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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올바른 죄인의식으로 회개의 열매를 맺어야 건강한 신앙입니다.(마3:1-12)
2024, 2/11 설교문
오늘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시는 말씀은 마3:1-12절 말씀으로“올바른 죄인의식으로 회개의 열매를 맺어야 건강한 신앙입니다.”이런 제목으로 말씀 전할 때 주의 크신 은혜와 사랑이 이곳에 충만하길 원합니다.
낼까지가 설 연휴인데, 가족들을 만나다보면 너무 편해서 말을 너무 쉽게 하거나, 또 술 먹고 하지 말아야할 말을 하여 가족관계가 깨지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이런 말 들어봤어요?‘친구는 가까이, 적은 더 가까이, 가족은 더 더 가까이.’뒷부분은 제가 지었으니 못 들어봤겠지요.^^ 가족을 내 몸처럼 생각하고 가까이 지내야하는데 우리 신앙인에게 가족은 혈육보다 어쩌면 믿음의 가족이 더 가족입니다. 이런 영적의미를 깨닫고 교회공동체를 중심의 삶이 이어졌으면 합니다.
이게 잘 되면 정말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그런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는지요? 우리 인사 나누겠습니다. 사랑합니다. 반갑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3가지로 은혜를 주셨습니다.
첫째로, 성도는 후회가 아니라 회개를 해야 합니다.(2절)
둘째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원칙을 지키는 것에서 시작합니다.(8절)
셋째로, 잘못된 선민의식보다는 올바른 죄인의식이 더 낫습니다.(9절)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인생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살아온 삶에 대해 후회를 많이 합니다. 어떨 때는 그 후회가 과해서 무력감에 빠지고, 우울증에 걸리기도 하며, 자책의 수준을 넘어 자학에 이르고 자살까지 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후회는 대안은 없고 후회만 하기 때문에 문제가 심각해짐으로 후회보다는 회개하는 것이 훨씬 더 좋습니다. 또한 회개를 하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하는데, 그래야 진정한 회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회개도 잘못된 선민의식을 가진 사람은 어렵습니다. 때문에 자신을 잘 알고 겸손하고 올바른 죄인의식으로 살아야합니다. 그런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말씀을 따라가면서 잘못된 선민의식보다는 올바른 죄인의식을 가질 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음을 성령이 들려주시는 하나님음성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성도는 후회가 아니라 회개를 해야 합니다.(2절)
본문 2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아멘.
지금까지 예수님의 탄생과 헤롯의 살인, 그리고 예수님께서 애굽으로의 피신한 것과 나사렛으로 돌아오는 일련의 과정을 말씀했는데, 이제부터는 세례요한의 등장과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세례 받고 공생애를 시작하는 내용들을 말씀합니다.
세례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말라기이후 400년 동안의 하나님말씀이 사라진 후 드디어 침묵을 깨고 나온 선지자로서 그의 입술을 통해 나온 첫 일성이 바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였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말라기 선지자를 끝으로 400년 동안 하나님의 어떤 계시도 없다보니 이스라엘백성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목마르게 기다렸는데, 세례요한의 입을 통해 들려온 하나님의 첫 메시지가 바로‘회개하라.’는 추상같은 음성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회개가 무엇일까요? 회개의 일반적 의미는‘죄나 잘못을 뉘우치고 마음을 고쳐먹음’인데, 기독교적 회개는‘삶 속에서 저지른 죄를 깨달아 반성하고 그로부터 벗어나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으로, 좀 길고 복잡하지만 간단하게 말하면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후회는 무엇일까요? 우리 신앙인들도 회개와 후회를 혼동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후회가 단순히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는 것이라면, 회개는 후회에다가 더하여 다시는 하지 않겠다는 강한 결단이 수반된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후회는 단지 자신의 잘못된 결정이나 행동을 반성하고 뉘우치지는 것으로 예를 들면 술을 먹지 말아야하는데 먹어서 그런 실수를 했다고 자책하는 것이고. 또 도박하지 않겠다면서 도박해 돈을 잃고 자책하는 것 이런 것들이 후회의 대표적인 경우인데, 똑같은 상황이 되면 다시 반복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이런 후회는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고, 또 그들의 인생을 바꾸거나 구원으로 인도해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면 그런 후회는 마음 깊은 곳의 변화도 아니고, 그렇다고 미래에 대한 그 어떤 결단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회개는 다릅니다. 회개는 과거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후회를 포함하는 것은 물론이고, 나아가 하나님께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며 그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강한 결단으로 그 자리에서 돌아서는 것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걸어왔던 죄악의 길을 벗어나 이제는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믿음으로 살아가겠다고 결단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회개(메타노에오)의 원어적의미도 머리로 깨닫고 마음으로 느끼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의지적 행동을 동반하여 완전히 돌이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오늘 세례요한은 여러 가지 죄악으로 완악해진 유대인들이 의지적인 강한 결단으로 하나님께로 몸과 마음을 돌이킬 것을 강하게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세상 사람들처럼 후회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회개하는 자가 되어 하나님과 관계를 최상으로 만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왜 그래야합니까? 회개는 생명을 얻게 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함으로 나머지 인생을 자신 있고 당당하게 살아가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후회는 과도한 자책으로 절망과 멸망만을 가져다줄 뿐입니다.
