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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불전에 나타난 구업(口業)의 유형과 대처 방안 / 한성자
특집 | 좋은 말 나쁜 말 그리고 불교
1. 머리말
항간에서는 요즈음 정치권이 연루된 사건을 둘러싸고 진실공방 또는 거짓공방으로 연일 시끄럽다. 공방의 당사자들뿐만 아니라 그 주변 사람들까지 사건에 휘말려 들어가 여러 사람이 각자의 진실을 주장하고 상대방의 거짓을 비난한다. 하루가 멀다고 매스컴에서 묵은 뉴스에 조족지혈의 새 소식을 보태서 떠들어대니, 거기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일반 사람들조차 은연중 나름의 잣대로 어느 쪽이 진실인가를 가늠해 보게 된다. 개중에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개인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나라의 앞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한갓 가십거리로 넘겨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제 일처럼 진실 찾기에 발 벗고 나서고 있다.
지금의 이런 사회현상을 마주하고 불교에서는 우리의 언어행위에 대하여 어떤 가르침을 주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은 시의적절한 일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시도가 얼마나 구체적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도움을 줄 것인가 하는 기대 또는 의심은 차치하고라도, 불전의 가르침에서 현재 우리 삶과 관련된 무언가를 찾아보려고 모색하는 것 자체가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고독한 숲속 수행자의 삶을 살아가지 못하고 있는 현대인에게 붓다의 교설은 대개의 경우 넘볼 수 없는 찬탄의 대상에 머물러 있지 않았던가.
초기불전에서 구업과 관련된 내용은 율장에서는 가장 무거운 죄인 바라이(波羅夷, pārājika)와 비교적 가벼운 죄에 해당하는 바일제(波逸提, pācittiya), 그릇된 언어에 대한 계목에서 파생된 둡바시따(dubbhāsita) 등에서 발견된다. 바라이에 해당하는 가장 무거운 범계는 자신이 깨달음을 성취하지 못한 것을 알면서도 인간을 초월한 상태에 도달했다고 거짓 주장을 하는 것으로, 이것을 범하면 승가로부터 영원히 추방되어 다시는 비구의 자격을 회복할 수 없다. 바일제에 속하는 것에는 거짓말, 모욕, 이간질의 세 가지 구업과 함께 비구가 구족계를 받지 않은 사람과 함께 법을 암송하는 것 등의 다양한 언어행위가 있는데, 이들 범계는 비교적 가벼운 죄이기 때문에 다른 비구에게 참회함으로써 용서를 받는다. 둡바시따는 세 가지 구업, 즉 거짓말, 모욕, 이간질 이외의 좋지 않은 말, 악의를 가진 말, 농담으로 하는 지저분한 말, 신심이 없는 말을 함으로써 범계하는 것으로 이 역시 다른 비구에게 참회함으로써 치유된다.
다음으로 경장의 경우에는 올바르지 않은 언어행위와 올바른 언어행위에 대한 교설들이 다양한 경에서 발견된다. 올바르지 않은 구업으로는 거짓말, 모욕, 이간질, 잡담을 들 수 있으며, 올바른 언어행위는 이들 올바르지 않은 구업에 대칭되는 것으로 진실한 말, 온화한 말, 유익한 말, 좋은 뜻을 가진 말 등이 있고 여기에 올바를 때 하는 말이 함께 언급된다. 이 교설들은 경장의 여러 경에서 반복해서 설해진다.
초기불전에서 보이는 구업에 대한 교설은 크게 위와 같이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이제 본문에서는 관련된 불경의 부분들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고 이와 더불어 좋은 구업을 짓는 것과 관련하여 경전에서는 어떻게 말하는 것을 잘 말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는가를 규명해보도록 한다. 나아가서 위에서 말한 세간에서 일어나고 있는 진실 공방의 경우를 들어 붓다의 교설을 우리의 언어생활에 적용해 볼 가능성을 엿보도록 한다.
2. 인간을 초월한 상태
구업 가운데 가장 큰 범계가 되는 것은 역시 거짓말과 관련된 것이다. 모든 의식적인 거짓말은 비교적 가벼운 범계라고 할 수 있는 바일제의 첫 번째 계율에 의해서 금지된다. 그러나 거짓말 중에서도 인간을 초월한 상태를 아직 성취하지 못했으면서도 거짓으로 그러한 상태에 도달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특별히 가장 무거운 범계인 바라이에 해당한다. 그에 따라 그러한 거짓 주장을 한 비구는 승가에서 쫓겨나 다시는 비구의 자격을 되찾을 수 없다. 바라이의 네 번째 항목인 해당 계목을 보자.
통찰지가 없는 비구가 자신이 인간의 법을 초월한 경지(Uttariman-ussadhamma)에 도달해 수승한 앎과 봄이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하면서 “나는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본다.”라고 말한다. 그러면 반대 심문을 받거나 받지 않거나 상관없이, 그가 나중에 후회하면서 청정하게 되고자 “스님들이시여, 알지 못하면서 나는 안다고 했고 보지 못하면서 본다고 헛되이, 거짓으로, 허황되게 말했습니다.”라고 참회할지라도, 자신의 과대평가로 인한 것이 아니라면, 바라이가 되어 더 이상 승가에서 함께 살 수 없다.
