었다. 음악을 틀지 않은 댄스학원 안은 썰렁했다. 조명등도 일부만 켜 놓았다. 쓸쓸함이 느껴졌다. 이후로 나는 홀에서 음악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문 밖에서 기다린다.
늦은 아침을 먹고 출근했을 원장과 여선생은 보통 한 시까지 가르친다. 전날 배운 스텝을 복습해주고 스텝 한 가지씩을 새로 가르쳐준다. 교습생이 헤맬 땐 배운 걸 계속 반복 연습시킨다. 내 경우가 그랬다.
교습생들은 짝을 지어 연습한다. 초보자인 나는 거울 앞에서 혼자 연습하거나 여선생이나 원장하고 춤을 춘다. 원장과 여선생은 남자 스텝과 여자 스텝을 함께 알고 있다. 내겐 그게 신기하다. 그 많은 종류의 스텝을 헷갈리지 않다니. 춤은 정말 선천적이다.
원장과 여선생은 한 시경에 주방으로 간다. 찌개를 끓이고 생선 굽는 냄새가 홀 안으로 퍼진다. 어떤 교습생들은 상습적으로 주방 쪽을 기웃거린다. 한 식구처럼 지내고 있기 때문이다. 교습생들은 삼겹살이나 족발이나 순대 같은 음식을 사들고 온다. 교습생들은 함께 둘러 앉아 점심을 먹곤 한다. 나는 가급적 사양한다. 아내의 식당에서 포장 된 음식을 가져올까 했지만 꾹 참는다. 참고로, 아내가 운영하는 음식점은 한우 전문 갈비집이다. 이백 명 정도가 한꺼번에 식사할 수 있는 대형 음식점이다.
'조르바'가 불쑥 나타나는 건 이때다. 점심을 먹던 교습생들이 다투어 그에게 자리를 양보한다. 교습생들은 그를 대감님이라고 부른다. 그는 학원 교습생들이 결성한 댄스클럽의 회장이다. 나는 그에게 흥미를 느꼈다. 그는 춤의 고수이다. 나이는 60세 정도. 30년 이상 춤을 추었다고 한다. 원장과 여선생부터 그를 깍듯이 대한다. 나는 그의 별명을 '희랍인 조르바'로 지었다. 줄여서 조르바로 부르겠다. 조르바는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점심시간에 맞추어 나타난다. 그리곤 마치 자기 집에 와서 밥을 먹듯이 식사한다.
"삼겹살 냄새 죽이는군. 소주 없나? 먹던 거라도 가져 와."
조르바의 말을 거역하는 사람은 없다. 누군가 냉장고에서 먹다 남은 소주병이라도 들고 온다. 그는 검정색 양복에 조끼를 입고 있다. 양복의 천은 그다지 고급 같지 않다. 하지만 양복이 잘 어울리는 체형이다. 키가 껑충하게 크고 적당히 말랐다. 다리가 무척 길다. 얼굴은 햇빛에 그을어서 검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그는 암벽 전문가란다. 춤과 암벽타기가 서로 잘 어울리는 취미인지 지금도 의문이다. 직업은 있는 지, 또 있다면 무엇인지 궁금했다. 얼굴의 광대뼈 때문에 강한 인상을 주지만 모서리에 금장식이 붙은 뿔테 안경을 끼고 있어서 코믹하게도 보인다. 렌즈 너머 눈동자가 선량해 보인다. 입술은 엷고 검붉은 빛이다. 얼굴에 미소가 번져 있다. 구부정한 허리를 숙여 머리를 비스듬히 하고 상대를 바라보는 버릇이 있다. 조르바가 교습소에 나타나는 날이면 여러 명의 남자와 여자들이 함께 나타난다. 댄스클럽 회원들로 춤의 고수들이다. 댄스클럽 회원이 되면 학원에 일인당 월 오만 원을 지불하고 장소를 마음껏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물론 실력이 기본은 넘어야 회원이 될 수 있다. 정기 모임은 매주 금요일 저녁 7시. 일종의 무도회 파티이다. 저녁 시간을 내지 못한 몇몇 주부들이 조르바를 낮 시간에 초청해서 춤을 춘다는 걸 알았다. 사전 연락을 해서 모이는 데 이 때 실력 있는 남자 회원 한 두 명이 파트너를 해주기 위해 나타난다. 조르바는 특히 왈츠를 잘 춘다. 춤이 아름답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남녀가 하체를 대고 춤을 추어서 민망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갈비뼈 부위를 접촉하는 거란다.