온갖 악행만을 저질렀던 아합왕이 회개 비슷한 것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가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고 죽였을 때 하나님이 엘리야를 통해 재앙을 선포하자 겁이 난 아합이 옷을 찢고 금식하며 삼베를 걸치고 자는 등 회개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자 하나님이 그의 생전에 심판하지 않고 아들 대에 가서 심판하겠다고 말씀합니다. 아합의 회개 비슷한 것은 오래가지 못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회개가 아니라 후회를 했기 때문입니다. 속마음까지 변하지 않고 겉모습만 변했다가 때가 되매 다시 그의 본성으로 돌아갔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와 가롯유다는 다 같이 주님을 배신했으나 베드로는 회개함으로 구원받고 초대교회의 기둥이 되었지만, 가롯유다는 예수님을 판 반성과 후회로 받은 은 30을 제사장에게 도로 주었지만 결국 멸망의 길로 가고 말았습니다.
사울왕도 다윗을 시기하여 후회하면서도 몇 번이나 죽이려고 시도했는데, 이는 그가 회개가 아닌 후회를 했기 때문에 반복한 것입니다. 이게 바로 회개와 후회의 차이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후회하는 자가 아니라 회개하는 자가 되십시오.
사실 진정으로 회개한 자는 결코 후회할 일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진정으로 회개하여 중심으로부터 변화된 자는, 그래서 주의 은혜 안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자는 회개할 일도 하지 않지만, 해도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십니다. 행8:22절에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인생을 살아갈 때 하나님과 사람 앞에 잘못을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 회개하고, 사람에게 용서를 구함으로 관계를 바르게 정립하여 복 받는데 문제가 없어야합니다. 그런 여러분 되셔서 항상 풍성한 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원칙을 지키는 것에서 시작합니다.(8절)
본문 8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아멘.
세례요한이 일반인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회개하라며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말을 선포하자 사람들이 그를 특별한 존재로 여기고 몰려들기 시작합니다.
세례요한이 자기에게 몰려든 군중들에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외쳤는데, 그렇다면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무엇일까요? 이를 알기 위해 본문과 평행구절인 눅3:8-14절 말씀을 보면 회개에 합당한 열매로‘입을 것과 먹을 것이 남는 자는 나누어주고’‘정한 세금 외에는 거두지 말며’‘사람들을 강탈하지 말고,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며’‘정해진 급료에 만족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게 좀 이상합니다. 여기에 언급된 것은 평범한 것들로, 나누어주라는 것은 어느 종교도 나오는 내용이고,“정한 세율 이외의 것을 징수하지 말 것과, 정해진 급료 외에 욕심 부리지 말라는 것도 일반적인 윤리도덕입니다.
그럼에도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이런 것과 비교해서 설명하면서 이걸 무시무시한 심판과 천국으로 연결시켜서 선포하는 것을 볼 때 결코 평범한 말씀이 아닌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바리새인들은 수많은 율법과 계율들을 만들어놓고 이를 지키지 못하는 자들을 죄인으로 정죄하여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세례요한이 말한 회개의 합당한 열매는 이런 종교적인 냄새도 전혀 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도요한이 말하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인간의 도리를 지키는 걸 말하고, 진실하고 성실하게 살아갈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좀 특별한 케이스이긴 하지만, 1963년 대한민국을 발칵 뒤집어놓은 고재봉이 도끼로 대대장 일가족 6명을 쳐 죽이고 사형을 당했는데, 그가 교도소에서 얼마나 악했던지 온갖 욕설과 폭력으로 가까이 하기가 어려웠고, 교도관 한명은 눈을 찔려 실명할 만큼 포악했는데, 안국선목사님의 전도로 회심합니다. 화장실에 놓인 성경을 읽다가 하나님을 만나고 교도소가 떠나갈듯 며칠을 통곡했답니다. 독실한 신앙인이었던 어머니의 기도가 응답된 것입니다. 이후 교도소에서 복음을 전해 2000명 중 1800여명이 회심할 정도였는데, 사형이 집행되던 날 유가족들에게 진심으로 사죄를 드린다며, 제가 천국에 가서 제가 죽인 분들에게 영원히 종노릇하며 살겠다는 말을 남기고 환한 얼굴로‘하늘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이 찬양을 부르면서 이 땅을 떠났는데, 사형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다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회개며, 회개에 합당한 열매입니다.