이 계목이 제정된 배경은 다음과 같다. 부처님께서 웨살리의 큰 숲에 머무실 때, 우안거를 보내던 왓지 스님들이 기근이 들어 탁발이 힘들어지자 스님들은 다른 스님이 선정이나 신통을 얻었다며 재가자들에게 거짓말을 하여 사람들이 공양을 올리도록 하였다. 나중에 이에 대해 들은 붓다는 비구들을 꾸짖고 거짓으로 인간을 초월한 상태를 말하면 더 이상 비구로서 함께 살 수 없다고 말씀하시고 이 계목을 제정하셨다(Sv.Pr4). 이 계목에 대한 경분별의 해설에서는 이 범계가 성립하는 다섯 가지 요소를 드는데 그것은 대상, 인식, 노력, 의도, 결과이다. 여기서 대상은 인간을 초월한 지위, 인식으로는 자신이 인간을 초월한 지위에 도달하지 않은 것을 아는 것, 노력은 자신의 수승한 상태를 다른 사람에게 알리려고 주장하는 것, 의도는 나쁜 욕망을 채우기 위해 진실을 왜곡하려는 시도이고 결과는 다른 사람이 그의 거짓 주장을 이해했다는 것이다.
이어서 그 다섯 가지 조건이 무엇을 말하는지, 그리고 그 다섯 가지 조건이 성립되는 경우와 성립되지 않는 경우 등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이어지는데, 다섯 가지 요소 중 하나라도 부족할 경우 범계가 되지 않거나 범계의 형태가 바뀌기도 한다.
이렇게 율장이 다섯 가지 요소에 대한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자세하게 살피는 것은 이 조건들이 범계 여부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이므로 잘 살펴서 가능한 범계가 성립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하며 또한 계의 청정함이 깨달음으로 가는 수행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자세히 살피는 것은 칠각지의 증장에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3. 네 가지 구업
1) 거짓말
거짓말, 모욕, 이간질의 세 가지 구업과 올바르지 않은 담마 암송 등의 여러 다양한 구업에 의한 범계는 바일제에 해당한다. 바일제의 첫 번째 항목은 거짓말에 대한 것이다.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하면 참회해야 한다.” 이 계목은 석가족의 핫타까(Hatthaka)라는 스님이 외도와 논쟁하면서 어떤 때는 자신의 패배를 부정하고 어떤 때는 인정하지 않으며 외도의 질문을 회피하고 고의적으로 거짓말을 일삼으며 약속을 하고 지키지 않자, 외도들이 “어찌 석가의 아들들은 우리에게 거짓말을 하고 약속하고 지키지 않는단 말인가?”라고 비난함에 따라 그것이 붓다에게 알려져 제정되었다(Sv.Pc1).
거짓말과 관련해서 주목할 것은 말하기 곤란한 상황일 경우에는 침묵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냥꾼이 동물의 행방을 물어보았을 경우에 동물을 살리기 위한 거짓말도 해서는 안 된다. 사냥꾼이 알게 되면 신심을 잃거나 반감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다른 비구가 범계를 저질렀다고 거짓으로 비난하는 경우에, 그에 대한 벌로 받게 되는 처벌이 거짓으로 내세운 범계의 종류에 따라 달라진다. 거짓으로 바라이로 다른 비구를 비난하면 승잔(僧殘, saṅghādisesa)의 악의, 성냄의 죄에 해당하며, 거짓 승잔으로써 다른 비구를 비난하면 바일제의 근거 없음에 처하고, 거짓으로 승잔 이하의 범계로 다른 비구를 비난하면 그릇된 행위의 범계인 둑까따(Dukkaṭa)에 해당한다. 선의의 의도로 약속을 했다가 어기게 되어도 둑까따에 해당하는 범계를 저지른 것이 된다.
고의적인 거짓말에 대해서는 경장의 여러 곳에서도 반복해서 경계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잘 알려진 라훌라에 대해 훈계하는 붓다의 말씀을 보기로 하자. 라훌라는 까필라왓투를 방문한 붓다에게 유산 상속을 요청하다 그대로 붓다를 쫓아와 일곱 살의 나이로 출가하게 되었다. 붓다는 아직 어린 라훌라에게 동자들이 거짓말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에 대해 경계하도록 하기 위해 물그릇을 이용해서 거짓말의 무익함을 알려준다.
처음에는 물그릇에 물을 조금 남기고, 다음에는 물을 다 쏟아버리고, 그러고 나서는 물그릇을 뒤집어엎고, 마지막에는 물그릇을 다시 바로 세워 각각의 경우를 고의로 거짓말하는 자의 출가수행에 대비시켰다. 고의로 거짓말하는 것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들의 출가수행은 물그릇에 조금 남은 물처럼 하찮은 것에 지나지 않고, 쏟아부은 물처럼 버려진 것에 지나지 않으며, 엎어진 물그릇처럼 엎어진 것에 지나지 않고, 바닥이 드러난 물그릇처럼 빈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유한 후에 붓다는 설한다.
쭌다에게 주는 교설에서는 거짓말의 전형적인 양상이 드러나는데 이와 유사한 교설이 여러 경에서 반복해서 나타난다.
거짓말을 삼가고 진실을 말하는 것은 위의 교설에 따르면 아는 것을 안다고 말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는 단순한 것이다. 그러나 이 단순한 것을 실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하는 것은 우리가 매스컴에서 보는 많은 사회적 지도자들이 다른 증거를 통해서 그들이 알고 있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나는데도 끝까지 모른다고 하는 것에서 흔히 목격할 수 있다.