댄스클럽 이름이 궁전인 것과 이름을 지은 사람이 조르바란 걸 알고 나는 혼자 미소 지었다. 조르바는 자신을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왈츠 추는 프랑스 귀족으로 상상해 봤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탄광 노무자인 '희랍인 조르바'가 그의 별명으로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조르바가 불쑥 내던지는 말에 나는 흥미를 느꼈다. 예컨대 누군가 노후 대비엔 춤이 최고라고 말했을 때 조르바가 눈을 치켜뜨며 한 말 같은 것이다.
"무슨 소리. 춤은 국민 체조가 아냐. 춤은 젊을 때 추어야 하는 법. 춤은 사랑이고 자유고 낭만이지. 늙으면 그게 안 돼."
춤에 대한 조르바의 생각은 종교적인 신념에 가깝다. 스텝이나 박자가 어렵다고 내가 푸념하자 조르바가 말했다.
"연습 부족이오. 춤은 머리로 추는 게 아니오. 가슴과 영혼으로 추는 거지. 스텝이 서툴면 이게 안 돼. 머리로 추는 춤은 고역이요. 열심히 연습해요. 스텝이 저절로 돼야 머리 문이 닫히고 가슴 문이 열리는 거요."
그 날 조르바가 혼자서 왈츠 추는 걸 보았다. 고난도의 스텝을 연습해 보는 건지 진지한 표정으로, 때론 눈을 감고, 30분 이상을 땀을 흠뻑 흘리며 춤을 추었다. 모두들 숙연한 표정으로 조르바의 동작을 지켜본다.
"혼자 추어도 멋있네요."
내 말에 여선생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혼자가 아녜요."
"네?"
"옛날의 그 누군가와 추는 중예요."
춤이 슬프게도 보인다는 걸 처음 알았다. 나중에 조르바가 나를 빤히 보며 말했다.
"거긴 힘들 것 같소."
'무슨 말씀인지."
"춤 출 사람 같지 않단 뜻이오."
"그런 사람이 따로 있나요?"
"있고말고. 춤을 추려면 머리 문을 닫아야할 거요."
나는 걸핏하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잡념을 생각해 보았다. 내 잡념은 사실 일종의 열등의식 같은 것이다. 조르바는 나를 무슨 지적인 사람으로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멋쩍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대감님이 도와주세요."
조르바가 빙그레 웃었다.
'내게 술 한 잔 사시오. 춤은 사람들과 친해져야 잘 출 수 있소."
"오늘 당장 마시죠."
"허 허. 걸음마는 뗀 다음에."
조르바와 친해질 기회는 연기되었다. 그런데 얼마 후 조르바가 부친상을 당했다. 상가가 경상북도 영양으로 꽤 먼 거리여서 조문 갈 회원들이 많지 않은 것 같았다. 원장이 다음 날 아침 9인승 스타렉스를 몰고 내려갈 테니 함께 갈 사람은 학원으로 나오라고 회원들에게 일일이 연락하는 것 같았다. 회원이 아니지만 나는 자청해서 조문 가겠다고 말했다. 원장이 반가워했다. 남자 회원 세 명과 여자 회원 두 명이 다음 날 아침 9시에 학원 앞에 나타났다. 뜻밖에도 스텝이 틀려 쩔쩔맬 때 나를 격려해 준 카르멘이 나타났다. 최근 클럽에 가입했단다. 조르바가 그녀의 실력을 인정해주었기 때문이란다. 이름이 이주희인 걸 알았다. 문상길이라서 평소완 달리 수수하게 옷을 차려입고 나타났다. 카르멘 이주희. 별명이 그럴듯하다.
