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태복음 9장 9-13절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
지난 주에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시기 전에 그의 죄를 먼저 사하시고 그리고 중풍병을 고치셨음을 들으셨습니다. 오늘도 역시 죄인을 불러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나옵니다. 사람들은 중풍병자에게 선포하시고 행하신 일에 크게 놀랐는데 오늘 말씀에 나온 마태와 그의 친구들에게 행하신 일과 또 하신 말씀은 사람들을 더 크게 놀라게 합니다.
8장에서 예수님은 거라사지방에 가셔서 군대 귀신 들린 두 사람을 고치심으로 인해 예수님의 권세가 얼마나 큰 지를 보이셨을 뿐 아니라 한 영혼의 가치가 얼마나 귀한지를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9장에 와서 그 귀한 영혼을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사역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바로 죄를 사하시는 예수님의 사역의 연속선상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통해 자신이 왜 이세상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야만 하셨는지를 드러내십니다.
예수님이 오늘 행하신 행동은 사람들이 갖는 권선징악의 선입견을 벗어버리라고 촉구하시며, 또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상이 갖는 도덕성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의 사랑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이 일은 이렇게 시작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서 중풍병자의 죄를 사하시고 또 그의 중풍병을 고치신 후에 그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고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마태에게 다가가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라” 그러자 그 말씀을 들은 마태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그 자리에서 세리의 안정된 직업을 버리고 예수님과 함께 고난을 받는 좁은 길을 가기 위해서 좁은 문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세무공무원 자리를 떠난 마태는 우선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영접하였습니다. 그런데 마태는 자기와 먼저 예수님의 제자된 사람들만 식사를 대접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동류들인 세리들과 죄인들을 불러 식사 자리에 초대하였습니다. 이들은 모두 마태가 평소에 만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수가 많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10절 말씀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성경을 보면 고넬료나 빌립보의 간수나 할 것없이 그들이 하나님의 역사의 현장에 있을 때 자기 혼자만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 것을 봅니다. 그들 가운데는 반드시 사랑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주변 사람들을 인도하여 함께 하나님 앞에 있는 것을 봅니다. 마태 역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마태가 사귀는 사람들이 대부분 세리들과 그 당시 사회에서 죄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유대민족적인 입장에서 보면 로마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다 죄인으로 불리웠습니다. 일제시대나 오늘날도 일본에 적을 둔 사람들이나 일본과 연관된 기업을 하거나 하면 매국노로 불리웁니다. 우리 나라 사람에서보면 죄인들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죄인의 개념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죄인의 개념은 다릅니다. 만일 로마를 위해서 일했던 마태가 죄인이었다면 바벨론이나 메대와 바사의 공직자로 일했던 다니엘이나 느헤미야, 그리고 다니엘의 세 친구, 그리고 모르드개 역시 죄인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 대하여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들은 믿음을 지켰고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였습니다. 이런 사람을 어떻게 죄인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 아닌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었습니다. 로마서 3장 23절을 보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하면서 죄를 범하지 않은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그리스도께서 그 죄인들과 함께 앉으신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제자중 한 사람에게 말합니다.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이 말은 “너희 선생님이 옳은 사람이라면 어떻게 저렇게 죄인들 가운데 앉아서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실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들의 눈으로 볼 때 예수님 역시 죄인으로 보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종교적 관점이나 민족적 관점으로 판단하면 안되며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 역시 민족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보면 안됩니다.
오늘날 우리 나라는 민족적인 관점에서 너무나 과하게 다른 나라, 특히 일본에 대하여 강하게 죄인된 국가라고 몰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죄는 덮어두고 말입니다. 사람들은 남의 죄를 강하게 드러냄으로써 자기 안에 감추인 죄를 철저히 숨기고 싶어 합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바리새인의 영적이고 도전적인 질문을 예수님께서는 들으셨습니다. 그래서 그 바리새인을 향하여 의사와 연관시켜서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의사는 환자를 위하여 존재합니다, 예전에 전 세계에서 가장 장수마을인 어느 곳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마을은 사람들이 하도 오래 살아서 죽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합니다. 물론 사람들의 숫자가 적기도 하겠지만 원래 그렇게 오래 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관심거리였습니다. 그래서 한 기자가 그 마을을 취재하기로 하고 가서 취재하면서 그 마을 사람들의 나이를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진짜 사람들이 오래 살았다는 것이 증명이 되었습니다.