2) 모욕
모욕은 바일제의 두 번째 항목에 해당한다. “모욕하면 참회해야 한다.” 그 제정 배경이 된 것은 여섯 비구의 무리가 계행을 갖춘 스님들의 태생, 이름, 종족, 직업 등과 관련해 허물을 찾아내 조롱하자, 사람들이 “어찌 이들은 비구들을 모욕하며 다닌단 말인가.” 하는 비난이 일어나 붓다가 이를 알게 된 것이다(Sv.Pc2). 모욕의 항목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모욕의 대상에 인종과 계급과 국가, 이름, 가족과 가문과 혈통, 직업, 재주와 능력, 질병과 장애, 육체적 특징, 모독, 인신공격, 욕설의 열 가지가 망라돼 있어서 마치 모든 사람이 차별받지 않고 동등하게 살 수 있는 권리와 자유를 보장하는 현대의 인권선언문을 보는 것과도 같다는 것이다. 동시에 아직까지도 이러한 것들을 이유로 약자에 대한 비하가 그치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인류가 내면적으로는 거의 발전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준다. 이 열 가지 모욕의 대상 이외의 것을 대상으로 하여 모욕하면 바일제가 아니고 둑까따에 해당한다.
경장에서도 모욕과 관련된 여러 구절을 찾아볼 수 있는데 붓다를 모욕한 한 바라문의 경우를 보자. 어떤 바라문이 자기네 가문의 사람이 세존에게로 출가했다고 해서 붓다를 찾아와 붓다에게 욕하고 비난하자, 붓다는 손님에게 내놓는 음식의 비유를 통해 그의 모욕에 대처한다. 붓다는 바라문에게 그의 집을 방문한 손님들이 만일 그가 대접한 음식을 취하지 않는다면 그 음식은 누구의 것이 되는가 하고 묻는다. 이에 바라문이 자기의 것이 된다고 대답하자 붓다는 말한다.
제목도 《욕설경》인 이 경전의 바라문은 ‘욕쟁이 바라드와자’라고 불렸으며 그의 큰형이 붓다에게로 출가했다고 주석서는 전하고 있다. 자기가 붓다에게 쏟아부은 욕설과 비난을 그대로 되돌려받은 욕쟁이 바라드와자는 고따마 존자가 자신을 저주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고따마는 지금 화를 내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어지는 붓다의 게송을 듣고는 크게 마음이 움직여 붓다 아래로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고 열심히 수행하여 결국 아라한이 되었다. 붓다는 분노에 맞서서 분노하지 않음으로써 자신뿐만 아니라 모욕한 상대방까지 구제했던 것이다.
분노조절장애라는 병이 횡행하는 현대사회에서 모욕과 욕설을 마주하여 함께 분노하지 않음으로써 모욕을 준 사람마저도 구제한 붓다의 지혜는 우리에게 어떤 무기보다도 강력한 모욕에 대한 방어기제를 선사한다. 《법구경》에서 말하는 것처럼 백만 명을 정복한 사람보다 자기 자신을 정복한 사람이 더 위대한 승리자이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불평등 사회에서 얼마나 많은 약자들이 한 줌 강자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모욕과 욕설에 노출돼 있는가. 부당한 근거에 맞서서 같은 처지의 사람들과 함께 싸움으로써 사회적으로 불평등을 줄여나가는 것은 현실적인 해결책이지만, 나 혼자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승리할 수 있을지도 불확실한 길이다. 나에게 모욕을 준 자에게 분노를 일으키지 않는 것은 온전히 나 혼자서 이룰 수 있고 승리가 보장된 길이다.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
3) 이간질
바일제의 세 번째 계목은 이간질이다. “비구들 사이에 악의적으로 불협화음을 일으키면 참회해야 한다.” 이의 제정 배경에는 두 번째 바일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여섯 비구의 무리가 관여된다. 붓다께서 사왓티의 제따 숲에 머무를 때, 여섯 비구의 무리가 다른 비구들을 싸우게 하고 불화를 일으키려고 이곳에서 들은 이야기를 저곳에서 말을 하고 저곳에서 들은 이야기를 이곳에서 말을 하며 비구들 사이에 불협화음을 일으키자, 스님들이 “어찌 여섯 비구의 무리는 비구들 사이에 이간질하며 다닌단 말인가?”라고 비난하며 부처님께 알려 이 계목이 제정되었다(Sv.Pc3). 비구 사이를 이간질하면 바일제이지만 이간시키고자 하는 둘 중 하나가 비구가 아니거나 또는 둘 다 모두 비구가 아닐 경우 이간질하면 둑까따에 해당하며, 간접적으로 빗대어 이간질하는 것도 둑까따이다. 또한 앞의 두 번째 바일제인 모욕에서 나왔던 열 가지 모욕 대상 이외의 문제로 이간질하면 둑까따이다.
경장에서 특별히 이간질 하나에만 관련된 교설은 찾을 수 없으며 예외 없이 네 가지 구업이 함께 언급되고 있어서 거짓말과 모욕 및 잡담이 항상 동반된다. 그중 이간질에 관한 설명이 가장 자세하게 돼 있는 부분을 보자.