상가는 경북의 안동과 영양 사이에 있는 전통 한옥 마을에 있었다. 퇴계 이황의 후학들이 대대로 살고 있는 마을이란다. 조르바는 형제가 많은 집안의 막내였다. 형들은 지방 군청의 공무원이나 교사를 했는데 조르바는 평생 변변한 직업을 가져 본 적이 없단 이야기를 들었다. 젊어서 상처한 후엔 평생 독신으로 산다는 것도. 그가 하는 일이란 춤을 추고 암벽을 기어오르는 일이란 것도. 집안사람들로 부터 무척 따돌림 받았을 거란 생각이 든다. 유학자 집안의 후손으로선 별종이다. 그러나 내 선입견인지 모르지만 조문객을 맞고 있는 형제들 가운데 조르바가 가장 건강하고 행복해 보였다. 호상이기도 했지만 상주답지 않게 얼굴은 밝고 명랑해 보였다. 우리 일행이 앉은 술상 앞으로 그가 찾아왔다. 조르바가 내게 말했다.
"고맙소. 예까지 오기가 쉽지 않은 일인데. 서울 가서 한 잔 합시다."
서울까지 4시간이 걸리는 먼 거리였다. 밤 여덟 시경에 도착했다. 내가 저녁을 샀다. 카르멘 이주희가 나를 오라버니라고 부르자 다른 여자도 그렇게 불렀다. 나는 오라버니란 호칭이 마음에 든다. 춤 실력은 아직 멀었지만 날 클럽 회원으로 받아주겠단다. 인사치례지만 기분이 좋다.
2
내가 나 혼자만의 세계에 푹 빠져서 집에선 아내와 딸애와 전혀 상관없이 혼자 살고 있다 고 말한다면 지나친 표현일 수도 있겠다. 나는 성실한 남편이었고 다정다감한 아빠였다. 그러나 최근 나는 한 가족이란 일체감을 잃어버리고 있는 중이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다. 퇴직한 이후 나는 부부로서의 감정이나 유대감이 조금씩 줄어드는 걸 느끼고 있다.
이런 기분이 들기 시작한 건 내가 소위 그 신사협정이란 걸 아내와 맺고 난 후부터가 아닌가 싶다. 내가 회사를 그만 둔 후 우리 부부는 각자의 일에 서로 간여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아내가 그걸 원했다. 사실 내겐 억울하다. 내가 직장 다닐 땐 급여 이체통장을 틀어쥐고 내 생활을 일일이 간섭하던 아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아내가 제안한 상호 무간섭원칙에 동의했다. 한 가족으로서의 결속은 딸애가 있어 그 바탕은 끊어지지 않을 것임으로.
