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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6년 8월 5일 수요일
[(녹) 연중 제18주간 수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백] 성모 대성전 봉헌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예레미야 예언자에게, 당신께서는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하느님이 되시고 그들은 당신의 백성이 되리라고 하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마귀 들린 자신의 딸을 위하여 자비를 청하는 가나안 부인의 믿음을 칭찬하시며 그의 딸을 고쳐 주신다(복음).
제1독서
<나는 너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였다.>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 31,1-7
1 그때에 나는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 주님의 말씀이다.
2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칼을 피해 살아남은 백성이 광야에서 은혜를 입었다.
이스라엘이 제 안식처를 찾아 나섰을 때
3 주님께서 먼 곳에서 와 그에게 나타나셨다.
“나는 너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였다.
그리하여 너에게 한결같이 자애를 베풀었다.
4 처녀 이스라엘아, 내가 너를 다시 세우면 네가 일어서리라.
네가 다시 손북을 들고 흥겹게 춤을 추며 나오리라.
5 네가 다시 사마리아 산마다 포도밭을 만들리니
포도를 심은 이들이 그 열매를 따 먹으리라.
6 에프라임 산에서 파수꾼들이 이렇게 외칠 날이 오리라.
‘일어나 시온으로 올라가 주 하느님께 나아가자! ’”
7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야곱에게 기쁨으로 환호하고, 민족들의 으뜸에게 환성을 올려라.
이렇게 외치며 찬양하여라.
‘주님, 당신 백성과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구원하소서!’”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5,21-28
그때에 예수님께서 21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가셨다.
22 그런데 그 고장에서 어떤 가나안 부인이 나와,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23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제자들이 다가와 말하였다.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24 그제야 예수님께서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25 그러나 그 여자는 예수님께 와 엎드려 절하며,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26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8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어른이 된 지금은 잘 먹지 않지만 초등학생 시절에는 과자를 많이 먹었습니다. 용돈을 모아서 사 먹기도 하였지만, 때로는 친구가 과자를 먹고 있으면 슬며시 다가가서 조금만 달라고도 하였습니다. 서슴없이 잘 나누어 주는 친구도 있지만 끝까지 주지 않는 녀석도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친구가 과자를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봉지는 내가 버릴게.” 하며 그것을 가져왔습니다. 왜 그랬냐고요? 봉지를 탈탈 털면 부스러기라도 맛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끔은 부스러기까지 털어 먹고 주는 놀부 심보를 가진 친구도 있었지만요. 아무튼 그때 과자 부스러기라도 좀 먹어 보려고 애를 썼던 기억이 납니다.
성체 분배가 끝나고 제대 위에 놓인 성합과 성반과 성작을 정리할 때, 성체 조각이나 부스러기가 남아 있으면 조심스럽게 모십니다. 모양이 온전한 성체가 아니더라도 함부로 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성체를 모시다가 손에 성체 가루가 묻으면 먼지 털 듯 손을 털지 않습니다. 그 가루까지 우리 안에 모십니다. 성체를 소중히 대하는 마음이 담겨 있는 태도입니다.
작은 부스러기라도 소중히 여기는 마음, 그 부스러기라도 먹고 싶은 간절함을 요즘은 찾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언제든 성체를 모실 수 있어서, 습관처럼 받아 모시고 있어서 그 간절함이 덜해진 것은 아닐까요?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태 15,27). 오늘 복음에 나오는 여인의 지혜로운 대답에서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게 됩니다.(유청 안셀모 신부)
더 큰 성장, 더 큰 도약을 위해!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당이나 교회, 병원이나 상점 등 공공장소에서 소란을 피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른바 진상 고객입니다. 업체에서는 그런 분들의 리스트를 만들어 특별 관리를 하며, 강력하게 대처합니다.
그들의 대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생각해보았습니다. 자신이 안고 있는 심각한 문제나 어려움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해결될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이 들 때 그럴 것입니다. 어딜 가나 사람들이 나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고 단정지으니 더 악이 받쳐 그런 행동을 합니다.