이간질이 목표로 하는 것이 불화를 조성하는 것이라면 이와 관련하여 초기불전에서 언급할 만한 사실은 왓지 족의 멸망에 관한 것이다. 마가다의 왕 아잣따사뚜가 이웃의 왓지 동맹부족을 정복하고 싶어서 붓다에게 신하를 보내 그에 대한 붓다의 의견을 물었을 때, 붓다는 아난다와의 문답을 통해 왓지들이 화합하는 한 그들을 정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그에 따라 아잣따삿뚜는 일단 물러섰으나 후에 그의 신하인 왓사까라가 계략을 세워 자신이 아잣따삿뚜에 대해 반역을 일으킨 것처럼 위장하여 왓지들에게로 망명한다. 거기서 지내는 3년 동안 그는 왓지들 사이에 불신과 의심을 조장하는 데 성공했고, 그들이 충분히 분열됐다고 생각됐을 때 아잣따삿뚜 왕에게 연락함으로써 왕이 손쉽게 왓지들을 정복할 수 있도록 했다. 이 사건은 이간질의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4) 담마 암송과 설법을 비롯한 다양한 구업
바일제의 네 번째 계목은 담마 암송에 대한 것이며 그 이하 구업과 관련된 계목이 여러 개 나오는데, 이 계목들은 설법, 실제 성취 알림, 중범계 알림, 다른 답변, 불평, 중한 범계, 훈계 등이다. 이들 구업은 바일제에 해당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대체로 담마와 설법 및 깨달음의 성취 등 일반인들의 구업과는 거리가 있는 언어행위들이다. 또한 비구의 기본계목(Bhikkhu Pātimokkha)이 거짓말, 이간질, 모욕, 잡담의 순서로 된 것을 고려해볼 때 이들 계목 대신에 잡담의 비중이 더 크게 부각돼 있고 경장에서도 이 네 가지 구업은 항상 짝이 되어 나오기 때문에, 이것들은 함께 묶어서 대략적으로 훑어보고 잡담으로 논의를 이어가도록 한다.
우선 담마 암송에 관한 계목은 “비구가 구족계를 받지 않은 사람(사미, 재가자 등)과 함께 한 줄씩 담마를 암송하면 참회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비구가 사미 및 재가자와 함께 경을 암송하지 않는 이유로는 비구들의 의무를 사미, 재가자에게 떠넘기는 것처럼 보일 수 있고, 당시 브라민이 다른 계급의 《베다》 암송을 허용하지 않았던 것과 비교하여 비구들이 자신의 전통을 수호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서 비구들에 대한 존경심을 잃게 할 수 있으며, 비구들이 마치 재가자들의 경 암송을 위해 고용된 교사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라는 세 가지가 거론되고 있다.
일곱 번째 바일제인 설법의 계목은 “비구가 여성에게 (빨리어를) 이해하는 남자가 함께 있지 않은데 (빨리어로 된) 담마를 다섯 또는 여섯 구절 이상 가르치면 참회해야 한다.”는 것이다. 범계가 되지 않는 경우로는 빨리어로 된 법을 여섯 구절 이상 연속으로 사용하지 않고 다른 언어를 섞어가며 법문을 설하는 경우, 빨리어를 이해할 만한 남자가 있는 경우, 여성이 여러 명 있고, 각 여성에게 여섯 구절 미만으로 연속으로 설하고, 질문한 여성에게 대답해 주기 위해 여섯 구절 이상 설하는 경우이다.
여덟 번째 바일제인 실제 성취 알림의 계목은 “비구가 실제로 얻은 초인의 상태를 구족계를 받지 않은 사람에게 알리면 참회해야 한다.”는 것이다. 앞의 네 번째 바라이의 경우에는 비구가 음식을 얻기 위해 자신의 깨달음에 대해 거짓 주장을 하는 것이라면 여기서는 음식을 얻기 위해 다른 스님이 실제 얻은 성취를 재가자들에게 알린다는 것이다.
아홉 번째 바일제인 중범계 알림의 계목은 “비구가 다른 비구의 중대한 범계(상잔)를 상가의 승인 없이 구족계를 받지 않은 사람에게 알리면 참회해야 한다.”이다. 상가가 승인한 경우에는 범계가 아니며, 다른 비구의 상잔 범계 이하의 범계를 알리면 둑까따이고, 구족계를 받지 않은 사람(사미, 사미니, 식차마나, 재가자)의 악한 행위를 구족계를 받지 않은 사람에게 알리면 중대한 범계의 여부를 떠나 둑까따이다. 범계 종류와 행위를 모두 말해야 바일제이고 그중의 하나만 말하면 둑까따이다.
열두 번째 바일제인 다른 답변은 “상가에서 답변을 회피하거나 비협조적이면 참회해야 한다.”는 것이고 열세 번째의 바일제인 불평은 “상가의 소임 비구를 비난하거나 불평하면 참회해야 한다.”는 것이다. 상가에 의해 정식으로 승인받은 타락하지 않은 소임 비구를 다른 비구에게 비난하거나 불평하는 것은 바일제이지만 타락한 소임 비구를 비난하는 것은 해당하지 않는다. 그 이외의 사람(승인받은 사미나 재가자 또는 승인받지 않은 비구, 사미, 재가자 등)을 비난하거나 불평하면 둑까따이다.