아내는 내가 여행도 하고 골프도 치면서 즐겁게 지내라고 말한다. 아내가 이처럼 관대한 이유는 간단하다. 그건 내가 심심하다 뭐하다 하면서 무슨 사업을 벌일까 봐 걱정해서다. 퇴직자가 사업하다 쫄딱 망한 경우를 숱하게 봤기 때문이다. 아내는 바로 이 경우를 두려워한다. 그저 백수로서 빈둥빈둥 잘 지내기를 원한다. 재취업한다면 최상이지만 오늘날 그게 쉬운 일인가. 아내의 또 한 가지 걱정은, 이건 순전히 내 생각인데, 내가 아내가 경영하는 갈비집에 나와서 마치 회장이나 된 것처럼 행세하는 경우다. 내가 직장에서 번 돈을 종자돈 삼아 식당업을 시작했으니 지금의 대형 갈비집에 내 지분이 가장 크다는 점을 내세우면서. 게다가 식당엔 오래 전부터 처남 부부가 나와서 일을 돕고 있다. 처남이야말로 일찌감치 직장 때려치우고 사업하다 번 돈과 집까지 몽땅 날려버린 장본인이다. 처남이 처가 식구들에게 끼친 걱정과 경제적 고통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처남은 아내가 대형 갈비집을 열고부터 식당에 나와 일했다. 밥 때가 되면 쉴 사이 없이 밀려드는 차량들을 주차장에 차곡차곡 주차시키는 일부터 시작했다. 지금은 삼십 명이 넘는 식당 종업원을 감독하고 음식재료를 사들이고 주방을 관리하는 막강한 자리로 승진해 있다. 아내는 식당에선 자기 동생을 전무라고 부른다. 처남이 누이의 식당을 반석위에 올려놓은 것에 자신의 공이 크다고 생각할 건 당연해 보였다. 실제로 한우 프랜차이즈 갈비집 아이디어를 낸 건 처남이었다. 처남으로선 매형이 식당에 나오는 걸 달가워할 리가 없을 것이다. 나는 갈비집이 잘 운영되고 있고 또 아내가 충분한 용돈을 내게 줌으로 굳이 식당에 나가서 손님들 한데 머리 숙일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최근 아내는 처남댁한데 자주 카운터를 맡기고 친구들과 어울려 백화점 쇼핑가고 찜질방에 가고 골프를 치러 다닌다. 처남댁은 결혼 전엔 항공사 여직원이었다. 미인인데다 애교가 넘쳐서 대형 갈비집의 얼굴마담으로 제격이다. 무엇보다 매상액을 빼돌리는 일은 하지 않을 거란 믿음을 아내에게 주었다. 현재의 관계가 유지 된다면 아내의 대형 갈비집은 처남 부부에겐 평생직장으로 손색이 없다. 게다가 남동생을 끔찍이 사랑하는 아내는 언젠간 남동생이 독립하도록 도와줄 것이다. 이 경우 나는 반대할 생각이 전혀 없다.
아내는 예전엔 나하고도 자주 골프 치더니 요즘은 일체 그런 일이 없다. 자기 친구나 영업상 만나는 사람들하고만 어울려 다닌다. 나는 최근 골프에 흥미를 잃었다. 아내의 골프 일행이 누군지 나는 묻지 않는다. 골프 친 날 저녁엔 여러 명의 남녀 손님들이 갈비집에 모여서 신나게 회식한다는 건 알고 있다. 매상 올리는 일임으로 나는 군소리하지 않는다. 아내는 술도 마시고 노래방에도 가고 자정이 넘어서 귀가할 때도 있다. 최근 우리 부부는 한 달에 두 번 관계 한다. 생리 전과 생리 끝난 후 한번씩. 보통 땐 피곤하다고 거부하다가도 이때가 되면 아내는 별 저항 없이 몸을 연다. 그러나 대부분 물 온도 30도 정도의 미지근한 섹스이다. 솔직히 나는 아내가 밝히지 않아서 더 좋다.
아내와 나는 가급적 아침 일찍 출근하는 딸애와 함께 식사를 한다. 저녁엔 함께 식사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 나는 친구들이나 옛 직장 동료들을 자주 만난다. 외출하지 않을 땐 혼자 저녁을 차려먹고 거실에서 영화를 본다. 한 가족이 저녁 때 한자리에 앉기란 쉽지가 않다. 일요일엔 세 식구가 함께 교회에 간다. 교회에서 아내와 나는 집사이다. 강남에서 제일 큰 교회이고 건물도 훌륭하고 신도들도 세련돼 있다.
아내와 나 사이가 서먹해진 건 이 개월 전 딸애의 결혼 문제로 의견차가 생기고 부터다. 부부 사이에 엄청난 생각의 차이가 있음을 발견하고 나는 매우 놀랐다. 이럴 수가. 어느 틈에 생각의 차이는 크게 벌어져서 도저히 메울 수 없을 정도가 돼 버린 걸 알았다. 나는 몹시 당황했다. 인생관이나 세계관이 달라져서 이혼한 사례가 있는 지 궁금해질 정도였다.