그러다보니 나름 어쩔 수 없이 살아가는 방식이 소리소리 지르고, 폭력을 행사하고, 뒤집는 것입니다. 그런 행동 이면에는 큰 상처나 약함이 자리잡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그런 진상고객으로 인해 힘든 순간을 보내셨습니다. 갑작스레 가나안 부인이 등장해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 바로 뒤를 따라 다니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습니다. 제자들이 제지를 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가만히 들어보니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습니다. 가나안 여인의 딸이 호되게 마귀에 들려 사는게 사는게 아니었습니다. 수시로 자해를 하고 틈만 나면 괴성을 지르고, 발작을 시작하면 장정 여럿이 달라붙어도 제어하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렇게 하루하루 죽어가는 딸의 모습이 너무 안타까웠던 나머지 예수님께로 달려온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그런데 오늘따라 예수님께서 바로 치유의 능력을 발휘하지 않으십니다. 살짝 뜸을 들이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얄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다른 곳에서는 청하기도 전에 인간 측의 결핍을 눈여겨보시며, 먼저 다가오셔서 치유의 은총을 베풀던 주님이셨는데, 오늘은 대체 왜 이러실까요?
여러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예수님께서 그녀의 믿음을 더욱 촉구하는 분위기로 여겨집니다. 보십시오. 여인은 단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습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도에 지나치는 굴욕적인 발언에도 눈 하나 꿈적하지 않고 또 한 번 크게 자신을 낮춥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여인의 딸을 향한 지극한 사랑, 겸손한 자세, 예수님께서는 반드시 자신의 소원을 들어주실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이 결국 기적을 불러오게 됩니다.
가끔씩 사람을 키우는 큰 스승님들의 제자 교육방식을 눈여겨봅니다. 때로 칭찬도 필요합니다. 당근과 격려도 필요합니다. 용기와 자신감을 불어넣어주는 위로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때로 더 큰 성장, 더 큰 도약을 위해, 더 큰 완성을 위해 뼈를 깎는 노력을 해보라는 차원에서의 자극, 채찍질도 필요한 것입니다. 더 큰 사람이 되라, 스승인 나를 넘어서라는 의미에서 혹독한 과정도 의도적으로 거치게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비슷한 마음이 아니셨을까요? 여인에게 더 큰 믿음을 주시기 위해 자극을 주신 것입니다. 더 크게 한걸음 나아가라고 살짝 튕긴 것입니다.
딸의 치유는 사실 그녀가 얻은 것 가운데 작은 선물이었습니다. 더 큰 선물, 더 큰 깨달음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 이 세상에서의 일회적인 치유와 회복뿐이 아니라 영원한 치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구세주 하느님임을 믿게 된 것입니다.
비록 짧은 순간이었지만 여인의 내면 안에서는 큰 도약과 성장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육체의 치유자를 넘어 영혼의 치유자란 사실을 굳게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주인임을 넘어 또 다른 세상의 주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궁(窮)하면 통(通)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궁하다는 것은 막다른 곳에 이르렀다는 뜻입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고,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느끼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서 뜻밖의 길이 열릴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궁하면 통한다.’라고 말합니다. 신앙의 눈으로 보면, 인간의 길이 막힌 자리에서 하느님의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내 힘이 다한 자리에서 하느님의 은총이 통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한국의 반도체가 ‘HBM’ 메모리로 큰 성과를 거두었다고 합니다. 이전의 반도체가 한 층으로 된 단층 구조였다면, HBM 반도체는 여러 층을 쌓아 올리는 방식이라고 합니다. 이런 발상을 했던 과학자가 서울에서 대전으로 가는 차 안에서 길가의 아파트 공사를 보았다고 합니다. 아파트의 층이 하나씩 올라가는 것을 보면서, 반도체도 저렇게 층층이 쌓으면 더 많은 정보를 담고 더 빠른 성능을 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꿈같은 이야기였지만, 그 발상이 인공지능 시대를 만나면서 큰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막혀 있는 것처럼 보였던 기술의 한계가 새로운 생각을 통해서 열리게 된 것입니다.