스물한 번째 바일제인 훈계는 “승인을 받지 않고 비구니를 훈계하면 참회해야 한다.”는 것이다. 훈계할 수 있는 비구의 자격조건에는 다음의 여덟 가지가 있다. 비구가 계율을 잘 지켜야 하며; 삼장에 대한 일반적인 지식을 습득하고 있어야 하며; 계목을 암송할 수 있어야 하며; 적절한 말로 올바르게 법을 설할 수 있어야 하며; 비구니 상가로부터 존경을 받을 만한 비구여야 하며; 비구니에게 유창하게 법을 설해야 하며; 재가자 시절에 비구니와 성관계를 가진 경험이 없어야 하며; 20안거 이상이 된 비구여야 한다. 승인을 받지 않고 비구니를 훈계하면 바일제이지만 비구니 상가에서만 계를 받은 비구니를 훈계하면 둑까따이며 식차마나, 사미니에게 훈계하면 범계가 아니다. 적법하게 승인받지 않은 비구가 비구니의 팔경법(八敬法) 이외의 주제로 비구니를 훈계하면 둑까따이다.
예순네 번째의 바일제인 중한 범계(둣툴라, Duṭṭulla)는 “비구가 다른 비구의 중한 범계(바라이, 상잔)를 알고도 의도적으로 숨기면 참회해야 한다.”는 것이다. 범계가 아닌 경우, 즉 다른 비구에게 말하지 않아도 되는 경우로는, 말하게 되면 상가에 분쟁, 분열이 일어날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경우, 앙갚음을 당해서 생명이나 청정한 삶에 위협을 느끼는 경우, 말하기에 적당한 비구가 없는 경우, 범계를 숨기고자 하는 동기가 없는 경우, 범계의 행위자가 스스로 말할 것이라고 생각되는 경우이다. 다른 비구의 경한 범계, 즉 상잔 이하의 범계를 숨기면 둑까따이다.
5) 잡담
율장에서는 잡담(쓸데없는 말)에 대해 다음의 두 경우를 들고 있는데 각각 바일제 46과 85에 해당한다.
위의 계목에서는 사실 쓸데없는 잡담을 이야기한다는 언급은 없는데 적당한 때와 적당한 시간이 아닌 때 찾아가고, 또한 방문하는 목적이 하나는 공양에 초청받아서 가는 것이지만 탁발 전이나 후에 가고, 다른 하나는 별다른 목적이 거론돼 있지 않으므로 잡담의 경우가 된 것으로 보인다. 네 가지 구업 가운데의 잡담은 이 글의 머리글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릇된 말로 인한 범계 둡바시따에 해당한다. 네 가지 구업 가운데 거짓말은 첫 번째 바일제, 모욕은 두 번째 바일제, 이간질은 세 번째 바일제로 모두 바일제이지만 잡담은 바일제가 아니라 둡바시따이다. 범계의 둡바시따 항목에 “좋지 않은 말, 악의를 가진 말, 농담으로 하는 지저분한 말, 신심이 없는 말을 하면 그릇된 말로 인한 범계인 둡바시따를 범하는 것”이라고 했을 때 여러 가지로 표현된 말들은 다 잡담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경장에는 쓸데없는 잡담에 대한 경계의 말이 여러 군데에 등장한다. 대표적으로 《이야기의 주제 경》에는 어떤 것이 잡담이고 어떤 것이 유익한 말을 하는 것인지가 분명하게 규정돼 있다.
여기서 쓸데없는 이야기로 언급되고 있는 이야기들은 오늘날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만났을 때 가장 많이 하는 이야기의 주제와 별로 다르지 않다. 다만 시대 상황에 따라 그 표현이 달라졌을 뿐이다. 가령 왕 이야기와 대신들 이야기는 정치에 관한 이야기가 될 수 있을 것이고, 탈 것에 대한 이야기는 자동차에 관한 이야기, 비구들이 하는 침대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에게는 아파트 이야기, 집 이야기가 될 것이다. 음식 이야기는 그대로 음식 이야기로 될 수 있지만 여기에 다이어트가 동반될 것이고, 음료수 이야기는 커피 이야기와 온갖 청량음료 이야기로 바뀔 것이고 군대 이야기, 친척 이야기 등 나머지는 여전히 그대로 유효할 것이다.
이렇게 쓸데없는 이야기에 반해서 붓다가 이야기할 가치가 있는 주제들이라고 한 것들은 어떤 것들일까?
붓다는 다른 경에서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법담을 나누고 있는 비구들을 칭찬한 후에 출가한 비구들이 함께 모이면 할 일이 오직 두 가지 있다고 했는데 그것은 “법담을 나누거나 성스러운 침묵을 지키는 것이다.”(《성스러운 구함 경》 MN 26) 성스러운 침묵은 제2선을 가리키지만 이 경우에는 명상 주제에 마음을 집중하는 초선 등도 성스러운 침묵이라는 이름을 얻는다고 주석서는 말하고 있다. 제2선을 성스러운 침묵이라고 하는 것은 제2선에서는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소멸하기 때문에 소리의 감각 장소, 즉 말이 일어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4. 잘 말하는 기준
1) 무엇을
이상에서 불선한 구업으로 인해 받게 되는 범계에 대해서 살펴보았는데 이러한 범계에 저촉되지 않으려면 잘 말해야 할 것이다. 이제 어떻게 말하는 것이 잘 말하는 것인가에 대한 것을 경전을 중심으로 무엇을 말하고 어떻게 말하고 언제 말할 것이냐는 세 가지 기준을 세워서 살펴보도록 한다. 말해야 할 것과 말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교설을 보자.