발단은 아내가 딸애에게 학창시절부터 사귄 남자와 헤어질 것을 요구하고 부터다. 어느 날 아내가 딸애 방에 들어가더니 문을 닫고 무슨 긴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밖으로 나온 아내의 표정이 밝지 않았다. 그 날 딸애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외출했다. 다음날, 일요일인데 딸애가 교회 가는 걸 거부했다. 침대에 누워 이불을 얼굴까지 덮어쓰곤 교회 안갈 거냐고 물어도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나는 무언가 심상찮은 일이 생겼음을 눈치 챘다. 딸애는 외고와 명문대를 졸업한 후 미국에 2년간 어학연수를 다녀와서 국내 대기업 전자회사에 취직했다. 토요일은 휴무임으로 일요일에 피곤하다는 핑계로 교회에 안가는 경우는 드물었다. 아내와 둘이서만 차를 몰고 교회로 가면서 내가 물었다.
"무슨 일 있어?"
아내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바보 같은 기집애."
"뭐가?"
아내는 한동안 대답하지 않는다. 이윽고 아내가 말했다.
"선을 보라니까 싫다 잖아요."
"그 앤 애인이 있잖아. 난 그 친구하고 결혼할 걸로 알고 있는데."
"꼭 그럴 필요 있어요?"
"....."
나는 어이가 없었다. 좋다고 할 땐 언제고.
"직장이 없잖아요."
"고시 공부 중이잖아."
"세 번이나 떨어졌는데 어떻게 될지 누가 알아요."
"그렇다고 딴 남자와 선을 봐?"
"기다릴 수 없어요."
아내의 단호한 말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 녀석은 딸애와 외고 동창이다. 같은 대학의 사회학과를 다녔다. 붙임성이 있고 서글서글하게 잘생긴 녀석이었다. 문제는 사법고시에 세 번 떨어진 것이다. 녀석이 떨어졌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더 철렁했던 건 녀석의 식구 보다는 차라리 아내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세 번째 떨어지자 아내의 얼굴에 짙은 수심의 그림자가 어렸다. 그러나 나는 꼭 변호사나 판사만이 좋은 직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보람 있고 훌륭한 직업은 얼마든지 있다. 다만 녀석이 조속히 결판을 내려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시험에 붙든가 딴 일을 하든가. 사랑이 식어 헤어진다면 글쎄, 잘됐다고 까진 말할 순 없지만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편하게 생각할 참이었다. 그런데 둘은 아직 사랑하는 사이인가 본데 고시에 연거푸 떨어졌다고 딴 남자와 선을 보라고? 나도 딸애가 걱정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솔직히 인간으로서 그럴 순 없는 노릇이다.
"대체 누구 길래?"
묻지도 말았어야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은 게 사실이었다. 아내는 곧바로 신이 나서 말했다.
"우리 교회에 홍명박 장로님 있잖아요. 둘째 아들이 치과의사래요. 지금은 군의관이지만 내년 초에 제대한데요. 권사님 한 분이 은근히 떠봤더니 홍 장로님이 좋다고 말했대요. 휴가 나오면 교회에 나오니까 서로 만나게 하자고 했어요. 우리가 이 교회로 옮겨온 지 얼마 안 됐기 때문에 둘은 만난 적이 없어요. 휴가 와서 오늘 교회 온 데요. 그런데 고게 교회에 안 간다잖아요."
"이유를 말했어?"
"예쁘게 하고 나가야죠."
"당신도 딱하군. 좋아요 하고 나가도 문제지. 난 그런 딸로 키우지 않았어."
"연애했다고 꼭 결혼해야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 말이 틀린 건 아니어도 본인들이 결정할 일이지."
"그래서 한 번 생각해 보라고 했어요. 여자 팔자는..."
"그 녀석이 뭐가 어때서. 고시에 세 번 떨어진 것뿐인데. 누구나 다 그러잖아. 오히려 격려하며 기다려줘야 하는 거 아닌가? 당신 요새 문제 있어."
