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숨결을 찾아서/靑石 전성훈
“ 백제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하다.”는 제목을 내걸고 떠나는 도봉문화원 10월 인문학 기행의 목적지는 늘 다정하고 따듯한 정감을 주는 충청남도 공주다. 문화원 일정표를 보니까 처음 들어보는 지명과 처음 가보는 곳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고마나루와 국립공주박물관이다. 고마나루에는 어떤 슬픈 전설이 전해오는지 궁금증 갖은 채 설레는 마음으로 길을 떠난다.
버스 안에서 쪽잠을 자고 났더니 저만치에서 금강이 보이기 시작한다. 유유히 흐르는 금강, 다리를 건너서니 왼쪽 야트막한 산등성이에 공산성이 보인다. 오전 10시 20분경 갑사 입구에 도착하여 주위를 둘러보니, 아련한 기억 속의 옛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절 입구의 어림잡아 수백 년은 되어 보이는 커다란 느티나무만 그때 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듯하다.
현지 여성 해설사를 따라서 숲길을 걸으며 갑사 경내로 향한다. ‘갑사홍매화축제’를 알리는 현수막 아래로 보이는 시화전 숲길이 반긴다. 일주문에 계룡산갑사(鷄龍山甲寺)라는 글이 보인다. 울창한 숲에서 나오는 피톤치드 향기를 맡으며 마음을 사로잡는 멋지고 아름다운 숲길을 걷는다. ‘봄은 마곡사 가을은 갑사’[춘마곡추갑사]라는 말이 있듯이, 아직 단풍이 본격적으로 물들지 않았지만, 마음의 눈으로 붉게 불타는 가을 갑사 정경을 그려본다. 계룡산 3대 사찰은, 임진왜란 당시 승병을 이끌었던 ‘영주대사’의 영혼이 숨 쉬는 갑사, 도교와 무속(巫俗)에 관련된 사람이 계룡산의 정기를 얻으려고 모여드는 신도안 부근의 신원사(新元寺), 유교의 영향으로 절 입구에 홍살문이 있는 동학사(東鶴寺)이다. 갑사 대웅전으로 올라가는 큰길 대신에 작은 숲길로 걸어가면 철당간(鐵幢竿)을 볼 수 있다. 당간은 법회 따위의 의식이 있을 때 쓰는 기(旗)를 달아 세우는 장대를 뜻한다. 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을 모신 대적전(大寂殿)을 둘러보고 돌로 만든 아치형 해탈문을 지나 대웅전으로 간다. 대웅전 바깥을 오른쪽으로 돌며 자세히 보면 다른 절에서는 볼 수 없는 작은 쪽문이 보인다. 이 쪽문은 야단법석(野壇法席)할 때 대웅전에 보관 중인 괘불을 손쉽게 꺼내기 위한 괘불 출입문이다. 괘불(掛佛)은 절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기 위해 법당 앞뜰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던 대형 불교 그림이다. 갑사에서 계룡산으로 올라가는 등산로 입구 부근 한쪽에는 불자들이 소원을 비는 곳이 있다. 소원을 비는 제단에 ‘갑사 초 아니면 소등합니다. 장학금으로 쓰는 후원금입니다’라는 문구가 보인다. 1600년이 넘는 사찰에서도 허덕거리며 힘들게 살아가는 시장의 ‘장사꾼’ 같은 냄새가 나는 듯하여 조금은 씁쓸하다.