이어지는 구절에서는 들은 것, 생각한 것, 안 것에 대하여도 같은 방식으로 설해진다. 여기서 말해야 할 것과 말하지 말아야 할 것의 기준은 그것을 말함으로써 생기는 불선법 내지는 선법의 증장과 감소이다. 불선법을 증장시키고 선법을 감소시키는 것은 말하면 안 되고 반대로 선법을을 증장시키고 불선법을 감소시키는 것은 말해야 한다.
이와 관련해서 다른 초기경전에서는 말한다. “무엇이 정어인가? 거짓말, 이간질, 험한 말, 쓸데없는 수다를 삼가는 것, 이것이 정어이다.”(《분석경》 SN 45.8) 이를 통해 정어가 네 가지 구업을 삼가는 것이라는 것은 알 수 있지만 왜 이 네 가지를 삼가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는데 다음의 교설을 통해 이들을 삼가야 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이어지는 구절에서는 중상모략, 모욕, 잡담의 나머지 구업에 대해서도 같은 식으로 말해진다. 위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거짓말 등의 네 가지 구업이 나쁘다고 하는 이유는 이것들이 불선법이 생기는 원인이 되어 해를 끼치기 때문이다.
반대로 이들 구업을 삼가는 정어가 좋은 것은 이를 통해 여러 가지 선법이 증장하여 완성에 이르도록 하기 때문이다. 선법의 증장이 정어에 따른 현생에서의 과보라면 다음은 네 가지 불선한 구업과 그것을 삼가는 네 가지 선업에 따른 내생에서의 과보를 말하고 있다. 먼저 불선한 구업의 과보를 보자.
나머지 세 가지 불선한 구업이 받는 내생의 과보도 모두 거짓말을 해서 받는 과보와 같고 다만 마지막의 가장 경미한 과보만 차이가 있다. 이간질을 해서 받는 가장 경미한 과보는 사람과의 우정에 금이 가게 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과 우정을 맺든지 간에 반드시 그 우정이 깨진다. 모욕을 해서 받는 가장 경미한 과보는 사람으로부터 마음에 들지 않는 소리를 많이 듣게 된다는 것이다. 오나가나 신랄하고 거칠고 귀에 거슬리고 질책하고 급소를 끊는 그런 말을 들을 뿐 마음에 드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 잡담을 해서 받는 가장 경미한 과보는 사람이 그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그대가 무엇 때문에 이 말을 하는가? 누가 당신의 말을 곧이듣겠느냐는 말을 듣게 된다.
다음은 네 가지 선한 구업을 비롯한 선업을 행한 사람이 내생에서 받을 과보에 대한 교설이다.
위의 교설에 따르면 정어를 비롯한 선업을 쌓은 사람이 그에 상응하는 과보를 받게 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다만 그 과보가 현생에서 나타날지 다음 생에서 나타나게 될지 아니면 그보다 더 후생에서 나타나게 될지에 대해서는 확정해서 말할 수 없다. 이제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이 잘 말하는 것인가 하는 구업의 대상은 확실해졌다. 좋은 업을 증장시켜서 완성에 이르도록 하는 선한 구업, 즉 거짓말과 모욕과 이간질과 잡담을 삼가는 정어를 말하는 것이다.
2) 어떻게
잘 말하려면 그 대상뿐만이 아니라 어떻게 말하는가 하는 방식도 중요하다. 그리고 잘 말하는 방식은 앞에서 논한 말해야 할 대상 즉 정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어떻게 말하는 것이 잘 말하는 것인지에 대해 경전은 말한다.
잘 말하는 방식은 위의 교설에 따르면 올바른 때에, 진실하게, 상냥하게, 유익하게, 좋은 의도를 가지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좀 더 들여다보면 이것은 앞서 살펴본 정어와 일맥상통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정어가 거짓말을 삼가고 모욕을 삼가고 이간질을 삼가고 잡담을 삼가는 것이라고 할 때, 거짓말을 삼가면 진실하게 말하는 것이고 모욕을 삼가면 상냥하게 말하는 것이며 이간질을 삼가면 좋은 뜻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고 잡담을 삼가면 유익하게 말하는 것이다. 맨 앞에 올바른 때라는 것이 추가되고 이간질과 잡담의 순서만 바뀌었을 뿐 결국 같은 것을 말한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즉 정어가 거짓말을 비롯한 네 가지 언어행위를 삼가라는 부정적인 방식으로 말해진 것이라면, 진실하게 말하라 등의 말하는 방식은 그것을 긍정적으로 표현한 것에 다름 아니다. 다음의 교설에서 그러한 사실이 더 명백히 드러난다.
우리의 언어 행위는 다섯 가지 말의 길, 즉 다섯 가지 말하는 방식에 따라 행해진다. 그런데 같은 길을 긍정적인 말을 사용해서 가면 좋은 길이 되고 부정적인 말을 사용해서 가면 나쁜 길이 된다. 긍정적인 말을 사용해서 가는 것은 그 길을 진실하게, 부드럽게, 유익하게, 자애로운 마음을 가지고 가는 것이고, 부정적인 말을 사용해서 가는 것은 그 길을 거짓되게, 거칠게, 해롭게, 증오를 품고 가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방식을 사용해서 말하는가에 따라 사람들은 둘로 나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이 어떤 쪽으로 나뉘든지 간에 붓다는 수행자 자신은 거기에 흔들리지 말 것을 당부한다.