"또 그 소리군요. 세상은 변하는 데 맨 날 그 타령이면 뒤처지는 게 당연하죠."
나는 입을 다물었다. 굳이 날 두고 한 이야기가 아니라 해도 심사가 꼬였다. 아내가 말했다.
"그 집하고 우리 집하곤 안 맞아요."
"뭐가 안 맞아. 한 땐 좋다고 했으면서. 그 애 아버지가 교육자고 시인이라서 좋다고 했잖아."
"교육자면 뭐해요. 대학교수가 아닌데. 시인이니 뭐 그런 사람들 가까이서 보면 되게 고지식하더라. 눈부신 세상하곤 맞지 않아요."
오, 맙소사. 눈부신 세상. 나는 입을 닫고 말았다.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아낸 요즘 '눈부신 세상'이란 말을 자주 쓴다. 사실 내가 사는 동네 주변은 하루가 다르게 변모하고 있다. 초고층 주상 복합 아파트며 호화스러운 백화점하며 어디서나 눈에 띠는 외제차하며 그리고, 주변에 들어선 아름답고 멋진 교회 건물들을 보면 눈부신 세상이란 말이 실감난다. 아내가 팔천만원이 넘는 렉서스를 뽑았을 때 나는 행복에 겨워 이가 시릴 정도였다. 눈부신 세상의 일부가 되었다는 이 뿌듯한 존재감. 하나님의 축복이 가득한 삶을 살고 있다는 이 충만한 행복감. 그러나, 아내가 최근 주변의 어수룩한 것들에 대해 짜증내거나 비하하는 말을 할 때면 나는 왠지 마음이 위축되었다.
교회 주차장에 차를 대면서 아내가 말했다.
"당신은 잠자코만 계세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홍 장로님은 하나님의 축복을 듬뿍 받은 분이예요. 그런 분의 가정과 혼사를 맺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축복예요. 사실 그 애 부모가 불교 쪽에 가까운 게 마음에 안 들었어요."
"결혼해서 전도하면 된다고 할 땐 언제고."
"여보. 당신은 뒤로 물러나 있어요. 부탁예요."
아무래도 아내는 일을 저지를 각오가 단단히 서 있어 보였다.
과연 딸애가 엄마의 말에 설득당해서 몇 년을 사귀던 남자 친구와 헤어지기로 결심할 것인지 나는 다소 복잡한 심정으로 지켜보았다. 나는 아내에게 일이 어떻게 돼 가는 지 묻지 않았다. 이런 침묵과 방관이 비겁하게 생각되기도 했다. 속으론 안 돼 하면서도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치사하게 여겨졌다.
어느 날 아침 딸애가 아침 식사를 먹는 둥 마는 둥하더니 내일부터 5 일간 휴가내서 단짝인 여자 친구와 둘이서 홍콩과 싱가포르를 여행한다고 말했다.
"머리 좀 식히고 오라고 했어요."
아내가 말했다. 딸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아내가 신이 나서 딸애의 여행 준비물을 챙겨주는 걸 보고 나는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딸애는 시종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통과의례. 짓궂게도 이 말이 내 머릿속에 떠올랐다. 다음 날 아침 아내는 자기 차로 딸애를 공항까지 데려다 주었다. 아파트 현관 앞에서 두 사람을 배웅하며 나는 복잡 미묘한 마음의 갈등을 겪었다. 나는 아내의 말대로 모든 건 하나님이 정하시는 일이라고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딸애가 여행을 떠난 다음날, 밤늦게 귀가하던 중 아파트 단지 입구에서 한 젊은 남자가 서성대는 걸 보았다. 그 녀석임을 직감했다. 나는 얼른 어둠 속에 몸을 숨겼다. 연락이 안 되는 딸애를 만나기 위해 밤늦게까지 집 앞에서 서성대고 있다면 여행간 사실도 모르고 있는 셈이다. 고시에 세 번 떨어지고 보니 여자의 집안까지 쳐들어 올 배짱도 잃어버린 것 같았다. 나는 되돌아 나와서 인근에 사는 친구를 불러내어 자정이 넘어서까지 술을 마시고 귀가했다. 그 녀석은 보이지 않았다.