저도 사목 현장에서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작은 성당에서 가정방문을 하다가 태권도 사범님을 만났습니다. 저는 그분에게 성당에서 아이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칠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사범님은 기꺼이 도와주겠다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7명의 아이가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100명이 넘는 아이들이 태권도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태권도를 배우면서 자연스럽게 성당에 오게 되었고,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아이들이 세례를 받자, 부모님들도 성당에 나오게 되었고, 부모님들도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작은 시작이 큰 결실이 되었습니다. 그때 저는 ‘궁하면 통한다.’라는 말을 사목 현장에서 체험했습니다. 차동엽 신부님은 ‘통하는 기도’를 이야기하였습니다. 기도는 하느님께 내 뜻을 관철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과 내가 통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길과 나의 마음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궁한 처지에 있을 때, 기도는 더 간절해집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느낄 때, 우리는 비로소 하느님께 마음을 열게 됩니다. 그래서 궁한 사람의 기도는 때로 더 깊고, 더 진실합니다. 부족하기에 기도하고, 막혔기 때문에 두드립니다. 그리고 그 두드림 안에서 하느님의 문이 열립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 안에서 궁한 사람들에게 통하는 표징을 보여 주셨습니다. 베짜타 못가에 있던 병자는 서른여덟 해 동안 아무도 자기를 못에 넣어 주지 못한다고 하소연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라고 하셨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눈먼 사람은 세상의 편견 속에 살았지만, 예수님을 만나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나병환자는 사람들 가까이 갈 수도 없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손을 내미시고 깨끗하게 해 주셨습니다. 백인대장은 이방인이었지만, 자기의 종을 살려 달라고 예수님께 간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 종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모두가 궁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모두가 막다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들의 삶은 통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가나안 여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여인은 이방인이었습니다. 당시 유다인들의 시선으로 보면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갈 자격이 없다고 여겨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딸이 마귀 들려 몹시 고통받고 있었기에 물러설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도, 제자들의 냉담함도, 예수님의 침묵도 그 여인을 멈추게 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라고 말씀하셨을 때도 그 여인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그 말 안에는 절망이 아니라 믿음이 있었습니다. 체념이 아니라 간절함이 있었습니다. 자존심을 앞세우는 마음이 아니라, 딸을 살리고 싶은 어머니의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자기 처지를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비가 자기 처지보다 크다는 것도 믿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그 순간 여인의 딸은 나았습니다. 궁한 여인의 기도가 예수님의 자비와 통하였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막히는 순간이 있습니다. 건강이 막히고, 관계가 막히고, 일이 막히고, 마음이 막힐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길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그때를 끝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때가 바로 기도의 시간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가 바로 하느님의 은총이 통하는 시간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궁한 자리는 부끄러운 자리가 아닙니다. 궁한 자리는 하느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자리입니다. 궁한 자리는 믿음이 깊어지는 자리입니다.
시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 네 길을 맡겨라.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께서 몸소 해 주시리라.” 이 말씀은 달리 말하면 “모든 것이 잘될 것이다.”라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물론 이 말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고통이 사라지고, 문제가 한순간에 풀리고, 우리가 원하는 대로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삶이 막히고, 마음이 무너지고, 길이 보이지 않을 때도 하느님께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 맡기면, 하느님의 때에, 하느님의 방법으로, 하느님께서 길을 열어 주신다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의 가나안 여인은 바로 그 믿음을 보여 줍니다. 딸이 고통받고 있었고, 사람들의 시선은 차가웠고, 예수님의 응답도 처음에는 침묵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라는 그 간절한 기도 안에는 “모든 것이 잘될 것이다.”라는 믿음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 믿음은 결국 예수님의 마음과 통하였고, 딸은 치유되었습니다.