하도 신기해서 기자가 물었습니다. “이 마을에서는 죽은 사람이 없습니까?” 그러나 인터뷰를 하는 노인이 말했습니다. “최근에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자는 놀라 물었습니다. “그 사람이 왜 죽었습니까?” “굶어서 죽었습니다.” “그 사람이 뭐하는 사람인데 굶어 죽었습니까?” 그러자 그 노인이 말합니다. “그 사람은 의사인데 하도 아픈 사람도 없고 죽는 사람이 없어서 굶어 죽었습니다”
여러분 모든 사람이 건강하다면 의사는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국에는 의사가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는 의사가 필요합니다. 사람은 으례히 늙고 병들고 죽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야만 하셨던 이유는 모든 사람이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죄인들에게 임하는 결과는 오직 사망입니다. 로마서 6장 23절을 보면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로 인해 영원한 죽음의 심판을 받은 죄인된 인류를 살리시고자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경에 기록된 말씀 한 말씀을 인용하시고 그리고 자신이 이 죄악 세상에 오실 수 밖에 없으셨던 이유에 대하여 설명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시편 40편 6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께서 내 귀를 통하여 내게 들려 주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하지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그리고 이어 11절에 “여호와여 주의 긍휼을 내게서 거두지 마시고 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항상 보호하소서”하고 있습니다. 또한 호세아 6장 6절을 보면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인애는 인자와 사랑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자비와 사랑을 말합니다. 긍휼히 여기는 그 마음은 자비와 사랑으로 증거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제물을 드리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도 사랑하지 못한다면 제물을 드린들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너희는 가서 하나님의 뜻을 다시 배우고 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정죄하지 않으십니다.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결코 사랑하는 상대를 정죄하지 않습니다. 설사 그가 극악한 죄인일지라도 그의 내면에 죄를 지을 수 밖에 없었던 그런 요소들을 이해하면서 용서를 베푸십니다.
악인들의 속성은 악인줄 알면서 악을 즐깁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는 죄인들은 악을 즐기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사탄의 그 마수에 빠져 어쩔 수 없이 죄를 짓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탄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환경의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죄인지 아닌지도 모른채 죄를 짓는 사람도 있습니다.
마태처럼 직업이 사람들에게 돈을 받고 로마에 그 세금을 전해줘야 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지탄을 받는 대상이 됩니다. 자기 마음은 정직하게 행할 지라도 사람들이 그렇게 보아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사회의 수많은 세리들이 로마가 정한 세 외의 세를 더 부과하여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세리들이 의외로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짓는 죄에 대한 죄책감마져 없습니다. 그리고 그 길에서 떠나고 싶어하는 마음도 없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돈은 하나님이나 사람의 생명보다 더 절대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돈은 맘몬신입니다, 돈의 힘을 신의 힘처럼 여기며 가치를 부여하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찾으시는 죄인들은 그런 종류의 죄인들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찾으시는 죄인들은 자기들이 죄인임을 알고 구원받기를 갈망하는 사람입니다. 때로 그들은 돈이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하면서 살았다가 돈으로 채우지 못하는 영적인 곤고를 느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삭개오도 역시 그런 유형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자기 집에 영접하고 하룻밤을 지내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은 사실은 자신은 죄인이며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돈은 나누면서 살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마음에 예수님이 주시는 구원의 빛이 임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셔서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은 죄사함을 받고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한 없이 놀라운 복입니다. 이 은혜가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이 말씀을 듣고 믿어짐으로 인해 구원해달라고 구하여 예수님은 그를 긍휼히 여기심으로 그의 죄를 사하시고 구원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생명값으로 말입니다.
죄인들에게 주시는 가장 축복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 내주심으로 여러분들에 대한 모든 죄의 값을 치루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의 이름을 구원자라는 의미로 예수라고 이름을 지으라고 요셉에게 명령하신 것입니다. 자기 백성들이 지은 그들의 죄로부터 구원하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게된 여러분 여러분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복을 받으셨습니다. 여러분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구원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여러분 안에 예수님을 모시고 죄인들을 찾아가 예수님이 바로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의 구원이 온 땅에 편만하고 하나님 나라가 그들 가운데, 그리고 그들의 삶 가운데, 그리고 그들의 가정 가운데 임하기 때문입니다. 뿐만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 공동체에 마태가 합류하게 된 것처럼 여러분들의 공동체에도 새로운 마태들이 많이 더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다니면서 예수님이 긍휼히 여기시는 죄인들을 찾아가 주님의 구원의 소식을 전해주시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