3
내 춤 실력이 늘었다. 비로소 파트너의 동작이 보인다. 파트너의 얼굴 표정도 보인다. 스텝이 틀려도 부드럽게 넘어간다. 몸에 땀이 솟는다. 360도 회전을 연속 두 번 한 후 곧바로 180도 회전을 하고도 휘청거리지 않는다. 파트너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끌며 다음 스텝으로 이끈다. 여선생이 칭찬했다.
댄스클럽의 정식회원으로 가입하진 않았지만 가끔 회원들과 어울린다. 남자들은 직업이 다양하고 먹고사는 데 지장 없어 보인다. 여자 회원들은 다소 대가 세 보인다. 동대문 시장에서 큰 옷가게를 하거나 부동산 중개업으로 돈 잘 버는 여자도 있다. 나는 독립적이고 당당한 여자들에게 호감이 간다. 사실 춤을 프로처럼 춘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적극적인 성격이 필요하다. 조르바는 춤에 관한 한 이 모든 회원들 위에 군림하는 위대한 카리스마이다. 내가 회원들과 어울릴 수 있는 건 조르바가 내게 호감을 보이기 때문이다.
학원에 작은 일이 생겼다. 카르멘 이주희가 보름이 넘도록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한동안 핸드폰까지 불통이었다. 조르바가 내게 은밀하게 제안했다. 이주희가 남해의 섬 진도의 한 횟집에서 알바를 하고 있는데 무슨 사연인지 알아보고 또 바다 여행도 할 겸 여자 회원 두 명과 함께 찾아가자는 것이었다. 일박이일의 일정이란다. 차를 갖고 올 수 있는 남자는 나밖에 없다고 솔직히 털어놓았다. 나는 기꺼이 동의했다. 겨울이 끝나고 남녘에 봄이 오고 있었다. 동백꽃은 졌을 거라고 조르바가 말했다. 아내가 애지중지하는 렉서스를 몰고 갈 순 없음으로 나는 SUV 차량을 렌트하기로 마음먹었다.
이틀 후 나는 렌트한 렉스턴에 일행을 태우고 진도를 향해 차를 몰았다. 두 여자는 평소 카르멘 이주희와 친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가정주부가 진도라는 먼 섬까지 내려가 있는 사연을 알지 못했다.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목포로 갔다. 조류가 시속 80키로나 된다는 울돌목 위에 놓인 진도 대교를 건넜다. 도로표지판을 따라 가계해수욕장으로 갔다. 한국판 모세의 기적인 '신비의 바닷길'이 열리는 해안이었다. 그곳에 동백이란 이름의 횟집이 있었다. 카르멘 이주희는 이곳에서 숙식하며 일하고 있는 중이다. 외사촌 언니가 운영하는 식당이란다. 그곳까지 찾아간 우리 일행을 보고 그녀가 몹시 반가워했다.
"고마워요. 대감님. 그리고 오라버니도요."
사연 같은 건 묻지 않았다. 도착한 시간이 저녁 무렵이라 우린 곧바로 생선회를 시켜놓고 소주를 마셨다. 창문을 통해 멀리 작은 섬들이 보였다. 바다가 갈라지는 때는 일 년에 두 번 정도라고 한다. 관광시즌이 아니라서 제법 넓은 홀인데도 다른 손님이 없었다. 바닷가에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조르바의 진한 농담에 모두들 정신없이 웃었다. 창밖의 바다는 어둠에 묻혀 보이지 않는다. 한가한 해안가엔 우리 일행이 술 마시며 웃고 떠드는 소리만이 존재하는 듯하다. 조르바가 제안했다.
"우리 춤이나 출까."
모두들 조르바의 얼굴을 보았다. 조르바는 들고 온 가방에서 작은 CD플레이어를 꺼냈다. 일행이 탄성을 질렀다.