우리는 쉽게 포기합니다. 한두 번 기도하다가 응답이 없으면 그만둡니다. 한두 번 노력하다가 결과가 없으면 내려놓습니다. 그러나 오늘 가나안 여인은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믿음은 끝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사랑은 쉽게 물러서지 않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께서 응답하실 때까지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것입니다. 야구에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것이 아니다.” 신앙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께 의지하고, 하느님의 자비를 붙잡는다면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닙니다. 궁하면 통합니다. 그러나 저절로 통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으로 두드릴 때 통합니다. 겸손으로 엎드릴 때 통합니다. 사랑으로 포기하지 않을 때 통합니다. 오늘 복음의 가나안 여인처럼, 우리도 삶의 막다른 자리에서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 기도는 절대 헛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넓고, 하느님의 은총은 우리가 기대하는 것보다 깊습니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것이 아닙니다. 궁하면 통하는 것이 신앙의 힘입니다. 주님께 맡기고 신뢰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잘될 것입니다.
<나 당신 믿기에>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마태 15,28)
당신께서 나에게
마침내 오시리라 믿기에
당신께서 나에게
오실 때까지
다가가고 또 다가갑니다
당신께서 나에게
마침내 들으시리라 믿기에
당신께서 나에게
들으실 때까지
부르짖고 또 부르짖습니다
당신께서 나에게
마침내 여시리라 믿기에
당신께서 나에게
여실 때까지
두드리고 또 두드립니다
당신께서 나를
마침내 품으시리라 믿기에
당신께서 나를
품으실 때까지
안기고 또 안깁니다
당신께서 나에게서
마침내 이루시리라 믿기에
당신께서 나에게서
이루실 때까지
바라고 또 바라나이다
오늘의 축일
성모 대 성전 봉헌 축일
성모 설지전(聖母殿)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인 352년 에스퀼리노 언덕위에 성모 마리아를 위하여 세워졌으며 유럽 가톨릭 교회 사상 최초로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된 성당으로, 처음에는 ’성모 설지전’이라고도 하였다.
5세기에는 교황 식스또 3세가 성당을 확장, 개축하였으며 교황 그레고리오 11세 때에 로마네스크 양식의 종탑이 건축되었다. 건물은 중앙의 신랑(身廊)을 중심으로 하여 좌우 20개의 이오니아 식 열주(列柱)로 좌우 측랑(側廊)이 나뉘어진 전형적인 성당이다. 성당의 내부는 신랑(身廊)의 양벽, 위, 승리의 아치 위, 넓은 후진, 정면의 안쪽이 화려한 모자이크로 장식 되었다.
이 중의 승리의 아치 위에 있는 것과 신랑(身廊) 벽 위에 있는 것은 5세기의 것이라고 한다. 이들 모자이크는 성서의 내용을 다루고 있으며, 그 아름다움과 신비함으로 이 성당을 더욱 유명하게 하였다. 에페소 공의회가 431년 예수의 어머니를 ’천주의 모친’이라고 장엄하게 선포한 후 교황 시스또 3세(432-440)는 로마의 에스킬리노 언덕에다 천주의 거룩한 모친을 기념하여 대성당을 재건하였는데, 훗날 그 성당은 성모 대성당(산타 마리아 마죠레)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것은 서방에서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바친 가장 오래 된 성당이다.
352년부터 366년에 이르는 13년간, 즉 성 베드로를 계승한 교황 리베리오 시대에
로마에 요한이라는 독실한 신자인 귀족이 있었다.