언제나 가장 중요한 붓다의 가르침은 여기서도 유효하다. 자기 자신의 마음을 정복한 사람은 가장 위대하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이 설령 나쁜 길이 되는 쪽을 택해서 악담을 퍼붓고 증오를 품고 그와 마주 서더라도 비구는 그에 영향받지 말고 악담 대신에 이로움과 연민을 가지고, 증오 대신에 자애로운 마음을 가지고 그를 대해야 한다. 더 나아가서 붓다는 그를 자애의 대상으로 삼아 공부에 정진하라고 격려한다.
3) 언제
다음으로 잘 말함에서 언제 말할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자. 이를 결정하는 데에도 기준은 다른 곳에서와 같다. 하려는 말이 진실인가, 이익을 주는가,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스러운가, 마음에 드는가의 여부와 함께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따져서 말할 시기를 결정한다.
여기서 언제 말할 것인가의 기준은 세 가지이다. 사실이냐의 여부, 유익한가의 여부,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드느냐의 여부이다. 첫 번째는 셋 다 아닐 때의 경우이므로 말하지 않는 것으로 금방 결정된다. 두 번째는 사실이기는 하지만 두 개의 조건을 채우지 못했을 경우인데 이때도 말하지 않는다. 세 번째는 사실이고 유익되지만 다른 사람의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에는 앞의 두 기준에 비해서 상대방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기준은 덜 중요한 요소이므로 말해주는 것으로 하되 다만 적절한 때를 기다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네 번째는 앞의 두 개가 충족되지 않고 상대방의 마음에 든다는 하나만 충족되므로 역시 말하지 않는다. 다섯 번째는 두 조건은 충족되고 유익한가의 조건만 충족시키지 못했으나 앞의 다른 사람의 마음에 드느냐는 기준보다 유익한가의 중요성이 앞서므로 말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된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 여섯 번째는 세 조건을 다 충족시키므로 말을 해주되, 이때도 역시 바른 시기를 기다린다.
여래가 어떤 것을 말하느냐 말하지 않느냐의 여부와 언제 말해주느냐에 대해 이렇게 신중하게 접근하는 것은 여래가 중생들에게 연민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가장 유익한 쪽으로 가장 좋을 때 진실을 말해주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5. 말해야 할 것과 말하지 말아야 할 것
1) 신중함
이제 잘 말함에서 어떤 것을 말하느냐 말하지 않느냐를 결정하는 가장 신중한 방식에 대한 교설을 보도록 하자. 이 교설에서 권고하는 방식은 자기가 할 말에 대해 그 말을 하기 전에, 하는 동안에, 그리고 하고 나서도 그 말에 대해 깊이 숙고하라는 것이다. 아들 라훌라에게 주는 붓다의 훈계를 보자.
같은 식으로 현재와 과거에 대해서 반조하는 것이 이어진다. 만일 지금 하고 있는 말의 행위를 반조해 봤을 때 이 말의 행위가 해로운 것으로서 괴로움으로 귀결되는 괴로운 과보를 가져오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 말의 행위를 중지해야 한다. 반대로 반조해 봤을 때 지금 행하고 있는 이 말의 행위가 유익한 것이어서 즐거움으로 귀결되고 즐거운 과보를 가져오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와 같은 행위는 계속해도 좋다. 마찬가지로 그 말의 행위를 하고 난 뒤에도 반조해서 그 말의 행위가 해로운 것이어서 괴로움으로 귀결되고 괴로운 과보를 가져온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러한 말의 행위를 스승이나 현명한 동료 수행자에게 실토하고 드러내고 밝혀야 한다. 실토하고 드러내고 밝힌 뒤 미래를 위해 단속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그 말의 행위를 하고 난 뒤에 반조해서 그 말의 행위가 유익한 것이어서 즐거움으로 귀결되고 즐거운 과보를 가져온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밤낮으로 유익한 법들을 공부 지으면서 희열과 환희로 머물게 될 것이다.
여기서 이 말의 행위를 하느냐 마느냐 판단의 기준은 그 말의 행위가 나와 다른 사람을 해치는가 해치지 않는가 하는 것과 그 말의 행위가 괴로움을 가져오는가 또는 즐거움을 가져오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현재, 미래, 과거의 삼세에 같은 식으로 반조해 보아야 한다. 해롭고 괴로움을 가져오는 것으로 판단되면 그 말의 행동을 중단해야 하고, 이롭고 즐거움을 가져오는 것으로 판단되면 그 말의 행위를 계속해도 좋은 것이다.
2) 확실한 표명
위의 교설에서 어떤 말의 행위를 함에서 신중함의 극단을 보았다면 이제 살펴볼 교설은 진실과 사실을 말해야 할 때 확실하게 칭찬할 사람을 칭찬하고 비난할 사람을 비난함으로써 확실하게 자신의 견해를 표명해야 할 것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네 부류의 사람 중 첫 번째 부류는 사실과 진실을 말해야 할 때 비난받을 사람을 비난하지만 칭송해야 할 사람을 칭송하지 않는 사람이다. 두 번째 부류는 사실과 진실을 말해야 할 때 칭송해야 할 사람을 칭송하지만 비난받을 사람을 비난하지 않는 부류이다. 세 번째는 사실과 진실을 말해야 할 때 비난받을 사람을 비난하지도 않고 칭송해야 할 사람을 칭송하지도 않는 부류이다. 마지막 네 번째는 사실과 진실을 말해야 할 때 비난받을 사람을 비난하고 칭송받을 사람을 칭송하는 부류이다. 붓다는 이 가운데 마지막 네 번째 부류의 사람이 더 수승한 사람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이유로서 진실을 얘기할 적당한 때를 아는 것이야말로 경이로운 것이라는 사실을 든다.