이런 세례요한의 가르침은 주님과 사도바울의 가르침과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주님과 사도바울도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무슨 대단한 비밀을 알거나, 신비한 종교의식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지켜야할 원칙들을 말씀하셨습니다.
영국의 유명한 성공회목사인 존 스토트(John Stott) 목사님이 한국에 와서 강연했을 때‘한국에는 미숙한 크리스찬이 너무 많다’고 말했다는데, 그건 한국 크리스챤들이 말씀의 기본적인 원칙들을 지키지 않는 것을 보았기 때문인데, 그에게 이게 상당히 충격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교인들이 일상생활에서 성경이 말씀하는 기본적인 원칙을 지키지 않고, 믿지 않는 사람들과 같은 가치관과 마인드로 산다면 이건 회개나 또한 회개의 열매와도 상관없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상에서 바르고 신실한 신앙인으로 살아가도록 힘쓰고 애써야할 것입니다. 그런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셋째로, 잘못된 선민의식보다는 올바른 죄인의식이 더 낫습니다.(9절)
본문 9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아멘.
세례요한은 자기에게 나아온 무리들을 향해 우리의 조상이 아브라함이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하면서, 하나님은 능히 이 돌들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은 당시 바리새인을 비롯한 이스라엘백성에게는 매우 충격적이고도 모욕적인 말로 들렸을 것입니다. 왜냐면 그들이 지금까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긍지와 자부심으로 세상을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사실 유대인들의 선민의식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물론 이스라엘백성은 만민 중에서 특별히 선택받은 하나님의 특별한 존재입니다.(출4:22) 이런 선민의식은 앗수르와 바벨론, 헬라와 로마를 비롯한 수많은 이방인들의 압제와 핍박을 이겨내는 힘이 되었지만, 그러나 이런 선민의식이 심각한 문제를 만들어냈습니다.
유대인은 선민의식이 강해서 상당히 배타적인데, 지금도 일부는 안식일에 자기들의 거주지에 외국인이 접근하는 것을 불허하고, 음식법과 절기 등을 철저히 지키며, 정류장에서 이방인이 앉은 자리는 불결하다고 앉지 않거나, 손수건으로 닦아낼 정도랍니다. 이런 선민의식의 우월함과 교만함이 그들의 구원을 막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도 이런 잘못된 선민의식에 빠져서 회개하지 못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세리가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가서 바리새인은 자신의 행위를 자랑하지만, 세리는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감히 하늘도 쳐다보지 못한 채 가슴만 치며 죄인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합니다.(눅18:9-14) 주님은 "이 사람이 저보다 더 의롭다하심을 받고" 이렇게 말씀하심으로 율법을 지키며 사는 바리새인도 의롭지만 자신이 죄인이라고 가슴을 치는 세리가 더 의롭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이 율법을 따라 의롭게 사는 것은 인정했지만, 저들 마음이 교만하고 완악하여 겸손에 가장 기본이 되는 죄인의식이 없음을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잘못된 선민의식으로 교만해져서 사람을 무시하는 유대인들을 책망하시고, 차라리 죄인의식으로 겸손하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여러분들도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겸손하게 은혜를 구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더 사랑하신다는 것을 꼭 아셨으면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떠신지요? 어떤 분은 자신이 교회공동체에 기여한다고 생각하면 그걸 드러내고 형제들이나 목회자가 알아주기를 원하며 특별대접을 받으려고 하지 않는지요? 그러나 이건 교만한 것이며 바리새인과 같은 발상입니다. 물론 많이 드리고 많이 헌신하는 것은 오늘 주님 말씀처럼 잘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걸 드러내고 대접받겠다면 헌신도 봉사의 귀한 의미도 모르며, 하나님과 관계도 잘 모르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봉사와 헌신은 목사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하는 것이라 그 어떤 권리도 주장할 수 없고, 교만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헌금을 많이 해도 목회자가 고맙다고 감사하다고 인사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내가 앞장서서 감당해야 할 봉사와 헌신을 다른 사람에게 미루는 것도 신앙의 정도를 벗어난 것입니다.
반면에 공동체에 많은 기여를 하면서도 내가 드린 것은 하나님께 드린 것이라 생각해 어떤 대접도 거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참 귀한 분들이지요.
여러분!!!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란 보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리와 같은 죄인이라는 의식이 필요하고, 항상 겸손하게 나보다 형제를 더 낫게 여기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겸손하게 신실하게 살아가야합니다.
내가 공동체를 위해 수고와 헌신을 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내가 먼저 솔선수범하여 공동체를 세워가야 합니다. 그것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런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