오래 전부터 역시 경건한 아내를 맞이하여 평화스럽고 원만한 가정을 이루어 행복한 나날을 보내었으나, 그 가정에 부족한 것이 하나 있었는데, 곧 자녀가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자녀를 얻기 위하여 열심히 기도를 했다.그러나 하느님의 뜻은 딴 곳에 있었음인지 그의 기도도 아무런 효과를 내지 못하고 둘이 다 연로해져 이제 다시는 자녀에 대한 희망조차 갖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막대한 재산을 성모께 바치기로 했다.그런데 어떻게 바쳐야 되는지를 모르던 두 부부는 열심히 기도하며 자선도 하고 단식제를 지키며 주님의 계시만 기다렸다.그의 소원은 드디어 이루어졌다.
즉 8월 4일이 지나 5일이 되는 밤중에 거룩하신 동정녀 마리아께서는 그 부부의 각자의 꿈에 나타나시어 “로마의 에스퀼리노 언덕에 나를 위한 성당을 세워라. 그 장소는 눈이 하얗게 내린 곳이니 즉시 알 것이다”하고 말씀하셨다.아무리 묵시라고는 하지만 찌는 듯한 이 삼복 더위에 과연 눈이 왔을까 하는 반신 반의의 생각에서 우선 날이 새기만 기다렸다. 동이 트자 둘이 달려가 본즉 어찌 된 일인가! 과연 눈이 하얗게 와 있지 않은가! 그것도 꼭 성당을 지을 장소에만 눈이 내려와 딴 곳은 전혀 눈이 내리지 않았다.
신기함과 기쁨에 사로잡힌 부부는 곧 교황 알현을 청했다. 교황께 그이야기를 말씀드리니, 교황께서도 다른 사제들을 대동하고 그곳으로 향했다. 이미 소식을 듣고 그곳에 모여든 수많은 군중들은 삼복 중에 백설을 보고 이는 거룩하신 동정 성모의 순결을 상징함이라 하며 모두들 경탄해 마지 않았다. 이런 뚜렷한 기적을 본 군중들은 모두 감동되어 하느님과 성모께 찬미를 드렸다. 모두가 성모를 위한 헌신적 정신에서 이 공사에 임했으므로 참으로 눈부신 진척을 보았고, 그 이듬해에는 교황께서 그 성당 축성을 하게끔 되었던 것이다.
이 새 성당은 성모께 봉헌한 성당이면서도, 최초에는 이와 관계가 깊은 성스러운 교황의 이름을 따라 리베리오 성당이라고 불렀다. 그 후 예루살렘에서 아기예수가 누웠던 말구유가 이 성당에 안치된 후부터는 말구유의 성모 성당이라고 불렀으나 로마의 다른 성당과 구별하기 위해 이를 ‘마리아마죠레’ 즉 ‘대 성모 성당’이라고 했다. 이는 그 규모의 미려함이 다른 성당을 훨씬 능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8월 5일 삼복 더위 중에 내린 기적적 백설(白雪)을 기념하기 위하여 ‘성모 설지전(聖母雪地殿)’이라고도 한다.
이 성당은 지금도 로마에 웅장하게 솟아 있어 그 고귀한 대리석이며 정교한 모자이크의 아름답고 화려함은 비할 데가 없다.
이 성당에는 많은 유물이 안치되어 있으며 계속 각국에서 순례객들이 와서 기도를 바치고 있다. 즉 이 성당은 순례자들이 반드시 참배하는 로마의 대 성당 중의 하나로 되어 있다.
오늘의 성인
성 오스왈도 (Oswald)
활동년도 : 604?-642년
신분 : 왕, 순교자
지역 : 노섬브리아(Northumbria)
같은 이름 : 오스왈두스, 오스왈드
성 오스왈두스(Oswaldus, 또는 오스왈도)는 그의 부친 애설프리스(Ethelfrith)가 616년에 이스트 앵글스(East Angles)의 왕 레드왈드(Redwald)에게 피살되었을 때 노섬브리아에서 스코틀랜드로 강제로 끌려갔었다. 이때 그는 스코틀랜드의 이오나(Iona)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다. 그 후 그의 외삼촌인 에드윈(Edwin) 왕마저 머시아(Mercia)의 왕 펜다와 브리튼의 왕 카드왈라에 의하여 피살되자, 그는 군대를 일으켜 카드왈라를 헥스햄(Hexham) 교외의 전투에서 물리치고 노섬브리아의 왕이 되었다.