"바닥도 적당히 미끄러운 걸. 주희부터 출까?"
우린 술상을 옆으로 밀어 놓고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외사촌 언니가 웃음을 머금고 문가에서 지켜본다. 망설이던 카르멘도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두 사람은 자이브와 룸바를 추었다. 조르바는 세 곡을 연속해서 카르멘과 춤을 추었다. 그 후엔 다른 여자 둘과 번갈아 춤을 추었다. 댄스화가 아닌 양말을 신은 발로. 술을 마셔서 그런지 스텝들이 엇갈렸다. 조르바가 시디를 껐다. 술상 앞으로 다시 모여들었다. 소주 한잔 씩 따르고 건배를 했다. 조르바가 말했다.
"이주희. 여긴 왜 왔어?"
분위기에 취해선지 망설임 없이 그녀가 이야기 했다.
"남편과 다퉜어요. 옛 애인을 십년 만에 우연히 봤는데 서울역 광장의 노숙자 신세더군요. 못 본 체하고 지나갔다가 다시 와서 사연을 물었어요. 사업이 망했데요. 카드로 현금 서비스 하고 통장에 있는 돈을 모두 찾아서 줘 버렸어요. 왜 그랬는지 나도 모르겠어요. 그 남자를 버리고 떠난 죄책감이 항상 있었거든요. 나중에 남편이 청구서를 봤어요. 조심해야 했는데. 솔직히 말했어요. 지저분한 노숙자와 바람피웠다고 의심하진 않았지만 당장 돈을 갖고 오라더군요. 친정에 가서 받아오래요. 친구한데서 빌려 오든지. 집에서 내쫓길 레 여길 내려 온 거예요. 돈 벌어서 남편 얼굴에다 던져 줄 거예요."
"얼마 줬는데?" 일행이 물었다.
"천만 원.'
조르바가 나만 들을 수 있게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천만 원씩이나 준 년이나 받아오라고 내쫓은 놈이나. 원."
4
딸애의 결혼 날자가 정해졌다. 아내는 딸애의 혼수를 마련할 계획을 단단히 세웠다.
"그 많은 걸 다 사줘야 해? 지네들이 벌어서 장만하라고 해."
"당신은 모르면 가만있어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요. 치과의사를 사위로 두는 게 보통 일인가요. 더구나 교회 장로님 가정인데."
내 기분은 계속 복잡 미묘했다. 나는 딸애가 버린 그 녀석이 다음 번 고시에 합격하거나 빨리 다른 직업을 택해 유능한 남자가 되어 주기를 바랐다. 기도할 때마다 빠짐없이 이 말을 했다. 그러나 여전히 찜찜하다. 아내와 딸애가 점점 더 행복해 하는 모습을 지켜보다 나는 불현듯 이 찜찜함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
나는 진도의 동백횟집 명함을 찾아내서 전화를 걸었다. 외사촌언니가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셨어요? 주희는 잠간 밖에 나갔는데요."
"괜찮습니다. 대신 사장님의 은행계좌 번호를 알려주세요."
"왜요?"
"클럽에서 주희 씨에게 보낼 돈이 있어서요. 찾아서 주희 씨 주세요."
외사촌언니가 은행계좌번호를 알려주었다.
나는 천만 원을 송금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딸애를 위한 액땜으로 생각했다. 인공치아를 해 박기 위한 비상금을 쓴다고 생각했다. 치과의사를 사위로 맞이하니 그 비상금은 필요 없게 된 거라고 위안했다.
나는 황혼 이혼을 생각해 보는 중이다. 아내의 눈부신 세상은 아름답지만 함께 숭배하고 싶진 않다. 재산을 나누는 일인데 아내가 동의할지 모르겠다. 서두르진 않겠다. 상대가 있는 일은 간단치가 않다. 그리고, 나는 계속 춤을 출 생각이다. 가슴으로 춤을 출 수 있을 때까지. 어수룩한 것들을 사랑하기 위해서.(끝)
윤 원 일
011- 9887- 463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