6. 맺음말
이 글에서는 율장과 경장에서 구업과 관련된 교설들을 분석함으로써 구업의 유형을 범계와 네 가지 불선한 구업의 기준에 따라 분석해 보았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하여 선한 구업을 짓는 잘 말하는 법에 대해서도 모색해 보았다. 그 결과 율장의 범계에 따라 불선한 구업의 유형은 가장 큰 죄인 바라이에 해당하는 초월한 경지에 대한 거짓 주장과 비교적 가벼운 죄인 바일제에 해당하는 거짓말, 모욕, 이간질의 세 가지 불선업과 담마 암송 등의 다양한 유형의 불선한 구업으로 나눠볼 수 있었다. 경장에서는 네 가지 불선업의 거짓말, 모욕, 이간질, 잡담이 흔히 함께 짝을 해서 설해지는 것을 볼 수 있었고, 또한 각각의 언어행위에 대한 경전 구절들을 살펴봄으로써 거짓말, 모욕, 이간질 잡담의 더욱 깊은 의미를 살펴보았다.
잘 말하는 법에서는 잘 말한다는 것이 사실은 네 가지 불선한 구업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서 이를 긍정적인 관점으로 고쳐서 표현한 것이 잘 말하는 법의 근간이 된다는 사실을 밝혔다. 즉 거짓말을 삼가는 것은 진실하게 말하는 것으로, 모욕을 삼가는 것은 상냥하게 말하는 것으로, 이간질을 삼가는 것은 좋은 뜻을 가지고 말하는 것으로, 잡담을 삼가는 것은 유익하게 말하는 것으로 긍정적 관점에서 표현된 것이다. 그리고 이에 새롭게 덧붙여서 잘 말하는 데에 중요한 요소로 등장한 것이 적절한 때에 말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잘 말하는 법의 기준을 설정해 보자면 진실을 말하는가, 상냥하게 말하는가, 좋은 뜻을 가지고 말하는가, 유익하게 말하는가의 네 가지와 마지막으로 적절한 때에 말하는가를 추가한 다섯 가지가 될 것이다. 이와 함께 확실한 의사 표명을 했느냐는 기준에 따라 그 말한 것을 보고 사람의 부류를 네 가지로 나눈 교설에서는 사실과 진실을 말함에서 비난할 사람은 비난하고 칭송할 사람은 칭송하는 사람을 더 수승한 사람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러한 평가도 잘 말하는 법에서 함께 고려해야 할 사항이 될 것이다.
이러한 기준을 실제 우리의 언어 행위에 적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엿보기 위해 현재 항간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에 간단히 적용해 보는 시도를 해보기로 한다. 먼저 진실하게 말하고 있는가의 기준을 적용한다면 서로 자기 말이 진실이라고 하는 여러 가지 상반된 주장이 난무하고 있어서, 정확한 정보를 가려낼 수 있는 수단이 부족한 일반인들은 그 진위 여부를 가릴 수 없다. 다만 각자가 접근 가능한 정보에 따라 나름대로의 판단은 내릴 수 있을 것이다. 나머지의 기준들, 즉 상냥하게 말하고 있는가, 좋은 뜻을 가지고 말하고 있는가, 유익하게 말하고 있는가 가운데서 좋은 뜻을 가지고 말하고 있는가와 유익하게 말하고 있는가 하는 두 가지는 그 중심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전혀 상이한 결과가 도출될 수 있다. 가령 나한테는 해가 되어도 다른 사람들을 유익하게 하기 위해서 말해야 한다고 판단할 수가 있으며, 또 그럴 경우에 다른 사람들이란 어떤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냐에 따라 결과가 또 달라질 수 있다.
또한 앞에서 마지막으로 살펴본 네 부류의 사람들에 관한 교설에 따르면 사실과 진실을 말해야 할 때 비난할 사람은 비난하고 칭송할 사람은 칭송하는 사람이 더 수승한 사람이라고 했으니, 이에 따르면 두리뭉실하게 넘어가는 것은 용납되지 않으며 자신이 설 자리를 분명하게 선택하는 태도가 요구된다. 이런 몇 가지 사항만 고려해보아도 교설에서 비교적 구체적으로 잘 말할 수 있는 기준을 제시한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실제 적용에서는 어떻게 적용하는가에 따라 잘 말하는 것이 다르게 될 것이다.
결국 최종 판단은 각자가 현재 위치해 있는 지적 정서적 능력에 따라 깜냥껏 판단해서 잘 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펼쳐진다. 그나마 경전의 교설에서 찾아볼 수 있는 기준에 따라 선한 구업을 지으려고 계속 노력하다 보면 점차 좋은 방향으로 나가지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를 품어보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
한성자 / 동국대 평생교육원 강사.이화여대 독문과 대학원을 졸업한 후 독일 보훔대학에서 독문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고 이화여대 등에서 독문학을 가르쳤다. 동국대에서 불교학 박사학위를 받고 동국대 강사, BK21 연구교수 등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