그는 만일 이 전투에서 승리할 경우에는 이 승리를 성 콜룸바(Columba, 6월 9일)에게 바칠 것이라고 약속하고 전투 전날에는 거대한 십자가를 세웠다. 그리하여 그는 성 아이다누스(Aidanus, 8월 31일)에게 전국에 복음을 선포하도록 도와주면서 린디스파른(Lindisfarne) 섬을 기증하고 주교좌로 삼도록 배려하였다. 그는 성당과 수도원을 많이 세웠고, 스코틀랜드에서 수도자를 이주시켜 자기 백성들의 신앙생활을 돌보게 하였다. 또한 그는 웨식스(Wessex)의 첫 번째 그리스도인 왕 치네질스(Cynegils)의 딸인 치네부르가와 결혼하였는데, 불과 몇 년 후에 펜다와의 전투에서 사망하였다.
성 에미그디오 (Emygdius)
활동년도 : +304년
신분 : 주교, 순교자
지역 :
같은 이름 : 에미그디우스, 에미디오, 에미디우스
전설에 의하면 성 에미그디우스(또는 에미그디오)는 독일 남서부 트리어(Trier)에 살던 이방인 튜튼 사람인데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다. 그는 로마(Roma)로 갔다가 큰 봉변을 당하고 축출되었는데, 그가 이방인들의 신전에 있는 우상을 파괴하였기 때문이었다. 그 후 그는 사제로 서품되어 이탈리아 아스콜리피체노(Ascoli Piceno) 지방을 순회하는 복음 선교사가 되었다.
그가 수많은 개종자를 얻고 선교 사업에서 크게 성공한 이유는 그 자신이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에 체포되어 참수를 당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296-304년 사이에 재임하였던 교황 마르첼리누스(Marcellinus)에 의하여 사제로 서품되었다. 성 에미그디우스는 지진 방지를 위한 수호자이다. 그는 에미디우스(Emidius)로도 불린다.
성녀 아프라 (Afra)
활동년도 : +304년경
신분 : 순교자
지역 :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
같은 이름 :
로마 아우크스부르크의 초기 순교자 명단에 성녀 아프라가 나타나지만 역사적인 근거는 희박하고 전설로만 전해온다. 그녀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치하의 박해 때 그리스도인으로 체포된 매춘부였다고 한다. 감옥에서 그녀는 하느님을 포기하라는 심문에 대하여 “내 몸은 죄를 지었으니 벌을 받아 마땅하나, 내 영혼을 이런 우상으로 파멸시킬 수는 없다”고 대답하여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고 전한다. 아프라는 사형 언도를 받고 레흐(Lech) 강의 섬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그녀의 어머니가 시체를 거두어 장례를 치렀다고 전해온다.
성녀 논나(Nonna)
신분 : 부인, 평신도
활동지역 : 나지안주스(Nazianzus)
활동연도 : +374년
자세한 전기는 알 수 없으나 성녀 논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레고리우스(Gregorius)란 사람과 결혼했는데, 남편은 카파도키아(Cappadocia)의 나지안주스의 지사였으며 유대인 이교인 그룹의 주요 멤버였다.
그녀는 오로지 자신의 표양만으로 남편을 그리스도인으로 개종시켰을 뿐만 아니라 사제가 되게 하였고, 그 후에는 주교까지 된 나지안주스의 성 그레고리우스(1월 1일)를 후원한 장본인이다. 그녀의 세 아이들 역시 모두 성인이 되었다. 나지안주스의 성 그레고리우스(1월 2일), 나지안주스의 성 카이사리우스(Caesarius, 2월 25일) 그리고 성녀 고르고니아(Gorgonia, 12월 9일)가 그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