갑사를 떠나서 무령왕릉과 왕릉원을 찾는다. 시간이 한낮이 되자, 가을 햇살이 가득하여 아침과는 달리 덥다. 삼국시대 왕릉 중에서 무덤 주인공의 신분을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유일한 왕릉이 무령왕릉이다. 1971년 7월 고분군의 장마철 피해 방지를 위해 배수로 공사를 하던 중에 6호분 옆에서 벽돌무덤의 입구가 발견되었다. 발굴단이 가장 먼저 본 것이 입구에 놓여있는 진묘수(鎭墓獸, 왕릉을 수호하는 상상 속의 동물)와 지석이다. 지석(誌石)에는 무덤의 주인공이 무령왕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라 왕과 왕족 무덤인 경주 대릉원과 이곳 공주 왕릉원을 비교해보면 서로 다른 것을 느낄 수 있다. 경주 대릉원은 평지에 봉분을 높이 쌓은 형식인데, 공주 왕릉원은 구릉지의 자연환경을 그대로 이용하여 구릉지 옆에서 파고 들어가 무덤을 만들었다고 한다. 게다가 백제의 수도였던 웅진(공주)과 사비(부여)는 백제의 멸망으로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하지만 신라는 나라를 고려 왕건에게 넘겨준 덕분에 경주는 파괴를 면하고 일정 한도 내에서 자치권을 보장받았다. 신라 천년 고도 경주와 백제의 문화 유적과 유산을 단순 비교하는 것은 올바른 방식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오후에 고마나루와 국립공주박물관을 찾는다. 고마나루에는 곰 사당이 있다. 고마나루는 공주의 옛 지명으로서 ‘고마(固麻)’는 곰의 옛말로 한자로 웅진(熊津)이라고 한다. 금강산에 ‘선녀와 나무꾼’의 전설이 있듯이, 금강의 옛 나루터인 고마나루에는 어부와 곰처녀의 슬픈 이야기가 전해온다. ‘나무꾼과 선녀’의 판박이 버전으로 내용은 정반대이다. 한 어부가 인근 연미산(燕尾山)의 암곰에게 잡혀서 부부의 인연을 맺어 두 명의 자식까지 두었으나, 어부가 도망가 버리자 그것을 비관한 암곰이 자식과 함께 금강에 빠져 죽었다는 전설이다. 고마나루는 금강변에 넓게 펼쳐진 백사장과 수백 그루의 솔밭이 금강과 연미산과 어우러져 매우 아름답다.
다시 공주를 찾으며 생각해보니, 강원도 강릉을 제외하고 공주만큼 많이 다녀간 곳도 없는 듯하다. 왜 그럴까, 무슨 까닭일까 하고 잠시 눈을 감고 옛날을 떠올려본다. 공주는 젊은 날의 애틋한 사연이 숨 쉬는 곳이다. 그렇다고 연모하고 그리워하던 사람이 살던 장소도 아니다. 유신체제로 휴교령이 발동되어 학교에 갈 수 없었던 70년대 그 옛날, 갑사 부근 민박집에서 이틀 밤을 지새우며, 군사 독재 정권을 저주하고 세월을 탓하며 젊음의 고민과 청춘의 아픔을 피를 토하듯이 아파했고, 가을 단풍이 물씬 물든 계룡산으로 세월을 낚으려고 떠났던 추억이 깃든 곳이다. 그런가 하면 겨울 방학 때 혼자서 무전여행을 하며 찾은 고장이기도 하다. 눈 내리는 공산성에 올라가서 무심한 금강을 쳐다보고, 갑사행 막차 시간에 맞추어 터미널 앞 포장마차에서 꼬치구이에 잔 소주를 마시고, 밤늦은 시간에 갑사에서 일하는 분을 만나 요사채 빈방에서 냉기로 벌벌 떨며 한숨도 자지 못하던 일, 다음 날 아침 제대로 된 등산 장비도 없이 빈속에 무릎까지 눈이 푹 쌓인 위험한 산길을 넘어서 동학사까지 갔다가, 물에 빠진 생쥐 같은 내 모습을 보고 중년의 아저씨가 막걸리를 사 주었던 잊을 수 없는 기억도 생생하다. 젊은 날의 꿈과 이상이 좌절되어 산처럼 쌓인 슬픔도, 어처구니없는 젊은 객기도 말없이 받아주는 엄마의 가슴같이 따뜻한 곳이 갑사와 동학사를 품은 공주다.
가을 속 인문학 기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달리는 자동차 창밖으로 노을이 진다. 황혼의 태양은 처연하도록 아름다운 붉은색을 띠며 찬란하게 빛난다. 마무리 짓는 행동에는 진한 슬픔이 깃들듯이 하루를 마치고 사그라지는 저 태양도 서러움이 북받치는가 보다. 이곳에서 지는 해는 다른 곳에서 웅장한 모습으로 그 얼굴을 내민다. 삶이란 만나면 헤어지고 헤어지면 만난다지만, 오직 한 번뿐인 인간의 숙명을 어찌하겠는가? (2024년 10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